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블루다 - 느릿느릿, 걸음마다 블루가 일렁일렁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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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일까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한국의 한(恨)에 해당하는 정서인 사우다지(saudade)를 기본으로 하는 대중가요 파두(fado), 소금으로 간한 정어리를 석쇠에 구워먹는 사르디냐 아사다스(sardinhas assadas), 도루 포도주 산지에서 생산되는 강화 포도주인 포트 와인, 푸른빛 장식 타일인 아줄레주(azulejo) 그리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를 꼽고 있다.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즐레주는 포르투갈을 다루는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라서 이상하지 않는데, 아프리카는 뭔가 어색하다. 왜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에 아프리카를 넣었을까?

 

포르투갈의 역사는 포르투를 중심으로 성립된 포르투갈 백작령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둔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 정복에서 시작된 이 제국은 1999년 중국에 마카오를 반환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점을 감안해서 지브롤터(Gibraltar)와 마주보는 아프리카 서북단의 이슬람 항구도시인 세우타가 포르투갈의 수중에 떨어진 1415년 8월 22일이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결코 “당신은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를 알기 위해 나를 평가하기 위해 ‘나’가 아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나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즉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나를 알려 한다. 그러한 네트워크 속의 내가 아니면 나 자신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로 세계화가 초래한 결과다.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을 동시화, 동조화시키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은 인터넷의 발명과 컴퓨터의 보급이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1415년 8월 22일에 벌어졌다. [pp. 25~28]

 

이처럼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제국을 가장 먼저 건설한 유럽 열강은 포르투갈이었다.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앙골라에서 많은 앙골라 주민들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해 ‘계약 노동’이라는 이름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심지어 목화 농장을 세우기 위해 앙골라 주민들이 이미 경작하고 있던 수수밭을 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은 악명 높은 흑인 노예무역의 중심국가기이고 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포르투갈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아프리카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누렸던 번영이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도시에는 성당과 푸른 빛의 아줄레주가 있다

 

<일본 도자기 여행: 규슈의 8대 조선 가마>, <일본 도자기 여행: 에도 산책>, <일본 도자기 여행: 교토의 향기>, <유럽 도자기 여행: 서유럽 편>, <유럽 도자기 여행: 북유럽 편>, <유럽도자기 여행: 동유럽 편>, <이천 도자 이야기> 등 도자기와 관련된 책을 많이 쓴 작가답게 아줄레주 이외에도 도자기로 부를 일군 도시, 일랴부도 소개한다. 이곳에는 포르투갈 최초의 그리고 지금도 유일한 도자기 생산업체인 ‘비스타 알레그레’의 도자기 공장이 있다.

 

제일 먼저 중국 도자기에 눈을 뜬 포르투갈이었지만, 자체적으로 자기를 만든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늦었다. 독일 마이슨이 1710년, 프랑스 세브르가 1727년, 영국 플리머스가 1746년에 도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포르투갈 도자기 공장은 1824년이 되어서야 세워질 수 있었다. 독일보다 무려 120년 이상 늦은 셈이다. [p. 144]

 

비스타 알레그레의 제품들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p. 151~152

 

아마도 마카오를 조차(租借)하여 중국 도자기를 쉽게 수입해서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자체 생산 하는 것은 그만큼 늦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도자기레주는 포르투갈을 상징한다.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아줄레주의 빛깔을 따서 <포르투갈은 블루다>라고 할 만큼.
 

저자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시작된 도시 포르투는 ‘아줄레주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제일가는 아줄레주 야외 전시장이다. 리스본의 명품 아줄레주가 잘 드러나지 않은 실내에 숨어 있는 반면, 포르투의 걸작들은 야외에 위풍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놓고 있다. 이런 대비, 포르투의 특수성은 대체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일까?

포르투 와인 판매와 수출로 인해 이 도시가 벌어들인 엄청난 재화들이 갈 곳이 어디였을까 생각하면 해답이 금방 나온다. 열성 가톨릭 국가의 부자도시에서는 성당도 부유할 수밖에 없다. 성당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고, 이의 사용처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를 가장 손쉽게 쓰는 방법은? 물론 빈민구제와 교육사업이 우선이 되겠지만 그래도 남는다면? 아마도 새로 성당을 짓거나 성당을 꾸미는 일이 가장 손쉽지 않을까. 포르투갈은 매우 열렬한 가톨릭 국가다. 성당을 꾸미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와 정비례한다는 논리에 어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까. [pp. 70~72]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포르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 상 벤투(San Bento) 역이다. 포르투의 상 벤투 역은 단언컨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다. 어떠한 역도 그 우아하고 화려한 아줄레주(azulejo), 즉 장식 타일로 장식한 이곳을 따라갈 수 없다.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는 하나의 벽화를 연상시킨다. 아니, 아줄레주 자체가 타일로 구성한 벽화다. 분명 여러 장의 타일이 조합되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련만, 수만 장을 분할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는 14cm×14cm 크기의 타일 2만 장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서사시다. [pp. 20~22]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21

