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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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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국가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전쟁 말기의 극심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또한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에서 민주주의 이념과 자유 평화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혼돈의 와중에서도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년 오에 겐자부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교육 기본법이었다. 거기에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관통하는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바로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내가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밖에 그가 노벨수상작가라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조국이 전범국가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의 일환으로 '일본은 국제 평화를 희구하고 영구히 국제적인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전)'는 내용의 헌법9조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천황제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고수하며, 반핵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그가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렇기때문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작가로서의 그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이 기울고, 또한 여러 작품을 읽은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이 단편집이 세 권 째일 뿐이다.

 

머리에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죽도록 방치하고, 소년 시절부터 간직해왔던 꿈인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실천하려는 주인공 버드의 이야기인 <개인적인 체험>은 무척 즐겁게 읽었다. 버드가 현실로 부터 달아나려는 꿈을 포기하고  누구나가 예상하는 결말을 택했을 때는 안타까움에 잠을 설쳤을 정도로 빠져들었었다. <개인적인 체험>은 두개골 이상을 가진 오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다음해인 1964년에 씌인 소설로, 오에가 작가로 등단한지 7년만인 1957년에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인 2009년에 씌여지고,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출간된 <익사>는 정말 어려웠다. <개인적인 체험>과 마찬가지로 <익사>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에 기초했지만, <개인적인 체험>과는 다르게 <익사>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만큼 매우 관념적인,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소설이다. 열 살무렵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아버지가 익사한 기억을 가진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익사>는 대중소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자전적 혹은 자기만족적 소설이라고 느꼈다. 작가가 <익사>를 통해 말하고 자 한 것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공감은 더더욱 어려웠다. 단지, 역시 '오에는 어렵구나' 라는 일반적인 의견에 동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단편선집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편집된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 중, 작가로 데뷔했던 대학시절부터 씌인 초기의 단편 여덟 편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좋다. 패전 이후 혼란 속에서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패전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처럼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새롭게 시작되는 활기로 어수선한 분위기 또한 포함된 혼란이었다-애국을 강요당하던, 혹은 애국이 의무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각 개인은 오히려 물에 젖은 모래알처럼 한데 뭉개져 무기력해져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상황이나 주고받는 대화가 간결하고 매우 선명해서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여덟 편에 줄곧 빨려 들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단편선에 대한 선택에 후회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익히 알고있듯 오에의 작품을 읽는 것은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수긍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작가가 그리는 장면이 선명하게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느낀 감성을 나는 느끼지 못 할 때처럼 당황스럽고,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주눅이 들었다. 시인의 감성을 공감하지 못할 때의 시는 얼마나 지루한 것이던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한림원은 이렇게 논평했다던가. '시적인 힘으로 생명과 신화가 밀접하게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현대에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 냈다.' 역시 오에를 좋아하는 데 있어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것은 번외로 여기고 싶다.

 

개들은 몹시 지저분했다. 온갖 종류의 잡종이 거의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개들이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형견에서 소형 애완견까지 또한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 크기의 비슷한 잡종 개들이 말뚝에 묶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닮은 것일까? 나는 개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볼품없는 잡종인 데다가 바싹 말랐다는 점이 닮았나? 말뚝에 묶인 채 적의라는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점일까?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적의라는 감정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묶여 서로서로 닮아 가는, 개성을 잃어버린 애매한 우리, 우리 일본 학생,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너무 젊었든가 너무 늙었다. (12쪽)

초기 작품으로 실린 여덟 편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첫 번째 단편 <기묘한 아르바이트>는 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문과대학생인 '나'가 개 150마리를 죽이는 매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는 이야기인데, 죽음을 기다리며 말뚝에 얌전히 묶여있는 개들을 보며 당시의 학생들, 즉 자신들의 모습을 상기하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오에를 대표하는 바로 그 감성, '개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의 표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 개들이 낮은 담에 갇혀서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정말 미치겠어. 우리에게는 담 너머가 보이지만 저 개들은 아무것도 못 보지. 그리고 저 녀석들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잖아." "담 넘어가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아." 여학생이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어쩔 수 없다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받아먹는다는 게."(19쪽)

