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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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을 읽는 내내 짜증난 부분이 있었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343쪽

이런 작가의 고백과는 달리 내가 읽기에는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운.힘든 문장이었다고 해야 하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미디어가 현실을 번역할 때 흔히 쓰는 완곡어법의 거름종이로도 그 참혹함이 여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더욱 소중한 성장영화다. 날것의 현실이 보여주는 참혹함은 미디어의 기름진 수사학에 절여진 우리의 얄량한 휴머니즘을 가차없이 베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두 문장쯤이야 캬. 좋쿠나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이런 수식어 주렁주렁한 문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수식어들이 참으로 기름졌다. 는게 나의 느낌이고 이것이 나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읽는 동안 참 괴로웠다. 그리고 한번 맘에 안드니 이것저것 다 맘에 들지 않았다.

아니 왜 이렇게 줄 간격이 넓은겐가. 이거 줄여서 얄쌍하게 내면 안돼? (넓은 줄 간격 싫어한다. 이 책의 줄간격은 귀여니 책 줄 간격과 맞먹는 듯. 물론 귀여니와 이 책의 작가 수준은 천지차이다만)

삽화도 맘에 안들었다. 별로 책 내용과 연관성도 없어보이는데다가 심지어 한번썼던 그림을 재배열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재활용해서 집어넣기도 한다. 성의없어보이고 무엇보다 안이쁘다. 차라리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중문화, 책 표지 사진이나 영화 드라마 사진이나 집어넣지! (실제로 책을 보면서 사진이 이쯤에서 한장쯤 나와주면 좋겠는데. 싶은 답답한 순간이 있었다. 허공에의 질주 같은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라던지...)

또 저자가 무척 사랑해하는 듯한 수식어 '투명한'. 투명한이 얼마나 많은 단어의 수식어로 쓰일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이것도 싫었다.

그리고 때때로 누군가의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쪼금 있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민망함을 참지 못했고 그래서 최대한 빨리 때로는 슬쩍 그 부분을 담타넘듯이 넘어가버렸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것 (사실 이건 어느정도의 오기가 발동해서 였기도 하다만) 그리고 어느 부분에선 정말 빠져들어 흥미진진하게 정신없이 읽어나간 부분이 있다는건 부인할 수가 없다.

크게 본다면야 위의 단점쯤이야 사소한 것일 테고 거기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기 까지 한 한 독자의 투정. 음 투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격하군. 하여튼 무시해도 좋을 한 독자의 뻘소리라고 치부해도 될 만큼 괜찮은 책인거 '같다.'

'같다.' 라고 표현하는 건 역시 내가 이 책의 장점을 크게 쭉쭉 흡수하며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점+단점해도 단점을 용서할 수 없고 단점과 장점과 끝까지 떼어놓고 생각하는걸 보면 말이다. 나는 감정적인 인간이라 좋으면 단점이고 뭐고 신경안쓰고 무조건 좋다고 외치는 그런 사람인데 이책은 절대 그런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 와. 많이 느끼기도 했고 저자의 드라마와 영화와 고전과 음악을 넘나들며 그야말로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저자의 드넓은 대중문화의 폭. 저자만의 그 '숲'의 크기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나 말고 다른 리뷰는 모두 좋은 말, 감탄이 담겨있는 걸 보니 과연 좋은 책인거 '같다'

아마 나의 이런 평은 무식한 일반 독자의 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추측을 해본다)

책을 보는 독자들의 지적수준은 참으로 다양하니까..^^

하여튼 중요한 건 어떤 지적수준의 위치에 있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의 솔직한 생각을 별점 3개와 함께 남겨본다. 

덧붙여 책 뒷표지에 있는 추천사가 참 좋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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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28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여자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책 말이죠 제가 읽은 책 중 가장 허접한 그 책의 리뷰는 찬사 일색이어요. 몇번 읽었다는 말도 있구... 그니까 남과 다르다고 님이 무식한 건 절대 아닙니다. 글구 저두 줄간격 넓은 책 싫어해요
 
세계의 모든 스타일 - 전문 컬렉터 김민석이 30년 수집품으로 말하는
김민석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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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쪽에 이르는데,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여 두툼한 두께를 자랑한다. 당연히 올 컬러.

글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책이다.

