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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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정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유럽인은 어떤 식으로든 다 가톨릭교도들이죠. 기독교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실제로는 다 같은 거지요."
그 사람은 마치 음미하든 `실제로는`이란 말을 반복했다. 그의 영어는 매우 우아했다. 여느 대학에서 그러듯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두면서 약간 길게 늘여서 접속사들을 발음했다. "프랙티컬리...액츄얼리." 그가 말했다.
"참 희한한 말들입니다. 영국에서 흔하게 들은 말들입니다. 당신네 유럽인들은 이 말을 자주 쓰지요." 그러고는 오랫동안 말을 잊시 않았지만, 그의 말이 끝난 건 아니었다. "저는 그게 비관주의인지 낙관주의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든 평생에 한 번쯤 주아리 호텔에서 묵을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특별히 행복한 모험이겠거니 하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돌이켜보는 한에서는, 냄새라든가 색깔이라든가, 세면대 밑에 보이는 종을 알 수 없는 곤충과 같이 직접적인 육체적 감각이 어느 정도 여과되고 나면 경험은 모호해져서 한껏 더 나은 이미지로 남게 마련이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는 여러 호텔이 가득하다. 조지프 콘래드나 서머싯 모의 책들에서, 키플링이나 브롬필드의 소설을 각색한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는 벌써 여러 호텔을 만난 바 있다. 마치 그곳에 가 본 듯 친근하다.

"사실 말이지만 내 취향도 몹시 까다롭습니다. 최상품이 아니면 돈을 안 씁니다." 내 말에 무게감을 싣기 위해 일단 말을 끊었다. 동시에 그에게만 진심을 털어놓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치 어떤 영화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고, 나는 제법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슬픔은 뒤늦게 올 것이었다. 난 그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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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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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가장 용감했다는 군인들을 개인적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만나보면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커피콩 같았고 그녀가 웃으면 콩 볶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중개인`이라는 직함은 그 속에 온갖 것을 숨길 수 있는 멋진 말이었거든요. 케케스팔바는 그 속에 자신이 더 이상 일개 중개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재산가이자 사업가라는 사실을 숨긴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 부자로 보이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학과 윤리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질병은 그 자체가 무법행위입니다. 자연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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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0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transient-guest 2016-02-10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입니다!!ㅎㅎ 이건 아직 못 읽어봤네요. 발자크 평전을 읽고부터 츠바이크의 책을 한 권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에 화를 내봤자 - 만년 노벨문학상 후보자의 나답게 사는 즐거움
엔도 슈사쿠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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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여러 번 읽을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도 아무런 의심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나의 멍청함을 개탄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트위터에서 망가지는 고종석을 보았고 우습게 무너지는 진중권도 보았는데 도대체 어떤 근거로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에세이도 잘 쓸것이라고(=개인의 삶에서도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프로의 영역에서 판매하는 창작물과 사생활의 영역은 넘나 다른 것이며, 나이든 남자의 정체성은 꼰대가 디폴트임을 알 만한 나이이지 않은가? 아 이 모든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탓이다. 그가 나에게(우리에게) 지난 사반세기를 걸쳐 너무나 큰 기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숨)


하여튼 나는 '남자에게 맞는 여자는 필시 남편에게 종알거리며 말대꾸를 하고 바가지를 긁어댔기 때문'일거라는 내용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가 읽는게 똥인지 설사인지 분간도 하기 싫은 지경이 되었다. 깊은 강을 읽으며 종교가 없는 나에겐 이것이 성경과도 같다고 여긴 그 과거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예술과 창작자의 사생활은 별도로 구분하고 싶지만 내가 너무도 나약하고 무지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라서 그러지 못하겠다. 하여튼 웬만하면 시작한 책은 다 읽는 나도 이번엔 그냥 중간에 덮었다. 엔도 슈사쿠는 본업이 소설가이니 소설만 읽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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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01-25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년 노벨문학상의 후보자ㅜㅜ

LAYLA 2016-01-26 02:54   좋아요 0 | URL
하하하 소설은 후보자로 머물기엔 아깝단 느낌이었는데 에세이는 그냥 책으로 엮지 않아도 될뻔 했어요.

