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
마영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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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만화로 그린 엄마의 '열혈연애기'라는 신문 소개글에 홀딱 넘어가 만화책을 샀다. 중학생 무렵 좋아했던 <베르사유의 장미> 같은 만화 이후에는 역사든 학습이든 먹거리여행이든 만화로는 보지 않는 내 취향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만화를 무시해서라기 보다는 텍스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림만 봐도 다 알겠는 그런 친절함이 영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시 상상의 여지가 있는 문장을, 문단을, 문맥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렵게 살았어도 행복했다."로 시작해 연하남, 어용노조, 감금과 폭행, 인간으로서의 엄마들 등의 단어를 구사해 쓴 한겨레 신문 구둘래 기자의 책 소개글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림이 주 언어일 만화지만 뭔가 상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격렬하게 서로의 머리칼을 쥐어 뜯으며 이를 가는 표지그림 자체도 워낙 압도적이었다. 이 그림에서는 도대체 엄마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나 권위를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주저없이 <엄마들>을 선택했다.

 

 

따뜻함, 인내, 희생 등 엄마라는 이름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는 이 시뻘건 표지를 보며, 이미 나는 그 지긋지긋한 엄마의 의미를 넘어설 적나라함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까지 읽고나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든 기분이었다. <엄마들>에 등장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것만 같다. 어쩌면 친구의 친구 이야기라거나, 혹은 소설에서라거나 하다못해 드라마에서라도 한번 쯤은 아니 몇번 쯤은 듣거나 본 이야기 일 수 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보통 그 여자라거나, 그 아줌마라거나, 그년이라 시작되었지 우리 엄마라거나, 그 엄마라거나, 걔 엄마라거나 하면서 시작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에게 이 만화책은 이토록 생경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대했던대로 지긋지긋한 엄마의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는 적나라함이 눈 앞에 펼쳐졌는데, 이럴 수는 없다며 눈 감고 싶은 상황이 된 것이다.

 

<엄마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죄다 무능하다. 경제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하다못해 성적으로도. 그러니 이 만화에 등장하는 엄마들의 삶이 천박하게 여겨질만큼 드세 보이는 것은 전부 남자들 탓인 것만 같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오래된 속어는 진리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다.

그러나 역시 엄마는 힘이 세다.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에 등장하는 엄마처럼 제 살붙이를 먹여살려야 할 절체절명의 이유에서 라기 보다는 세월이, 삶을 어떻든 견뎌내도록 한 세월이 '그녀'를 엄마로 다져놓았기 때문에 힘이 셀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이기 이전에는 그냥 한 여자였으나, 여자를 '엄마' 라는 이름으로 가둬놓는 그 순간부터 연약한 여자를 벗고 강한 엄마가 될 것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작가는 엄마에게 여자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였으리라는 생각이.

 

실제 이름이 順心인 주인공 소연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댈 것은 남편도 자식도 애인도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아 가고, 엄마는 엄마일뿐 이라고만 막연히 상상했던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삶을 견딘 그녀들에게서 '여자'를 본다. 그제야 비로소 사랑과 질투로 범벅이 된 <엄마들>의 진흙탕을 추하다 여기지 않을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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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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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7쪽)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K가 한 마을에 도착하고, 그가 가려는 성은 어둠과 안개에 쌓여 도대체 그곳에 성이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 K는 그곳에 성이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K의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성을 바라보며, 이제 부터 시작될 성을 향한 K의 여정에 대해 들어보려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왜냐하면 안개와 어둠에 잠긴 첫문단은 성을 찾아 길을 나선 K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너무도 자명하게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성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인지, 거기에 성이 있다는 것을 K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쩌면 K가 찾는 성은 그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에 있는 성일 수도 있지 않은지 하는 의심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들지 않았다. 소설을 읽기 전부터 " 카프카"와 "성"의 아성에 압도된 나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을 태세로 독서를 시작했으니까.

