오래된 정원 - 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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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아는 문장 하나가 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에에 그러니까....인간은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이들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적 힘을 더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눈 속이 뜨거워졌지요. 갑자기 그때 당신 생각이 났을까요. 그래그래,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편지라도 써야 하는데. 나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게 누구의 책인가요?
맑스라는 털보아저씨의 책입니다. 이때는 그가 청년으로 불리던 시기였지만요. 우리도 여기서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나는 얼른 붉어진 눈을 감추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최루탄 때문에 언제나 학교에 갈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을 가리고도 눈두덩이 부어오를 정도로 울고 나오면서 그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처 같은 것이었는데, 역시 사람의 말은 위대해요. 물론 나는 그 딱딱한 번역투의 문장이 시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건 당신이 사용하던 말투였기 때문이기도 해요.-18쪽

아줌마가 은결이를 덥석 안아다가 내 팔 사이에 넣어주었고 나는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은결이는 그 무렵에 엄마는 물론이고 맘마. 찌찌, 빠이빠이, 이뻐, 미워 따위의 간단한 낱말들을 한마디씩 종알거렸는데 내가 입을 맞추자마자 고개를 돌려 빰으로 내 입술을 뿌리치면서 이래요
엄마 미워
나는 한동안 은결이를 꼭 안고 서성였어요. 따뜻한 작은 가슴의 통통대는 박동이 느껴지면서 이것이 내 몸안에 있을 적의 일들이 생각났어요.-23쪽

오현우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 그냥.....친구인데요.
그는 빙긋 웃었어요.
애인입니까?
저어....그. 그래요.
관청이라든가 군에서 여자친구란 성립이 안되는 걸 잘 알아요. 그들에게는 아내면 아내, 애인이면 애인 외에는 정답이 따로 없으니까요. 아무개 애인이 면회 왔다더라는 말은 웃음 섞여 말이 되어도 여자친구?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없는 셈이지요.-30쪽

공연히 그러지들 마라, 느이들 나 포섭할려구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았니?
진작에 포섭된 게 아니고예? 저두 오선배 얘긴 많이 들었심더.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뭐야아, 그딴 소리가 어딨어? 오니 아니 내 앞에서 허튼 소리 하지 말어. 야 송가야, 니가 입 싸게 놀렸어?
송영태나 최미경도 내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송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재빠르게 설명했다.
아냐, 그건 오해야 윤희씨. 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변혁운동의 모델들을 검토하다 보면 오선배 사건은 언제나 빠짐없이 거론이 되어 있어. 다만 여기서 모임을 가지게 되면서 윤희씨 얘기가 덧붙여진 거야.
제가 잘못했심더. 그렇다꼬 저희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을 뒷전에서 비양거리고 할 사람들은 아니라예. 그 반댑니더. 언니, 화 풀으소 고마.
나는 소주를 벌컷 들이켜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송영태가 술이 깨버렸는지 말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한형, 노여움을 풀어. 모두가 당하는 고통을 두고 냉소할 사람은 우리들 중에 아무도 없어. 미경이 후배가 가볍게 얘길 꺼낸 건 잘못이지만 이제 시작이라 워낙 니편 내편이 분명해서 그래. 서툴고 덕 익은 것두 이쁘잖아.-45쪽

