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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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판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리, 뉴욕의 유명한 편집장이 이 책을 책장에 쌓아두고 세설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바로 손에 쥐어준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귀가 팔랑거려 구입한 책인데 읽고 나서 보니 동양판 오만과 편견이라는 말엔 절대 동의하지 못하겠고(오만과 편견의 백미는 그 로맨틱한 줄거리를 써내리는 제인 오스틴의 시니컬한 시선과 툭툭 튀어나오는 독설들인데 이 책은 저자의 오사카 자매들과 간사이 지방에 대한 무한 애정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니 근본적으로 비교 불가능하다. 동양판 오만과 편견이란 평은 '아가씨들의 신랑감 찾기'라는 공통소재만으로 거칠게 두 작품을 묶은 것이기에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나로선 화가 날 따름이다) 그 뉴요커가 그렇게도 세설에 목을 맨 이유는 너무도 잘 이해가 되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후반부에는 한국인의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회사원 김씨와 과장 사이의 대화" by 손호민 

과장; 날씨도 으스스하고 출출하네 (한 잔 하러 가는게 어때?)  

회사원 김씨; 한 잔 하시겠어요?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과장; 괜찮아. 좀 참지 뭐 ( 그 말을 반복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회사원 김씨; 배고프실텐데, 가시죠?(저는 접대할 의향이 있습니다) 

과장; 그럼 나갈까? (받아들이도록 하지.)
 
   

말콤 글래드웰은 이런 서로의 은근한 신호를 받아 계산하고 파악하는 미묘함을 세련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평한다. 그리고 바로 이 책, 세설은 바로 이런 미묘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의사소통으로 가득 차 있는 동양식 의사소통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직구 날리는 의사소통이 편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맞아 멍 든 가슴 한번쯤 가져본 서구인이라면 이 애둘러가는 동양식 대화의 매력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거기다 '일본'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기모노며 가부키며 스시가 그동안 쌓은 후광은 그 자체로 이 이야기를 1.5배쯤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줬을 것이다.

세설은 오사카의 몰락한 상류 계층의 네 자매 이야기이다. 특히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은 바로 저 우아한 이중소통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캐릭터의 행위로 보자면 말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 담긴 수많은 의도와 무수한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작가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그리고 편지가 온 다음 날 사진을 보내왔다. 사치코는 사진을 잘 받았다는 인사를 겸해 곧 답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작년에 이타니에게 몹시 재촉을 당한 것에 질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경솔하게 나서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친절한 마음은 감사하지만 답은 한두 달 기다려 달라며 대충 이런 말을 써 보냈다. 

최근에 혼담이 잇었는데 바로 얼마 전에 깨졌기 때문에 동생의 마음을 생각하면 시간을 좀 둔 다음에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좋을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되도록 신중을 기해 조사도 충분히 하고 나서 부탁할 일이 있으면 부탁하겠다. 아시다시피 동생은 혼기가 한참 지났으므로 너무 자주 선을 보고 또 그것이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면 언니로서 너무 안쓰럽기 때문이다. 

사치코는 솔직한 마음을 썼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직접 찬찬히 알아보고 괜찮으면 큰집에 이야기를 하고, 그런 다음 유키코에게 알리자고 데이노스케와도 의논을 해두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다지 마음이 내킨 건 아니었다. 물론 알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고 재산 상태도 전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사진 뒷면에 쓰여 있는 것만을 봐도 세코시보다 조건이 훨씬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로 나이가 데이노스케보다 두 살이나 위라는 것, 둘째로 초혼이 아니라는 것, 전처 자식은 둘 다 죽었으므로 그거야 홀가분하지만 사치코의 생각에는 무엇보다 유키코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진 속 인물은 풍채가 아주 늙어 보였고 꾀죄죄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막상 실물이 나은 경우도 있지만 구혼을 위해 보내온 사진이 이렇다면 아마 이보다 더 늙어보였지 젊어 보일 리는 없을 터였다. 특별히 미남일 필요도 없고 실제 나이가 데이노스케보다 위라도 상관은 없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술잔을 나눌 때 신랑이 너무 늙어 보이면 유키코가 가엾기도 하고 애써 주선해 준 자신들도 자리를 함께 할 친척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역시 신랑다운 젊음이 무리라면 어딘가 발랄하고 윤기 있는 얼굴에 활기찬 느낌의 사람이었으면 했다. 이것저것 생각하자니 사치코는 아무래도 이 사진 속 인물에게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므로 당장 서둘러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일주일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문득 생각이 미친 것은, 일전에 <사진 재중>이라고 쓰인 우편물이 배달되었을 때 유키코가 힐끗 보고 알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잠자코 있는 것이 오히려 숨기는 것처럼 보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치코는 유키코의 표정으로 보아 겉으로는 특별히 달라진 점이 없지만 역시 저번 일에 정신적으로 다소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연달아 다음 혼담을 꺼내는 것은 피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사진을 보내왔는데 사치코 언니는 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까 하고, 애써 배려해준 자신의 마음을 자연스럽지 못한 농간으로 받아들여도 곤란했다. 

