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三人稱)과 우수마발(牛溲馬勃)
대학 학장까지 지내고 은퇴한 후, 농사를 짓겠다고 과수원을 사서 시골로 내려간 자형(姊兄)이 한 날은 이렇게 말했다. “새벽에 잠이 깨면 온갖 생각이 다 든다”고, 그때는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는 말이라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풍치를 앓고 치과 치료를 시작하면서 그 좋아하던 자기 전 수면제, 딱 한 잔을 하지 않아서 인지 꼭두새벽에 잠이 깬다. 일어나서 움직이기에는 눈치 받기 딱 좋을 시간이다. 원래 TV는 보지 않으니 그렇고, 그렇다고 독서를 하기에도 아직 눈이 워밍업이 되어 있지 않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오랜만에 자형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씰데 없는’ 생각들 중에 그래도 재미있는 기억에 빙그레 웃음이 난다.
한창 시험 준비를 위해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서, 자칭 우리나라 국보 제1호요, 동양의 석학이신 양주동 박사의 수필, 『면학(勉學)의 서(書)』를 읽는다. 박사님은 글 속에서 공자의 논어를 들어 독서의 즐거움을 논하시고 독서의 방법론까지 설파(說破)하시더니 이렇게 끝을 맺으셨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의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나는 그 ‘우수마발’에 빵 터졌다. 약에 쓸려면 찾아도 없다는 그 유명한 개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 오줌과 말 똥’이란 말이 아닌가. 푸하하하하
한참 웃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신다. 웃음을 그치고 문을 여니 어머니의 표정에서 근심스러움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밤늦게 공부한다고 열심이더니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 줄 아셨단다.ㅋㅋㅋ
꼭두새벽에 일어나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다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볼일이라도 있어 지하철이라도 이용하게 되면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우수마발의 지뢰밭 사이를 걸어야 하나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한다. 3인칭과 우수마발, ㅋㅋㅋ...... 오늘 생각해도 또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