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의 시대를 읽고 이디스 워튼이 제인 오스틴보다 낫다고 생각했지만 '기쁨의 집'으로 한 방 먹고 '여름'으로 니킥까지 맞고 나니 가슴이 너덜너덜해졌던 기억이 있다. 못생기고 가난해서 노처녀로 세상을 떠난 이가 그린 달달한 세상이 전 세계의 여심을 흔들고, 뉴욕 상류층 출신에 빠리에서 작품활동하며 소설같은 인생을 산 여성이 그린 삶의 진실이란 것은 이렇게도 슬프고 씁쓸하다니 정말 인생은 아이러니 아닌지. 이 작품은 워튼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거칠고 잔인하다는 느낌이다. 미국에선 중고교생 필독서로 분류된다 하는데 애들이 보아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플롯은 간단하다. 가난한 농장주인 이선프롬은 이십대 초반, 병약한 자신의 어머니를 간호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떠나려는 사촌누나를 단지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렵다는 어리석은 이유로 붙잡아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 후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며 투덜거리고 자기 전엔 침대 맡에 틀니를 놔두는 지긋지긋한 여자가 되어버린 아내와의 생활에 지쳐갈 때 쯤, 아내의 사촌동생이 집안일을 돕겠다며 이선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아내보다 훨씬 어리고 생기발랄한 그녀에게 이선은 점점 매료되고, 아내가 사촌동생을 내보내려 할 수록 둘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지는데... 


불륜만 해도 용서받기 힘든데 아내의 여동생과의 불륜이라니 상황만으로 보자면 막장인 둘이지만 이디스 워튼은 이선이 왜 그녀에게 빠질 수 밖에 없는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남자가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을 때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서 그들의 사랑을 욕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랑하는 여자와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차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빈곤한 사랑의 리얼리티란. 이선은 너 내 여자해라 쿡. 웃으며 고급 부띠끄에서 걸치는 모든 옷을 카드로 긁어주는 드라마 속 재벌3세와 극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남자이다. 이선이 해 줄수 있는 일이라곤 아내가 아끼는 접시를 깨고서 안절부절하는 애인을 위해 마을로 나가 접착제를 사오는 일 정도일 뿐. 


이 둘의 사랑은 이디스 워튼의 다른 작품들처럼 익숙한 새드엔딩을 맞이한다. 그 새드엔딩 중에서도 더 유별나게 처참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디스 워튼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 작가 새디스트 아닌가 의심했을 지도. 혹은 이런 소설로 monogamy의 신성함에 대해 설파하려는 건가 싶어 짜증이 났을지도.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니까. 그녀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것보다 더 깊고 더 슬픈 것임을 짐작한다. 


예전 번역보다 나아진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번역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촌스럽고 어색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킨들로 검색해보니 0.99달러, 짧은 분량이라 원서로 보아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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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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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한테 시집 온 지 벌써 몇 년 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형수는 그저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했다.
"난 그런 건 모두 잊어버렸어요. 하물며 내 나이조차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형수의 이 능청스러움은 너무나 형수답게 들렸다. 그리고 내게 오히려 교태로 보이는 이 어색함이, 진지한 형에겐 심한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형수님은 자신의 나이에조차 냉담하군요."-303쪽

두 사람은 이제 요릿집에서 주선해준 여관까지 가야 했다. 채비를 해서 현관을 내려올 때, 거기에 불 밝힌 전등이며 인력거꾼의 초롱은 빗소리와 바람의 울부짖음에 환해지며 흡사 어둠에 날뛰는 광폭함을 비추는 도구처럼 여겨졌다.-307쪽

"형수님,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요" 하는 목소리가 예상했던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무서움을 타는 기색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일부러 무서운 척하는, 어리고 경박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323쪽

"난 죽는다면 목매달거나 목을 찌르는 그런 잔재주 부리는 건 싫어요. 홍수에 휩쓸리거나 벼락을 맞든가 해서 맹렬하고 단숨에 죽는 방법을 택하고 싶어요"-335쪽

"나는 내 아이만 다룰 수 없는 게 아냐. 내 부모님조차 다를 기교를 갖질 못했어.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내 아내마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덕분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393쪽

형은 등의자 위에서 오사다를 보며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낮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은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라고 말했다. -397쪽

긴 듯하나 짧은 겨울은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하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내 앞에 찬비, 녹아드는 서릿발, 강바람....등의 짜여진 일정을 평범하게 반복하며 이렇게 지나갔다. -561쪽

