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
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이정환 옮김 / 안그라픽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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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들이 많이 읽는 책이라 해서 기대를 가지고 보았는데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 책이 업계의 스테디셀러란 명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가 수년에 걸쳐 쓴 일기를 모아 엮은 책인데 '디자이너'의 일기라기 보다는 '사업가'의 일기에 더 가깝다. 저자는 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글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를 더럽히는 행위는 자신의 이력을 더럽히는 행위와 같다.'  

'회사를 무대라고 생각하자. 배우는 무대에서 연습은 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말이라면 아무렇지 않을 문장들이지만 나는 저런 문장들을 보려고 디자이너의 생각 운운하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읽는건 아니란 말이다. 디자이너로서의 폼은 잡아야 겠다 싶었는지 자꾸 '사회'이야기를 가지고 나오는데 일기 읽어보면 그닥 사회적 의식이 있는 사람인거 같지는 않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회란 사장님이 바라보는 '시장'으로서의 사회에 한정되는 듯.  

  

의식을 가진 디자이너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말은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잡지에 얼마나 자주 소개되는가에 따라 매상이 크게 올라가고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 해도 '팔리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일본인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는 이유는 '융통성 교육'이라는 미국의 교육을 모방한 제도 탓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식 스타일은 무분별할 정도로 마구잡이로 도입되었다. '마케팅','효율화','가족을 소중히 여긴다','사생활에 충실한다.','파티','유연성','결과주의','유명인','럭셔리'등. 그 결과, 미국에 필적할 만한 범죄국가로 변모했고, 직장이 없이 아르바이트나 하는 청년들이 급증했다. 소비 또한 저하되었다. p.302  

 

아르바이트'나' 하는 청년들이라니..70.80대 할아버지도 아니고 30대 디자이너가 저런 소리를 버젓이 써재끼고 있는 걸 보니 100엔샵 다이소 물건으로 연명할 망정 그의 디자인은 절대로 구매하지 말아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의 창조물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무식하기까지 하다.  

물롱,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그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지면 안될지도 모른다. 저런 것에 신경쓰기 보단 '디자인'이야기를 더 파고드는게 더 나은 독서방향일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나 사고를 읽어내기에 그의 일기는 한없이 가볍다. 일본의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동네 인쇄소 아저씨가 한 말이라고 해도 별 이상할 게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만 하고 있다.(+자기계발서같은 소리들) 그리고 잘 나가는 디자이너라 그런지 더러운 성깔도 여기저기서 가감없이 드러내 주신다.     

 

미술대학에 비상근강사로서 강의를 하러 갔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작품을 포트폴리오로 구성하여 우송해 달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우송방법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dvd나 mo형식으로 만들어 우송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dvd나 mo드라이브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학생의 작품을 볼 수 없었다. 며칠 수 그 학생에 게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면서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학생과 나 하이에 "dvd를 사용하고 계십니까?"하는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상식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 강사는 당연히 dv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어야 할까. p.179   

 

강사가 dv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다. 산속에 처박혀 순수 회화하는 사람도 아니고 비즈니스 하고 컴퓨터로 그래픽 디자인 하는 사람이 dv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게 더 비상식적인 일 아닌가? 진정 학생을 가르치려는 '배려'와 '의지' 그리고 학생을 돌보고 이끄는 것이 선생의 본분이라는 '상식'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자신의 학생을 들먹이며, 자신은 한점의 과오도 없다는 듯 남을 훈계하는 글을 쓰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맥락에서, 그의 동양인.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내가 과연 일본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인지, 디자이너의 철학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남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등등을 아주 심도깊게 기술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독자가 디자이너의 책에서 기대할 법한 내용들-디자인의 originality를 창조하는 어려움이라던지,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과정 등등-과 정반대의 것들이라 뭥미?뭥미?의 연발을 멈출 수 없었다.  

