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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쑨이멍 지음, 박지민 옮김 / 빅허그 / 2024년 6월
평점 :
기억과 스토리가 있는 장소, 백년 가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그런 의미와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lieu)’라고 정의했다. 장소라고 다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 맥도날드, 24시간 편의점 등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장소’가 아닌 장소를 뜻하는 ‘비(非)장소(non-lieu)’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비장소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의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기억의 도시일수록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도시의 장소들은 감동, 기쁨, 안식, 평안을 제공한다. 장소에서는 공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비장소에서 공간은 그저 상투성과 단절감만 느끼게 한다. ‘장소’는 없고 오로지 필요에 의해 생긴 기능적 ‘비장소’들만 즐비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삶이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며 쫓기게 된다. 그러니까 어느 도시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속에는 ‘세렌디퍼티’1)와 ‘장소’의 화학적 결합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시의 공적인 ‘장소’가 기억과 상상의 연금술을 통해 나만의 장소, 나의 삶에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2)
이처럼 사회학자 정수복의 <파리의 장소들>은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공간을 ‘장소(place)’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포(老鋪)라고 부르는 백 년 가게들도 누군가의 장소일 것이다.
그렇기에 파리고등응용예술대학 학생이었던 쑨이멍[孫藝萌]이 일러스트레이션 과제로 그렸던, 파리 백 년 가게들에 대한 책인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에 손이 갔다. 그녀는 가게들을 찾아 다니며 가게의 역사, 가게 사람들의 이야기, 상품에 대해 취재하고 이를 일러스트와 함께 짧은 글로 옮겼다. 다만 50곳이라는 많은 장소를 한정된 지면에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정보의 양이 아쉽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백년 가게’라는 이름의, 추억과 이야기가 얽힌 장소들
노포(老鋪) 혹은 백년 가게라고 하면 흔히 대(代)를 이어 운영되는 오래된 식당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대장간처럼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사라진 수공업 가게들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식당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요식업이 아닌 다른 업종의 백년 가게들도 소개하고 있는 것이 기껍다.
요식업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맛을 파는 가게’ 17곳을 제외하며 ‘특별한 기념품이 필요할 때 갈만한 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파리 시민이 아닌 이상, 우리는 파리에 출장처럼 업무상으로 방문하거나 관광하기 위해 방문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기념품 혹은 선물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향초(트루등), 향수(불리, 오리자 엘 로그랑, 화장품(데따이유), 파이프(아 라 피프 뒤 노르), 자수(아니 부케) 등에 시선이 가게 된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는, 자타공인의 ‘책벌레’라면 ‘문화가 가득한 가게’에서 소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골 가게이자 문학에 대한 토론의 장이 펼쳐졌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7세기 이후 문헌자료의 벼룩시장이라는 라 갈캉트, 고전 만화책과 잡지가 가득한 뤼테스, 희귀 중고서적을 사고파는 리브레리 주솜 등에 군침이 흐를 것이다.
라 갈캉트(La Galcante)

출처: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pp. 76~77
혹시 현지인의 일상이 궁금한 이라면, ‘파리 시민의 일상이 있는 가게’에서 소개하는 꽃집(라숌), 약국(파르마시 생토노레, 오루즈), 주방용품 가게(E. 드일르랑), 공구점(게냐르 미용), 담배 가게(아 라 시베트) 등에 관심이 갈 수도 있다.
파르마시 생토노레(Pharmacie Saint-Honore)

출처: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pp. 106~107
어쩌면 이런 백년 가게들이야말로, 흔히 ‘파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예술과 문화의 1번지에 걸맞은 관광명소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진정한 파리의 장소들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해당 장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 이에게는 추억을 되새겨줄 좋은 매개체가 될 듯하다. 또 파리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파리만의 감성을 느껴보고 싶은 이에게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다만, 2%부족한 정보 때문인지, 파리 관광을 위해서라면 이 책 이외에 여행가이드북과 같은 다른 책도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 세렌디퍼티(serendipity): 완전하게 우연히, 예상치 않게, 기분 좋은 발견을 하는 재능
2) 정수복, <파리의 장소들>, (문학과지성사, 2010) , pp.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