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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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바라나시는 유달리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거리를 걸어가면 여기저기 일본어와 한국어로 쓰인 간판과 홍보문구가 눈에 띄고 심지어 일본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사꾼들도 만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바라나시가 가지고 있는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가 동양인들이 그리는 인도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뭉뚱그린 추측을 해보았을 뿐. 그런데 인도의 갠지스 강을 배경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깊은 강'을 읽고서, 적어도 일본인들의 바라나시 사랑에는 이 책이 한 몫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일본인이라도 이 책을 읽고서 바라나시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교성 짙은 글이라, 처음에 너무 좋아 빨려들어가면서도 결국 뻔한 설교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고통을 설마 신의 은총이란 거짓말 같은 것으로 다 해결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하는 걱정. 책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으며 다시 환생하겠다 말한 아내를 찾아 인도로 온 이소베, 병에 걸려 정신없는 와중에 돌보지 못해 굶겨죽인 구관조를 가슴에 품은 누마다, 전쟁터에서 인육을 먹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구치, 대학시절 장난으로 유혹했던 찌질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권태에서 허우적 대는 미쓰코. 가장 흥미로웠던 건 미쓰코의 이야기이다. 그저 놀려먹기 위해, 잠시간의 무료함을 잊기 위해 카톨릭 신자를 유혹하고 당신이 믿는 신이란 게 뭐냐고 놀리고 아무렇지 않게 차 버렸는데 그 뒤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삶의 권태에 부닥칠 때마다 그 답답하고 멍청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현대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란 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생사가 달린 사건사고라면 차라리 그에 매몰되어 살아지겠는데 부족한 것 없으면서도 마음이 허한 고통, 이유도 없고 답도 없이 생을 덮치는 권태라는 괴물. 


작가는 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이되, 내가 지금껏 본 구원과는 다른 구원. 물 같은 구원, 공기 같은 구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구원, 시나브로 스며드는 구원. 신을 믿지는 않지만 이런 종류의 구원은 충분히 존중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진짜를 향한 작가의 마음이 책에서 느껴져서, 그래서 그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절규같은 저 마음가짐이 책에서 읽힌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대가는 자신이 평생 천착했던 구원이란 주제에 대해 보이지 않게 써내려 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이 아주 오래 갔다. 사진과 그럴듯한 말 몇 줄로 쉬운 감수성 자극하는 책 말고, 가슴이 아파서 갠지스 강을 찾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든는 이런 책을 가진 일본 국민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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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년 봄에 네팔에 갔을 때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스와얌부나트를 들른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사원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바라나시'를 향해 곧장 발걸음을 옮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네팔 사람들만 하더라도 인도와 이웃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세'에 대한 엄청난 확신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괴롭더라도 '환생 이후의 또다른 삶'을 위해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혹은 그리 큰 희망도 품지 않고) 아무런 불만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사는 듯한 모습들을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답니다.

카트만두 시내에도 조그만 강가에 화장터(파슈파티나트, Pahupatinath)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거길 가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네요. 언젠가는 비행기 위애서 내려다 보기만 했던 그 거대한 갠지스 강과 바라니시를 가 볼 날이 있겠지요. 바람과 구름과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구원 얘기는 참으로 억지스럽지 않아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LAYLA 2013-08-20 10:53   좋아요 0 | URL
세계인구 기준으로 힌두교 신자가 기독교 신자보다 많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카트만두에도 화장터가 있군요? 네팔은 가보지 못했는데 전 거꾸로 다음엔 네팔에 가보고 싶네요. 바라나시는 인도에서도 제가 가본 곳 중 가장 더러운 도시입니다. 더러움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래서 참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론 별로 였는데 그래도 어쩔수 없는, 제 불호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아이콘으로 잡은 장소라 엔도 슈샤쿠를 읽으며 이런 식으로 기억을 곱씹어 보게 되네요 ^^

라로 2021-04-02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이 옛날에 읽으셨군요!! 레일라님이 읽었는데 내가 왜 자랑스럽지? ㅎㅎㅎ

LAYLA 2021-04-03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요즈에 읽으세요? 저는 좋아서 두번 읽었어요^^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산문집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1월
구판절판


용감한 사람들

나는 무익한 것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과감하게 무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을 존중한다.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다..... 아주 유능하다. 나는 용기있게 '나' 또는 '아름답고 무정한 권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말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가능성과 관련하여...'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절대로 높이 사지 않는다. -11쪽

