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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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는 다시 눈을 치떠 그녀를 더듬듯이 살폈다. 남자란 어째서 결국은 다들 똑같은 걸까. 그녀는 자신이 이 오쓰에게 다른 학생들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남성들에게 없는 것. 나무의 꿈, 물의 꿈, 불의 꿈, 사막의 꿈.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오쓰에게 건넸다. 건넬 때 일부러 휘청거리며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오쓰는 미쓰코의 몸을 떠받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겁쟁이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억누르고 있던 욕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그녀의 몸에 와락 달라붙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학생 식당에서 먹었을 게 분명한 카레 냄새가 났다. 미쓰코는 자기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다려요."
미쓰코는 그를 두 손으로 밀쳐 냈다.
"샤워 정도는 해야잖아."
-69쪽

썩은 무화과의 악취가 나는 일요일이 그 후로 세 번 이어졌다. 오쓰의 머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미쓰코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푹 빠져 엎디어 있는 건 오쓰일 뿐, 그녀는 방에 걸린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무언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 확실하고 뿌리 있는 것을. 인생을 붙잡고 싶다. -73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건) 그때, 미쓰코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충동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야)
대학 시절에 몸속을 마냥 치달았던, 자신을 더럽히고 싶다는 그 충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사회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 그런 파괴적인 무엇을 자극할 만한 것, 예를 들면 바그너의 오페라나 루동의 그림 같은 것들과는 통 인연이 없고 무관심한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과 비슷한 남녀들 속에 자신을 시체처럼 묻어 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바랐다. -77쪽

이소베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그네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흔들렸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고서도 그 말이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듯이. 우리들 일생에서는 무엇인가 끝났어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171쪽

저는 고독하기 때문에 필시 고독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한심하게도, 저는 고독합니다 .......-185쪽

사 년이나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했으나 고생한 보람 하나 없이 어느 대학의 연구실에도 빈자리가 없다며 거절당한 그는, 여행사 안내원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불만을 마음 깊숙이 쌓아 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코스모스 사의 의뢰로 안내해야만 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경멸했다. 오로지 감사해하며 불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노인네들, 히피나 다름없는 방랑을 즐기는 여대생들, 그리고 누마다처럼 인도의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남자. 그들이 일본에 갖고 돌아가는 토산품은 늘 뻔하다. 실크 사리, 백단 목걸이, 상감 세공, 스타 루비나 에머랄드 같은 보석, 은 팔찌. 예전에 미국이나 유럽의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가게에서 지금은 일본인이 어정버정대는 모습을, 에나미는 가게 입구에 서서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197쪽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복도로 나왔다. 오전 3시 경으로, 캄캄했다. 복도 벽에 갖다 붙인 듯이 도마뱀붙이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밖에서는 벌레들이 홍수처럼 울어 대고 있었다.-223쪽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243쪽

복수나 증오는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기분이 늘 남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그는 사근사근하게 누구와도 잘 지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저마다 마음 깊숙이 자신만의 에고이즘이 있고, 그 에고이즘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니 옳은 방향이니 주장하는 것을 실생활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정하고서, 풍파 일지 않는 인생을 꾸려왔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5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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