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계절

 

 어릴 때부터, 요행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유난히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 가옥이었다. 물이 들었다가 빠지면 생기는 바닷가 모래톱에서 20미터나 됐을까? 문 밖 골목에 나서면 파도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히 바다와 친할 수밖에 없었고 바닷가가 우리들 놀이의 터전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바닷가에서 함석 조각을 가지고 놀다가 이끼를 밟아 미끄러지면서 함석 조각에 눈썹 위가 찢어져 네 바늘을 꿰맸는데, 그때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죽다가 살아난 경험도 있었지만(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달리는 어머니 등에 업혔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를 반복한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여전히 나의 놀이터는 바닷가였다.


 일본 놈들이 우리 동네 왼쪽으로는 바다에 면하여 길게 석축을 쌓고 야적장 비슷하게 넓은 공간을 만들었고, 그것이 부두로 연결되게 해 놓아서 그 넓은 곳이 우리들이 놀기에 아주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이라면 그곳에는 제방이 없어서 공놀이를 할 때 공이 바닷물에 자주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사라호 태풍이 오는 바람에 모두 깨어져 버려서 놀이터를 잃었는데 얼마 후 피해 복구공사를 하면서 우리 동네 앞에만 제방이 설치되니 이제는 완벽한 놀이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공굴 마당’(아마도 콘크리트로 포장된 마당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이라 하면서 맨날 그곳에서 아이들과 놀게 되었다.


 그날도 공굴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공놀이를 하는데 마침 그 시간에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와 있었다.


 한참을 신나게 공놀이를 하며 노는데 한 아이가 실수로 공을 제방 넘어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어디에서 간짓대를 구해 와서 공을 건지려는데 길이가 약간 짧다. 그러자 아이들이 삼식이 저거 집에 긴 간짓대가 있다며 가지고 오라고 삼식이를 꾄다.


 살던 동네가 바닷가이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뱃일들을 하였고, 뱃일을 안 하더라도 거의 모든 집에서 처마 밑 선반에 낚싯대 한 두 대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싫다던 삼식이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집에 있던 낚싯대를 가지고 왔다. 낚싯대는 내가 보기에도 좋아 보였고, 초릿대 부분은 불로 구어서 곧고 똑 바르게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낚싯대를 들고 공을 건지려 안간힘을 쓰지만 낚싯대 윗부분이 너무 가늘어서 둥근 공을 제대로 건질 수가 없다.


 ‘에이 머리 나쁜 녀석들.’

 “내가 건져 볼게.”하고 나는 낚싯대를 건네받아 낚싯대의 가느다란 쪽을 손에 쥐고 두툼한 손잡이 쪽으로 공을 살살 방파제 제방 쪽으로 몰고 왔다.


 ‘, 역시 사람은 머리를 쓸 줄 알아야 돼.’


 이제 한 번만 공을 몰아오면 애들이 건질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한껏 고무된 나는 마지막 필살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낚싯대를 힘껏 쳐들었다. 순간, ‘우지직하면서 낚싯대가 부러지고 말았다.


 낚싯대를 거꾸로 들고 가느다란 부분에 너무 힘을 준 탓이었다.


 ‘아이쿠, x됐다. 이일을 우짜노?’

 

 아이들 모두 공놀이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실망과 경악과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삼식이는 죽을 상이 되어 울먹인다.


 ‘! 이런 낭패가 있나?’


 그 낚싯대는 자기 삼촌의 것인데, 삼촌이 애지중지 다듬어 놓고 뱃일을 나갔는데 사흘 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단다. 큰일이다. 삼식이 삼촌이 돌아오면 삼식이 뿐만 아니라 나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아! 나에게는 어찌 이런 일만 자꾸 생기는지? 지난주에는 누나 친구들이 고무줄놀이 하는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다 누나 친구가 던진 돌에 맞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것도, 누나 친구가 돌을 던지는 것을 보고 피한다고 폴짝 뛰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돌에 맞도록 얼굴을 들이대는 꼴이 되어 왼쪽 눈에 돌이 정통으로 맞아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었다.


