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구판절판


나이가 좀 들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모든 게 간단해지는 것 같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 그만이거든. 마찬가지로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해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내가 잘 못한 거라면 고쳐야겠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뭐라고 하는 게 대부분이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잇고 그걸 참을 수 없어서 덕훈 씨가 헤어지자고 했던 거잖아. 근데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덕훈시는 원래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인 거야.-63쪽

햄릿이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햄릿이 지칭했던 여자란 삼촌과 결혼했던 그의 어머니였지만 사람들은 어쨌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약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보다 더 약하다.생산력의 관점에서 보면 남자가 우월하다. 하지만 남작 절대적으로 우월했던 것도 육체적 힘을 필요로 하던 먼 옛날 수렵시대나 농경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의 생산력은 점점 남자에 근접해 가고 있으며 육체적인 힘의 우위가 생산력의 우월성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신은 적어도 태초에는 공형팼는지 혹은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뀔것이라고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외적으로 강한 남자에게 약한 내면을 주었고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에게는 강한 내면을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 한다.-117쪽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대개의 여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경험한다.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들의 텍스트이다. 도한 여자들은 연애할 때와 이별할 때 그리고 남자친구가 바람피울 때 그 모든 일들을 친구들과 공요한다. 이랬어. 어머. 저랬어. 저런. 이래야 돼. 정말? 저래야 한다니까. 깔깔. 그리하여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미사랑에 관한 수십개의 시나리오들이 완성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배역과 연기의 색깔이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즉 그녀들에게는 수십가지의 대처방안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남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스포츠 마노하나 무협지를 보며 영웅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는 욕설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 속에 연애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란 없다. 사랑에 대한 시물레이션? 없다.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친구가 고민하면?"술이나 마셔"라고 말해준다.(오쟁이를 지다니 쪼다같은 놈_)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럴리가 있겠나 (생각한 적도 없다니까-)막상 일이 닥치면?

왜 나야!-118쪽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의 섞임이 듣기 좋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같이 빨래를 널고, 빨래가 다 마르면 같이 빨래를 개킨다. 할 일이 없으면 소파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tv를 본다. 아내가 책이라도 읽으면 또 그 옆에 누워 빈둥거린다.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이란 로또 같은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옆 자리에 아내의 무릎에 있다.-121쪽

-하나 물어보자. 그놈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글쎄. 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건 아니야.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진 것도 아니고, 죽도록 사랑해서 그 사람 아니면 아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그 사람하고 있으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미래? 나하고는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았던 거냐?
-그런 게 아냐. 내가 말하는 미래라는 건 아파트 평수에 대한 얘기가 아냐. 아이를 몇을 두어야겠다는 얘기도 아니고 추상적인 얘기지만,내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에 대한 전망 같은 거야.
-그게 무슨 사랑이야?
-그 사람을 알면 알 수록 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되는 나에 대한 사랑인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서 나만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야.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그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거지. 미묘한 얘기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랑이야.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사랑이야
-그럼 나는?
-당신이란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 당신은 매혹적이면서 선한 남편이니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 그런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129쪽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남자가 힘을 기울이는 것은 비단 성적쾌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종족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진화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져 있듯 수억 개의 정자 중 난자와 만나 수정되는 정자는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 로빈 베이커와 마크 벨리스는 80퍼센트 이상의 정자가 여성의 질과 자궁 등에 있는 다른 남자의 정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죽이는 역할을 하며 20퍼센트 미만의 정자는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난자로 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여자의 몸안에서 수억의 때로는 수십억의 정자들이 서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정자가 수정되는 과정에서의 전쟁은 수백만 년 이상 진행되어 온 진화의 결과이다. 여자의 몸은 이 전쟁을 조장하는 격렬한 전장일 뿐만 아니라 선택한 정자를 지원하는 첨단 기지의 역할도 수행한다. 여자가 느끼는 오르가슴의 타이밍에 따라 산성의 점액이 분출되어 알칼리성인 정자의 전진을 막아버린다. 여자 스스로 오르가스므이 타이밍을 결정할 수 없다. 어떤 정자를 몰살 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여자의 몸이다. 그녀의 성향이나 의지와는 별개로 그녀의 몸은 더 나은 유전자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213쪽

베이커와 벨리스의 연구는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일부일처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다른 종의 동물들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일부일처제는 인간 고유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여자는 여러 남자의 정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정자를 받아들이게끔 진화했고 남자는 그러한 조건에서 사진의 유전자가 존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정자 전쟁이란 여자의 바람기가 남자의 그것 이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14쪽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 다만 견딜 수 없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217쪽

-거야 그렇지. 근데 내가 지금 이 나이에 거길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거나 당신이 하고 싶은 거. 가령 축구 웹진 같은 걸 만들어서 운영해 보는 건 어대?
-그런 걸 아무나 하냐?
-당신이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나 하는 중이지. 당신이 하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거에요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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