 

산투 일데폰수(Santo Ildefonso) 성당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갈은 블루다>, p. 75

 

그렇다고 포르투에만 볼만한 아줄레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아줄레주 끝판왕으로 꼽는,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lgreja de Sao Vicente de Fora)은 초대 포르투갈의 군주인 아폰수 1세 엔히크스(Afonso Ⅰ Henriques, 1109~1185)가 114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위한 수도원으로 세웠다. 이후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마치 궁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81, 488, 490

 

 

파두, 한(恨)의 노래이자 소통의 노래

 

파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로 떠오른 것은 <춘향전>을 연상시키는, 마리아 세바라(Maris Severa, 1820~1846)라는 비운의 파디스타 덕분이었다.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거리의 여인인 마리아 세바라와 그의 노래와 외모에 반한 마리알바 백작의 로맨스는 19세기라는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아마 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도 현실이었다면 비슷한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울적하다. 그녀의 뒤를 이어 파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든 포르투갈의 이미자,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0) 등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호세 말호아의 <파두>(1910)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46

 

파두는 ‘사우다지’를 바탕으로 하는 노래다. 바로 우리의 한(恨)이다.

중략 ~

숙명적으로 바라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포르투갈. 그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수 많은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을 사랑하고 미워했던 여자들의 눈물과 탄식….

거기에는 지배당하는 힘없는 나에게서 세계의 지배자로 올라섰다가 또 다시 피지배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아픔, 이젠 과거의 영화를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그들의 역사도 애환과 애잔함으로 깔려 있다.

파두에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온 노예들의 설움, 식민지 지배를 당한 브라질 원주민들의 노여움, 머나먼 항해에 지치고 병든 뱃사람들의 비탄, 북아프리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무어인들의 향수가 모두 녹아 있다.

그래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파두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숙명. 아무리 발버둥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왜?’냐고 물어보아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파두는 소통, 요즘 용어로 하자면 ‘인터랙티브’의 노래다. 어느 노래인들 소통의 기능이 없겠냐만 파두는 특히 더 그렇다. 파디스타는 통상 대규모 공연장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근대 클래식처럼 소규모 인원이 감상하는 ‘살롱 음악’의 형태다.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소수의 관중과 일체감을 느끼기 좋은 ‘교감의 무대’에서 노래한다. [pp. 454~455]

 

참고로 파두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으로 KBS의 <UHD 문화기행 낭만 오디세이>(2017.07.02 방영) “포르투갈 파두, 세상의 끝에서 운명을 노래하다(https://youtu.be/dykeRKgTOeI)”를 보는 것도 괜찮다.

 

 

정어리 축제와 성인(聖人) 산투 안토니우

 

리스본 출신의 수도사 산투 안토니우(Santo Antonio, 1195? ~ 1231?)는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시칠리아로 표류했다. 그는 이를 신의 계시로 여기고 그곳에서 설교하면서 수도사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낙담한 그는 바닷가에 가서 그에게 다가온 정어리에게 하소연하듯이 말을 걸었다. 이에 호응하여 정어리 떼가 몰려오자,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해서 정어리를 상태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이 ‘정어리의 기적’이 유명해져서 그의 사후(死後) 1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리스본에서는 해마다 6월 12일이 오면 산투 아토니우를 기리는 ‘정어리 축제’가 열린다. 의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산투 안토니우와 정어리의 기적을 묘사한 17세기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189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되지만, 읽는 이가 관심 가는 지역과 도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제시한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줄레주,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이 11개의 스토리 곳곳에 녹아 들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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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리스본 -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안내하는 리스본 여행 가이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박소현 옮김, 최경화 감수 / 안그라픽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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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지나도 유효한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

 

이 책, <페소아의 리스본(Lisbon: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은 포르투갈의 국민작가인 페르난두 안토니우 노게이라 페소아(Fernando Antonio Nogueira Pessoa, 1888~1935, 이하 ‘페소아’)가 192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이다. 매년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 여행 가이드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은 박물관에나 가야 할 골동품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 물론 20세기 초반 유럽을 여행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다시 여행해보는 것은 독특하고 신선할 것이다.