군군주의, 전체주의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애국주의는 전쟁이 끝난 평화의 시대, 희망의 시대에도 일본을 떠돌며, 각 개인들의 정신을 흩뜨린다. 저항의 의지조차 품지 못한 개들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는 대학원생은 개들에게서 무기력한 자신들을 보았고 이에 분노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굴욕감도 분노도 남의 일인 것만 같다. 그는 이미 완전히 지쳤기 때문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 무슨 '주의'를 논하는 것 만으로도 지레 지쳐버린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치적인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기력할지라도 '나'만의 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의 시기는 본시 냉소를 가장한 무기력을 자양분으로 삼고 숨어드는 '때'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나'의 무기력을 몹시 개인적인 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혹은 냉소적인 개인의 모습은 의과대 해부용 시체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 다른 '나'(사자의 잘난척), 결핵환자 요양소의 냉소적인 순응주의자 중 하나인 '나'(남의 다리), 외국 국인들로 부터 봉변을 당하고 그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는 '나'(인간양), 당시 유행과 같은 '좌익' 대신 실용적인 '우익'으로 돌아서는 열일곱의 '나'(세븐틴) 등으로 이어진다. 도드라지는 행동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각 개인들은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나'를 고집한다.

 

내 머릿속에는 돼지비계 같은 뇌가 가득찬 데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자신을 의식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악의적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몸의 움직임이 어색해지고 몸의 여기저기가 봉기해서 제멋대로 무슨 짓인가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치스러워 죽고싶을 지경이다. 나라는 육체 플러스 정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발광한 크로마뇽인처럼 동굴에 들어가 혼자 혈거 생활을 하고 싶었다. 타인들의 시선을 꺼버리고 싶은 거다. 아니면 자신을 꺼버리고 싶은 거고. (211쪽)

비교적 재미있게 읽히는 초기의 작품들은 그러나 읽고 난 후의 여운까지 쉬운 것은 아니어서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깊은 독서와 시와 영감으로 관념적이 되었다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도 작가의 독백이 아닌 독자를 향한 소통의 무엇이 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에가 중기 이후로 갈 수록 관념적이 된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더더욱 깊어졌다는 반증이므로 오에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기쁜 일이겠지만, 작가와 같은 템포로 성장할 수 없는 일반적인 독자로서는 무척 아쉽다. 역시 문학은 대중을 향해 열리는 것이 맞다.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한정된 독자에게만 이해되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가 갖는 힘 역시 축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은 인간 오에가 품은 개인과 평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문학계 안과 밖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외려 작가 오에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오에가 어렵다는 선입견으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나같은 독자에게는 무척 반가운 단편선이다.

- 사설 : 일본의 헌법9조는 세계2차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것을 최근에 안 나는 그것에 몹시 반발하는 심정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라면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러한 법이 승전국인 미국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이 최근에 본 영화 <London Has Fallen>의 내용과 겹치면서 불쾌해진다. 일본헌법 9조의 수호를 지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 누구에 의해 행해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분리되는 것에 냉소하는 것 외에 어떠한 저항도 구체화할 수 없는 무기력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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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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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가을은 겨울로 넘어가던, 파르바네와 패트릭이 오베의 집 우편함으로 트레일러를 후진시킨 지 거의 4년이 되던 11월의 어느 싸늘한 일요일 아침, 파르바네는 누가 얼어붙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만진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15분이었다. 오베의 집 밖에 쌓여 있던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447쪽

 

오베와 임신한 이웃 여자인 파르바네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한 것일까. 그들이 주고받은 감정은 이웃간의 우애 또는 아버지를 잃은 이방인 여자와 자식도 없이 홀로된 아빠뻘인 남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온당한 애정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나눈 것은 명백한 남녀 간의 사랑이 있었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인구 9백만의 스웨덴에서 70만 부 이상의 판매를 올리고 독일, 영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는 이 책을 사랑에 방점을 두고 읽은 사람이 단지 나 하나 뿐이라고 할지라도, <오베라는 남자>는 연애소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 다만 오베와 파르바네 간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는 묻겠지.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이냐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뭐랄까 육체적 끌림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따뜻한 포옹을 꿈꾸는 무성의 애정상태?