-114쪽

 
   

모든 것에 마음을 담는 일본 사람들만의 사고방식은 이렇게 잔잔한 일상에 잔물결이 퍼져나가듯 서술된다. 퍼져나가던 물결이 힘에 부쳐 가라앉는가 싶으면 또 다른 물결이 일어나 누군가의 마음을 어지럽히며 2권의 분량의 글을 이어간다. 거친 굴곡없이 저런 잔물결서술만으로 독자를 빠져들게 하니 이래서 이 책이 그리 유명한가보다 싶었다.  

문학으로서 가지는 매력 외에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1930년대 40년대 일본의 풍경과 생활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들이다. 한국에선 먹고살기 힘들어 괴롭던 시기이고(운수좋은 날) 먹을만하면 제정신으로 살수가 없었던 시기로 그려지는데(이상) 일본에게 이 시대는 빛나던 근대화의 시기이다. 누가 강탈하거나 핍박하지 않으니 기모노를 차려입고 얼굴에 분칠을 한 채 서구문명의 이기를 일상속에서 누리는 모습이 그려지는데(쉽게 주사를 맞는 모습, 구체적으로 열거되는 서구 약의 이름 등) 그 모습들을 읽으며 일본이 그렇게 가까워보이면서도 멀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절절히 와닿는다. 시작에서부터 이렇게 달랐던 것이다. 당시 독일인, 러시아인들과 이웃으로서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2권으로 나누어진 이 긴 책에 밑줄긋기 할 만한 대목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저 상세히 서술된 캐릭터들의 뒷마음 한구절 한구절 가슴에 와닿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정수이다. 전체로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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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3-3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 저도 요즘 시작이 달랐다!며 괜히 혼자 울분을 터뜨리곤 하죠.
부럽고, 밉습니다. 일본은.

그나저나 말콤글래드웰의 미학적 취향은 참 독특하네요 ㅋㅋㅋㅋ

LAYLA 2010-04-01 03:20   좋아요 0 | URL
일본을 경쟁대상이라고 여기는 것도 착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경쟁이 되어야 경쟁을 하죠.. 하하 말콤 아저씨는 저 부분 보니까 좀 귀엽드라구요 ㅋㅋㅋㅋ

2010-03-31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1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 세계 유명 작가 32인이 들려주는 실전 글쓰기 노하우
몬티 슐츠.바나비 콘라드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6년 10월
구판절판


언젠가 아버지는 나에게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삶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게 시인의 재능이고 책임감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실연 당한 이는 시집을 통해 위안을 받고, 낯선 땅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전에 그 곳에 갑본 사람들의 여행기에서 몰랐던 길을 찾아낸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7쪽

유명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타고난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에는 그 어떤 지름길도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확신했다. -17쪽

"이 한 권의 책을 쓰게 하려고 출판사들은 그토록 내 원고를 거절했구나."-37쪽

배경 묘사가 있어야만 독자는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어. 배경을 잘 묘사하면 독자들을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상황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배경이 온두라스라면, 독자들은 더위와 습기와 갈증을 느껴야 해. 마을 광장으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과 교회당 옆에 묶어놓은 작은 당나귀의 엉덩이에서 솟구치는 더운 김을 볼 수 있어야 하지. 물고기 머리와 바나나 껍질로 만드는 토속 음식인 조조가 숯불 위에서 지글대는 소리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해.
배경을 정교하게 묘사하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을 정확하게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처럼 믿게 만들 수 있어. 이를 두고 '핍진성'이라고 해. 그래야만 안 믿으려고 드는 독자들을 놀라게 할 수 있지. 배경을 정교하게 묘사하려면 어디까지 묘사하고 어디까지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야 할지 결정해야 해. 독자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책을 읽기 때문에, 소설가가 가구는 어떤 것들이 있고 서랍 속에는 무엇이 들었고 하는 식으로 하나한 일일이 다 설명해주면 마치 남의 물건을 빌려 쓰는 세입자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더 읽고 싶어 하지 않아. -91쪽

