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7쪽)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K가 한 마을에 도착하고, 그가 가려는 성은 어둠과 안개에 쌓여 도대체 그곳에 성이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 K는 그곳에 성이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K의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성을 바라보며, 이제 부터 시작될 성을 향한 K의 여정에 대해 들어보려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왜냐하면 안개와 어둠에 잠긴 첫문단은 성을 찾아 길을 나선 K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너무도 자명하게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성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인지, 거기에 성이 있다는 것을 K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쩌면 K가 찾는 성은 그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에 있는 성일 수도 있지 않은지 하는 의심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들지 않았다. 소설을 읽기 전부터 " 카프카"와 "성"의 아성에 압도된 나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을 태세로 독서를 시작했으니까.

그러므로 나 또한 K가 되어 기꺼이 성에 다다르고자 하지만, K가 낯선 마을을 빙글빙글 돌며 방황하듯 나 또한 제자리를 맴돌며 어리둥절해 진다. 때문에 "내가 도대체 뭘 읽고 있는거야?" 라는 자조적인 의심은 수시로 들었고, 이르고자 하는 성 대신 다다른 생각은 "카프카라는 오래된 남자의 난해한 정신 세계를 따라 21세기를 사는 내가 방황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미로를 헤매는 기분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K를 따라 성을 찾는 일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안개 속이다. K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독자에게 성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성은 반드시 거기있다고 마을의 누구나가 말하고 믿는다. <성>이 미완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소설이 완성되었다면 K는 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을까.

'지상의 마지막 경계선을 향한 돌진,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 최후의 걸작'이라는 출판사의 서평은 소설 <성>만큼이나 막막하고 모호하다. 인간종의 일반적 본질보다, 인간 개체마다의 실질적 존재, 즉 자기 한 사람으로서의 독자적 실존을 강조한 실존주의를 표방한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소송>이나 <실종자>가 더 나았으려나.

이해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카프카의 실존문학을 이해하려면 <성>은 정말 어렵다. 그냥 거기 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K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성>을 완독하려 한다면 이해하지 말고 받아들일 것.

 

아말리아라고 불리는 한 처녀가 있다. 그녀는 마을의 축제에서 성의 관리 중 한 사람의 눈에 띄여 밤의 초대를 받는다. 성의 관리들은 때때로 마음에 드는 마을 처녀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경향이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일부는 그런 행위를 특별한 기회, 혹은 은총이라고 믿기도 했다. 따라서 아말리아에 대한 관리의 관심은 그녀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농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다(적어도 알고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보이지 않는 성의 권리에 복종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상식이고, 관습이다. 그렇지만 기질적으로 복종이 맞지않는(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말리아는 관리가 보낸 추잡한 편지를 찢어 심부름 온 하인의 얼굴에 내던지고 쌀쌀히 창문을 닫아 건다. 그녀는 심부름꾼에게 망신을 줌으로써 관리를 모욕한 것이었고, 이는 명백히 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아말리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마을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존재로 추락한다. 그들 가족이 마을사람들로 부터 멸시를 받기까지 모욕을 당한 관리나 성으로 부터 어떤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은 내려온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족은 온 마을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K는 그들 가족이 마을로부터 경멸을 당하는 것은, 부당한 처우에 대해 그들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의 권위에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근거없는 불안이 '성'이라는 권력이며, 그것은 거짓 권위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소수는 성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형적인 다수에 의해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성>은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관점에서 해석된다. 유대인인 카프카가 유럽의 주류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이방인의 위치에서 K를 그렸다는 해석과 비밀스럽고도 매혹적인 성이 가르키는 것은 종교적 상징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여타의 소설들이 그렇듯 <성> 역시 보는 이의 심리나 처한 상황 등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성>이 상징하는 것은 권력이거나 권위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실체가 분명치 않은 성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맹신 또는 맹종에 의해 형성된 권위를 확인시키고자 K는 성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을 권력, 혹은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때 성은 종교일수도, 국가 권력일수도 있겠지만, 개개인이 전생애를 통해 추구하는 하나의  우상으로 볼 수도 있다. 문학 혹은 소설 역시 그 중 하나일 수 있겠는데, 이를테면 카프카라는 소설가가 쓴 <성>이라는 소설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 역시 실존주의적 가치면에서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위한 글쓰기를 유언까지 무시하며 대중소설로 둔갑시킨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를 원망해야 할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12-04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에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완성작으로 남았으면 카프카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미로에 오랫동안 헤맸을 겁니다.

비의딸 2015-12-04 18:52   좋아요 0 | URL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결국에는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이야기였네요. 결국엔 지금 <소송>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cyrus 2015-12-04 18: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소송》이 《성》보다 조금 읽기 편했습니다. ^^

루쉰P 2015-12-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ㅎ 성은 저도 참 좋아합니다 20대에는 읽어도 성에 대해 몰랐는데 30대에는 조금이나마 성에 대해 알 수 있어어요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결국 인생의 하루 하루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만 헤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후후

비의딸 2015-12-04 21:07   좋아요 0 | URL

소설가 김영하는 <읽다>에서 K가 성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 소설 속에서 길을 찾는 독자의 그것과 같으며 그 길을 찾는 것은 능동적 행위라고 하더군요.
루쉰님의 댓글을 보고나나 성이 다시 보이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보다 더 능동적으로 성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러나 일단은 소송부터 잘 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