그러므로 나 또한 K가 되어 기꺼이 성에 다다르고자 하지만, K가 낯선 마을을 빙글빙글 돌며 방황하듯 나 또한 제자리를 맴돌며 어리둥절해 진다. 때문에 "내가 도대체 뭘 읽고 있는거야?" 라는 자조적인 의심은 수시로 들었고, 이르고자 하는 성 대신 다다른 생각은 "카프카라는 오래된 남자의 난해한 정신 세계를 따라 21세기를 사는 내가 방황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미로를 헤매는 기분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K를 따라 성을 찾는 일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안개 속이다. K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독자에게 성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성은 반드시 거기있다고 마을의 누구나가 말하고 믿는다. <성>이 미완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소설이 완성되었다면 K는 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을까.

'지상의 마지막 경계선을 향한 돌진,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 최후의 걸작'이라는 출판사의 서평은 소설 <성>만큼이나 막막하고 모호하다. 인간종의 일반적 본질보다, 인간 개체마다의 실질적 존재, 즉 자기 한 사람으로서의 독자적 실존을 강조한 실존주의를 표방한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소송>이나 <실종자>가 더 나았으려나.

이해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카프카의 실존문학을 이해하려면 <성>은 정말 어렵다. 그냥 거기 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K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성>을 완독하려 한다면 이해하지 말고 받아들일 것.

 

아말리아라고 불리는 한 처녀가 있다. 그녀는 마을의 축제에서 성의 관리 중 한 사람의 눈에 띄여 밤의 초대를 받는다. 성의 관리들은 때때로 마음에 드는 마을 처녀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경향이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일부는 그런 행위를 특별한 기회, 혹은 은총이라고 믿기도 했다. 따라서 아말리아에 대한 관리의 관심은 그녀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농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다(적어도 알고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보이지 않는 성의 권리에 복종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상식이고, 관습이다. 그렇지만 기질적으로 복종이 맞지않는(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말리아는 관리가 보낸 추잡한 편지를 찢어 심부름 온 하인의 얼굴에 내던지고 쌀쌀히 창문을 닫아 건다. 그녀는 심부름꾼에게 망신을 줌으로써 관리를 모욕한 것이었고, 이는 명백히 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아말리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마을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존재로 추락한다. 그들 가족이 마을사람들로 부터 멸시를 받기까지 모욕을 당한 관리나 성으로 부터 어떤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은 내려온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족은 온 마을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K는 그들 가족이 마을로부터 경멸을 당하는 것은, 부당한 처우에 대해 그들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의 권위에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근거없는 불안이 '성'이라는 권력이며, 그것은 거짓 권위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소수는 성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형적인 다수에 의해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성>은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관점에서 해석된다. 유대인인 카프카가 유럽의 주류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이방인의 위치에서 K를 그렸다는 해석과 비밀스럽고도 매혹적인 성이 가르키는 것은 종교적 상징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여타의 소설들이 그렇듯 <성> 역시 보는 이의 심리나 처한 상황 등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성>이 상징하는 것은 권력이거나 권위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실체가 분명치 않은 성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맹신 또는 맹종에 의해 형성된 권위를 확인시키고자 K는 성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을 권력, 혹은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때 성은 종교일수도, 국가 권력일수도 있겠지만, 개개인이 전생애를 통해 추구하는 하나의  우상으로 볼 수도 있다. 문학 혹은 소설 역시 그 중 하나일 수 있겠는데, 이를테면 카프카라는 소설가가 쓴 <성>이라는 소설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 역시 실존주의적 가치면에서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위한 글쓰기를 유언까지 무시하며 대중소설로 둔갑시킨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를 원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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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04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에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완성작으로 남았으면 카프카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미로에 오랫동안 헤맸을 겁니다.