 

한편의 시트콤처럼 명랑 쾌활 유쾌 통쾌한 <오베라는 남자>를 힘들게 읽었다. 첫 장부터 오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며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가되었든 일단 반감부터 품고 보는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 그 자체가 자랑인,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라 다종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호화찬란하기까지 한 색채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십구 세의 남자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전철에서 혹은 은행에서, 길을 가다가, 또는 식당에서 숱하게 부딪히는 권위적인 얼굴의 남자들을 오베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원칙만을 소중히 여기는,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상황은 절대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갇힌 권위로 똘똘뭉친 완고한 남자들의 얼굴을.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15쪽) 오베는 아무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쓰레기장과 자전거 보관소를 관리하고 주차금지 구역을 시찰하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무정부적 혼란이 벌어질 것(16쪽)이라고 믿는 원칙주의자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까칠하다거나 사회성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한편으로 트레일러를 제대로 주차시키지 못하고 사다리도 잘타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임신한 여자를 돌보고, 마녀같은 이웃집 여자와 그녀의 개에게 쫓기는 상처받은 고양이를 거둬들인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고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는 자전거 고치는 법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청년에게는 잠잘 곳을 내주기도 하는 자상한 사람이며, 육개월 전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오베는 울타리 안에서 원칙을 세우고 체계를 잡는 권위자이며, 가족을 돌보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기도 하는 한마디로 이상적인 아버지 상 인 것이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답게 첨단의 기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유명 블로거인 작가는 어째서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를 불러낸 것일까. 북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수십 년 전부터 난민을 비롯한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대표적인 다문화국가가 되었는데, 당연히 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스웨덴인들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이민자들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이민자들은 이민자들대로 스웨덴인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키기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아수라장을 해결하는 데는 가족을 돌보고 상황을 통제할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한편으로 약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서는 히어로가 필요한 상황을 오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을 간파한 스웨덴의 독자들은 오베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는다. 자신은 남자이며, 아버지라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 때문에 내가 받을 몫을 손해본다고 느끼는 유럽인도 아니고, 아버지의 권위가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도 아닌 나는, 여전히 이 이야기를 연애소설로 읽는다. 자신이 통제하는 상황을 즐기는 오베는 전형적인 상남자이다. 남편을 따라 멀리 스웨덴까지 온 이방인 파르바네는 그런 오베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강한 남자를 본 것이다. 여자이고, 임신한 상태이며, 이민자인,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힘이 없어 핍박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맨손으로 라디에이터를 고치는 오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상, 안전, 보호 따위의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한 파르바네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빠의 동료를 좋아했던 어린 내 모습을 본다.

<오베라는 남자>는 나에게 엄연한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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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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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알지 못할 어느 도시의 공동 묘지에는 자살한 사람들의 무덤을 따로 모아둔 구역이 있다. 거대한 초원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그곳은 무덤은 물론이고 비석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치 자연 초지처럼 보여 그곳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매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무덤엔 제대로 된 비석 대신 번호판을 꽂아두어 그 황량함이 더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양치기 노인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러 이 구역을 찾곤 하는데, 그는 마치 장난처럼 무덤들의 번호판을 마구 뒤섞어 놓는다. 그런 행동은 죽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주인공에게 노인은 궤변 아닌 궤변을 늘어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엔, 물론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이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게 틀림없소, 선생이 말했던 내 악의에 찬 장난으로 인해서 그들은 더 이상 성가신 일을 치르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253쪽) 라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밝히고 싶은 억울함이든, 죽을만큼의 원망이든, 또는 죽음으로써만 씻게 되는 죄책감이든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 한장 남기지 않은 죽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한탄은 남은자의 애도를 위한 무덤이 그렇듯 살아있는 사람들의 위안이며 호기심이고 이기일 뿐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의 고통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항변이나 핑계조차도 필요하지 않을 터, 그런 의미에서 노인의 궤변은 진리처럼 여겨진다. 자살한 사람들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그말은 남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 누구를 애도하던 모두 같지않겠냐는 의미가 아닌가.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이 세상을 떠난게 아니라오... 