하지만 여행 가이드북으로써 유효할까? 한국으로 치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1875년이 쓴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가이드북 삼아 한라산 유람을 하는 셈이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다행히 이 책을 들고 직접 리스본을 다녀온 옮긴이와 현재 리스본에 거주하는 감수자에 의하면, 리스본은 페소아가 살던 시절과 지금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한다.

 

2017년 3월, 이 책을 들고 방문한 리스본은 다행히도 “스스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도시가 아닌”지라 페소아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건축물은 대부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p. 18]

 

아, 한 가지 더. 한국어판은 원서와 다소 다르게 편집되어 있다고 한다.

 

원서는 리스본 전체를 하루에 둘러보는 빠듯한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국어판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구역별로 나누었다(마지막 두 장 ‘리스본의 신문들’과 ‘켈루스를 거쳐 신트라’를 제외한 장은 모두 편집 과정에서 임의로 넣은 것임을 밝혀둔다). 한 구역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 반나절 정도 걸리지만 도보 여행을 계획한다면 시간을 더 넉넉하게 잡기를 권한다. 또한 페소아는 자동차를 타고 리스본을 둘러보자고 제안하지만, 지금의 리스본은 그보다는 가끔 전차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보로 둘러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또한 지금은 필요 없는 페소아 당대의 여행 정보를 모두 원문대로 수록했다. 대신 해당 장소에 주석을 달아 현재의 정보와 그 사이 달라진 내용을 일러두었다. [pp. 17~18]

 

 

페소아는 왜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을 썼을까?

 

페소아가 그의 계부(繼父)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대해 무지(無知)하다는 것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보통의 영국인, 그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 사람이건 포르투갈을 유럽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로, 심지어는 스페인의 한 지방인 줄로만 안다.” 페소아는 남아프리카 시절 외국인, 특히 영국인이 포르투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들이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쪽 해안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pp. 12~13]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페소아는 자신의 모국 포르투갈과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 리스본을 외국인에게 알릴 방법을 고심했다.

 

페소아는 자신의 리스본을 이방인 앞에 가장 잘 내보일 방법을 고심하며 관광 코스를 구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 안내서를 쓰는 것만큼 한 도시에 대한 사랑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특히 그처럼 여행을 혐오하고 “정주적 삶을 향한 유기적이고 숙명적인 애정”으로 뭉쳐 있는 사람에게 리스본은 그가 속한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었을 테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안내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리스본의 과거와 현재, 북적이는 관광 명소와 인적 드문 거리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된다. [p. 17]

 

예를 들어 본래 군사훈련장이었으나 리스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는 캄푸 그란드(Campo Grande)를 보자. 얼마나 넓은지[면적], 언제 공원이 되었는지, 어떤 시설이 있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에

 

캄푸 그란드 공원은 제일 인기 있는 일요일 나들이 장소 중 하나다. 일요일이면 공원 사이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인파가 몰려들고 도로 왼쪽은 말과 마차로 분주하다. 공원 한쪽 끝에는 포르투갈 스포츠클럽의 축구장이 있고, 공원 뒤쪽으로 가면 왼쪽에 동 페드루 5세 구빈원과 보르달루 피녜이루 미술관이 나온다. 그리고 하울 사비에르가 제작한 이 유명한 국민 예술가 보르달루 피녜이루의 청동상이 보인다. [p. 54]

 

라는 말로 마무리 한다.

 

호시우(Rossio) 혹은 동 페드루 4세 광장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p. 90

 

리스본의 중심지로 ‘호시우(Rossio)’라고 부르는 동 페드루 4세 광장은 거의 모든 대중교통이 지나가는 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리스본에 머물 숙소를 구하려면, 이곳이 가장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여행 가이드북이 그렇듯이 이 책도 리스본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리스본에는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감성을 자극하는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포르투갈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수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리스본에 처음 왔다면 누구나 테주강 유역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일곱 언덕 위에서 보이는 근사한 경치, 공원과 기념비, 오래된 거리와 새로 난 대로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교외 지역 또한 그 나름대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 리스본 근교의 풍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자연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건물의 아름다움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리스본 근교로 나가보도록 하자. 함께 가는 이방인은 이 짧은 여행에 쓰는 시간을 잠시라도 낭비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p. 162]

 

라는 말과 함께 리스본 교외의 ‘리스본 동물원’, 로코코 양식의 궁전인 ‘켈루스궁(Palacio de Queluz)’, ‘신트라 언덕(Serra de Sintra)’과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 등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거나 언급되어 있다.