책은 각 대륙별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각 국가별로 순서를 정하여 저자가 수집한 수집품들을 보여주고 그 나라에서 저자가 겪은 특이한 사건이나 수집과 관련된 추억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처음에 쫘라락 펼쳐봤을때, '어머나' 소리가 튀어나오게 이쁘고 아름다운 장식품에 반해버려 읽기시작했는데 사실 그렇게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채워진 페이지(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앤티크 종류)는 그리 많지 않고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문화권의 오브제에 관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전문적으로 자세히 여러 문화에 대해 일러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 나라의 대표적인 오브제들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곳에도 이다지도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루마니아나 터키. 이란 등의 대충 이름은 알고 있지만 문화적으론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쪽의 경우가 그 대표적 예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여러국가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작가는 아프리카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진 듯 보였다. 프랑스를 소개하면서도 사진페이지로 2-3페이지가 고작인데 아프리카의 경우 한 나라에 사진페이지를 6페이지 이상씩 팍팍 할애하고 있다.

나는 아프리카의 수집품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는지라 ,그래서 뒤로 갈수록 지루하기도 하였지만 (뒷부분에 아프리카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미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다지도 유럽중심으로 길들여져 있구나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책 한권을 다 읽고 나서의 감상은 - 정말 전세계의 모든 스타일을 한번 훑어본거 같다는 느낌이었다 ^^  영국 프랑스 뭐 이런 유명한 나라 말고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들까지 고루고루.

요즘에 와서 이런 종류의 책을 볼 때면 먼저 저자를 따지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겉보기에 그럴싸 해보이고 도판도 근사하지만 정작 읽기 시작하면 실망감을 주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

문제는 무엇(책의 주제 혹은 중심 소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오랜시간을 공부하지 않고 그저 겉핥기식으로 화려하게 만든 책을 찍어내는 사람.그리고 출판사 때문이 아닐까.

하여튼 이 책은 그런 걱정을 할 만한 책은 아니란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30여년간, 정확히는 27년간 수집에 열정을 쏟아온 저자의 안목을 책을 보는 내내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뿐만 아니라 글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각 나라에서 저자가 수집을 하면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라던지 (코뿔소 뿔 수입하려다 밀렵꾼으로 오인되어 끌려갔던 일이라던지 ^^) 짤막하게 나오는 인생여정들 그 자체로 참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는동안 즐거웠던 건 평생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바친 누군가를 책을 통해 만난다는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큰 돈도 못 벌면서 외국이나 돌아다닌다는 이유르 주위의 비난과 멸시를 받았던 지난 세월을 고백하듯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는 자신의 지난 삶과 그간 수집한 오브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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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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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쿵 울렸다. 분명히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만일 내 가슴이 북이었더라면 여간 큰 소리가 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북 소리도 비. 애. 장. 중. 희.열...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때의 내 북소리는 희나 열이었다. -11쪽

더러워진 손을 깨끗이 씻고 내가 사기그릇에 햇빛이 아롱거리는 맑은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자 -11쪽

나는 저 서울대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에 대하여 논문이라도 한 편 쓰고 싶다는 것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라나면서 어른들의 사랑ㅇ르 충분히 받아온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동물은 사랑만 받고 자라면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하게 되고 한편 작은 꾸지람에도 샐쭉해지며 작은 비난에도 깊고 험악한 절망의 회오리바람 소리를 들어버리는 법이니까.
서울대학생들 쳐놓고 전국 방방곡곡 어느 작은 귀퉁이에서라도 어렸을 적부터 반장 한 번 안 해보거나 일등 한 번 안 해본 양반은 없다. 따라서 어른들의 사랑과 기대를 받아보지 않은 녀석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결과로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에게는 멍청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를 내밀고, 자기의 뺨을 갈기는 사람에게는 곡괭이로 그사람 그림자의 대가리라도 짓부숴야 속이 시원해하는 성미를 가진, 어린애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는 어르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7쪽

영일이가 가리키는 대로 빈 좌석 하나에 앉고 보니 내 맞은편 자리에는 부동 중의 부동, 무표정 중의 무표정은 혼자 다 차지한 듯한, 고추처럼 작고 호박처럼 넓적한, 그러니까 꼭 간장에 절임할 때 쓰는 양파처럼 생긴 처녀가 앉아 있었다.-68쪽