"어차피 내가 이런 바보로 태어난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봤자 될 대로 되는 수밖에 길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면 그만이에요."
그녀는 애초에 운명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심을 스스로 지니고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대신, 타인의 운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비쳤다.
"남잔 싫어지기만 하면 지로 씨처럼 어디든 날아갈 수 있지만 여잔 그렇게 못 하니까. 나 같은 사람은 마치 부모 손으로 화분에 심어진 나무와 다를 바 없이 한번 심어지면 그걸로 끝, 누군가 와서 움직여주지 않는 이상,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요. 꼼짝 않고 있을 뿐이죠. 그대로 말라죽을 때까지 꼼짝 않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걸요."
나는 딱해 보이는 이 호소 이면에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여성을 전기처럼 느꼈다. -580쪽

나는 그 동안 한 사람의 형수를 다양하게 보았다. -그녀는 남자도 초월하기 힘든 무엇을 시집온 그날부터 이미 초월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처음부터 초월해야 할 울타리도 벽도 없었다. 처음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행동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의 발현에 불과했다.

어느 때는 또 그녀가 모든 걸 가슴속에 접어두고 쉽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소위 당찬 여자처럼 내 눈에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녀는 흔히 있는 당찬 여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 차분함, 그 품위, 그 과목함, 누가 보기에도 그녀는 지나치게 당찬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놀랄 만큼 뻔뻔스럽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용납하지 않는 고상함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발이 썩기를 기다리는 듯이. 요컨대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 거의 그녀의 자연에 가까운 무엇이었다.-587쪽

"집에선 요즘 네가 오지 않아서 모두 궁금해하고 있다. 지로는 어찌 된 셈인가 하고. 겸손이 무소식이라지만 넌 고집이 무소식이라 더욱 나빠."-604쪽

"어떤가, 마음에 안 드는가?"
"얼굴은 괜찮군."
"얼굴뿐인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데 좀 구식이더군.무조건 사양만 하면 그게 예의인 줄 아는 모양이지."-657쪽

형님이 괴로워하는 건, 형님이 아무리 무얼 해봐도 그게 목적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수단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불안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형님은 차분히 누워 있을 수 없으니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일어나면, 그저 일어나 있을 수 없어 걷는다고 말합니다. 걸으면, 그저 걷고만 있을 수 없으니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미 달려나간 이상, 어디서도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멈 출 수 없기만 하다면 괜찮겠는데, 시시각각 속력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극단을 상상하면 두렵다고 말합니다. 식은땀이 날 만큼 두렵다고 말합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708쪽

"나는 죽은 신보다 살아 있는 인간이 더 좋다네. 인력거꾼이든, 수레 인부든, 도둑이든, 내가 고맙게 여기는 찰나의 얼굴이 곧 신이 아닌가?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내가 숭고하다고 느끼는 순가느이 자연, 그게 곧 신이 아닌가? 그 밖에 어떤 신이 있나?"-722쪽

"세상일이 자기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이상, 거기엔 자기 이외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걸세."
"인정하네"
"그리고 그 의지는 자네보다 훨씬 위대하지"
"위대할지도 모르지, 내가 지니까. 하지만 대개 나보다도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진실하지 않아. 나는 그들에게 질 까닭이 없는데도 지고 있다네. 그래서 화가 나는 거지."-752쪽

하코네를 떠날 때, 형님은 "두 번 다시 이런 곳은 질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지나온 가운데 형님의 마음에 든 곳은 아직 한 군데도 없습니다. 형님은 누구와 어디를 가든 쉽게 싫증내는 사람일 테지요. 그것도 그럴 만합니다. 형님은 자신의 몸이며 마음부터 이미 성에 차지 않으니까요. 형님은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자신을 배반하는 수상한 자인 양 말합니다.-775쪽

스님의 이름은 아마도 교겐이라 했습니다. 흔히 말하듯, 하나를 물어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하는 식의 총명하고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총명함, 영리함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어 아무리 지나도 득도할 수가 없었다고 형님은 말했습니다.깨달음을 모르는 나도 이 의미는 잘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지혜로 인해 괴로움을 격고 있는 형님에겐 한층 더 절실하게 와닿았겠지요. -795쪽

"시집 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도대체 어떤 사람한테 시집을 갔기에?" 하고 도중에 내가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8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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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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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늘 내게 진정한 통속의 의미를 깨달으면 누구도 그걸 함부로 비웃을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문제는 상상력의 솔직함이야. 산다는 건 알고보면 굉장히 간단하거든. 남녀가 만났다. 사랑했다.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헤어졌다. 말하자면 그런 거지. ...방송 작가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머리로 꼭 한 번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대신 써주면 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는 없어. 통속은 아름다운 거란다. 중요한 건, 얼마나 진탕 울고 웃었냐는 거지."-12쪽

그는 말한다. 역사의식에 선행하는 것이 직업의식이라고. 군인이 철저한 군인으로서의 직업의식만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쿠데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20쪽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찼고, 해뜨기 전의 구름들은 파란 잉크가 번진 솜뭉치 같았다. 비가 한차례 내리면 곧이어 지상엔 영하의 날씨들이 닥칠 거였다.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퍼지는 겨울.-24쪽