한형, 날 어떻게 생각해?
보통 때 같으면 초전박살이라고 아예 그런 분위기를 잡지도 못하게 우악스런 욕이나 농담으로 입을 막았을 텐데 아까부터 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냥 잔잔하게 웃는 표정을 짓자. 나는 공연히 차림표가 붙은 더러운 벽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할 거 같니?
그랬더니 이 녀석이 갑자기 탁자를 세게 두드렸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허, 기가 막혀서 이젠 성질까지 부리네 하는 얼굴로 쳇, 하는 입시늉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해 보였다.
너 고거 먹고 벌써 취했니?
우리가 만난 지 일년 거의 되어가지...
혼자서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더니 송영태가 불쑥 말했다.
나, 한형한테 정들었다.
점점 유행가조루 나올 거야? 것보다 한형소리 좀 뺄 수 없어?
너 좋아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정말 그 친구라도 없었으면 진학하고 나서 얼마나 생소하고 심드렁한 시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어긋나게 말해버렸다.
인마, 나두 널 좋아해 .하지만 너하구 그 이상은 절대루 안할 거니까 두 눈에 라이트 꺼라 응?
나 먼저 간다.
하더니 영태는 벌떡 일어나 계산하고 국밥집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99쪽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질주하다 위협사격에 쓰러지는 그런 순진무구한 장면말고 행정부 청사를 접수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의 의결기구를 무장으로 지키는 장면 따위는 이젠 없다. 아마 점점 그런 가능성은 사라져가리라. 끊임없는 토론과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설득과 뜨뜻미지근한 합의와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약간의 진전이 있거나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될 거야. 그래 기껏 조합이 아니면 선거를 하게 되겠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실타래의 시초를 찾을 수도 없이 방금 놓쳐버린 실 끝이라도 잡게 되면 다행일 거야. 이 실끝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모두 어슷비슷해질걸. 다시는 출발점을 향하여 돌이킬 수도 없이. 제도를 부숴버리는 동안에 그것을 부수는 제도가 만들어지겠지. 누구나 언제든 투쟁하는 전사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혁명위원회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아이를 낳거나 식량배급이 늦는다고 투덜대고 좀 일찍 들어올 수 없냐고 바가지를 긁고 생활비가 거덜이 났다고 하소연하고. 식구들은 모두들 끊임없이 먹어대고 마셔대고 싸우다가 성교도 하고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새옷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고 다시 토론해야 한다. 그가 출발했던 땅에서 이제는 아득한 미래로 날아간 하늘 사이에는 무한 천공이 입을 벌리고 있다. 혁명이라고. 그건 정지된 섬광이야. 오현우처럼 유혜되거나 그의 아우들같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연발사격에 쓰러지지 않는 한 그는 출퇴근하는 토론자로 기진맥진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 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109쪽

나는 어둡지만 눈에 익은 오솔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내려올 때 켜두었던 형광등 불빛으로 방문이 하얗게 밝혀져 있다. 밖에서 보면 격자 창살이 더욱 선명했다. 누군가 저 방안에 있는 것 같고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림자와 함께 방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이제 와요? 하는 목소리와 그네의 어두운 실루엣이 툇마루 위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신을 벅소 툇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방안에 들어서지 않고 마루에 털퍼덕 주저앉아 봄밤을 수놓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봐, 별똥이 진다. 또 누가 세상을 떠나는가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어딘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라므이 부재는 거기 남은 한사람까지도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126쪽

공안수든 시국사범이든 간첩조작사건이든 이른바 집시법 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머릿속의 사상을 바꿀 것을 끈질기게 강요했다. 요즈음 뱃속을 관찰하는 투시기가 나온 것처럼 머리에다 대고 비추어보면 붉고 푸른 색깔이 판명되는 기계라도 발명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빨갱이인지 퍼랭이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나는 이 땅에서 무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일분 군부와 그에 붙어서 온갖 이권과 특혜를 누려온 독점자본을 반대했다. 유신시대와 오월의 학살을 겪으면서 나와 타자를 알게 되고 여러번의 좌절감에 시달린 젊은이들은 북쪽이 타자가 아니라는 너무도 뻔한 사실에 눈을 떴다. 육십년대에는 가지고만 있어도 사형이라던 문건들이 바다 밖에서 들어왔는데 숨을 죽이고 그런 자료들을 접하기 시작한 게 팔십년대 초반의 일이다. 동우가 그런 자료들을 모으고 내부 문건에 반영했던 것은 좌편향이었을까. 내가 줄곧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이 바뀌어갔던 길을 돌이켜보면 그런 따위는 차츰 보편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갔다. 세월은 저절로 균형을 잡아간다. 그것 봐라, 별일도 아니었잖아.-127쪽

그는 분명히 과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환경공학 계통이어서 지혜가 있는 기계쟁이처럼 보였거든요. 사람의 일에 관한 잡지식이 제법 많은 듯했어요. 여기서의 쓰레기나 산업폐기물의 처리과정을 연구한다던가 그랬어요. 하지만 내가 그맘때의 한국에서 보았던 친구들처럼 급진적이진 않았어요.이야기를 조용조용 유머러스하게 진행하고 다분히 상식적이었습니다. 나는 소싯적부터 그런 남자를 처음 보았거든요. 물론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고. 그는 어려서부터 중산층 집안에서 햇빛과 바람이 잘 드나드는 창가에 놓인 관엽식물처럼 파란없이 자란 게 분명해요. -223쪽