괜히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사람이 하는 일들이 그다지도 절대적으로 보이고, 남이란 것이 그다지도 뚫고 넘어갈 수 없는 성벽처럼 생각 될 때는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나는 부두의 포장된 길을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좁은 해협은 좁은 대로 충만해 있고 먼 외해는 눈부시게 넓은 대로 내가 흔히 사용하던 계산의 단위와는 다른 계산 단위의 무한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강렬하긴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써는 공허밖엔 아무것도 붙잡아둘 수 없는 듯한 바다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다지도 눈물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하여 너그려우려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우리 선조들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지도자로서 대부분 모시어온 대신에 바닷가에 큰 도시를 꾸미려고 애쓰고 바닷가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많이 지도자로 모셔왔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좀더 좋게 달라져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조차 했다. 무한 그리고 절대, 그것은 머리로써가 아니라 피부로써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만 사람들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앞서 노출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절대는 인간이 아니라 따로 있는 것이기에....
문득 바다가 나에게는 그토록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멀어보였고 그토록 좁아보이면서도 그토록 넓어 보였던 것이다.-146쪽

오늘 저녁에 가질 집회라는 것도 강동우씨가 내게 말해준 대로 말하면 이런 거야. 이 크지 않은 도시에도 별의별 사람이 다 모여 있다는 거지, 직업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또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고...그런데 공통된 점은 딱 두가지가 있다는 거야. 하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별의별 짓도 다 하겠다는 자세와 또 하나는 다른 직업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경멸이란 점이라는 거야.-162쪽

도인은 주리의 그 말할 수 없이 천박한 화술, 경솔한 행동, 몰염치, 무지, 분수에 맞지 않는 출세욕등에 단박 반하고 말았다. 반했다는 표현에 어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동정하고 말았다는 정도로 바꿔도 좋다. 소비만 하기 위하여 태어난 듯한,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여성 중의 하나라 바로 주리였는데, 도인으로서는 여자의 은박지 같은 그 가벼움에 묘하게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도인의 인간관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구제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여자가, 그런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목구멍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돋보이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255쪽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또 누군가를 만날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잘못을 부분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존재들이란 것을. -347쪽

따지고 보면 내가 꼭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일이란 없어. 누구에게나 그렇지. 군밤장수도, 자동차 운전사도, 인기 배우도, 대학교수도, 대통령도........ 그 사람이 군밤을 팔지 않으면 누군가가 팔 거야, 그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것이고, 그 사람이 인기가 없으면 다른 배우가 인기를 끌 것이고, 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당선되었을 게고...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것은 이미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군밤이며 자동차며 극장이며 대학이며 대통령이라는 제도일 뿐이야. 하물며 대한민국 서울의 모 사립고등학교 일반사회 교사 하나쯤이야.
물론 도인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자기가 자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통렬하게 그 점을 비판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논객들이 그 점을 괴로워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합승버스에 흔들리면서 학교를 향하여 가고 있는 도인은, 그 점이 마치 현대만을 가지고 있는 나쁘게 특이한 현상인 듯이, 그리고 인간들이 노력하면 고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떠들고 있는 저 숱한 저자들과 논객들에게 불복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367쪽

