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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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구분이 의미 있을까?

 

저자는 <작별인사>가 개작(改作)을 거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화두(話頭)는 서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서로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휴먼매터스 랩에서 휴먼매터스의 창립 멤버인 최진수박사의 아들로 살아오던 ‘철이’는 비 오는 날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나갔다가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인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pp. 68~69]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가 기계인 걸까? 육체의 몇 %까지 인공 기기로 교체해야 기계일까? ‘뇌’만 남아있으면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의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육체의 100%가 기계로 되어 있어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작별인사>에 배경이 되는 시대라면 어디까지 ‘인간’이라고. 또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중략 ~

예를 들어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민이는 예전의 그 민이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팔도 교체할 수 있고, 다리도 교체할 수 있고, 몸의 모든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은 '나'가 아닌 거잖아. 그게 없어도 나는 나일까?

그렇지. 뇌가 그 경계일 거야. 의식은 거기서 생겨나니까.” [pp. 200~201]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는 겉보기에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개체의 팔을 뽑아 버린다. 분명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휴머노이드가 아닌 인간일 경우 이런 구분방법은 치명적인 부상이 된다. 따라서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는 ‘기계’, 아니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기계’를 그리는 작품은 이 작품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다움’에 대해 논의하는 작품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의 단편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와는 다소 다르지만 외관상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리플리컨트를 다루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네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 같은 거 말야.”

아, 음악. 음악이 있어. 나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정말 말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리고 보니 수용소에 잡혀올 때도 소광장에서 하이든을 듣고 있었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마음은 그냥 안에 있어요.”

민이가 내 말을 잘랐다.

이런 걸 비유라고 하는 거야. 마음은 물론 내 안에 있지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야. 나는 집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떠올리면서 수용소의 끔찍한 날들을 견뎠어. 내가 기계라면 왜 음악 같은 것을 듣고 감정이 변할까? 음악은 기계에겐 아무 의미도 정보도 없는 소음일 뿐인데나는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를 보다가 괴로워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야 [p. 123]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태를 기억하는가? 가수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대니얼 선웅 리(Daniel Seon Woong Lee)’임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을 믿지 않는 ‘타진요’ 같은 이들이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

 

 

영생(永生), 그 덧없음에 대하여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잡혀간 수용소에서 ‘철이’는 복제인간 ‘선이’와 버림받은 휴머노이드 ‘민이’를 만난다. 그들은 철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탈출을 시도하다가 민이의 왼쪽 팔목만 로봇 개에게 잃고 다시 잡혀왔다.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민병대의 습격으로 수용소가 혼란해지자 철이, 선이, 민이는 탈출한다. 휴먼매터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민이는 살해되고, 철이와 선이는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 달마를 만난다. 철이는 달마를 통해 자신이 휴머노이드임을 인지하고,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나는 휴먼매터스 밖으로 나와 진짜 세상을 보았다. 민이 같은 휴머노이드가 존재하는 걸 이미 알아버렸고, 선이처럼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클론과 친구가 되었다. 휴먼매터스는 내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혼란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언제나 문제의 일부였다. 아빠가 나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행해온 자랑스러운 프로젝트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그가 정확히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게 정말 그 휴머노이드를 위해서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생산하기 위해 선이와 같은 클론을 배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는 휴먼매터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pp. 212~213]

 

하지만 누구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개별성이 보존된다면, 레이먼드 F. 존스(Raymond F. Jones, 1915~1994)의SF소설 <합성 뇌의 반란(The Cybernetic Brains)>에서 ‘뇌’가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름만 영생(永生)이지, 사실상 종신노예가 아닌가.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단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p. 276]

 

영생(永生)은 아니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만 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설정된 드래곤의 경우, 긴 수명을 무게에 짓눌려 다른 생명체의 모습으로 유희를 떠나거나 장시간의 수면에 든다. 육신이 있는 존재도 그러할진대, 육체 없이 의식만 있는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육체가 없다면 쉴 수도 없을 텐데……. 여기에 망각도 할 수 없다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드래곤 ‘크라드메서’처럼 미치거나 자살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SF소설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를 보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방식은 개별성이나 독자성을 점차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소설에서 인류는 점차 개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기존의 인류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種)으로 변한 끝에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의 일부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 소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도, 휴머노이드도 대부분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개별성 혹은 독자성과의 작별인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는 종(種)이 개체성을 상실하여 ‘종(種)’으로서 소멸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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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호질.광문전.임호은전 - 한국고전문학100 11
김기동 외 지음 / 서문당 / 198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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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자전(廣文者傳)> 혹은 <광문전(廣文傳)>(이하 ‘광문자전’)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번쯤 제목은 들어보았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단편소설이다. 그냥 읽으면 광문(廣文)이라는 거지의 의리 있는 행동을 부각시킨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광문이라는 비렁뱅이를 통해 유교적 관습에 얽매인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군자(君子)를 지향한다. 바로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꼽은 ‘군자(君子)’말이다. 하지만 영남학파의 시초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소총(홍유손(洪裕孫, 1431~1529), 생육신의 하나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 많은 문인들은 도가적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지향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죽림칠현을 지향하는 것은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문자전>에 언급된 광문 혹은 달문(達文)의 행적을 보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물론 그가 비렁뱅이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해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심지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出家)한 스님 조차도 또 다른 사회에 얽매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병든 거지 아이를 위해 구걸했지만 살해했다고 의심받아 매를 맞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았고, 약방 부자가 도둑질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도 묵묵히 지낸 광문의 행적은 독특하다. 마치 <장자>에서 말한,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編)에 언급된 송영자(宋榮子)를 보면,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氣)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뿐이다그는 세상 일을 좇아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중략 ~