다락방 2016-01-25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훌륭한 리뷰입니다. 이런 리뷰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리뷰가 아닐까 싶단 말이죠. 고종석과 진중권 안습 ㅜㅜ

LAYLA 2016-01-26 02:55   좋아요 0 | URL
우리의 시간과 돈은 소중하니까요 ★ 고종석과 진중권을 보며 제 나이듦을 인정하고 저의 부족함도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보다 100배 존잘인 그분들도 저러는데 내가 머라고...싶은 것이죠 흑흑 ㅠㅠ
 
태엽 감는 새 3 - 새잡이꾼 편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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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었지만, 나는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조차 가끔씩 잊었다. 그것이 진짜 추위인지 혹은 내 속에 있는 추위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잘 온도게를 보고 정말로 춥다는 게 납득이 되면 난로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난로에 불을 피워 아무리 방을 따뜻하게 해도 체감 온도로 느끼는 추위가 가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렇게 개미처럼 한눈도 팔지 않고 일을 함으로써 점점 `참다운 자신`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에요. 뭐라고 할까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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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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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를 읽으면서도 느낀 바이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연애소설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연애소설이 해피엔딩 로맨스의 집중하고, 그 서사를 위해 각각의 캐릭터는 개성을 깎아 서사에 딱 들어맞는 블록처럼 규격화 된다면 소세키의 소설은 한 인간의 삶의 대하는 자세가 연애에 있어서는 어떻게 발현되고 그 모순을 어떻게 이겨내는가(혹은 그 모순에 어떻게 굴복하는가)를 그려내기에 일반적인 연애소설과는 달리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 캐릭터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갈지는 마지막 장까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액자식 구성으로 2개의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이상을 접은채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취업을 하려고 노력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의 청년의 친구로, 집안의 재산이 어느정도 있어 굳이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청년의 썸 이야기이다. 독자에 따라 2가지 이야기 중 어느것에 더 깊이 감응하느냐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아주 흥미로우며 어찌 이리 이질적인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속에 그 만의 방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보태자면 두번째 청년의 썸 이야기가 더 아름다운 문체로 쓰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 이야기라서 어쩔수 없는 것일까. 예민한 성미와 자아로 인해 세상일과 거리를 두고 한량으로 살아가는 청년에게는 어릴적부터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촌 여동생이 있다. 사실 모든 것에 회의적인 그는 사촌 여동생과의 결혼도 굳이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해 주저하기만 하고 그러던 차에 사촌 여동생의 주위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한 휴가지에서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여동생을 보고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청년은 퉁명스럽게 휴가지를 떠나버리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강한 자극으로 가득 찬 소설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약한 남자다. 강한 자극으로 가득 찬 소설을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는 남자다. 나는 자신의 기분이 소설이 되려는 순간 놀라서 도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차 안에서 나는 반은 승자였고 반은 패자였다. 비교적 승객이 적은 이등칸 안에서 나는 스스로 쓰기 시작해서 스스로 찢어버린 듯한 이 소설의 뒷부분을 이리저리 상상했다.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달이 있고 물가가 있었다. 젊은 남자의 그림자와 젊은 여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격해져서 여자가 울었다. 나중에는 여자가 격해져서 남자가 달랬다. 결국에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조용한 모래 위를 걸었다. 또는 액자가 있고 다다미가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곳에서 젊은 남자 둘이 의미 없는 언쟁을 벌였다. 점차 뜨거운 피가 올라와 볼이 붉어졌고 결국 두 사람다 자신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일어나 서로 주먹을 휘둘렀다 .'


아름다워서 멈추게 된다. 아름다운 그림 앞에 발길이 멈추는 것처럼, 소세키만의 아름다운 문장에 놀라서 글을 더 읽어나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맴돌며 읽고 또 읽어보게 된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소세키 밖에 없다. 미문을 쓰는 작가는 많다지만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달이 있고 물가가 있었다.'이런 평범한 단어의 평범한 조합으로 시보다 더 시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는 소세키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실망이 없고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음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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