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성녀 - 마성과 성성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아케가미 슈운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창해 / 2005년 11월
품절


악마학이 탄생한 시기는 농촌사회가 변모하는 시대였다. 인구의 증가와 화폐 경제의발전으로 농촌 내부의 계층이 분화되고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어 사람들이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농민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웃사이더인 여성들이었다.-53쪽

농촌은 농촌대로 인구 증가, 경제의 변모, 내부의 계층 분화로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모두가 심각한 위기에 사로잡혔다. 중세 농촌에 존재했던 상부상조의 정신은 과거의 것이 되어, 가난한 자는 부자를 증오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저주했다. 그런 사오항에서 어떤 재앙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지울 속죄양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 연유로 '마녀'라는 딱지가 붙은 이들은, 건전한 공동체 의식이 자리잡았던 지난날에 사람들의 자선 대상이기도 했던 가난한 여성들이었다. -59쪽

중세에 남성이 여장을 하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저버리는 행위라며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악마가 종종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해 남성을 유괴한다는 설도 여장을 하는 남성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즉, 남자가 여자로 바뀌는 것은 추락이자 치욕이었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장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적으로는 보통 남자에게만 허락된 높은 수준의 영성을 얻기 위해 남자와 똑같은 외모로 똑같이 생활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과거의 간통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남자 복장을 하였다.
...
실제로 남장한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치 않다. 하지만 여성, 특히 성녀의 남장과 그 이미지가 커다란 의미를 지녔던 시기는 중세 초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의 수녀가 이상으로 여긴 존재는 남성의 미덕을 지닌 '무성의 성녀'였기 때문이다.-74쪽

그녀들은 교회 당국자로부터 좀더 먹으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육체는 더러워도 간단히 정화할 수 있지만, 여자의 육체는 결코 정화할 수 없다. 하지만 몸을 정화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에 따라 자신의 몸을 내맡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남자들이 흔히 행하는 한정된 단식이 아닌 끝없는 단식을 감행했거, 그 대부분은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녀들은 남성을 거치지 않는 영혼의 구원을 추가하며 거식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들이 토대로 삼은 가치관은 여전히남성의 그것이었다.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 그 뿌리부터 오염된 여성의 육체.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거식증에 걸렸던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거식증과 마찬가지로 성녀들의 거식증에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한다. 현대의 거식증이 뒤틀린 모자 관계나 '살찐 여자는 추하다'는 남성의 사고방식때문이라면 과거의 거식증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88쪽

마리아는 특별한 여성이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처녀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처녀이면서 어머니가 되기란, 보통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평생 처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리아가 종교생활의 모델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영원한 '처녀'였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그 모성보다 처녀성에 이목이 모아졌다. 이브가 처녀성의 상실로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면 마리아는 그 처녀성을 보존해 승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그녀는 완전무결한 존재인 것이다.
,,,
성스러운 처녀는 남성의 저주를 면하게 된 것이다. -121쪽

중세 후기는 '가족 시대'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기는 했지만, 어느 나라든 핵가족화한 가정이 사회의 기본 구성원으로 차츰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핵가족화와 그 가정생활을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되자, 인문주의자와 크리스트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가족과 더불어 부부와 결혼, 더 나아가 어머니에 대해 새로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탈리아의 한 인문주의자는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로 미덕이나 애국심의 육성은 물론이며 교육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시대의 여성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과거 천 년에 걸쳐 어머니라는 위치와 성성은 부합되지 ㅇ낳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마침내 이 시점에 이르러 어머니라는 위치가 성성의 길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처녀야말로 성성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 다음이 과부고, 마지막이 아내였다. 아내 중에서도 어머니는 날마다 성행위를 하는 존재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도 그 처녀성의 그늘에 가려 중세 후반까지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이후에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인 여성이 점차 성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142쪽

중세에는 여성이 도시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등, 관리직은 될 수 ㅇ벗었지만 상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여성들은 길드나 신심회에 가입했고, 양친이나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자기 재산을 소유했다. 또한 금전 대차 계약을 체결.서약하거나 소송을 걸 수도 있었다.
단, 그것은 여성이 '가정'에 소속된 경우에 한해서였다. 여성은 결혼해야만 시민으로서 도시의 보호를 받았다. 중세 도시는 원래 가정 및 가족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가정은 징세의 단위이자 도시 방어를 위한 인력 공출의 단위였다.
도시의 각 가정은 시민으로 서약하고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은 남성 가장이 지배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그 가정의 구성원인 처자식은 일정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도 가정에 소속되면 '시민'으로 불리며 다양한 권리를 누린다. 또한 그녀들이 가장이 되면 완전힌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는 이와 같은 여성의 권리가 사라진다. 중세 후기에 도시에서 일종의 '민주혁명'이 일어나면서 도시의 단위가 가정이 아닌'개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혁명으로 그동안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던 하류층 남성에게는 권리가 주어지지만, 여성의 권리는 줄어들게 된다.-178쪽

도시의 여성들은 상당히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여성들은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 참여하고 있었다..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중세후기에는 여성의 직업 선택의 폭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다 바르베리노는 거의 저서 <여성의 태도와 습관>에서 여성의 직업에 대한 위험성을 언급했다. 그는 여성들이 모든 직업에서 손님을 속인다고 했다. 따라서 여성은 장인이나 가장으로는 부적당하므로 임금노동을 시키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 구조가 노동계까지 침투해있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적인 여성 길드는 남편이나 길드의 장인, 도시 당국자가 지닌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17.18세기가 되자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물업에 종사하거나 상류층의 하녀로 일하게 된다. -19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