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리커버) 대산세계문학총서 1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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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이하 ‘보들레르’)!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미술비평가 중 하나이자 ‘현대시의 시조’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악마의 옹호를 자처한 반항적인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 바로 이 책,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다. 그의 이미지만으로는 악마주의적이거나 다소 외설적인 시(詩)들이 가득 찰 것 같지만, 실제 <악의 꽃>을 펼치면, 반항적인, 젊은 락스타의 노래 같은 느낌을 주는 시(詩)가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알바트로스(L’ALBATROS)>라는 시(詩)가 있다.

알바트로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엽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 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p. 47]


우리가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르는, 날개를 펼치면 가장 큰 새인 알바트로스를 제목으로 하는 이 시(詩)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과 공존(共存)하려는 동양이라면 이렇게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그저 보고 즐겼을 텐데자연을 정복(征服)의 대상으로 여기는 서양이기에 선원들은 그 새를 잡아 갑판에 내려놓는다. 시(詩)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날개를 꺾거나 해서 알바트로스가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보들레르는 이 무기력해진 알바트로스에게 자신을 투영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라고 한탄한 것이 아닐까? 혹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번뜩이는 재능을 가진 자신이 대중의, 문단의 평가에 의해 날개가 꺾일 미래를 어렴풋이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 사창가를 드나들다가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전 성병에 걸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방종한 품행 때문에 그의 작품에도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악의 꽃>에서 삭제된 시(詩)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출간으로 공중도덕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벌금과 함께 시(詩) 여섯 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삭제된 시(詩) 중 하나인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A CELLE QUI EST TROP GAIE)”를 보면, 굳이 삭제해야 할 만큼 음란하고 저속한 시(詩)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


그대 머리, 그대 몸짓, 그리고 그대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처럼 아름답다;

청명한 하늘에 신선한 바람처럼

그대 얼굴엔 웃음이 노닌다.


그대 곁을 스쳐가는 침울한 행인도

그대의 팔과 어깨로부터

빛처럼 솟아나는

그 건강에 황홀해진다.


그대 옷차림에 뿌려놓은

요란스런 색깔은

시인의 마음에

꽃들의 발레 같은 환영을 던진다.


그 야단스런 옷들은

얼룩덜룩한 그대 마음의 표상인가;

나를 황홀하게 하는 쾌활한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미워한다, 그대 사랑하는 만큼!


때로 아름다운 정원에서

무기력을 떨치지 못할 때면,

나는 태양이, 빈정거리듯,

내 가슴을 찢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봄과 신록이

내 마음에 그토록 창피를 주었기에,

나는 한 송이 꽃에

[자연]의 교만함을 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날 밤

쾌락의 시간이 울릴 때,

보석 같은 그대 몸 곁으로

겁보처럼 살그머니 기어가,


쾌활한 그대 살을 벌주고파

내맡긴 그대 젖퉁이를 멍들게 하고파,

그대의 놀란 옆구리에

움푹한 커다란 상처를 내어주고파,


그리고 아 현기증 나는 쾌감이여!

더욱 눈부시고 더욱 아름다운

그 새 입술을 통해, 누이여,

그대에게 내 독을 부어 넣고 싶어라! [pp. 351~352]


아무리 읽어봐도 왜 삭제되는, 일종의 기록말살의 판결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여성의 동성애를 노래하는 “레스포스(LESBOS)”나 “천벌받은 여인들(FEMMES DAMNEES)”은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풍기문란죄의 적용을 납득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詩)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그가 <악마의 연도(煉禱)(LES LITANIES DE SATAN)>에서 언급한 악마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악마와 달리 하나님에 의해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 소위 ‘루시퍼(Lucifer)’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B.C. 183)처럼 핍박 받는 영웅의 이미지도 살짝 곁들인.
어쩌면 악마를 그렇게 묘사했기에 악마를 옹호했다는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분석하기에는 난해하지만, 가볍게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보들레르에 대한 선입견은 버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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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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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은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 <으제니 그랑제(Eugenie Grandet), <고리오 영감(Le Pere Goriot)> 등으로 유명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는 이 책,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1831)은 사실주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소유자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만, 그 때마다 소유자의 목숨도 조금씩 사라진다는 나귀 가죽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원제목을 고려하면, ‘나귀 가죽’이 아닌 다른 이름, 예컨대 ‘괴로움의 가죽’이 더 적절한 번역일지도 모른다. 불어사전을 펼쳐보면, ‘peau’은 ‘가죽, 피부’라는 뜻을, ‘chagrin’은 ‘괴로움, 슬픔, 신경질, 우울’이라는 뜻을 각각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제목이 프랑스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래서 번역자의 해설을 펼쳐보니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chagrin’은 가죽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로써