-미국으로 데려가주겠다는 것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여자의 사랑은 싫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우스운 욕심입니다.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아니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춘향이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물론 그런 사랑이 나쁘다거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만, 그렇지만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사랑 자체는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일 겁니다. 자기를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은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얘기한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라는 건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그것들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어쩌면 사기와 사촌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과 다른 점은 하나는 자기도 돕고 상대자도 돕는 결과를 수반하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자기도 파멸하고 상대방도 골탕을 먹는다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애경이한테 미국행 얘기는 꺼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날 사랑해달라고 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우스운 허영심에서 나온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만인 애경이가 아무 조건 없아, 다만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가면을 쓴 일시적인 성욕에 불과했을 겁니다.-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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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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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대학에 속한 학생의 신분이다.  경영학과를 3년간 꿈꾼것도 아니고 대단히 이 과와 관련된 무언가가 하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다. 그저 원서 쓸 때 시간은 쫓기고, 이것 저것 어디에나 붙여놔도 말은 되는 과니까 싶어서 오다 보니 이 과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써 놓고 나니 난 참으로 무책임하게 나의 인생을 결정한것같기도 하다. 하여튼, 이렇게 과에 대한 진지한 고찰없이 들어와 놓고 보니 말이다, 이 과는 정말 욕망이 덩어리져서 뭉쳐진 과 같더란 말이다. 경영학과를 저런 과정으로 들어간 내가 나이브한걸지도 모르겠다만. 하여튼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점이 많았다. 대학이란 것이 원래 전국의 다양한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지만 경영대학생의 하나의 큰 흐름을 보자면 다들 욕망과 욕심과 야망으로 똘똘뭉쳐져 있더란 말이다. (모두가 다 그런건 아니다 당연히)애초에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학문이니까 그런 것이다. (과연 학문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과, 경영학이 목적이 아니라 대부분 돈과 명예와 성공 - 즉 사회에서 한가닥 해먹는것에 목적이 있어서 모인아해들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학문에 뜻이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경제학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있어도 경영학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난 한명도 못봤다) 하여튼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때때로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돈과 성공에 대해 그리 초연한 편은 아니다. 그걸 가져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상대적인 것 아닐까..몇살엔 무슨 자격증을 따고 몇살엔 얼마쯤 모으고..벌써부터 (20대 초반부터) 국회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다던지,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을 둔다던지하는 그런 욕망속에서 나는 지나치게 어리고 순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것만 같았다.  소속집단 주류의 정체성과 다른 개인의 모습은 무언가 . 불안함을 유발시킨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시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도대체가, 부동산 투자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학 내 라디오 방송이라니!! (대학생의 금전적 능력에 걸맞는 제테크 방법에 대해 학내 라디오 방송에서 주마다 일러준다.)하여튼 간에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 이 책에 실린 2편의 중편, 내가 훔친 여름 그리고 60년대식 중 내 마음을 움직인 건 60년대 식 이었다. 내가 훔친 여름이란 작품은 내가 김승옥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같다는 인상을 준 , 그러한 작품이었다. '선데이 서울'에 연재되었다는 60년대식에 이리 크고 깊은 감명을 받는 걸 보니 내 수준이 이 정도인가보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선데이 서울이 아마...뭐....그런 잡지 아닌가? 그렇다고 글이 수준이 낮은건 당연이 당연히 아니고, 작가가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서 쓴 글이겠지..(내가 훔친 여름은 중앙일보에서 연재되었다고 한다) 60년대식은, 열정없는 한 인간의 하루 이틀에 걸친 행동을 하나하나 낱낱이 따라가며 그리고 있다. 김승옥 소설의 특징이다. 이제 기껏4편 읽었는데 모두 이렇다.

이 이상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선택해서 읽어주세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좀 뭣합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에게서 제가 느낀 바로는, 형은 많은 지식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선량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뭐랄까요, 정열은 없는 사람같습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저는 별로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도인은 어안이 벙벙해져버렸다. 그에게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그렇다. 도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들 중의 하나야 말로 바로 정열이라는 것이었다. 도인의 이해 속에서 정열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가장 나쁜 원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정열이라고 하면 도인의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어쩐지  수양이었고 연산군이었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고 히틀러였고 중공의 홍위병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에서 엿보이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판단이 결핍됐을 때 나오는 우격다짐의 행동이었고, 무기교를 감추려는 광란의 몸짓이었고, 지나가버린 일, 또는 이렇게 쓸 수도 있고 저렇게 쓸 수도 있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느끼고 있는 절망감에 호소하는 과격한 프로파간다였다.....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열이란 말처럼 서먹서먹하고 아니 두렵기까지 한 말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서 정열을 제거해버리려고 노력해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정열을 내세우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화학기사의 입에서 '당신에게는 정열이 없어보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도인은 이상스럽게도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정열이 없는 보이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얘기에선 패배감조차 느꼈다. 이런 느낌들이 정열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정열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모욕감을 느끼고 패배감을 느낀 그는, 그렇다면 정열을 무의식적이나마 긍정하고 있덨던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이제야 도인은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과도한 정열이, 또는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빚어내는 인간에 대한 과오를 경계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는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조차 닳아 없어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언가, 찌르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열정과 야망.욕망을 혼동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타인의 욕망.야망에 기가 질려 어리버리하게 내가 가져야 순수한 열정도 놓치고 산 것이 아닌가. 나도 그들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근데 닮기 싫다고서 행한 행동들이 야망의 부재가 아닌 열정의 부재로 나타난건 아닌가.하는 반성.아니 구분할 필요조차 없이 어느새 열정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열정이 없는 이성과 지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를 변화시킬수 없다)  주변의 모습에 위축되지 말고, 열정과 욕망을 혼돈하지 말고, 나만의 열정을 지켜야겠다는  큰.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돈과 세속적인 부를 향한 노력을 욕망으로 정의 하는 내가 오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열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내 기준에선 그건 나의 열정이 아니니 나만의 열정으로 살아야겠다는, 나만의 기준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 책이다. 감사합니다 김승옥님.  패션쇼에서 옷의 디테일이 보이면 하급. 아직 수준 낮은 디자이너의 쇼이고 옷의 이미지가 보이면 상급, 대가의 쇼라고 하였다. 모든 예술에서 통하는 말인가 보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그 무엇. 그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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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2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잘 읽었습니다. :) 저는 요즘 '혁명과 웃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또한 김승옥의 뛰어남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서, 더욱 공감되네요. ㅎ