 

 

여행 가이드북으로서의 아쉬움

 

대부분의 여행 가이드북과 달리 이 책은 대부분의 장소를 사진 없이 말로 소개하고 있다. 아마 원서에 사진이 없어 현재의 사진을 넣기도, 과거의 사진을 넣기도 애매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어쨌든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또 하나는 지도다. 페소아가 제시한 경로를 꼼꼼하게 표시한 지도와 원문이 인터넷에 공개(http://lisbon.pessoa.free.fr/)되어 있다고 하지만 QR코드로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하면 더 편리하지 않을까?

 

리스본 지도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책날개의 앞날개

 

위의 사진처럼 책 속에서 페소아가 소개한 리스본의 장소들이 지도상에 숫자로 표시되고 본문에서 언급될 때에는 지도상의 위치(숫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어디가 어딘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p.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00여 년 전에 쓰여진 리스본의 여행기에 장소에 따라 현재의 운영시간과 입장료가 표기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책이라는 점에서 리스본 여행을 시도하는 이에게 색다르고 재미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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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임지연 옮김 / 북스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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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A Bite-Sized History of France: Delicious, Gastronomic Tales of Revolution, War, and Enlightenment)>는 프랑스의 여러 음식과 그에 관한 역사 등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 치즈 장수’를 자처하는 스테판 에노(Stephane Henaut)가 마음 편히 치즈를 가져오기 위해, 미국인 아내인 제니 미첼(Jeni Mitchell)에게 치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음식과 와인, 더 넓게는 먹고 마시고 농사짓고 포도를 재배하는 일체의 관습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그렇듯 시대의 전쟁과 혁명, 전염병과 침략, 발명과 계몽을 통해 진화해왔고, 좋든 나쁘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p. 9]

 

그래서일까? 저자는 음식을 통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칫하면 ‘순혈(純血)’주의자 혹은 ‘국수(國粹)’주의자에게 이용되기 좋다.

 

불행히도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는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파가 선호하는 전술이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주류 정치에도 스며들었다.

중략 ~

프랑스인이 되려면 프랑스 사람들처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미식 전통이 전 세계의 맛과 관습이 혼합된 결과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포도밭은 로마인이 전해준 것이며, 유명한 페이스트리는 오스트리아의 선물이다. 터키로부터의 멋진 수입품, 커피가 없었다면 카페의 탄생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초콜릿? 멕시코에서 수입되었다. 프로방스 요리?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토마토 없는 프로방스 요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순혈의’ 정통 프랑스 요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앞으로 밝혀내도록 하겠다. [p. 10]

 

그렇기에 저자도 이 책에서 사실상 ‘순수한 프랑스 미식’은 없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프랑스의 풍부한 음식 문화가 침략과 전쟁,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요리 또한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다양한 지역색 덕분만은 아니다. 긴 역사를 탐구한 결과 우리는 외국 요리가 프랑스 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을 밝혀냈다. 와인과 리큐어, 페이스트리와 초콜릿, 그리고 프로방스의 맛 등 프랑스를 대표한다고 믿었던 많은 요소가 프랑스가 원조가 아닌 수 세기에 걸쳐 유입되어 서서히 흡수된 것이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이러한 요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침략과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기 때문에 그 유입과정은 실제보다 더 순화되어 묘사되었다. 이 중 식민지 정복의 영향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온 식민지 요리가 현재도 프랑스 미식에 서서히 동화되는 과정에 있으므로 결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pp. 426~427]

 

예컨대 초콜릿과 같은 경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도 프랑스인들이 매년 약 7kg을 소비할 만큼 즐긴다. 하지만, 여전히 착취와 어쩌면 폭력을 통해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 대다수가 현대의 초콜릿이 끔찍한 식민지 건설과 대량 학살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서아프리카 카카오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를 강조하는 지속적인 캠페인 덕분에 초콜릿 무역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카카오의 60퍼센트 이상이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에서 생산된다. 많은 카카오 농장 일꾼들이 일당 1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아동이 2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되는데 일부는 이웃 나라에서 인신매매된 아이들이다. [p. 178]

 

 

이와 함께 음식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요리와 식재료는 식생활 습관 혹은 방식을 통해 계층 간의 차이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사회 계층 간 차이는 음식을 통해서도 점점 더 공고해졌다. 봉건 시대에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식습관 차이가 매우 컸다. 음식은 단순한 계급의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정 음식이 고귀함과 건강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음식은 비천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그 특정 음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pp. 66~67]

 

귀족들이 구운 고기를 먹는 동안 농민들은 채소를 찾아 헤맸다. 적어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루이 14세가 채소를 더욱 고급 재료의 반열에 올려놓기 전까진 말이다. 이국적인 향신료와 설탕은 비교적 최근까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심지어 포위전과 전쟁 중에도 부유층은 계속 별미를 즐겼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비단 프랑스만의 일은 아니다.