운명

사람들은 언제나 운명이 번개와 번득이는 불꽃, 티파니와 북, 트럼펫을 거느리고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이닥친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에 부딪히면 그 매너가 훨씬 더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폐암, 빈곤, 굴욕, 아니면 치명적인 사랑이 살며시 나타나 문을 두드리고는 정중하게 허락을 청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고 나서야 들어온다. -63쪽

연민

동물들은 연민을 안다. 그것은 원시적인 연민, 더듬거리는 외마디 연민이다. 내가 어쩌다 삶이나 문학 논쟁에서 한 방 먹거나 아픈 곳을 찔리면 개는 정확하게 내 상처를 안다. 개는 다가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다 안다는 듯이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슬기롭게 위로한다. "기운을 내, 곧 다시 좋아질 거야." 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좋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의 연민은 고매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위로하는 게 아니라 확인할 뿐이다. 이런 객관성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한다.-77쪽

당장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이십 년 전부터 구상해온 소설을 드디어 쓰자. 그동안 나는 이 과제를 미루려고 수십 권의 다른 책을 썼다. 또 중국과 그린랜드로 여행을 하고, 가족을 일구어 적어도 아이를 셋은 낳고, 이따금 로빈슨과 카사노바처럼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려주는 삼사천권의 책을 읽고, 독립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더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죽음과 친근해지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이제 이런 일들을 더 미루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것들을 성취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삶은 덧없고 의미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의무이고, 또 당장 나한테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출발 오 분 전에야 짐을 꾸리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여행자처럼 허둥지둥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니 자, 지금 시작하자. 당장, 우리 삶을 꾸리자. -84쪽

절대로 가격을 흥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삶.-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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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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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는 다시 눈을 치떠 그녀를 더듬듯이 살폈다. 남자란 어째서 결국은 다들 똑같은 걸까. 그녀는 자신이 이 오쓰에게 다른 학생들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남성들에게 없는 것. 나무의 꿈, 물의 꿈, 불의 꿈, 사막의 꿈.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오쓰에게 건넸다. 건넬 때 일부러 휘청거리며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오쓰는 미쓰코의 몸을 떠받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겁쟁이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억누르고 있던 욕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그녀의 몸에 와락 달라붙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학생 식당에서 먹었을 게 분명한 카레 냄새가 났다. 미쓰코는 자기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다려요."
미쓰코는 그를 두 손으로 밀쳐 냈다.
"샤워 정도는 해야잖아."
-69쪽

썩은 무화과의 악취가 나는 일요일이 그 후로 세 번 이어졌다. 오쓰의 머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미쓰코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푹 빠져 엎디어 있는 건 오쓰일 뿐, 그녀는 방에 걸린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무언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 확실하고 뿌리 있는 것을. 인생을 붙잡고 싶다. -73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건) 그때, 미쓰코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충동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야)
대학 시절에 몸속을 마냥 치달았던, 자신을 더럽히고 싶다는 그 충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사회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 그런 파괴적인 무엇을 자극할 만한 것, 예를 들면 바그너의 오페라나 루동의 그림 같은 것들과는 통 인연이 없고 무관심한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과 비슷한 남녀들 속에 자신을 시체처럼 묻어 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바랐다. -77쪽

이소베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그네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흔들렸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고서도 그 말이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듯이. 우리들 일생에서는 무엇인가 끝났어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171쪽

저는 고독하기 때문에 필시 고독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한심하게도, 저는 고독합니다 .......-185쪽

사 년이나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했으나 고생한 보람 하나 없이 어느 대학의 연구실에도 빈자리가 없다며 거절당한 그는, 여행사 안내원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불만을 마음 깊숙이 쌓아 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코스모스 사의 의뢰로 안내해야만 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경멸했다. 오로지 감사해하며 불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노인네들, 히피나 다름없는 방랑을 즐기는 여대생들, 그리고 누마다처럼 인도의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남자. 그들이 일본에 갖고 돌아가는 토산품은 늘 뻔하다. 실크 사리, 백단 목걸이, 상감 세공, 스타 루비나 에머랄드 같은 보석, 은 팔찌. 예전에 미국이나 유럽의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가게에서 지금은 일본인이 어정버정대는 모습을, 에나미는 가게 입구에 서서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197쪽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복도로 나왔다. 오전 3시 경으로, 캄캄했다. 복도 벽에 갖다 붙인 듯이 도마뱀붙이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밖에서는 벌레들이 홍수처럼 울어 대고 있었다.-223쪽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243쪽