비의딸 2015-12-04 18:52   좋아요 0 | URL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결국에는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이야기였네요. 결국엔 지금 <소송>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cyrus 2015-12-04 18: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소송》이 《성》보다 조금 읽기 편했습니다. ^^

루쉰P 2015-12-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ㅎ 성은 저도 참 좋아합니다 20대에는 읽어도 성에 대해 몰랐는데 30대에는 조금이나마 성에 대해 알 수 있어어요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결국 인생의 하루 하루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만 헤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후후

비의딸 2015-12-04 21:07   좋아요 0 | URL

소설가 김영하는 <읽다>에서 K가 성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 소설 속에서 길을 찾는 독자의 그것과 같으며 그 길을 찾는 것은 능동적 행위라고 하더군요.
루쉰님의 댓글을 보고나나 성이 다시 보이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보다 더 능동적으로 성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러나 일단은 소송부터 잘 읽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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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헨닝 망켈/김재성/뮤진트리

 

아프리카 모잠비크를 배경으로 한 백인 여성의 삶을 조명한 소설이라고.

백인 여성으로 아프리카에서 권위를 세우지 못해 살해당한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의 메리가 생각나기도 하고, 치욕을 겪었을 망정 추락하지 않은 존 쿳시의 <추락>의  루시가 생각나기도 하며, 남편에 의해 미친여자로 둔갑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앙뜨와네뜨도 생각난다.

식민의 땅에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백인 여성은 때로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로 떨어지곤 했다.  제목과 출판사 서평만으로는 위의 세 책과 이야기의 결이 어떻게 다를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궁금하다. 헨닝 망켈의 작품은 처음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작가인 것만 같다.

 

 

 

 

 

 

댓글부대/장강명/은행나무

 

<한국이 싫어서>의 작가 장강명.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합니다!"

 

제목만으로는 어쩐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은 작가 중 하나다. 그래서 더더욱 읽고싶다. 읽고싶다.

 

 

 

 

 

독/이승우/예담

 

초판 출간 1995년작을 재 출간했다.

인간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악의를 '독'으로 표현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악인이 저지르는 심각한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며 내 안의 악에 대해 어느정도 인정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많이 읽어 뛰어난 사람이 되진 않겠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조명 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달라붙어 있는 악마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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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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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글쓰기로만 보였던 <보다>에 무던히도 실망해(실린 일러스트들도 크게 한 몫했다) <말하다>를 건너 뛰고, <읽다>를 읽었다. 나의 첫사랑 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작가가 말하는 '책 이야기'이니, 김영하라는 작가에게 더이상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라도 <읽다>를 읽지 않을 재간이 없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예약구매를 하면 출간 강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추첨권을 주겠다기에 덮석 예약구매까지 마치고 열흘을 기다려 받은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은 역시 훌륭했다. 김영하에게 말과 글로 대운할 상이라고 했다던, 김영하가 이십대에 만난 관상쟁이가 궁금할 정도로.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176쪽).

 

책을 혹은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김영하가 든 이 이유만큼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책은, 소설은 복잡하게 나쁜 나를 이해하고, 단순하게 좋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무엇이니까.

혹시 나처럼 <보다>에 실망해 다음 시리즈는 사지도 읽지도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던 사람이라도 <읽다>만은 꼭 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단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필요하다. 아니, 단지 김영하의 책만을 좋아할 뿐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출판 강연회에서 보니 어떤 이들에게 김영하는 작가라기 보다는 대중스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라고 보지는 않는데, 김영하의 책을 좋아해 다른 책까지 읽게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꽤 많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한가지, 이 책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데는 아직 보르헤스도 칼비노도 읽지 않은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는 고백은 해야겠다.

 

