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재할 권리가 없는 인간에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실업가들의 자비에 힘입은 바 크다. 비생산적인 말을 늘어놓는 학자나 축음기나 다름없이 항상 같은 말만 늘어놓는 교사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돈은 어디서 오는가? 수억의 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실업가들이 내놓는 티끌 같은 돈 부스러기로 연명해가는 사람이 바로 학자다. 문학자다. 교사이기도 하다.

돈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돈을 비방하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카노 군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따뜻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세상의 온갖 비바람은 그저 고타쓰에 앉아서 유리문 너머로 바라본 풍경에 불과하다. 유젠의 무늬도 알고 있다. 금병풍의 선명한 색깔도 알고 있다. 은촛대의 반짝거림도 마찬가지로 친근하다. 살아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그의 눈에 잘 들어온다. 부모의 은혜, 형제 사이의 정, 벗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반쪽 세상에는 지금까지 언제라도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반쪽 세상에 살던 사람이 한쪽 발로 땅을 밟으며 이 발아래에 나머지 어두운 반쪽 세상이 있다고 깨닫는 것은 지리학을 배울 때뿐이다. 걸어 다니면서 우연히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어두울 거라고 느끼고 진정으로 오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애받는 것은 고통이다.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 그 자체는 피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나 구애받는 것의 고통은 하루에 끝날 고통을 5일, 7일로 연장하는 고통이다. 불필요한 고통이다.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기 때문에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육의 형식이 비슷한 것을 교육의 실체기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같은 대학의 졸업생이 동일한 수준이라면 대학의 졸업생은 죄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든지 아니면 죄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만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기를 쓴다면 설령 같은 학교 졸업생이나 그 밖의 사람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미 그런 가정을 하고 있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은 같은 학사라고 해도 크게 차이가 난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까?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번민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난 이름처럼 미덥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가 악명이 되든, 오명이 되든, 아니면 광기가 되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내가 걸어야 하는 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에겐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길의 동물이기 때문에 길을 좇는 것이 가장 존엄하다 생각합니다. 길을 좇는 사람은 신 역시 피해야 합니다. 이와사키의 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하하하

이상은 혼입니다. 혼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혼이 행위에서 발현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아쉽게도 현대 청년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걸 과거에서 찾아도 없고, 현대에서 찾으려 하면 더더욱 없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부모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학교에서 교사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사회에서 신사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사실상 여러분은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아요. 집에서는 부모를 경멸하고, 학교에서는 교사를 경멸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신사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경멸하는 것은 식견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경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타락입니다. 현대의 청년은 도도하게 날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길을 걸어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과는 달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걸어냅니다. 방황하고 싶어도 방황할 수 없습니다. 혼이 이쪽, 이쪽 하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인생이라는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사기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일 그 자체에 따라 전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순히 여러분의 이름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것은 경박한 짓 입니다.

학문, 즉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생활의 자유, 즉 돈이 있다는 것은 서로 독립해 있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학자이기 때문에 돈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때문에 학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는 돈이 없는 대신에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상인은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돈을 법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돈이 있는 곳에 이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하고 있어요. 저 사람은 부자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니 이치 또한 분명 알고 있을 것이고, 문화 역시 제대로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기 때문에 돈을 벌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orgettable. 2014-07-0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부분에 밑줄긋기를 했네요. ㅎㅎ 이 책 정말 좋았어요!

LAYLA 2014-07-10 13:38   좋아요 0 | URL
다 좋죠
소세키느님
ㅠㅠ

transient-guest 2014-07-09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못본 소세키 책이네요. 아직까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가장 최고로 꼽네요.

LAYLA 2014-07-10 13:38   좋아요 0 | URL
전 아직도 '그 후'가 최고이고 그걸 넘어설 작품은 없을거 같아요
고양이로소이다도 좋긴 한데
소세키는 좀 우울해야 제맛(?)인거 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