김효근 역시, 양준모 노래 '내 영혼 바람되어'

주인공은 태어난 자와 죽은 자의 기록을 보관하는 중앙등기소에 말단 보조서기다. 그는 우연히 손에 들어온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다. 마치 그 여자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큰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가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를 뒤지고, 그녀가 살던 집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은 지극히 변태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여전히 모르는 여자인 그녀의 물건을 쓰다듬으며 '세상은 의미가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의 남자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알건 모르건,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건, 이름이 있건 없건, 누군가 기억하건 말건, 죽음은 너무도 공평하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다' 라고 한 양치기 노인의 말 역시도 진리다. 어쨌든 모두가 가는 마지막엔 죽음이 있으니까.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 남자의 삶은 고독했다. 나이가 오십이 되었지만 등기소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말단의 보조서기이고, 마치 무덤과 같은 집에는 아파도 이마에 손을 짚어주거나 스프를 끓여줄 사람 하나 없다. 힘든 일을 상의할 친구나 지인도 없다. 남자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인들의 신상 명세서나 신문 기사를 모으는 것이다. 서류나 신문지 상의 그들은 살아있지만 말을 나누고 체온을 나눌 실제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거기 종이에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필요치 않은 지점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가 모르는 여자를 쫓는 일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다. 그가 쫓는 '모르는 여자'의 경우 부모도 직장 동료들도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모를 만큼 고독한 생을 살았다. '모르는 여자'의 대모인 일층에 사는 노부인이 어느날 구급차에 실려 갔지만 이웃들은 그후로 그녀의 소식을 모를뿐더러 그녀의 병세를 묻는 남자를 문전박대 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고독하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자도, 구급차에 실려간 노부인도, 딸이 자살한 이유를 모르는 부모들도, 구급차에 실려간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웃들도 모두 각자가 살아남기에도 벅찬 인생들인 거다. 보통 이럴때는 각개 전투해야하는 현대인들은 고독하다고 표현하지만, 정말 과거의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았을까? 옆집의 숟가락 갯수까지 알았다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정말 외롭지 않았을까?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란 제목은 그저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에 이어 시리즈로 묶기 위해서 지었던 출판사 '해냄'용 제목이었던 듯, 원제는 <All The Names>. 인간이란 존재가 고독을 사명처럼 받들고 살아갈 때, 세상 모든 이름들 만은 고독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실체와 상관없이 언제고 존재하니까.

 

작가 주제 사라마구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하고 억울해 하다가 이제라도 알게되었구나 하고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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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제법 읽고 싶은 책들이 있는 3월의 시작이다. 단지 3월이기 때문인지,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 취향에 맞는 책들이 많이 출판된 것인지 딱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눈에 솔솔 책들이 들어온다.

 

 

그랜드 마더스/도리스 레싱 지음/강수정 옮김/예담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나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메리'(풀잎은 노래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적이라고 보여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낳은 비정상적인 아들 '벤'(다섯째 아이)의 작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집. '그랜드마더스'를 포함한 중편소설 네 편이 실려있다. 정혜윤은 <그랜드 마더스>는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전에 읽었던 <풀잎은 노래한다>와 <다섯째 아이>, 그리고 <그랜드마더스>라는 제목으로 추측해 보건데, 레싱의 말년 작품이라는 이 책 역시 가족 안의 개인, 특히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나름으로 추측한다.