그래서 “지인(至人)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에게는 공적(功績)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1)

 

그렇기에 광문의 평가가 가장 공정(公正)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장안에 이름난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노래와 춤을 잘해도 광문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지 않으면 그 기생은 한 푼어치의 가치도 될 수 없었다2)고 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궁궐 안 별감(別監)들이며 부마(駙馬)들 또는 그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아갔다. 술상을 차려 놓은 가운데 장고 거문고 등에 맞추어 춤추기를 부탁하며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자꾸 미루면서 춤출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광문은 밤에 이들이 노는 집 밑에 다다라 머뭇거리다가 방에 뛰어 들어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은 비록 다 떨어진 옷을 입었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중략 ~

술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눈짓을 하며 광문을 몰아내 쫓아 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더욱 다가앉으면서 무릎을 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운심은 일어서더니 옷을 고쳐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3)

 

이렇게 광문은 남의 권위를 빌리려는 가짜들과 달리 당당하게 ‘나’를 내세우는 진짜였기에 운심도 그를 위해 기꺼이 칼춤을 춘 것이다. 광문이 진짜니까 그녀도 진짜를 대접한 셈이다.

 

<광문자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를 보면, 광문의 명성을 빌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척 하는 거지 아이와 그의 동생인 척하는 요망한 자가 결국 사형되거나 귀양을 간 이야기가 적혀 있다. 거짓으로 남의 인생을 사는 자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남의 인생, 거짓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기에 쉬운 일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잠깐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나마 맛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재능을 헛되게 낭비하게 만든 셈이다.

 

<광문자전>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에서 보이는 광문처럼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장자>에서 말하는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의 마지막을 저자는 “그 뒤에 광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낸 것 같다. 아마도 광문과 같은 이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1) 장주,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1993), pp. 33~34

2) 김기동, 전규태 엮음, <양반전, 호질, 광문전, 임호은전>, (서문당, 1984), p. 33

3) 앞의 책,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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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 곽재식의 기후 시민 수업
곽재식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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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사회의 약자를 괴롭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지구를 멸망시키는 위기인 것처럼 말하고, 우리가 그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여 무언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 결과 무의식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대홍수 전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일까?

 

지구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온실효과를 겪어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출현하기도 전의 먼 옛날부터 지구는 온실효과의 영향을 받는 온실 속 같은 곳이었다. 지금 온실효과와 기후변화가 문제인 것은 그 효과의 정도가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p. 32]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후 위기라는 것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0.03%에서 0.04%로 짙어짐에 따라 부가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사람들은 0.03퍼센트이던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을 0.04퍼센트 정도 올린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광합성을 하는 세균들은 긴 세월에 걸쳐 0퍼센트에 가깝던 산소 기체 농도를 20퍼센트 이상으로 높여버렸다. 지구의 생명체들과 자연은 이런 일을 벌였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46억 년 지구 역사 전체에서 요즘의 기후변화는 미세한 변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p. 76]

 

결국 기후 위기는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그래서 저자도 이 책의 제목을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라고 정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로는 고작 사람, 그것도 사회적 약자의 삶을 힘겹게 만들 뿐이다.

 

사람이 뿜어내는 온실 기체가 지구를 통째로 금성처럼 바꾸어놓기는 부족하겠지만당장 지구에 사는 사람 자신의 삶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하다. [p. 37]

 

 

기후 위기’ 혹은 ‘지구온난화’라는 슬로건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위기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비극을 피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자’와 같은 당연한 얘기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도덕 교과서가 없어서, 도덕 교육을 받지 않아서 도덕적이지 않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에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의 기후위기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유럽의 선진국은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풍족하게 생활하면서도 저절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기후위기로 타격을 받는 개발도상국은 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에 더 적은 연료와 전기를 사용하면서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더 나은 삶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다.

심지어 글로벌 기업은 본사 사무실은 선진국에, 생산공장은 개발도상국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당연히 생산공장이 있는 개발도상국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단순히 이산화탄소 발생량만 따져 규제를 하면, 지구온난화 극복을 위해 더 가난한 사람들이 더 희생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기후위기나 지구온난화는 개발도상국에서 돈을 걷어 선진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수단처럼 보인다.