blowup 2006-11-1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시대의 에센스를 이렇게 잘 포착하다니요.
그렇게 내게만 찌리릿 하는 시대 정신이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대상과의 불화과 사람을 성숙시키는 건 신기해요.
신기하게도요.



2006-11-12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6-11-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저는 완전 팬이 됐어요 ^,^ 기인님은 국문학과이시니 좋은 책 많이 읽으셨겠죠? 알수록 정말 멋진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많은거 같아요 ^^

namu님
그리고 약간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에서 엿보이는 그 무엇이었다. ...이 말 나오기 전에 이런 이야기도 나왔어요
요는 잘 살아보자는 거 아녜요?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도 알 건 다 알았거든. 멀리까지 가볼 것도 없고 해적질 해먹고 살았다고 깔보는 일본에만 가도 그 정도의 건물은 얼마든지 있어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악착스럽게 이익을 추구한 국가가 번영했소. 노골적으로 말해서 난 우리 정부에 불만이 많아요. ......세상에 체면이고 염치고 호주머니 속이 든든해야 돌보는 것이지. 국민소득 백몇십 달라 가지고야 어디 체면 차리게 됐나, 안 그래 젊은이? 체면이고 염치고 말야. 그런데 저 사람들 되게 체면 좋아하더군.끌끌끌.

60년대 이야기라고 해도 국민소득 백 몇십달라 라는 말을 들으면 또 아아 그렇지 그시대엔 그랬겠지 하고 깜짝 놀라고 namu님 표현대로 그 시대에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시대의 에센스를 포착'하는 김승옥이 천재같았어요..^^

속삭님
히히 네..맞아요 제 안에 존재하여 꺼지지 않고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요 ^.^

2006-11-12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달 2006-11-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좋아요. ㅋ

LAYLA 2006-11-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전 님의 글, 엄청 좋아해서 (아이 붓끄러워라 히히) 님의 댓글 자체만으로 엄청 기분 좋았답니다 ^^

미미달님 으흐흐 정작 서울 1964년 겨울 배울땐 학교에서 배우는 거라 별 감흥 없었는데 말이죠 ^.^ 미미달님은 학교때부터 좋아한거에요?


미미달 2006-11-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64년 겨울. 학교에서 배웠을 때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죠. ㅋ
가슴을 울리는 소설이었어요.
김승옥의 청년때의 고뇌에 찬 듯한 모습 또한 멋져서 천생 작가구나 싶어요. ㅋㅋ

LAYLA 2006-11-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은 일찍 김승옥님의 매력에 눈을 떴군요. 멋진 글뿐만 아니라 잘생기기도 했죠 호호호

아싸 2007-02-0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읽어보니 저보다 많이 사신분은 아닌것 같은데 어쩜 그리 생각이 깊으신지요. ㅋ
참 그리고 선데이 서울은 아주 그렇고 그렇지는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ㅋㅋ 물론 사소한 동네아줌니들의 춤바람이나 항상 이니셜로 표기되던 어느 스타의 충격고백따위가 주류였지만 전 아주 잼나게 읽었다구요 ㅋㅋ 저두 그땐 초등학교때라 아부지 몰래 읽긴 햇어두.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구판절판


나이가 좀 들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모든 게 간단해지는 것 같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 그만이거든. 마찬가지로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해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내가 잘 못한 거라면 고쳐야겠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뭐라고 하는 게 대부분이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잇고 그걸 참을 수 없어서 덕훈 씨가 헤어지자고 했던 거잖아. 근데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덕훈시는 원래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인 거야.-63쪽