이선생은 셔츠바람에 가슴까지 올라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오븐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어요.
뭘 하는 거예요?
내가 그의 등뒤로 다가서며 물었더니 그가 나를 가볍게 밀어냈어요. 어허, 여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안되는데....
반대말놀이 하는 건가요?
신유교라구 아시는지.
그는 나에게 식탁을 가리켰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오늘 메뉴는.......참, 양고기 먹어봤어요?
그럼요, 향료와 양념을 많이 쳐야 할 텐데.
.....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햄과 멜론을 곁들인 스페인풍의 전채도 ?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트로켄류의 화이트와인을 마셨는데 이선생이 한장의 잎을 돌돌 말아서 가느다란 실로 묶은 원뿔 모양의 담배를 주었어요. 한모금 빠니까 연기가 좀 독하기는 했지만 향긋하고 구수한 원래의 풀잎냄새가 나서 쌉쌀한 술맛과 잘 어울렸지요
이거 담배 맞죠?
터키 상점에서 팔아요. 파키스탄 거라구 그러던데
씨가보다 훨씬 토속적인데요
이런 광경이 영화장면에라두 보이면 나는 귀밑에 소름이 돋아서 딴청을 부릴걸. 생각해보면 그것두 과장이었어요. 시시한 멋 좀 부린들 어때. 내일이면 모든 조명과 장치를 표백시켜버리는 한낮의 태양이 뜰 텐데.
저 동네가 왜 좋죠?
나는 잎담배로 벽에 걸린 부처님을 지시했어요.
중생일체란 소리가 근사하고 폭력이 없잖소
세계를 단순히 해석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에요
그걸 누가 해석하는데. 사람들은 자기 사는 동안의 생을 통해서 계절에 의미를 붙이고 그러지요. 세상은 그 누구와 상관없이 저 혼자 있는 거요.-225쪽

유월이 되어 날씨가 변덕이 심해졌을 때 나는 몹시 앓았어요. 앍으면서도 나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에 나는 주변에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벼락같이 병이 찾아와 탈진하도록 앓고 일어나곤 했거든요. 어린아이들은 한번씩 앓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성숙해가는 법이지만 어른인 나는 어쩌면 노화와 쇠락으로 가는 게 아닌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봄비가 감미롭게 새싹을 키우는 것과 가을비가 땅속 깊은 뿌리를 든든히 해주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마음속의 저 깊은 곳으로 더 아래로 내려갔으면 했어요.-230쪽

알코올을 조금 줄이세요. 식사를 빼먹지 말구요.
그래 알고 있어. 처음엔 난방비를 줄이려고 저녁마다 잘 때만 마셨는데 차츰 양이 늘어나는 거야. 그런데 그 남자친구 이야기 좀 해줄래요?
나도 아직 잘 몰라요. 나이는 마흔 셋, 이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고.
오, 그건 관청 서류에 나오는 기록 아냐?
나는 맥없이 웃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해요?
내 느낌으로는 서로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마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네는 주름잡힌 자기 콧장등을 검지로 콕콕 찍어 보였죠.
여기서 알지. 나는 깊은 밤 어둠속에서도 병 속에 보드카가 들었는지 쉬납스인지 꼬냑인지 다 알아요.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는거야.
마리는 슈테판이 요양원으로 가버린 뒤에 다른 남자가 없었어요?
왜......몇번 있었지. 가끔 만나던 평범한 의사도 있었고 가난한 연극 연출가도 있었고 마지막이 언제쯤이었는지 모르겠네.
그가 요양원에서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일인가요?
물론이야. 그건 전혀 다른 거야. 유니는 지금 감옥의 남자를 생각하고 있군. 잠잘 때를 생각해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여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카밀레차에 넣은 스카치 탓이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왔어요. 마리가 내 이불깃을 여며주었지요.
늘 같은 끔을 꿀 수도 없고 그것마저 전부가 아니야. 잘 자요.-231쪽

나는 그 남자와 여러번 잤어요. 그의 목소리와 까칠한 면도자리와 뻣뻣한 살갗을 기억해요. 그의 상식적이고 안정된 정서가 얼마나 편안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따뜻하잖아요. 열정이 도대체 무슨 독감 따위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없지만, 바람부는 날 어느 언덕 위에서 오리나무 같은 데 기대어 서면 좋잖아요. 작별할 때 한맺힌 핏물도 내게 덮어씌우지 않고 조용히 한걸음 물러서는 그림자같이요. 아버지의 감 이야기에 나오는 색시처럼 내색 않고 같은 선에 서서 넉넉한 시선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아주는 아낙이 되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헤어지진 말고 오랜 같이 살 수 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249쪽

나는 언젠가 친구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 시대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라고 절망적으로 외쳤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요새 와서 나는 이 말을 수정할 작정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때에나 사람들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드러나는 모양이 시대마다 다르기는 했어도. 물살에 씻기어 닳아지고 부서지는 돌멩이처럼 일상에 시달리는 벗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회한에 잠기지 않기를 바래요. 지금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라고. 그리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지난날과 미래를 껴안게 될 것을 기대하구 있어요.-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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