중략 ~

즉,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과 불평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특정 지역이나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습인 ‘식생활 방식(foodways)’을 조사함으로써 사회에서 누가 가장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지 등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pp. 424~425]

 

외교 수단이기도 했다.

 

탈레랑은 프랑스 대사와 외무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 문화와 미식을 최대한 활용해 경쟁자를 이기고, 잠재적 동맹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타협을 끌어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소프트 파워’라고 부르는 것의 완벽한 실천자였으며, 적어도 17세기 중반 이래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었다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을 활용해 중요한 국익을 추구했다. 그는 유럽 정치를 재편할 협상을 위해 빈 회의에 참석하고자 출발하면서 “폐하, 지시 말씀보다 소스팬이 더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p. 276]

 

이처럼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이면까지 들여다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의 다채로운 음식과 역사, 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누군가가 한국의 음식과 역사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글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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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 - 시와 해설로 읽는 신화 인문학 고전 아틀리에 2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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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가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 이유는 그 시대의 지식인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세계관, 배경지식 등]과 현대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책을 읽기 전에”에서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원전 번역본 <일리아스>는 방대한 분량, 낯섦, 신화, 수많은 에피소드 등으로 읽기 쉽지 않다. 10년 전쟁 중 4일의 전쟁 이야기로는 <일리아스>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전쟁의 원인도 나오지 않고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관한 서술도 없다. 누구나 아는 트로이아 목마를 서사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왜 신들이 편을 나누어 인간을 돕고 응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서양 문화권이 아닌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리아스>가 서양 인문학의 출발이라고 하는데 막상 실제로 읽으려면 기본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를 위해 <일리아스>의 이전과 이후, 그리고 신화와 비극 등 관련 내용을 담은 도움서가 필요하다. [p. 21]

 

라고 말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은

 

제1장 [일리아스]를 읽기 위한 준비’에서는 서사시 <일리아스>의 가치와 이를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고전은 원전 또는 원전 번역본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고, 스마트폰 등 다른 매체의 이용으로 독서율(책을 읽는 사람의 비율)도, 독서량도 줄어드는 상황1)에서 얼마나 유효한 주장인지 의문이 간다. 게다가 블링키스트(Blinkist) 같은 책 요약 서비스가 흑자 전환2)할 만큼 요약본 혹은 발췌본 읽기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 고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것 같지않다. 오히려 서양 고전의 경우에는 기본 배경지식 문제로 더 진입장벽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전 내지 원전 완역본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평역(評譯)이나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 해설서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글은 원저자가 아닌 해당 글을 쓴 이의 시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제2장 [일리아스] 이전 이야기’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고대 헬라스 서사시는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으로 나누어진다. 트로이아 서사시권은 트로이아 함락 이야기이고, 테바이 서시시권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중략 ~

트로이아 서시시권 서사시는 총 8편이다. <퀴프리아>는 파리스 심판에서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의 트로이아 도착 이야기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이야기이며, <아이티오피스>는 아킬레우스가 아마조네스 여왕 펜테실레이아, 아이티오페스 왕 멤논을 죽이고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이야기이다. <소(小) 일리아스>는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의 무구 재판 이야기, <일로오스의 함락>은 오뒷세우스의 목마로 트로이아를 함락한 이야기,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아카이오이족 장수들의 귀국 이야기,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이아의 귀국 이야기, <텔레고노스>는 오뒷세우스가 아들 텔레고노스에게 살해되는 이야기이다. 이 중에 온전하게 전해오는 서사시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pp. 34~35]

 

굳이 따지자면 제2장은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과 초기 부분을 다루는 <퀴프리아>의 내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이 된 황금사과와 파리스의 재판, 아프로디테의 뜻에 따라 트로이아로 가는 헬레네,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이 트로이아를 공격하기까지 과정 등을 언급한다.

 

제3장 [일리아스] 날짜별 서사의 전개’에서는 24권으로 구성된 <일리아스>의 서사를 날짜별로 소개한다.

 

제4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트로이아 함락’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다루는 <아이티오피스>,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 다툼과 아킬레우스의 사촌 아이아스의 자살을 다루는 <소(小) 일리아스>, 유명한 트로이아의 멸망을 다루는 <일로오스의 함락>에 해당한다.

 

제5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영웅들의 귀향’은 승자인 아카이오이족 영웅들의 귀향을 다룬다.