~ 중략 ~

(소설 속에서 가죽은 대개 la peau de chagrin이라고 불리지만 그냥 le chagrin혹은 le peau라고도 불린다), 엄밀히 말하면 동어 반복인 la peau de chagrin이라는 표현은 작가 발자크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가죽을 가리키는 chagrin이라는 단어에 그것과 철자가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슬픔, 번민’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단어를 겹치려 한 데 있다. [pp. 444~445]


라고 되어 있다. 마치 다이허우잉[戴厚英, 1938~1996]의 <사람아 아, 사람아! [人啊, 人!]>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쨌든, 번역자가 원제목을 직역하지는 않았지만,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은 이 책에 정말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가난과 절망으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젊은 ‘라파엘’이 자살하려다 우연히 들어간 골동품 상점에서 늙은 주인으로부터 ‘나귀 가죽’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 혹은 행운 총량의 법칙

어디선가 사람은 각자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이를 초과해서 누릴 경우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주어온 옷을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하루 건너 끼니를 때우면서 60살까지 살 운을 타고난 아이가 만석지기 양반 가문의 장손(長孫)으로 태어나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바람에 그 운을 다 써서 돌잔치에서 급사(急死)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나귀 가죽’은 이런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을 나귀 가죽을 매개로 유형화했다고 느껴진다.

조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강철의 연금술사>(2003)의 유명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떠올려도 된다.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알폰스 엘릭(Alphonse Elric)은


사람은 그 무언가의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연금술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라고 말한다. ‘나귀 가죽’처럼 욕망의 실현을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것 또한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만약 당신에게 누군가 이 소설에 나오는 ‘나귀 가죽’을 소유할 기회를 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이 ‘나귀 가죽’에 새겨진 


만일 그대가 나를 소유하면 그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신이

그렇게 원하셨느니라.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의 목숨이 여기 들어 있다. 매번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가 살날도 줄어들 것이다.

나를 가지길 원하는가?

가져라. 신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아멘! [p.70]


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읽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는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귀 가죽’의 소유자가 될 기회를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당장의 욕망에 눈이 뒤집혀서 그런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1/456의 확률로 456억 원을 받게 되는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보다 더 명확하게 원하는 것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지는, ‘나귀 가죽’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욕망과 수명의 밸런스를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나귀 가죽’을 획득하는 것은 손쉽게 성공적인 삶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문제다. 거의 성인(聖人)급으로 절제해야만 욕망과 수명의 균형을 이루면서 ‘삶’이라는 담장 위를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한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면 자신의 ‘나귀 가죽’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있을지 보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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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econd Hometown 마이 세컨드 홈타운
오지윤 지음 / 카멜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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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econd Hometown]의 목차를 펼치면,

살아 보기
|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관찰하기
| 시즈오카, 오사카, 교토, 도쿄
춤추기
| 다딩베시, 카트만두, 히말라야, 포카라, 치트완
기억하기
| 빈, 파리, 두브로브니크, 니스, 로마, 상트페테르부르크, 포틀랜드

라고 되어 있다. 이것만 보면, 이 책이 열거된 19개의 장소에 대한 소개 혹은 경험을 살아보기, 관찰하기, 춤추기, 기억하기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언급된 장소가 많다는 느낌은 있지만, 여행지에서 일정기간 머물며 살아보고, 여행지를 관찰하고, 여행지를 기억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춤추기’라니. 뭔가 생뚱맞은 카테고리가 하나 끼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다딩 베시(Dhading Besi), 카트만두(Kathmandu, 네팔의 수도), 히말라야, 포카라(Pokhara), 치트완(Chitwan) 국립공원에서 전통 춤을 배웠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래서 ‘춤추기’ 파트를 제일 먼저 펼쳐봤다.