"의사가 뭐라든? 안 좋대니?"
"축하해. 약간이긴 하지만 암 수치가 떨어졌대요. 항암 주사를 한 번 더 맞재. 택솔이라고 좋은 약이 있대요. 머리도 빠지지 않고. 백혈구도 안 줄어드나 봐. 그 약 하나 만들려면 백 년 묵은 주목나무 백 그루가 필요하다고 그러던데."
"그럼 내 몸속으로 주목나무 백 그루가 들어앉는 셈이네? 어서 맞고 싶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37쪽

후회되는 일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난 누군가 날 다시 젊어지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리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젊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 일이거든.-41쪽

네 밖과 안 어디에도 가고픈 나라를 세우지 마라. 알았니? 그럼 사는 게 너무 고달파지고, 나중엔 나처럼 이렇게 병들고 마는 거야. 너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며 살았으면 해. 자신을 상할 정도로 괴롭히는 건, 문학이나 혁명, 혹은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그 무엇이건 간에 옳지 않은 거야. 엄마는 젊어서 그걸 몰랐어. 내 고집만을 실컷 부리며 살았지.상이 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지금부터라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있는 구원을 기대하며 살라구. 그건 네가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원래부터 있었고, 완벽하게 존재하지. 또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절대자가 너에게 주는 값없는 선물인 거야.

나더러 교회에 다니라는 거야?

아니야.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널 받아줄, 네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영토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믿으며 살란 말이야. 믿으라는 거지. 믿어. -51쪽

시는 소설과 조금 달라. 시는 첫사랑 같은거지. 한번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내게서 떠났거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땐 이미 첫사랑이 아니겠지. 달라졌을 테니까. 나는 지난 5년 동안 주변의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 걸 보아왔어. 분명 자기 자신도 느끼거든. 시가 떠나버렸다는 걸. 그런데도 한번 시인이었으니 평생을 시인으로 우기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러긴 싫어. -109쪽

보통의 경우 인간들은 젊어선 무엇이 되고 싶어 잠을 못 이루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스스로를 불안해하며 숱한 밤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곤 한다.-221쪽

인이 박인다는 것처럼 가슴 저며오는 표현이 어디에 따로 있을 것인가. 뭐든 제대로 해내려면 그래야 할 거였다. 끊을 수 없어 차라리 마취된 고통. 내 소설도 한때 내게 그러했다.-327쪽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가.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그리하여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혹 덜 되었다 하더라도 늘 다 그린 그림처럼 세워두어야만 하는 유화의 작법은, 인생이 지닌 속성과 너무나 흡사해 자못 섬찟하기까지 하다.-406쪽

나는 그녀가 제 이마를 짚으며 단성사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비로소, 지금 저 여자를 마음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은 단지 망가진 스케줄 정도가 아니라 뭔가 은밀한 곳으로부터 연유한 상심이라는 걸 눈치 챘다.-416쪽

별나라로 가려는 사람,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모두 죽이고도 나머지 한 마리마저 찾아 옮아가려는 돌림병보다 모진 마음, 나도 귀화식물의 시앗으로 저이의 옷깃에 묻어 황폐한 땅을 밟아봤으면. 나 외엔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나 사라진 뒤엔 사막만 남게 되는 그런 세계로.-431쪽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가 연약한 초식동물로 느껴진다면. 일단 씹으면 모두 제 것이라며 가책없이 삼켜버리는 육식동물이 아니라,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간 한 줌의 기억조차도 믿지 못해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소심한 초식동물로 여겨진다면. 또 소라든가 양, 염소 같은 초식동물들만 번제의 제물로 쓰여지는 것이 억울하다면. 왜 유순한 초식동물의 각을 뜨고 피를 뿌려, 교활하고 무정한 육식동물들의 죄를 씻어야 하는지 신에게 따져 묻고 싶다면. -481쪽

서너 시간쯤 뒤, 아시아나 항공 oz 602편은 김포공항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층을 지나는 그 1,2분 동안, 창 밖은 하얗게 바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발이 땅에 닿으려면, 여러겹의 모호한 시절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무 순결하고 밝아 시야를 가리는 것도, 결국에는, 어둠처럼 어둠이다.-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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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저는 이응준을 읽겠다 읽겠다 하고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뽑아주신 밑줄들 읽어보니 한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습니다.


LAYLA 2013-05-20 13:45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스토리로 읽는 작가가 아니라 읽고 나서 무얼 읽었는지 몽롱하긴 하지만 미문들의 매력으로 충분하다 싶어요.
 