 어쨌거나 이 위기를 모면하려면 새로운 낚싯대를 구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삼식이를 달래놓고 옆집에 사는 수곤이를 꼬셨다. 함께 낚싯대를 찌러 가자고.(찌다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내다.) 마침 자기도 낚싯대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것을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수곤이는 낫과 식칼을 챙겨서 남의 대나무 밭으로 대나무를 훔치려 출발했다. 우리 동네에는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야산 모롱이에 대밭이 있었는데,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대나무들이 무성했다.(지금 생각하면 그곳은 주인 없는 곳이 틀림 없었는데.)


 평소에도 그곳은 외진 곳이라 귀신이라도 나올 듯 좀 으스스하였는데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물불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무서움과, 남의 것을 훔친다는 죄책감까지 더하여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밭으로 들어가 각자 대나무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나무는 밑에서 보면 위가 똑 바르게 곧은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각자가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선택하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하고, 당장 주인이 나타나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 같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낫과 식칼을 이용해 손발을 덜덜 떨어가며 어렵게 하나 씩 대나무를 찌고 옆으로 난 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급지급 대나무를 정리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대나무 밭을 빠져 나왔다. 한 참을 도망치다시피 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뒤를 돌아보았지만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 안심을 하고 가지들을 정리한 대나무를 보니, 수곤이 것은 초릿대 부분이 곧고 바른 것이 아주 훌륭하다. 그런데 내가 찐 대나무는 초릿대 부분이 마디마다 비뚤비뚤한 것이 영 시원치가 않다. 내가 부러뜨린 낚싯대에 비하면 어림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다시 다른 나무를 찌러 가기에는 대나무 주인이 곧 잡으러 들이닥칠 것 같아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나는 수곤이에게 낚싯대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사실 우리가 찐 낚싯대는 아이들이 들고 낚시하기에는 너무 길고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런데 수곤이 싫단다. 아무리 꼬셔도 안된다. 딱지를 얹어 줄께, 구슬을 얹어 줄께, 해도 모두 싫단다. 아니, 같이 놀다가 낚싯대를 부러뜨렸는데 혼자 책임을 지게 되니 좀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싫다니 뭐, 할 수 없었고.


 그길로 나는 삼식이를 만나서 낚싯대 상태를 모른 체하고 낚싯대를 건넸다. 비록 허접한 것이었지만 낚싯대를 본 삼식이는 그제야 비로소 얼굴에 화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후 며칠 동안 대나무 주인이 우리집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삼식이 삼촌이 혼내려 오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는데,


 어느 날 공굴 마당에 나가보니 삼식이 삼촌이 불을 피워놓고 내가 쪄다 준 대나무를 열심히 손질하고 있었다. 삼식이한테 넌지시 물어보니, 자기 삼촌도 낚싯대

가 이상하다며 얘기를 했지만 삼식이는 시치미를 뚝 땄단다. ㅋㅋㅋ 기특한 녀석.


 운수도 나쁘면서 그렇게 가슴 졸이던, 시련의 계절은 그렇게 흘러갔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 모든 일이 해프닝이었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거침없이 실행하는 법도 배운 반면,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를 일찍 경험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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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1-08-02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편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길태 2021-08-02 16:04   좋아요 2 | URL
ㅎㅎㅎ 졸필 읽어주셔서 감사힙니다.^^

바람돌이 2021-08-02 1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닷가의 삶.... 저도 섬 출신이라 어릴적 바닷물에 몇번 빠져서 죽을뻔 했어요. 집의 문 열면 바다였죠. 그래도 남자아이들은 정말 다치는게 장난 아닌게 다들 그래도 살아남는게 신기 신기요. ^^

하길태 2021-08-02 20:47   좋아요 2 | URL
오, 그러셨군요.
바닷가가 위험하기는 위험하죠? 우리 동네에도 매년 여름이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꼭 한 명 이상은 생기곤 했어요.^^

붕붕툐툐 2021-08-0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하길태님은 왤케 잼난 스토리가 많으신겁니까?ㅎㅎ
저는 도시 태생이라 자연에서 자라신 분들 넘 부러워요~ 물론 위험한 순간들도 많겠지만, 저도 오토바이 사고로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느니 어디든 아이들은 위험한 걸로?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하길태 2021-08-03 07:07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릴적 기억으로는 그런 일들이 저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었습니다.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