의외였다. 춤추기 파트에 언급된, 네팔의 지명들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 그리고 에피소드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저자가 한국어 교사로 머문 디딩 베시 인근의 고아원에서의 경험과 히말라야 등반의 경험 등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한국에 일하러 온 네팔 젊은이들의 허망한 죽음과 자신의 한국어 제자가 한국에 오지 않아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가 덧붙여진다.

우리가 지낼 고아원은 다딩베시라는 도시의 중심지로부터 40분 정도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달 동안 먹고 자며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기로 했고, 동네에 사는 청년들이 고아원으로 와서 한국어 강의를 듣기로 했다. 모두 한국에서 일하는 데 관심 있는 청년들이었다. [p. 148]

나는 어쩌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 젊은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똥통에 빠져 죽을 수도,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대한민국에서의 노동은 힘들 거란 것을. 레건이 자문자답한 것처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고 이 나라에 왔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오늘도 의욕 넘치는 눈빛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겠지.
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결국 단 한 명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p. 159]

그래서일까? 해당 부분을 다 읽을 때까지 왜 ‘춤추기’라는 파트 제목을 정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마을이자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의 결혼식장에서 춤을 춘 경험이 그나마 ‘춤추기’와 연관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나중에 한번 더 읽더라도 ‘춤추기’라는 파트 제목 설정에 대한 의문을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의문은 마음 한 구석에 몰아놓고, 책장을 다시 펼쳐 처음 파트인 ‘살아보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 파트는 퇴사 후 친구 집에서 한 달을 얹혀살며 경험한 베를린(Berlin)에서의 에피소드가 중심이었다. 음? 또 한 달? 혹시 이 책의 파트들이 특정 지역에서 한달 살기였나?
베를린에서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는 듯 했다.

- 베를린 살면서 좋은 게 뭐야. 자랑 좀 해 봐.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그에게 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말했다.
- 지금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서울에서는 사치였어. 
창 밖으로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일까. 서울에서는 벽이나 다른 아파트가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 돈이 별로 없어도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며 살 수 있어서 좋아. 그것만으로도 여기가 좋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어. 삼십 대 중반이 되니까 친구들을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가 부동산이며 주식이며 하는 것들로 정해졌던 것 같아.
 - 그건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일 것 같아.
나는 왠지 방어적으로 답했다.
- 맞아. 여기는 
평생 세입자로 살아도 주거 안정성이 보장돼. 죽을 때까지 집을 소유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비교하고 걱정하는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지. 삶의 스펙트럼도 넓고 친구들의 스펙트럼도 넓어. 플리마켓에서 그림을 그리며 사는 친구도 있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도 있어. 어떤 나이에 어느 만큼 경제력을 갖춰야 한다는 기준이 없어. 다들 격 없이 대화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달까.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pp. 23~26]

하지만, 그건 상대적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만난 나우엘과의 에피소드였다. 세계 어디서든 엄마의 삶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주었다.

- 그래도 독일은 엄마들이 살지 좋이 않아? 육아휴직도 엄청 길 것 같은데.
- 육아휴직이야 몇 개월 주긴 하지. 그럼 뭐 해? 복직한 후가 문제야. 독일은 어린이집이 3시면 문을 닫아. 그럼 우리는 어쩌지? 3시에 퇴근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지. 결국에는 
아이를 가지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는 여자들이 생기는 거야. 사회가 여자들의 경력 단절을 조장하고 있어. [p. 76]

피천득의 <인연>을 떠오르게 하는,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해 갈까’라는 에피소드도 흥미로웠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의 교환학생 시절 만난 라트비아인 친구 ‘우나’와 10년째 인연을 이어 가며 세 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10년 사이에 우나는 흡연도, 맥도날드도, 클럽도, 술도. 탄산음료도, 카페인도 끊고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피천득과 아사꼬의 만남과는 달리 저자와 우나의 만남은 더 이어질 것 같아 흥미로웠다. 다음 만남에서 우나는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세 번째로 펼친 ‘관찰하기’ 파트는 부모님의 효도여행,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인스타그램 친구이자 브런치북 대상 동기인 이예은 작가와의 만남 얘기를 두 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펼친 ‘기억하기’ 파트는 조금 의외였다. 각각 다른 신문에 실린, 오늘 날짜의 4컷 만화들을 모은 듯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잘츠부르크 유학시절 친구인 리사를 만나기 위해 탄, 빈(Wien)에 가는 열차의 옆자리에 앉은 ‘파독(派獨) 간호사’가 언급한  ‘두 번째 고향’이야기나