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이학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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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타코 씨는 77세의 여성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독신생활을 즐기는 노인이다. 다나베 세이코의 통통튀는 캐릭터가 어떻게 77세의 할머니로 살아났을지 궁금하여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우타코 씨는 독립심 넘치고 쿨하고 동시에 지난 세월을 잘 살아낸 사람만의 단단함을 간직한 멋진 신여성노인이다. 캐릭터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별점이 3개인 이유는 이 소설이 큰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장 별로 이런 저런 소소한 사건을 기술하는 마치 수필같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수필로서 담백하고 현실감이 있을 때 매력적인 것인데 이 책은 현실에선 보기 힘든, 다분히 작가의 바람과 판타지가 담긴 연예인 같은 캐릭터를 설정해놓고 기술방식은 그에 비해 너무나 차분해서 중반을 넘어서고부터는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이라면 초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노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 본다면, 이 소설은 21세기 일본사회를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기능할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한 부분에서 일본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불당에 가면 '자식에게 추한 꼴 보이지 않고 꼴까닥 바로 죽을 수 있는 부적'이 있다거나, 시청 구청이 행정차원에서 나서서 노인들의 반려자 찾기를 지원한다거나, 노인들만을 위한 성교육 강좌가 있다거나. 우리나라에서도 10년 20년 내에 경험할 일들이 아닐까. 내가 살아갈 노년의 사회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약간의 상상에 잠기는 재미가 있긴 하였지만 분명 소설에서 기대할만한 독서경험이 아니기는 하였다. 최근 유행하는 무연사회 등 사회과학 서적과 같이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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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1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다나베 세이코-
지루하다고 하셔도 읽어보고 싶어지는걸요.

LAYLA 2013-05-20 13:47   좋아요 0 | URL
뭘 써도 기본은 하는 작가지요^^
 
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이학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7년 11월
품절


어찌됐건,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왔다고 자부하는 나는 잘난 글줄이나 훈시 따위만 늘어놓을 뿐 정작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들한테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모양'도 때로는 중요하겠지만 형식적이고 사대주의적인 '모양 차리기'에는 반발을 느끼게 된다. '모양'만 밝히는 동안 실체는 점점 변해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18쪽

일류 회사니 뭐니 하며 목에 힘줘 봤자 넓은 세상 긴 인생에서는 아주 작은 웅덩이일 뿐, 그 안에서 잘난 척해 봤자 내가 보기엔 제 잘난 맛에 헤엄치는 올챙이로구만. 이 아이도 마흔여덟인가 아홉인가, 낼모레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이건만 그 정도의 성찰도 못하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38쪽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도 인생에서는 필요한 법이다. 왜냐하면 그러다 나중에 정말로 괴로운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다 자신이 뿌린 씨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 아닐까. -183쪽

여자는 고생을 한다. 남자와 사회, 양쪽으로 고생한다. 하지만 남자는 사회에서 겪는 고생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수양을 쌓지 못한 그 심성이 그대로 표출된다. 정년이 지나 아내한테 버림받는 남자 중에 그런 수양을 쌓지 못한 유형들이 많다.

남자는 여자 고생을 해야만 한다. 여자 고생을 한다고 해서 꽃뱀같은 여자들한테 뜯겨 보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의 아내와 고생스럽게 어울려 주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란 자동적으로 자신에게 맞춰주는 존재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인격이 진보하지 않는다.-210쪽

"결혼식 장례식이 있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던데요. 지난번에 tv에서 무슨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하지 않지만, 인간은 어떤 미개지에서도 결혼식과 장례식은 꼭 한다고요. 인간이 위대한 점이 바로 그거래요."

은근히 나를 가르치는 말투다. 일흔일곱 먹은 나한테 고작 쉰 정도의 여자가 가르치려드는 것은 또 무슨 버르장머리인지.

"허, 그러면 인간이 결혼식, 장례식을 그만두면 되겠구먼. 동물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이야. 인간이 자연을 거스르고 있는 게다. 인간도 동물을 본받아서 결혼식 장례식을 그만둬야 해."-333쪽

"색정광은 또 뭐냐? 이건 로맨틱하다고 하는 거야. 나이 칠팔십 되어 아직 낭만이 살아 있으니 얼마나 훌륭하냐. 뭐가 아쉬워 손자, 증손자나 보고 있으라는 거냐? 사랑이니 연애니 찾고 있을 새가 없는 것은 너희들 같이 한참 일할 나이들이야. 너희들은 열심히 일이나 하면 돼. 그래서 늙은이들한테 노령연금이나 열심히 벌어주면 되는거야. 칠팔십 되어서 연애를 못하면 대체 언제 하란 거냐?"-356쪽

사실 여자아이라 해도 서른이 가까워지면 아이디어 풍부하고, 행동력 있고, 의욕과 근성이 있어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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