모든 사실은 당신이 사랑해야만 진실이 된다.-107쪽

이야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이야기의 결말이 꼭 영화처럼 멋진 키스씬이나 격렬한 자동차 추격씬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이야기의 절정은 조용하며, 심지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 그런 결말의 대가로는 체홉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헤밍웨이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소설이 좀 예스럽긴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놀랍다. 단편소설을 쓰겠다면 그들이 소설을 어떻게 끝맺었는지 공부하는게 좋겠다.
피츠제랄드가 그게 곧 플롯이라고 재치 있게 말한 것처럼 제일 먼저 인물들이 필요하다. 행동하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훌륭한 도입, 전개, 결말. 이 모든 것을 한데 묶는 구조를 넘어서는 뭔가가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왜 이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말이다.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풀롯에 필적하는것이라면 목적이 있는 플롯이 바로 주제가 될 것이다. 주제 따위는 치워버려라. 그걸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거니까.-151쪽

...그 다음 2주 동안 나는 숨도 안 쉬고 울프를 읽어 마침내 시로 점철된 마지막 책 <그대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 이르게 됐지. 진절머리를 치며 나는 베이커 교수님께 달려가 하소연을 했어.
"이제 누가 작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토머스 울프가 이미 다 썼는데!" 백발이 성성하던 교수님은 짐짓 놀라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
"스코트, 스물두살이 되면 다시 찾아오게나"
그리고 퍼킨즈에 대한 전기물을 찾다가 나는 누군가 퍼킨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머스 울프가 오랫동안 읽힐 만한 작가인지 묻는 부분을 발견했어. 퍼킨즈는 이렇게 대답했더군.
"대학 2학년 학생들이 있는 한."
그렇니까 좀더 노력해봐, 스누피야. 네 경박한 반응을 보니 꼭 루시가 비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준 것만 같구나. 평소엔 깨물었다면 그 입을 좀 더 크게 벌려서 물어뜯으려고 노력해보지 않으련? 루시와 나와 수많은 대학교 2학년 학생들과 함께 울프의 작품 속에 담긴 즐거움을 찾아보자꾸나.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작가들이 나올거야.-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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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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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절판


인간 존재가 없다면 감동적이고 장대한 장관인 자연은 슬픈 벙어리일 것이다 -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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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9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0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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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제로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을 달고 있는 이 책은 350여 쪽의 볼륨을 통해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진화론이 사실 그닥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과학에 무지하고 생물은 고등학교 내신 수준에서 기초만 배운 나 같은 사람에게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 '진리'의 위치로 자리잡고 있기에 진화론을 '거짓'으로 끌어내리는 이 책은 참 용감해보였다. 책의 앞부분 절반 정도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진화론을 반박한다. 기억나는 것만 예를 들자면, 첫째, 만약 진화론이 진실이라면 생물은 점진적 진화를 거듭해야 하는데 화석이나 지층대를 보면 새로운 생물의 등장이나 멸종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둘째, 침팬치가 더 진화한 형태가 인간이라고 하는데, 직립보행은 인간이 침팬지보다 더 우월한 영장류로 만들어주긴 하지만 침팬지가 직립보행을 하는 과정에서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적의 공격에 무척 취약한 상태가 된다. 적자생존의 원칙에서 봤을 때 침팬치가 직립보행을 시도했다면 약자로서 '자연선택'에 의해 사라졌을 것이다. 셋째, 아무리 자연이 수많은 변화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조만간 그 변화는 한 종과 다른 종의 상호교배를 방지하는 '이종 간 생식불능'의 장벽에 부딪힐 것이다. 넷째, 인간은 진화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그럼, 이런 문제점을 가진 진화론이 어떻게 인간의 탄생을 설명하는 지배적 학설로 인정받게 된 것일까? 저자는 두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사실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부풀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다. 둘째, 시기가 완벽했다. '종의 기원은 자연의 역사를 유물론적 입장으로만 설명하려는 많은 과학자들의 희망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설계자'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추론하는 성가신 신학의 손아귀로부터 자연을 해방시켰던 것이다.(128p)  

책의 후반부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진화라는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과정의 결과로 치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학'이라는 틀에서 볼 땐 감히 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진화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

   
 

 다윈의 진화론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객관적 대상으로만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영적인 자아를 두뇌의 물리적 구조의 작용으로 축소한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 경험의 '내부'를 부인하고 인간을 단지 객체로만 보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제거하고 다른 어떤 것, 즉 비인격적인 존재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대상화'는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지적하듯이, 유물론적, 전체주의적 사회 제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227p)

 
   

 진화론에 따르자면 인간은 냉혹한 자연 법칙의 우연한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가진 도덕심, 이성, 이타심, 신념등의 가치는 모두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을 유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특성'으로 간주될 뿐이다.   