 

 

 

왠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이기호 지음/박선경 그림/마음산책

왠만해선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습관이 있는 나는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와 <독고다이>,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연달아 읽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읽고 생각한 것에 대해 정리는 못했지만, 그러나 작가 이기호에 대한 생각 하나는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새롭다는 것, 아무것도 가르치려하지 않지만 왠만해선 쉽게 잊을수 없다는 것. 좌충우돌 전전긍긍 갈팡질팡.. 이기호 소설에 대한 소설MD 김효선의 정의는 '참'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송경동/창비

나는 한국인이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송경동이다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파르빈 악타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투쟁이며 항쟁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아무것도 안 하면서 마음으로라도 지켜주고 싶은 많은 것 중, 하나이니까.

 

 

 

 

지극히 내성적인/최정화/창비

온전해 보이는 세계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의 기미를 내성적인 사람들의 민감한 시선으로 날렵하게 포착...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꽉 차오르는<지극히 내성적인> 혹은 <내성적인 지극히>의 출판사 소개글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는다. 이건 내 얘기야. 작고 사소한 일에도 생각 속에서는 수십 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바로 나의.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무뎌진 감각을 세련하고 싶은 것이 작가 자신의 소명이라 했지만, 나는 내 감각을 시멘트 바닥에 비벼서라도 좀 무디게 만들고 싶다. 너무 아프게 나무 세밀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모신 하미드 지음/안종설 옮김/문학수첩

 

오~ 모신 하미드.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고백으로 나를 미치도록 공감하게 했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쓴 작가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출간된 모신 하미드의 소설 중 두번째 작품이다. 자기계발서를  흉내낸 책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듯,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을 시작한다. 또 한번 심장이 두근두근. 아직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은 모신 하미드의 출세작 <나방 연기Moth Smoke>도 곧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영화 <동주>에서 동주는... '이런 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되겠다고 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 말.. 잊혀지지 않는다. 어딘가엔 꼭 적어놔야 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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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0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번달에는 꼭 됐음 좋겠는 책이 제법 꽤 많은 거 같다는..

비의딸 2016-03-04 17:49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정말 따뜻하네요. 점심시간에 벤치에 앉아 한참을 해바라기 했어요.
기네스 님 홈피에서 소설은 읽고나서 얼마간의 숙성기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보았어요. 정말 그렇죠. 두고두고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소설이죠. 그런데 그러기엔 읽고 싶은 책이 정말 많아요. 그것이 행복한 고민만은 아닌 거 같아요. 어쩌면 읽고싶은 것이 많다는 것도 그냥 일반적인 욕심의 하나일 수 있을테니까요.

맥거핀 2016-03-0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송경동의 시집을 읽고 싶기는 한데..안되지 않을까 싶네요. 해당분야에 시는 제외한다고 되어 있어서..고르신 책 중에 어느 책이든 저는 다 좋을 것 같아요. 밑에 두 권은 저도 추천한 책이고, 위에 두 권은 마지막까지 고를까, 말까 망설였던 책이라서..^^

비의딸 2016-03-04 17:29   좋아요 0 | URL
`해당분야에 시는 제외한다`라고 되어있다는 맥거핀 님의 말씀에, `설마 그럴리가`라는 대답이 절로.. (정말로 소리내서 그렇게 말했어요, 설마 그럴리가아?)

소설/시/희곡 중 시, 희곡, 우리나라옛글, 잡지를 제외한 전 분야

라고 씌여있는 걸 저는 보지 않았군요. ㅠㅠ
송경동의 시집은 증정도서가 아니라 사서 보는게 맞다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에이바 2016-03-0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달 신간중에 그랜드 마더스랑 피에로들의 집을 가장 기대해요. 레싱의 책은 읽을 것이고, 윤대녕 작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선정되지 않더라도 읽을 거예요ㅎㅎ 정말 읽고 싶어요. 그냥 이웃분들의 언급만으로도 호감이 생겨서요. 비의딸님은 그래도 돌아오셨군요 ㅠㅠ 저는 아직도 책이 썩 끌리지 않는데요. 그냥 신간체크하고, 정보 찾아보고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불을 지펴보려 하는데 잘 안 되네요.