 

승자인 아카이오이족에서 행복한 자는 없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등 영웅은 죽는다. 귀향 후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신들의 노여움으로 영웅들의 여인들은 바람이 나고 영웅들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오뒷세우스는 10년의 어려운 귀향 후 자신의 자식에게 죽는다.

전쟁은 신에 대한 거역이다. 그 결과 전쟁에 참여한 자들 중 행복한 이를 찾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전쟁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하면서 처참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역설한다. [pp. 246~247]

 

 

저자의 해설을 보면, <일리아스>가 전쟁에 참여한 영웅들의 몰락을 통해 반전(反戰)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본인이 아닌 조상 때문에 파멸하는 경우를 보면, 헬라스 문화권도 ‘조상의 음덕(蔭德)’을 의식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6장 [일리아스] 깊이 읽기’에는 헬라스에 문명이 생겼을 때부터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까지의 간략한 역사, 트로이아 전쟁에서 각 진영으로 나뉜 헬라스의 신(神)들의 소개, <일리아스>의 구조에 대한 해설, 트로이아 왕가의 계보 등이 실려있다.

 

제7장 [일리아스]의 영향과 평가’는 헬라스가 세계에 끼친 영향과 [일리아스]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 등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제8장 [일리아스]외 다른 서사시들’에서는 <길가메시 서사시>, <라마야나>, <아이네이스>, <에다>, <니벨룽의 노래>, <동명왕편> 등 세계의 서사시를 소개하고 있다.

 

제9장 [일리아스]의 종합적 이해’는 [일리아스]가 고대 헬라스인들의 인간에 대한 보고서라고 주장하며, [일리아스]의 주제, [일리아스] 속 신화에 대한 해석 등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남자처럼 살았다.

베니스 상인의 포셔처럼

십이야의 바이올라처럼

남장 여성이다.

벗기면 그대로인 것을

고대 올림픽 경기는 먼저 알아

경기 선수는 나체이다.

경기는 공평해야 하므로

똑같이 지닌 몸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겨루어야 정당하다. [p. 97]

 

이 책에 종종 삽입된 저자의 시(詩)는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사족(蛇足)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각 단락을 시(詩)로 시작하는 것은 신선하지만, 동시에 고대 소설에서 내용을 함축하는 짧은 글로 장절(章節)을 시작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예컨대 유명한 <홍루몽>의 경우 제1회를

 

진사은은 꿈길에서 통령보옥 처음보고[甄士隱夢幻識通寶 ]

가우촌은 불우할 때 한 여인을 알았다네[賈雨村風塵懷閨秀]3)

 

라고 시작한다.

 

굳이 이런 부분을 넣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는 제목 그래도 <일리아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양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한 이에게는 <일리아스> 독해를 위한 좋은 가이드북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옥의 티

 

p. 21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문맥상 사람 이름인 호메로스가 아닌 ‘호메로스의 저서 전체’ 혹은 <일리아스>를 의미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든 명확하게 표기하는 것이 읽고 이해하기 좋을 듯하다.

 

p. 418

<일리아스>는 고대 희랍인들의 오랫동안 누적된 인간에 대한 보고서이다. ~ 헬라스인들은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그려진 삶을 꿈꾸지만 그 방패를 내세우면서 죽는 존재이다. ⇒ 희랍인 혹은 헬라스인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이은정, “지난해 국민 독서량 ‘뚝’… 2년 전보다 성인 3권, 학생 6.6권 ↓”, <연합뉴스> 2022.01.14. 참고로 성인의 독서율은 2011년 73.7%에서 2021년 46.9%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 김상희, “짧게 즐기는 시대… 책도 줄여본다”, <머니투데이> 2023.01.29

3) 조설근(曹雪芹)/고악(高顎), <홍루몽> 1, 최용철/고민희 옮김, (나남, 2009),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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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 - 역사 따라 살펴보는 경성 근대건축
이영천 지음 / 루아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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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공관, 건축과정과 건축의도

 

‘1장 서로를 경계하며 우후죽순 밀려드는 외국 공관들’에서는 개항과 함께 세워진 외국 공관들을 다루고 있다.

서양의 공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미국의 공사관으로 지금은 주한미국대사관저 부속 시설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어 영국도 한옥을 매입, 공사관을 건립했는데, 현재까지도 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와 벨기에의 공관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공관은 이들과 달리 세월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1890년 한성 내 최초의 서구식 공사관을 정동 언덕에 세웠다. 당시 한성에서 제일가는 서구식 건축물이었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거의 허물어져서 현재는 3층짜리 전망탑 하나만 남아있다.