여기가 두 번째 고향이네. 
작은 지구에 살면서 고향을 하나 더 만드는 건 너무 좋은 일 같아요. 그리워할 수 있고 언제나 돌아갈 곳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건 행운이에요. [p. 227]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로마(Roma)에서 관광 가이드를 거쳐 개발자로 일하는 대학 동기 보연과의 만남을 얘기하기도 하며 포틀랜드(Portland)의 카페 코아바의 비효율적인 아니 돈에 구애 받지 않는 널찍한 공간 구성과 어느 호프집의 넉넉한 커피 인심도 부러운 듯이 말한다.

크게 독일 여행, 일본 여행, 네팔 여행에서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살아보기, 관찰하기, 춤추기 파트와는 달리 서로 다른 장소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저 엮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학창시절 동아리 방에 놓여 있는 ‘날적이’처럼 통일성이 약한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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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 - 공생하고 공격하며 공진화해 온 인류와 미생물의 미래 묻고 답하다 6
고관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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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역사를 바꾸다 


“2장 최초의 민주주의를 세균이 무너뜨렸다고?”는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원전 5세기 중반 도시국가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 강대국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격퇴했다. 하지만 이후 지중해의 패자가 된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이에 반발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테네는 몰락한다. 이 몰락에는 단순한 전쟁에서의 패배 외에 지도자인 페리클레스(Perikles)를 비롯한 시민 1/3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장티푸스 혹은 염병(染病)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아테네 해군의 노잡이로 투입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 4등급의 무산자(無産者)인 테테스(thetes)의 지지에 기반을 둔 중우정치(衆愚政治)도 큰 몫을 했다. 만약, 살모넬라 엔테리카(Salmonella enterica)에 의한 장티푸스가 번지지 않았더라면 전통적인 명문가 출신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주체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페리클레스 같은 지도층이 계속해서 아테네를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소한 구실로 대승을 거둔 해군 수뇌부를 몰살시키는 멍청한 결정을 내릴 중우정치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패배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3장에서는 대두창바이러스(Variola major)에 의한 두창(痘瘡) 혹은 마마(
媽媽)로 불리는 천연두가 유럽인에 의해 유입되어 이에 대한 면역이 없던 아스테카 왕국과 잉카 제국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쳤음을 얘기한다. 4장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대규모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근무하면서 미코박테리움 투베르쿨로시스(Mycobacterium tuberculosis) 혹은 결핵균에 의한 결핵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5장에서는 콜레라균(Vibrio cholera)이 세계화에 따라 수 차례 팬데믹을 발생시켰다는 사실과 최초의 역학조사를 통해 나쁜 공기가 아닌 오염된 물을 통해 콜레라가 전염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도시 위생 개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6장에서는 H1N1 A형 독감 바이러스로 인해 발병한 소위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언급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2장에서 6장까지 어떤 미생물이 원인이 된 질병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와 그 미생물을 발견하는 과정 등을 얘기한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존

“7장 포스트 항생제 시대, 미생물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부터 앞 부분과 다소 결을 달리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항생제의 대표로 인식된 페니실린이 상징하는 세균 박멸은 어떻게 보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서양의 시각이 담겨있다. 하지만 한때 효율적이었던 항생제의 사용은 내성(耐性)문제가 불거지면서 주춤하고 있다.
 

항생제 내성으로 기존의 항생제가 쓸모 없어지는(이미 쓸모 없어진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메커니즘을 갖는 항생제 개발의 어려움, 비용과 수익성의 문제, 임상시험의 복잡성, 내성 문제 등으로 많은 제약회사가 항생제 개발에서 발을 빼는 실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흔한 세균 감염에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포스트 항생제 시대(Post-antibiotic era)’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의 미래를 세균에 저당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벌써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p. 17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인체에 존재하는 미생물의 집단적 유전체인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조현병(調絃病), 자폐스펙트럼장애(ASD), 파킨슨병 등 다양한 병이 마이크로바이옴의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생물은 지구에 최초로 나타난 생명체이면서, 외치1)가 그랬듯 인류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함께해왔다. 마이크로바이옴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면서 단순히 함께해온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은 물론 정신세계에까지 몸 속 미생물의 영향이 뻗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생물은 부단히 인간을 바꿔왔다. 어쩌면 인간은 미생물에 종속된 존재가 아닐까? [pp. 223~224]