애초에 저자는 일기가 뭔지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본래 일기란건 한번 써갈긴 담에 아무도 못보게 어디 깊숙한 곳에 던져넣려야 하는 것인데 이 아저씨의 일기는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자의식이 너무 과해서 안쓰러울 정도이다. 왜 일기에서 매일매일 사장 마인드로 디자이너는 이래야 하고 회사에서는 이래야 하고 should.must등 남의 이야기만 하고 있냔 말이다. 자기 성찰이 없는 일기가 무슨 일기냐... 일기를 모욕하지 마세요.

별 하나 평점에 충실한 리뷰를 마치며, 정리하자면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은 더러운 직장생활 못참겠다며 뛰쳐나가 창업할 생각으로 가득찬 디자이너들이다. 디자이너에서 사장님으로의 마인드 개조 청사진을 보고 싶다면 추천. 나처럼 괜히 디자이너도 아닌데 멋진 디자이너의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 본다면 실망할테니 그냥 보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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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11-10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리뷰 좋아요^^
DVD가 없으면 없다고 미리 말을 하던가, 어떤 형식으로 보내달라고 하던가. 책을 쓴 사람은 고압적인데다 꽉 막힌 사람 같아요. 아무리 좋은 디자인을 했더라도 매력없을 것 같아요.
디자인에 대한 책으로 하라 켄야의 '포스터를 훔쳐라'를 추천해요. 세번에 한번은 밑줄긋거나 메모했던 것 같아요.

LAYLA 2011-11-10 11:40   좋아요 0 | URL
아 그 책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추천 감사합니다. 그렇게 곱씹을 수 있는 깊은생각을 보고 싶어서 예술가의 글을 보는건데 말이어요 :)

다락방 2011-11-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말하지 않았는데 dvd 로 받았다면 학생에게 다른식으로 보내달라고 언급했어야죠. 궁금한 학생이 봤냐고 물었을때 보지 못했다고 답을 하다니, 너무하네요. 강사가 dvd 플레이어를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건 아니라고 자신이 생각한다면, 그러니 다른식으로 내게 접근해다오 라고 요구하는 것도 그의 몫이죠. 별하나 리뷰에 추천합니다.

LAYLA 2011-11-10 11:42   좋아요 0 | URL
둘의 관계가 대등하다면, 뭐 사고방식 다른 둘이 만나서 다툰걸로 끝날 문제지만 사제지간의 권력불균형은 어마어마한거잖아요.제자가 피를 볼 수밖에 없는..ㅠㅠ정말 성숙한 사람은 권력우위를 점한 사람에서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님 말씀대로 과제 가이드에 dvd를 내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하던지!!!

고슴도치 2011-11-10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꽉 막힌 생각을 가진 사람이 30대의 디자이너라니...놀라울 따름이네요; 저도 예전에 이 필자같은 사람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한 경험이 있는지라, 라일라님의 리뷰가 딱 와닿네요..그래서 추천 꾹!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LAYLA 2011-11-11 09:58   좋아요 0 | URL
고슴도치님 반갑습니다. 고슴도치님 서재를 보고 몇 권 보관함으로 넣었어요 ^^

2011-11-12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하(紫霞) 2011-11-2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가르치시던 강사님이 "이 책들은 사지 마세요."라고 한 책들 중 이 책이 들어가 있었죠.:)

LAYLA 2011-11-25 00:52   좋아요 0 | URL
소신있는 분이시네요. 제 주변 디자이너들은 이 책을 무슨 바이블처럼 소중히 다루더라구요. 켁. ㅋㅋㅋㅋ
 
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
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이정환 옮김 / 안그라픽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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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사람들의 일에 대한 사고방식을 배웠는데 이것이 꽤 재미있다. 이 요정의 구조와 '뜨내기 손님은 반기지 않는다'는 등 접객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찾아올 경우, 최고의 접대를 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의 소개가 없으면 저도 손님도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소개한다. 어떤 사람에게 소개를 받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이나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서비스도 가능해진다.
교토 사람은 소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신이 아닌 타인을 통한 자신의 평가를 중시한다.
...
어떤 사람을 소개받아 그 사람과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때, 소개를 해 준 사람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로 소개받은 사람을 대한다. 그리고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여 함부로 단절을 논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하면 도쿄는 미국식 스타일이다. 싫으면 관둬. 다른 사람과 손 잡으면 되니까. 이런 발상