복수나 증오는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기분이 늘 남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그는 사근사근하게 누구와도 잘 지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저마다 마음 깊숙이 자신만의 에고이즘이 있고, 그 에고이즘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니 옳은 방향이니 주장하는 것을 실생활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정하고서, 풍파 일지 않는 인생을 꾸려왔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5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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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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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다닐 때 읽은 김경은 그럭저럭 괜찮다 기억하는데 이번의 이 실망은 그녀의 글이 구려진 것인지 내가 나이가 든 것인지 좀 아리까리하다. 한국이라면 예전 책 다시 찾아 확인차 읽어보기라도 하겠건만. 


책의 시작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이게 먼소리여 싶은건 짧은 호흡의 잡지용 칼럼을 책으로 묶어 읽으니 나타나는 현상인걸까? 


책에 대한 불호의 이유는 크게 두가지인데 한 가지는 너무나 잦은 인용문. 이런 식이다.


"저기 제일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게 목성이랬지? 어때? 보여?"
"응, 보고 있어. 앞으로는 날씨가 사나온 날에도 가끔 목성에게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야."
"오~ 낭만 쩌는데?"
철학자 러셀이 그랬다. 어쨋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남친이랑 닭살감성 대화를 하다가도 러셀을 떠올리는 교양. 근데 닭살감성대화보다 더 긴 인용문은 닭살감성대화보다 더한 오글거림을 낳는다는 부작용이 있다. 칼럼의 소재에 따라 인용문의 분량이 달라지는데 때때로 인용문의 홍수 속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까먹게 되는 다른 종류의 부작용 또한 발생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그 이야기에 관해서 누구는 또 무슨 이야기를 했고.. 또 그 인용문 속의 뭐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용문의 행렬. 내가 한 밑줄긋기를 보면 거의 80-90퍼센트가 바로 그 인용문들이다. 그렇게 편집샵에서 쇼핑하듯 남이 한번 거른 잘 빠진 문장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선택일듯. 하지만 나는 별로 그런 류의 글을 안좋아한다. 거칠고 투박해도 글쓴이가 느껴지는 담백한 문장 하나가 좋다. 


불호의 두번째 이유는 이 많은 칼럼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제안이 너무나 가식적이어서다. 예술을 사랑하고 채식을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이패션잡지에서 늘상 이야기하는, 남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한 이런 저런 제안이 나오는데 그 한계가 너무 뻔해서 시비를 걸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달까? 이런식이다. 도심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의 쿨함에 대해 예찬하다가 튀어 나오는 이런 문장들.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자전거에 돈을 쓰는 일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꾸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는 순간 (하다못해 안장이나 흙받이를 바꿀 때도) 죄책감은 커녕 왠지 소비자 무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이패션지의 허영과 그 독자들의 우매함에 대해 한껏 비틀어 조롱하려고 쓴 문장이라면 모르겠지만, 줘도 안 할거 같은 '소비자 무리 중 가장 고상한 부류' 타이틀이라니 자전거 타려던 마음도 다시 쑥 들어가는 아주 마법같은 문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 칼럼의 결론은 우아한 린넨소재 셔츠와 팬츠가 아닌 엉덩이 다 보이는 스판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한국 아저씨들에 대한 개탄) 촛불을 드느니 보도블럭을 깨어 던지라는 소리라면 모를까 이런 극온건한 삶의 자세에 대한 제안이 21세기 대한민국에 굳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새로 출시된 안티링클 제품에 대한 리뷰와 개봉예정작 주연배우의 인터뷰 등에 뒤섞여 바자 @@호 에 실린 칼럼이었다면 실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별 기대도 안했을테니. 한 권의 책으로 보니 이게 먼 소리래.. 싶은걸지도. 그래도 주렁주렁한 인용문과 트렌디한 그때그때의 이슈에 맞추어 급조작된듯한 이런저런 제안들은 영 아니다 싶다. 담백하게, 김경이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상의 이야기 솔직한 이야기들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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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7-1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은 원래 '구렸어요'. 차라리 딴 세상 가서 노니는 이충걸이 백번 낫다는.