그리고 사족,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

대형 출판사 <문학동네>는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 김영하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사지 않았을 거다(이 얘기는 출판사는 김영하의 상품성을 믿었다는 얘기도 되겠지!). 커피 한 잔 값이 오천 원을 웃도는 이 시대에 책만큼 싼 물건이 어디 있나 하는 출판계의 자조적인 항변은 중요치 않다. 문제는 그런 생각은 출판사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여섯번의 강의를 묶었다고는 하지만(애초 작가의 기획은 김영하가 팟캐스트를 통해 읽었던 책들을 묶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아쉽다. 차라리 그랬다면 책에 대한 김영하의 독자적인 생각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을텐데) 참고문헌을 포함해 219쪽 밖에 되지 않는,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다른 책의 발췌로 채워진, 거기다 그나마도 중간 중간 쓸데없는 타이포그래피나 간지로 장 수를 채운, 이토록 빈약한 책을(질량적인 면에서 시각적 만족감이 매우 떨어진다) 만 이천원이나 받고 팔아먹는 그 장삿속을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 보다, 말하다, 읽다 이 세권이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묶일 만 한 책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읽는이로 하여금(일부일지라도!) 기만당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런 얄팍한 장삿속은 작가에게도 출판사에게도 크게 남는 장사는 아닐 것 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작가도 소비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어떻든 책은 남는다. <읽다>에서 김영하가 말한 것처럼 김영하라는 사람은 가도, 작가 김영하의 책은 그후로도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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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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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인 에어>의 남자 주인공 로체스터에게는 미친 아내가 있다. 그녀는 남편에 의해 감금되어 로체스터의 영지인 손필드 삼층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자신을 감시하는 여자가 술에 취해 잠이 들고나면 종종 아랫층으로 내려가 저택을 헤매이곤 했다. <제인 에어>의 작가인 샬럿 브론테는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에 대해 외모뿐 아니라 행동도 괴물처럼 그렸는데, 결혼식을 앞둔 제인 에어의 방에 한밤중에 침입해 베일을 찢는 모습은 마치 유령의 모습처럼 보일만큼 섬뜩했다.

버사 메이슨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광기를 숨기고 로체스터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결혼 후에도 술과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광기가 발현한 매우 부정한 여인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체스터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것 일뿐, 진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버사 메이슨의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과 모습은 로체스터의 불행한 결혼을 강조하고, 그녀를 감금한 그의 행동에 타당성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일면 타당해 보이는 그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미친 아내를 숨기고 제인 에어와 결혼하려 했던 로체스터의 행위는 범죄이다. 그 시대에도 중혼이 범죄로 성립될 만한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버사 메이슨의 오빠가 그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제인 에어와의 결혼식은 중지되었고, 로체스터는 한 여자가 사랑과 존경을 바칠만 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를 향한 제인 에어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를 읽는 독자는 제인 에어의 빗나간 사랑에 대해 안타까워 할 뿐 로체스터의 인간됨됨이라던가, 미친 아내의 내막같은 것은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우리의 주인공은 강한 자아를 가진 제인 에어이지 제인 에어의 행복한 결혼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인 버사 메이슨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친 아내를 피해 사랑의 도피를 제안하는 로체스터를 거절하고 자신만의 길을 떠난 제인 에어는 이후, 얼굴도 모르는 외삼촌의 유산 덕으로 부자가 된다. 그러나 자존감 높고 독립심 강한 그녀의 성정은 부자가 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화재로 인해 버사가 죽고 로체스터가 불구가 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체스터에게 달려가 사랑과 희생을 바치기로 한다. 해피 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결말이 나는 무척 못마땅했다. <제인 에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을 강조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라고 말 할 뿐만 아니라, 로체스터의 비정상적인 행위가 제인 에어의 눈먼 사랑으로 인해 가려지는 듯 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가 출판 되고 100년 후, 주체적이면서도 지고지순한 제인 에어가 아닌 죽음까지도 몹시 광포했던 미치광이 버사 메이슨에게 집중한 작가가 있었다.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거예요. 항상(183쪽)

버사 메이슨은 왜 미쳤을까. 광인의 내력은 정말 그녀 집안의 유전이었을까. 로체스터는 진정 속아서 결혼했던 것일까. 버사는 어떤 성장 배경을 가진 여자였을까. 그녀는 정말 괴물이었을까.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버사는 괴물이 아닌 유령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하녀들에게까지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진 리스는 여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남편에 의해 앙뜨와네뜨라는 아름다운 이름마저 버려진 미친 여자 버사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진 리스가 말하듯 모든 일에는 분명 다른 면이 있다. 그러므로 한 여인을 어둠 속에 가두고 재산을 비롯해 그녀의 삶까지 송두리째 가로챈 로체스터의 변명 또한 듣고 싶다. 제국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가치관을 가진 백인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그런 소설은 익히 알고있듯 무척이나 역겹지만, 문학은 일상의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 보여주고 독자는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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