(교토에서는)"꾸짖을 수 있다면 진짜 가까운 사이라는 증거지요"
도쿄 스타일로 꾸짖는다는 것은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증거'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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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기낙경 지음 / 오브제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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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넘긴 후,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여전히 서툴고 미숙한 자신을 만난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온기에는 무감하고 냉기에는 민감해지는 자신도 만난다. 삶을 향한 미열마저 식어가는 심장을 매만지게도 된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거난 멀어지는 것을 순리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늘 의자에 앉고 싶다. 거기에 안장 어느 시절엔가 스스럼없이 흘리고 다녔던 순수한 명랑함을, 좋은 종류의 진지함을 떠올리고 싶다. -5쪽

이를테면 미시시피 강 저지대 계곡의 나체Natchez족은 달의 이름을 딸기의 달, 작은 옥수수의 달, 수박의 달, 곰과 밤나무의 달로 구분했다. 라코타 인디언에게 8월 중순은 벚나무 열매가 익는 달, 10월 초는 잎이 지는 달, 1월 말은 눈보라 치는 달이라고 한다. -18쪽

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 (...)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소금창고'-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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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6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6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월
절판


"이 세상에서 무한한 것은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이 두가지뿐이다."
-아인슈타인-130쪽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었어.
아주 오래전, 내가 어렷을 적
너는 이야기 속에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어.
문득 네 생각이 난 거야.

전차에 내 몸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어.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참이었지.

네가
깊은 산속에서
풀숲을 힘차게 헤치며
쓰러진 큰 통나무 위를
건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야.

나는 알았지.

너와 나 사이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호시노 미치오, '곰아'-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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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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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사무소라는 작은 조직인 만큼 젊은이들을 나쁜 의미의 월급쟁이로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대기업의 직원이라도 된듯이, 즉 '누군가 하겠지', '상사가 책임지겠지'하며 남한테 기대거나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하는 태도는 허용할 수 없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순서를 정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전진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책임을 완수하겠다고 각오하는, 그런 강력한 개인들의 집단이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으로 1960년대 말부터 오늘까지 40년 남짓 동안 사무소를 꾸려왔다. 타인의 자금으로, 그 사람에게는 평생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건물을 지어 주는 것이므로 그에 걸맞은 각오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 -25쪽

유럽의 이른바 역사도시가 근대화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고 옛 시가지와 건축물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도시화의 배푸에 '이런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이념이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일본의 도시는 서구 도시를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거쳤지만, 수입된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 계획의 기법뿐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라는 이념은 등한시해왔다. 그런 상태로 전후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맞이하자 경제논리만을 잣대로 건설과 파괴가 거듭되었고, 그 결과 세계 어디에도 없는 '혼돈'의 도시가 생겨나고 말았다. -123쪽

도시의 광장
서구 도시에서 광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도시의 중심이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으로 이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오래된 도시들을 가 보면 어디나 역사가 깃든 아름다운 광장이나 도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그 서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는 일본의 도시에는 광장이 없다.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도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만드는 쪽보다 오히려 사용하는 쪽의 문제였다.
원래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마을 한복판에 주민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는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 사회구조가 아니었다. 도시 공간이라는 조건에서 보자면 오히려 골목이나 우물가 같은 도시 뒤쪽에 있는 장소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참여 의식이나 공유 의식이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리적 공간을 확보해 놓는다 해도 참된 의미의 광장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시내 역 앞에 있는 널찍한 터가 이름뿐인 광장으로 쓸쓸하게 남아있는 광경을 지금도 자주 본다.
어떻게 광장을 만들 것인가. 도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 이후 광장이라는 주제는 일본의 도시에서 늘 숙제처럼 다루어졌-130쪽

모더니즘이 싹튼 서구의 1920년대가 획기적이었던 까닭은 그때까지 귀족 계급을 위한 예술가로 일하던 건축가가 사회를 향해 자기들의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주체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 지금 사회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그런 발상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 '지들룽'이라는 주제였다. -199쪽