 

1981년 전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폭 45센티미터, 길이 20.3미터짜리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잇던 비밀 통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작은 통로에 꺼져가는 촛불 같던 나라의 위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보인다. [p. 37]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조선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반면 벨기에는 1901년 체결된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의 내용이 오로지 상업 활동에 관한 규정 일색이었고, 그들이 설치한 공관도 오직 시장 개척에 상응하는 영사 업무만을 위한 영사관이었던 것에 드러나 있듯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추구했다.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벨기에는 10배 이상의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영사관 건물을 일본 요코하마 생명보험사에 팔아 넘긴다. 일본인 상권이 명동과 충무로를 점령한 뒤였고, 한성 상권의 패권을 두고 종로와 맞설 때였다. 벨기에영사관이 있던 곳은 곧 식민도시 경성의 핵심 상권으로 성장한다. [p. 53]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와 건축

 

‘2장 순교하는 가톨릭, 병원과 학교를 앞세운 개신교’에서는 성당과 신학교로 대표되는 선교에 치중한 가톨릭과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으로 대표되는 계몽과 근대화에 치중한 개신교의 건축물을 조명한다.

 

가톨릭은 교회 부지로 가급적 높은 언덕을 선호한다. 가톨릭 교리를 표현하는 대상물로서 권위를 드러내고 어느 장소에서든 잘 보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또 주변에 순교성지가 있어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 선호도는 배가된다. 이는 통례적으로 인정되어온 가톨릭 전통으로, 한성에서는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의 입지가 대표적이다. [p. 70]

 

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를 놓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청나라 기술자의 시공으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이 신학교가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이를 소(小)신학교라 불렀는데, 이 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한다. 그 후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와 주교관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60년대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大)신학교 교사는 소신학교 인근에 1911년에 건축되어 일제가 강제로 폐쇄하는 1942년까지 그 역할을 이어갔다. 건물은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부터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온전히 존치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건물을 인수했고,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p. 71]

 

주로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루트로 유입된 감리교와 장로교가 조선에서는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울에 지어진 정동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때 미국에서 주류를 이룬 교회 건축은 적절한 부속시설을 지닌 반형식주의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이었다. [p. 97]

 

 

경운궁의 중건(重建)과 근대국가로의 전환 노력

 

‘3장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경운궁 중건과 서양관’에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의 확장, 중건(重建)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다룬다. 수옥헌(漱玉軒), 정관헌(靜觀軒)석조전(石造殿) 등 양관(洋館)이라는 이름의 경운궁에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은 대한제국의 노력과 좌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경운궁 수리와 더불어 진행된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의 건립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직후부터 경운궁을 중심에 두면서 나라를 근대국가로 다시 세우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먼저 경운궁 수리에 착수하고 이와 더불어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 건립을 시작한다. 곧 도시재정비 사업이다. 이는 온건개화파로 알려진 박정양과 이채현의 노력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고종은 이를 통해 부강한 영세 중립국가 수립을 꿈꾼 것이다. [pp. 101~102]

 

가로가 정비되자 한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불결함이 급격히 줄어들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 환경은 활기를 띠었다. 아울러 상업도 보다 활발해졌는데,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 효과였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맞춤이었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장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밤을 밝혔다. 가로 정비는 단순히 도로 폭을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이는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 공간구조 개편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가로망처럼, 경운궁을 중심에 두어 권위를 드러내려는 방사형 가로망을 꿈꾼 것이다. 이는 한 지점에서 각 가로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갖춘 체계다. 방사형을 선택한 이유는 정세상 일본을 경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pp. 105~106]

 

 

일제의 침략 첨병들

 

‘4장 침략의 첨병으로서 우리를 옥죈 기구들’에서는 용산역과 용산기지, 종로경찰서 등 파출소 및 주재소, 서대문형무소, 경성재판소처럼 침략의 첨병으로 기능했던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1904~1906년 기간에 용산 땅 992만 제곱미터(약 300만평)을 평당 30전에 강제로 징발한다.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및 철도 용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pp. 156~158]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군부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인력과 물자를 갈취해 보급하는 실질적 지휘소 역할을 맡는다. 한반도에도 적용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노동력과 물자, 자금과 물가, 시설과 사업, 출판과 언론을 통제하고 식량을 공출해가는 전시통제체제를 시행한 것이다. 여기에 청년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내몰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또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위안소를 차리기까지 한다. [pp.164~165]

 

 

식민 지배공간 창출을 위한 건물들

 

‘5장 치밀한 흉계로 경성을 장악한 통치기구들’에서는 4장과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른, 조선 신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처럼 일제의 통치기구를 위한 건축물을 언급한다.