LAYLA 2013-07-17 12:28   좋아요 0 | URL
전 이충걸은 아예 읽지를 못해서..트윗 140자로 자아내는 오글거림을 보자면 어휴..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절판


원자 같은 가장 최소 단위에서 인가느이 육체를 분석하자면 우리는 사실 책상 다리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타인과 다르게 만드는가? 자아? 나는 자아라는 말이 버겁다. 영혼? 솔직히 그걸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내 몸뚱아리를 보고 나라는 인간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혼은 들을 수도 만질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없다. 증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취향이다. 내 영혼의 풍향계가 그 많고 많은 티셔츠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른다. 아무 계산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리고 한 인간의 인생이란 그런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톨스토이가 어딘가에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라고 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그냥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11쪽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캐서린 헵번-17쪽

새로운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 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33쪽

가만히 생각해봤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일 수 없는데 왜 구태여 가난한 남자만 좋아하는 건지. 혹시 부자이거나 성공한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완전 전무하다는 판단 아래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피곤한 기대와 희망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틀리지 않다. 게다가 부유한 남자는 가난한 남자만큼 개인적인 혹은 인간적인 매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있으니까, 구태여 매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적다고 할까? -89쪽

사랑이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라면, 결혼은 알아본 그 사람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알아가는 거다. -103쪽

"아니 검은색이 너한테 전혀 안 어울린다는 말은 아니야. 다만 검은색은 지친 사람을 더욱 지쳐 보이게 하는 것 같은데 니 일이 그렇잖아."

..그의 말에 따르면 검정은 매우 엄격한 색이라 생기 넘치는 사람이 가장 질 좋은 소재와 물 흐르듯 날렵하게 재단된 실루엣으로 입을 때만 그 어떤 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답게 그 진가가 발휘되는 색이란다. -131쪽

"우는 여자만큼 예쁜 건 없어. 울지 않는 여자는 바보야. 현대 여자들이 그렇지. 남자 흉내를 내느라고 울지 않는 바보가 됐으니까."-151쪽

사랑하는 사람만이 창조한다.
사랑해본 사람은, 사랑을 경멸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을 경멸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지 못한다.
오직 사랑한 것을 경멸해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창조할 수 있다. -153쪽

루소는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훌륭한 작업장과 도시로 진보해온 게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가 매우 정확하고 단순했던 원시시대의 자연인 상태로부터 우리 영혼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왔다고 말한다.-190쪽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복식이든 행동이든 삶의 패턴이든. 그 모든 게 멋대가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랴.- 톰 포드 -215쪽

내 머리는 내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루소-317쪽

나는 패션지 에디터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누비며 온갖 종류의 유명인을 만나 인터뷰해온 마흔즈음의 닳고 닳은 여자였고, 그는 시골에서 6년째 은둔생활을 하며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로 동네에서 성범죄 사건이 나면 용의자로 지목될 수도 있을 만큼 남루하고 고독한 남자였다. 사는 곳이나 직업적 환경의 격차로 보자면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조금 더 낮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내 취향이 그를 찾아냈다. -9쪽

당대 최고로 잘 팔리는 유명화가였지만 사교계를 좋아하지 않았고 화려한 자신의 그림과는 달리 희거나 검은 옷만 입는 이 아웃사이더(조지아 오키프)에게 어느 날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존 해밀턴이 찾아온다. 오키프가 여든다섯 살 되던 해에 와서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다는 존이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기 또래들과 제대로 된 우정도 나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예순 살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344쪽

중요한 문제는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379쪽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소재나 주제가 외부 문제이고 스타일이 내부 문제인 것이다. 콕토가 지적한 바 있듯이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가면이 곧 얼굴인 것이다. -수전 손택-399쪽

저마다의 일생에는 그 일생이 동터오는 여명기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 장 그르니에 '섬'-470쪽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자전거에 돈을 쓰는 일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꾸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는 순간 (하다못해 안장이나 흙받이를 바굴 때도) 죄책감은 커녕 왠지 소비자 무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540쪽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 이것이 나의 순례이며 저 별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길이라오. 아무리 희망이 없을지라도, 또한 아무리 멀리 있을지라도. -돈키호테-560쪽

작가에게 양심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절대로 위선을 떨면 안 된다. 글로 누군가를 동요시키고 싶다면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저 맡바닥까지 내려가 써야만 한다. -590쪽

"저기 제일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게 목성이랬지? 어때? 보여?"
"응, 보고 있어. 앞으로는 날씨가 사나온 날에도 가끔 목성에게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야."
"오~ 낭만 쩌는데?"
철학자 러셀이 그랬다. 어쨋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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