심지어 위의 글을 읽다 보면, 인간의 성격이나 건강을 미생물이 좌우하는, 나아가 인간이 숙주라는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미생물은 미생물의 일을, 인간은 인간의 일을 각각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단지, 인간이 그것에 선악을, 이로움과 해로움을 부여하거나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미생물이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때문이다. 증식이라는 미생물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존재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생물의 목적을 인간 역사에서 파괴적인 역할로 전환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 중략 ~

기회주의적 병원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즉 인체의 방어 능력이 약해졌을 때만 병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병원체가 기회주의적이라는 말은 많은 미생물이 인체 내에서 대체로 중립적이라는 뜻이다. 인간 면역력은 완전하지 않기에 감염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또한 도움이 되는 미생물도 적지 않다. 물론 중립적인 미생물의 다양한 특성을 인간이 이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손에 달렸다. [pp. 247~248]


덧붙이자면, 이런 
마이크로바이옴 연구에 자연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동양의 시각이 담겼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 우리는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을 질병을 일으키는 못된 녀석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해로운 세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미생물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뿐만 아니라, 해롭다거나 이롭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미생물을 나눌 수 없으며, 대신 미생물 군집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미국 뉴욕 대학의 마틴 블레이저(Martin Blaser)가 인간 진화의 운명이 우리의 마이크로바이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듯이, 미생물은 과거뿐 아니라 곧 현재가 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미생물을 이용한 질병 치료로 나아가고 있다. 인류가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질병에서의 해방은 어쩌면 미생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pp. 243~244]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외치(Otzi): 5,300년 전(청동기 시대)에 자연 냉동된 성인 남성의 미라. ‘아이스맨(Ice man)’이라는 별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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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50
카를로 콜로디 지음, 아틸리오 무시노 그림,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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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권리와 책임의 다른 이름

우리에게 ‘피노키오’로 기억되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이하 ‘피노키오의 모험’>는 흔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우화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읽은 <피노키오의 모험>은 어린 시절과 다르게 다가왔다.

꼭두각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끈’과 ‘조종자’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어쩌면 이것이 꼭두각시로 만들어진 존재의 숙명일 것이다. 그런데 피노키오는 다른 꼭두각시 인형과 달리 기적적으로 스스로 말할 줄 알고, 움직일 줄 알고,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로 태어났다. 아니,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지기 전, 늙은 목수 안토니오 혹은 버찌 할아버지에게 나무토막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래서 피노키오는 마치 인간처럼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태초에 자유의지가 부여된 아담과 이브가 신이 정한 길을 벗어나 뱀의 유혹에 빠진 것처럼 피노키오도 다양한 유혹에 넘어간다. 물론 자유의지로 진흙탕에 뛰어들었으니 그 대가도 아담과 이브처럼 당연히 치러야 했다.

이 책, <피노키오의 모험>은 36개의 에피소드로 그 과정을 담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피노키오라는 주인공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고 인간이 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1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당대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풍자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우리가 단순히 동화로 인식하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원래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15번째 에피소드로 끝날 예정
이었다고 한다.
15번째 에피소드 마지막은


피노키오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두 다리를 쭉 뻗었어요. 그리고는 한 번 크게 버둥거리더니 굳어 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답니다. [pp. 99~100]


로 끝나는데, 누가 봐도 이것은 피노키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결말이 나오게 된 것은 <피노키오의 모험>이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 1826~1890)가 살던,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피노키오부터 ‘이탈리아인’하면 떠올리는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피노키오는 아직 ‘이탈리아인’이라는 소속감이 갖춰지지 않은, 갓 생겨난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 1861~1946)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새롭게 열강이 되었다는 ‘뽕’에 취해 자제할 줄 모르는 이탈리아 사회와 피노키오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판사 앞에서 자신이 당한 몹쓸 사기 사건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어요. 도둑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법의 심판을 요청했어요.

판사는 아주 친절하게 피노키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어요. 피노키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고, 피노키오를 가엽게 생각하고 동정을 표했지요. 피노키오가 설명을 다 끝내자 판사는 손을 뻗어 벨을 눌렀어요.