비의딸 2016-03-07 14:33   좋아요 0 | URL
윤대녕 작가의 책은 저도 한 권도 읽어보질 않았어요. 예전의 저는 베스트셀러나 무슨무슨 수상작을 비롯해 많이 읽히는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그것도 일종의 반항인거겠죠. 나름 순응하지 않겠다는 객기 같은거..
저두 모든 책이 다 잘 읽히는 건 아니구요, 제가 나가는 책모임에서 <오베라는 남자>를 이번 책으로 정해 읽는데, 이건 또 엄청 힘들게 읽고 있어요. 지난번 <카인> 이후에 사라마구에 빠져 줄창 사라마구만 읽다가 오베를 읽으려니 힘든 것 같아요.
누가 그러던데요. 읽던 사람은 읽을 수 밖에 없다고. 조급해 하지말고 안 읽히는 그때도 즐겨보자구요.. ^^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눈이 멀었던 익명의 도시.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고 4년 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국민 투표가 실시된다. 그러나 투표를 한 시민들 중 팔십 삼 퍼센트는 우 또는 좌 그도 아니라면 중도의 어느 한 정당을 선택하지 않고 백지를 투척한다. 유권자들 중 대다수가 낸 백지투표는 국민으로서의 권리 포기와는 다른 성격의 것으로, 이는 현 정부에 대한 불신 또는 투표의 대상인 정치권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백지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단순히 투표라는 절차가 귀찮다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게으름이나 무관심과는 확연히 다른 행동이었다. 이는 자신들은 현 정부와 정치권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한 방식이었지만, 그것은 국가 전복을 꾀하는 혁명과도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시민들은 일방적인 정부의 지침에 따르는 일개의 투표자가 아니라 아니라, 독자적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유권자로서 행동하길 원했지만 피를 부르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백지투표를 하다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야.'(132)

정부는 유권자들의 백지투표 사태에 대해 반란, 또는 전염병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도시에 게엄을 선포한다. 경찰을 비롯한 모든 정치 기구가 백지투표 사태를 일으킨 도시, 즉 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도시의 모든 것이 마비되기를 꾀하고, 도시에 갇힌 사람들이 끝내는 서로를 불신하고 소요를 일으키게끔 은밀한 작적을 펼치기도 한다.

 

이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그들은 말했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대통령 인형이라도 태우고, 창문 좀 몇 개 깨고, 낡은 혁명가도 부르고, 자신들이 방금 묻어버린 사람들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도착해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서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 (185)

 

무정부 도시에서 혼란을 예상했던 정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눈뜬 자들의 도시' 사람들은 침착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행동한다. 이들은 눈먼 자들, 즉 눈을 뜨고 있으되 보지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 것을 알았고, 안것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새로운 음모를 펼치는데, 이른바 백지투표를 주도한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목한 주모자가 실제로 백지투표를 주도했건 안했건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백지투표라는 전국민적 행위를 전염병 쯤으로 돌리고, 15세기에 있었던 마녀사냥과 같은 희생양을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대국민 앞에 정부의 기능을 바로 잡겠다는 것이 권력자들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고, 빠져나갈 수 없고, 반박할 수 없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증거의 무게로 눌려버리기를 바라오.(322쪽)​

2002년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명의 여중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처음 열린 촛불집회는 그 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로 이어졌다. 이후 촛불 시위는 대한민국의 평화로운 시위문화로 자리잡았다.  또한 집회는 주도세력이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것에 의문을 갖고, 주도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눈뜬 자들의 도시가  바로 여기 서울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은 책을 읽는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쓰기 9년 전에 발표했던 ​<눈먼 자들의 도시>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본 것을 알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비관적인 편인 나는 눈뜬자들의 도시 사람들은 절대로 권력을 이길 수 없다고, 결국 언제나 승리는 저들의 몫이였다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그리고 우리의 신념은 시간과 함께 무뎌지기 쉬우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 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143쪽)

주제 사라마구 역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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