   
  높은 도덕성이 개인에게는 약간의 유익을 주거나 전혀 유익을 주지 않는 반면, 도덕 수준의 진보는 분명히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이기는 데 엄청난 장점을 제공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을 갖고 있고,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공동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종족은 대부분의 다른 종족들을 이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선택이다. -다윈  (218p)  
   

과연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진화론'인가? 저자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 시각이 그 자체로 물질주의적 시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듬을 비판한다.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것이 창조론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행간을 보자면 저자는 종교의 힘을 전혀 무시할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교양의 측면에서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 이론 역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 마지막 페이지에서-

   
 

 물질주의적 과학의 발판에 대한 다윈의 기여만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 과거를 회고해 볼 때, 명백한 오류를 내포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제는 다윈의 차례이다. 다윈의 평판은 아마도 20세기의 연구 결과가 보여준 결정적인 증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다. 조만간 그가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나란히 하늘의 빈의자를 채우게 되면 마침내 3인방은 완전히 종말을 맞을 것이다. (359p)

 
   

 내 참 ㅋㅋ 왜 다윈만 까면 되지 맑스를 까는가???? 아직도 맑스 믿는 사람 많거든여??? ㅋㅋㅋ 종교스멜을 풍겨도 그려려니 넘어갔지만 결국 조금 찌질스멜을 남긴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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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3-1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과학은 언제나 '가설'의 연속선상에 있죠.
뭐든지 '확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늘, 바꿔치기 당할 수 밖에 없죠.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문제점을 낳는다'
그러면서 자꾸 발전해가는 것이니까요. 과학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책들과 지식을 접해야 하는 것이죠.

고마워요, 덕분에 나도 좋은 책 알게 되었습니다.(웃음)

LAYLA 2010-03-20 20: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과학 관련 서적은 어려워요 ^^;; 하하하

마법천자문 2010-03-20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잡설이 더이상 안 먹히니까 기독교계에서 새롭게 고안해낸 지적설계잡설로 횡설수설을 늘어놓은 쓰레기가 한 권 더 나왔군요. 이 책에서 진화론의 헛점이랍시고 늘어놓은 근거들은 이미 과학계에서 오래전에 완벽하게 반박돼서 더이상 거론하는 것조차 귀찮은 사안들입니다.

진화론은 현존하는 과학이론들 중에서 과학자들 사이에 그 기본 토대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이론입니다. 진화의 구체적인 매커니즘과 종합 원리에 대한 부분은 물론 많은 이견이 있고 아직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진화론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 원리에 대해서는 단 0.00000000001%의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진화론의 기본 원리를 의심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게 사실인가를 의심하는 게 더 현실적일 겁니다.

LAYLA 2010-03-20 20:50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쪽에 관심도 없고 제가 진화의 산물인지 창조의 산물인지도 상관없어요. 왜 이렇게 과학에 관해서만큼은 될대로 되라, 너 하고싶은 대로 사세요- 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진화론의 헛점에 대한 반박이 있다는 걸 또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 감사합니다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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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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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6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0-03-16 22:47   좋아요 0 | URL
이런 좋은 댓글은 공개로 달아주시지... :)
발음의 중요성은 외국에 나가기 전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본토 땅 한번 못 밟아본 저로선 발음에 쏟을 시간을 문법이나 독해에 쏟는게 훨씬 효율적이었고 어차피 스무살 넘어서 회화해봐야 소용없다는 시니컬한 소리도 들었지요. 그런데 나가서 아프리카 애들이나 싱가포르애들 영어 알아듣느라 고생하며 발음이나 악센트도 의사소통의 한 부분이며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발음 공부하는게 참 스스로 답답하지만 ㅋㅋㅋㅋㅋ 뭐 이 부분도 이 부분이지만 제일 본질적인 부분은 21세기 사회에서 앞으로 영어없이 할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는 제 생각이겠지요. 영어를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접하는 정보의 양에서 너무 큰 차이가 생겨버리니까요. 그런데 영어를 쓸 일 없는 사람은 배우지 말자-라고 해버리면. 영어를 공부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소리가 정말로 일상생활에 영어가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압력에 의해 영어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면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영어로 배운 지식으로 먹고살고 영어를 발판삼아 잘 나가는 사람들이 해버리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나는 영어로 창조적 사유를 할 수 있는데, 그거 하지도 않을거면서 기초회화에 돈 쏟지 말아라-처럼 오만하게 들리기도 하거든요.
뭐 이건 제 좁은 생각들이구요 님의 댓글, 오 교수의 주장 모두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저도 교환학생 나가서 영어로 고생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진보쪽 지식인들도 다 영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고...다정한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