벨 소리에 곧 병정 옷을 입은 불독 두 마리가 나타났어요.

저 불쌍한 악마는 금화 네 닢을 도둑맞았다. 그러니 저자를 잡아서 즉시 감옥에 가두어라.” [pp. 130~131]


에서는 판사가 사기와 강도 행위를 눈감아 주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둔다. 이 에피소드가 사법의 집행자인 판사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일단 처벌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풍자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사법의 부정을 상징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저자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가 어린이들이 평온, 무사하게 자라나기 힘든, 험난한 사회라고 환경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바보 잡기 도시를 다스리는 젊은 황제가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자 큰 잔치를 베풀었던 거예요. 조명을 환히 밝히고, 폭죽을 터트리고, 경마와 커다란 앞바퀴가 달린 자전거 경주 대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황제는 승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감옥 문을 열고 도둑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명령했어요.

~ 중략 ~

피노키오가 말했어요.

죄송하지만 저도 도둑이에요.”

“그렇다면 충분히 자격이 되지.”

교도관은 정중하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피노키오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그리고는 감옥 문을 열어 피노키오를 내보내 주었답니다. [pp. 132~133]


에서 보이는 모습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된 이후의 남부 이탈리아 사회를 풍자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프랑스에 뿌리를 둔, 북부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가 주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통일운동의 지지자인 지주층을 의식, 농민들이 원한 토지개혁 등 사회 구조 개혁은 외면하면서도 통일 자금 확보를 위해 곡물세 등을 부과했다고 한다. 이에 반발하여 남부에서는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브리간타조(Brigantaggio)’라는 게릴라 반란군을 통한 저항이 발생했다. 즉, 이 에피소드는 이탈리아 통일과 이에 따른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게릴라 반란군의 발생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이를 풍자한 것이 아닐까?

이처럼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어린이들이 평안 무사하게 자라기 힘든 환경으로 보았기에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도 피노키오가 죽는 새드 엔딩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를로 콜로디는 끝내 피노키오를 부활시켜야 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사건>(1894)에서 셜록 홈즈를 죽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처럼 독자들의 요청으로 주인공을 부활시킨 셈이다. 그런데 카를로 콜로디의 경우, 피노키오를 부활시키면서 유령이 푸른 머리의 요정으로 변화
하는 등 동화적 요소가 향신료처럼 뿌려지는 변화가 발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은 <피노키오의 모험>을 단순히 동화로 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1940)의 역할이 크다. 그에 의해 <피노키오의 모험>이 가지고 있던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이 거세되었으니까.



꼭두각시가 아닌 인간, 피노키오의 입장에서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분명히 어떤 버전을 선택해도 새롭게 만들어진 결말은 똑같다. 요정이 꼭두각시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활기찬 모습의 소년으로 바꾸어 준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해피 엔딩일까?
이야기 속의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인간이 된 피노키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피노키오는 다섯 달 넘게 매일 아침 해 뜨기 전에 일어났어요.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고, 아빠의 건강에 아주 좋은 우유 한 잔을 벌어 오기 위해서였지요. 이것만이 아니었어요. 남은 시간에 갈대로 광주리와 빵 바구니 엮는 법을 배웠고, 바구니를 만들어 번 돈을 아끼고 아껴서 생활비로 썼어요. [p. 296]


꼭두각시 시절에 했던 노동을 반복하는, 피곤한 노동자의 삶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물론 요정이 은화 40개를 금화 40개로 바꿔주었지만, 5개월 정도 노동하고 은화 40개를 저축할 수 있었다면, 금화 40개도 신세를 바꿔줄 만큼 큰 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피노키오의 입장에서 꼭두각시 인형에서 인간으로의 신분상승(?)이 보상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왠지 카카오99% 초콜릿을 한 입 머금은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1) 원래 결말은 피노키오가 여러 잘못을 저지르다 결국 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것이었으나, 반응이 너무 좋았기에 편집자의 요구로 피노키오가 파란 요정의 도움을 받아 되살아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15번째 에피소드에서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피노키오에게 “나도 죽었어”, “ 날 실어 갈 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6번째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알아 둘 필요가 있겠네요.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천 년 전부터 그 숲에 살고 있는 아주 마음씨 고운 요정이었어요.)라는 추가 해설이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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