 

일제는 1916년까지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조선인에 대한 정신적 동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1916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은 것인데, 그 해 일제는 기존 남산대신궁을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격상하는 조치를 발표한다.

이런 배경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이식과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국가 신토가 건립될 때까지 임시 변통 역할을 경성신사에 맡기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경성신사 신직이 반발하고 나선다. 야만에 가까운 조선인이 일본 신 앞에서 자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선동조론이란 정신 동화정책이 현실에서는 구호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는 종교적 자유와 황실에 대한 충성 의무 사이에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가 갖는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 [pp. 201~202]

 

1907년 일본 왕사제 다이쇼[大正]의 방문을 계기로 숭례문 양측 성곽을 없앤 것을 시작으로 도성 성곽이 본격적으로 파괴된다. 1908년경에는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자락의 약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2500평) 땅을 차입하겠다고 청원한다. 이에 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이 앞장서서 그 땅을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영구 대여한다. 옛 남산식물원에서 3호 터널에 이르는 공간이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 기슭의 진고개와 왜성대 일대 그리고 군사용 조차장이었던 용산역과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잇는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해 2년 만인 1910년 5월 29일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이 행사에 2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하사하기까지 한다. [pp. 208~209]

 

 

철도, 근대화로 위장된 침략

 

‘6장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철마로 밀려온 근대’에서는 근대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철도 부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을 돌아보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대규모 조차장(操車場)였던 용산역,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 및 물류 배후기지로 조성하던 수색 조차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일제는 일찍부터 경부선에 눈독을 들였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 강토를 활보하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일본 밀정은 이미 1885년부터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리와 인문 정보, 경제 현황, 교통 등을 은밀히 조사한 바 있다. 또 사냥꾼으로 가장한 철도 기술자가 일제의 비호 아래 경부선 철도 예정지를 답사하고 측량한 뒤 1892년 보고서와 도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이 자행된 1894년과 1899년, 1900년, 190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완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일제는 실질적으로 전 국민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1901년 6월 25일 반관반민의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중략 ~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경부선 철도 완성은 한 척 전투함을 만드는 것보다, 한 개 사단 병력을 증설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서는 일’이라며 1903년 12워 28일 ‘속성명령’으로 일 년 내 완공을 밀어붙인다. 이런 만행으로 철도가 지나는 곳 주변에 사는 민중들만 골병이 들었다. 땅과 물자는 물론, 노동력마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버리고 유리걸식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광무 정권은 토지대금 마련에 허덕이면서 일본은행에 빚까지 진다. 러일전쟁을 위한 통과 시설로서 경부선은 그렇게 한국인의 뼈와 살을 발라 태어난 것이다. [pp. 247~248]

 

 

실패로 끝난 근대화 이식 실험

 

‘7장 이식된 근대화의 길 위에서’는 근대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을 살핀다. 신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기국(機器局), 국립의료원 제중원(濟衆院),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과대학인 의학교, 내부(內部) 직할의 국립 병원인 광제원(廣濟院), 전신선의 설치와 연결을 꾀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 등은 근대 문물의 도입을 통해 힘을 키우려 했던 조선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했다. 나라 재정은 몹시 열악했고, 내부 분열과 외세의 참견, 간섭이 극심했기에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 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를 염두에 두고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유학생들이 당장 이룰 수 있는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같은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학습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들을 조기에 귀국시키고, 따로 기계를 사들여 국(局)을 설치한 다음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며 69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떠난 지 불과 일 년 남짓이었다. [p. 271]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건축물에는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배경이 세세히 녹아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적 없이 만들어진 건축물은 없다’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단순히 건축물이 담당했던 기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건축물의 입지에서부터 건축 재료, 건축 형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치밀한 계산을 통한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각각의 건축물을 세웠다.

그렇기에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으니까, 무조건 철거해서 지워버리자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치욕적이고 끔찍한 역사를 전하는 문화재들은 한때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됐다.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화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부적으로는 힘이 없으면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가해자의 악행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일제 관련 유물은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최근 행태를 반박하는 증거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관련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보호, 활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네거티브 문화재는 아픈 역사를 드러내 재연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근대 건축물들이 아직 가치평가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보전하고, 그 공간에 담겨있는 기억을 복원하며 앞 세대, 그리고 해당 건축물과 소통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박제화하여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내용을 채우면서 새로운 가치를 계속해서 담아내는 방식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마 저자도 이를 위해 서울의 근대 건축물을 대상으로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닐까?

 

1) 강구열, “기억해야 할 치욕의 흔적… 대한민국 역사의 ‘빛과 그림자’”, <세계일보>,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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