젊은 시공팀은 하룻강아지의 강점이라고나 할까, 겁도 없이 굴삭 작업을 해 나갔다. ...젊고 경험도 부족한 만큼 그들은 각 공정에 들어가기 전에 꼼꼼하게 연구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어중간한 경험만 믿고 작업하는 얼치기 베테랑 감독보다 훨씬 성실하고 믿음직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공사는 아무 문제도 없이 일정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지금은 젊은 시공팀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것이 오히려 성공의 열쇠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199쪽

철근 콘크리트조 18층의 판상형 고층빌딩에 1인부터 10인의 대가족용까지 무려 23개 유형으로 337가구가 배치되었다. 모든 가구가 복층형이고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짜 맞춰 단순한 박스에 담아 놓은 교묘한 구성도 멋졌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감동한 것은 다양한 형태로 과감하게 설치된 공적인 공간이었다.
지상층은 야성적인 인상을 풍기는 기둥으로 상부 구조를 지탱하는 필로티로서 주민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최상층에는 보육원, 그 밑에는 유치원, 그리고 옥상은 수영장, 실내체육관, 일광욕실 같은 공용 시설로 구성된 옥상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주거동 안으로 들어가면 레스토랑이나 미용실 같은 점포까지 나름의 설비를 갖추고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집합주택 안에 하나의 거리 혹은 공동체가 자라는 데 충분한 생활 요소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는 단순히 대량 공급의 경제적 이점만이 아니라 모여 살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풍요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203쪽

자유롭고 공평한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개인의 자아를 넘어선 공공 정신이다. 하지만 그런 정신 아래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 참되 의미에서 퍼블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은 국가나 공공이 아니다. 뭇 사람들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문화를 창조하고 키워 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개인의 강력하고 격렬한 열정이다. 그들의 열정에 부응할 수 있는 '생명'이 깃든 건물을 나는 짓고 싶다. -254쪽

도쿄가 '관'의 손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면 오사카는 '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옛날에는 항구, 수로, 도로 같은 도시 인프라가 민간으로 건설되고, 메이지 이후의 도시정비에서도 도시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 미드소지를 비롯하여 많은 시설이 민간의 자금 제공이나 토지 수용 등 민간의 협조로 건설되었다. 오사카는 무엇보다도 여기 살며 일하는 사람들이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키워 온 도시였다. -277쪽

...대규모 작업과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 나에게 사지 씨는 "모쪼록 용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과감하게 일하게. 책임은 내가 지겠네"라고 말해 주었다.
"좌우지간 인생은 재미있어야 해. 업무에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일하면서 살아가게. 감동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279쪽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글로벌리즘이란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한 근대화 사회 속에서 일어난 사태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칫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믿기 쉽지만 이 세계에는 거기에서 비켜난 사람들도 매우 많다.
..앞으로도 '세계'가 존재해 나가려면 필연적으로 이런 강국 중심의 패권주의를 뛰어넘은 참된 의미의 지구주의가 요구된다.
... 그렇다고 일개 개인에 불과한 건축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건축이 인간 생활의 문화에 관련된 것인 만큼 건축을 통하여 나름대로 의사 표명은 해 나가야 할 것이다. -305쪽

지진 이후 몇 달 동안 사무소 업무를 모드 젖혀 두고 혼자서 혹은 사무소 스태프들과 함께 피해 지역을 돌아보았다. 그 지역에 내가 지은 건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처참한 풍경을 마음에 깊이 낙인처럼 새겨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구에는 10년 이상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의 내부에 그 복구 작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지속시키려면 그 참혹한 현실을 똑똑히 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358쪽

건축 이야기에는 반드시 빛과 그늘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밝은 빛 같은 날들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그늘 같은 날들이 있다.
독학으로 건축가가 되었다는 나의 이력을 듣고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고 혼자 건축가로 일했으니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살아왔을 리가 없다. 여하튼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해도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애오라지 그늘 속을 걷고, 하나를 거머쥐면 이내 다음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하고, 그렇게 작은 희망의 빛을 이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늘 역경 속에 있었고, 그 역경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활로를 찾아내 왔다 . 그러므로 가령 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있다면 그것은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것이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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