햄릿이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햄릿이 지칭했던 여자란 삼촌과 결혼했던 그의 어머니였지만 사람들은 어쨌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약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보다 더 약하다.생산력의 관점에서 보면 남자가 우월하다. 하지만 남작 절대적으로 우월했던 것도 육체적 힘을 필요로 하던 먼 옛날 수렵시대나 농경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의 생산력은 점점 남자에 근접해 가고 있으며 육체적인 힘의 우위가 생산력의 우월성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신은 적어도 태초에는 공형팼는지 혹은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뀔것이라고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외적으로 강한 남자에게 약한 내면을 주었고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에게는 강한 내면을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 한다.-117쪽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대개의 여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경험한다.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들의 텍스트이다. 도한 여자들은 연애할 때와 이별할 때 그리고 남자친구가 바람피울 때 그 모든 일들을 친구들과 공요한다. 이랬어. 어머. 저랬어. 저런. 이래야 돼. 정말? 저래야 한다니까. 깔깔. 그리하여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미사랑에 관한 수십개의 시나리오들이 완성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배역과 연기의 색깔이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즉 그녀들에게는 수십가지의 대처방안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남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스포츠 마노하나 무협지를 보며 영웅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는 욕설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 속에 연애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란 없다. 사랑에 대한 시물레이션? 없다.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친구가 고민하면?"술이나 마셔"라고 말해준다.(오쟁이를 지다니 쪼다같은 놈_)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럴리가 있겠나 (생각한 적도 없다니까-)막상 일이 닥치면?

왜 나야!-118쪽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의 섞임이 듣기 좋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같이 빨래를 널고, 빨래가 다 마르면 같이 빨래를 개킨다. 할 일이 없으면 소파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tv를 본다. 아내가 책이라도 읽으면 또 그 옆에 누워 빈둥거린다.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이란 로또 같은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옆 자리에 아내의 무릎에 있다.-121쪽

-하나 물어보자. 그놈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글쎄. 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건 아니야.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진 것도 아니고, 죽도록 사랑해서 그 사람 아니면 아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그 사람하고 있으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미래? 나하고는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았던 거냐?
-그런 게 아냐. 내가 말하는 미래라는 건 아파트 평수에 대한 얘기가 아냐. 아이를 몇을 두어야겠다는 얘기도 아니고 추상적인 얘기지만,내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에 대한 전망 같은 거야.
-그게 무슨 사랑이야?
-그 사람을 알면 알 수록 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되는 나에 대한 사랑인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서 나만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야.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그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거지. 미묘한 얘기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랑이야.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사랑이야
-그럼 나는?
-당신이란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 당신은 매혹적이면서 선한 남편이니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 그런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129쪽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남자가 힘을 기울이는 것은 비단 성적쾌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종족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진화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져 있듯 수억 개의 정자 중 난자와 만나 수정되는 정자는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 로빈 베이커와 마크 벨리스는 80퍼센트 이상의 정자가 여성의 질과 자궁 등에 있는 다른 남자의 정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죽이는 역할을 하며 20퍼센트 미만의 정자는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난자로 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여자의 몸안에서 수억의 때로는 수십억의 정자들이 서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정자가 수정되는 과정에서의 전쟁은 수백만 년 이상 진행되어 온 진화의 결과이다. 여자의 몸은 이 전쟁을 조장하는 격렬한 전장일 뿐만 아니라 선택한 정자를 지원하는 첨단 기지의 역할도 수행한다. 여자가 느끼는 오르가슴의 타이밍에 따라 산성의 점액이 분출되어 알칼리성인 정자의 전진을 막아버린다. 여자 스스로 오르가스므이 타이밍을 결정할 수 없다. 어떤 정자를 몰살 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여자의 몸이다. 그녀의 성향이나 의지와는 별개로 그녀의 몸은 더 나은 유전자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213쪽

베이커와 벨리스의 연구는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일부일처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다른 종의 동물들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일부일처제는 인간 고유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여자는 여러 남자의 정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정자를 받아들이게끔 진화했고 남자는 그러한 조건에서 사진의 유전자가 존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정자 전쟁이란 여자의 바람기가 남자의 그것 이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14쪽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 다만 견딜 수 없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217쪽

-거야 그렇지. 근데 내가 지금 이 나이에 거길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거나 당신이 하고 싶은 거. 가령 축구 웹진 같은 걸 만들어서 운영해 보는 건 어대?
-그런 걸 아무나 하냐?
-당신이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나 하는 중이지. 당신이 하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거에요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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