 

 

기후 위기를 벗어나려면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지 않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수력, 태양광과 풍력, 지열(地熱)과 조류(潮流)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전기화(電氣化)가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전기화되어 있다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을 쉽게 줄일 수 있다.

보다 공격적인 방법으로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탄소 흡수 혹은 탄소 포집(捕執)도 있다. 문제는 아직까지는 이산화탄소를 모으더라도 그 비용이 많이 들고, 수집된 이산화탄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현실적인 것이 식목사업이다. 비록 많은 공간과 오랜 시간이 요구되지만, 식목사업은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도로 빨아들일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

 

지금까지 기후변화라고 하면, 대체로 미래를 내다보는 공공기관이 개인과 사기업을 이끌고 통제하는 일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가 엄격한 단속반을 만들어 기후변화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물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거나, 공장에 어떤 시설을 설치하라는 규정을 만들고 엄한 처벌 조치를 통해 그것을 따르도록 시키거나, 혹은 기후변화와 관련 있는 어떤 일에 세금을 매겨 돈을 걷는 등의 일이 정부의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면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는 권한이 강해지게 된다.

중략 ~

그러나 기후변화 적응 기술에 무게를 실으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만큼이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진다. [pp. 384~385]

 

최근 유엔환경계획(UNEP) 주도로 개최된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2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2)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회의에서 노르웨이와 르완다 등은 플라스틱 생산 제한과 플라스틱 제조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규제에,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은 플라스틱 폐기물과 플라스틱 재활용에 각각 초점을 두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나프타를 원재료로 하는 플라스틱은 개발 초창기에는 기후변화를 줄이는 방향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플라스틱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나프타도 휘발유처럼 태워 연료로 사용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플라스틱을 만든 제품은 가치가 낮고 가짜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아끼지 않고 쉽게 버린다는 점이다.

 

비닐봉지 대신에 종이봉투를 사용한다면, 그 종이를 만들기 위해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를 숲에서 잘라내야 한다. <애틀랜틱>의 2014년 10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장을 보면 1년간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7.52킬로그램 가량이지만, 종이봉투를 사용하면 훨씬 많은 44.74킬로그램 가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한다. 비닐봉지보다 종이봉투가 자연적인 것 같아도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양은 오히려 여섯 배 가까이 많다는 이야기다. [p. 418]

 

여러 번 재사용할 수 있는 면으로 만든 장바구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닐봉지는 워낙 만드는 데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기 때문에, 면으로 만든 가방을 하나 만들 정도면 비닐봉지 131개 만들 수 있다이 계산은 영국환경청의 2011년 발표인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면 가방을 131번 정도는 꾸준히 장바구니로 활용해야만 비닐봉지를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보다 환경에 이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pp. 418~419]

 

다시 말해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플라스틱 빨대 금지’로 대표되는 플라스틱 규제 정책으로 도리어 기후위기가 가속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플라스틱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치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기후변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플라스틱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고, 2022년 전체 플라스틱 생산량의 9%만 재활용되었다는 유엔환경계획(UNEP)의 발표처럼 아직까지는 미흡한 플라스틱 재활용 비율 상승을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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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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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전락(轉落, La Chute)>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라는 바(bar)에서 ‘누군가’를 만난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이하 ‘클라망스’)의 고백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참회한 재판관’이라고 말하며 며칠에 걸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세상을 비판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독백 속에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화자(話者)인 클라망스는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쩌다가 닥친 불행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죄(罪)는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은 회피하려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인간일지라도(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자(賢者)들이면 몰라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격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악질적으로 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심판 받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남을 심판하러 덤비는 겁니다어쩌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에서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저 키 작은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내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가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에게 이의신청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했어요. 이의신청이라니? 서기와 그 동료들이 웃어댔습니다. “소용없어, 이 친구야. 여기선 이의신청 따윈 하는 게 아니라구.” “그렇지만 말입니다, 내 경우는 예외거든요. 난 죄가 없습니다!” 하고 키 작은 프랑스인이 말했어요. [pp. 85~86]

 

이처럼 나만 예외라고 주장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심판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거나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어야 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남에게 동정을 받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가면서 격려를 받고 싶은 겁니다. 요컨대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싫고 또 동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p. 88]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위로와 주위 사람들의 인정에만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은 클라망스도 과거에 그런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 자살, 사랑, 가난 같은 것에 사정이 어쩔 수 없을 때는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도 예의상이거나 피상적으로 그랬을 뿐이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어떤 대의명분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이는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경우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어요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저 표면만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맞아요. 모든 게 내겐 겉만 스치면서 미끄러져갔어요. [p. 56]

 

예전에 클라망스는 가난하거나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클라망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리 근처를 산책하다가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주위에 그를 심판 혹은 평가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몇 년 후 갑자기 그는 그때 죽은 여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환청을 겪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죽은 이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각성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중략 ~

우선, 선생께서도 경험해보셨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공공연한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횡무진으로 나 자신을 고발합니다.

중략 ~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pp.140~142]

 

이런 방식으로 그는 먼저 참회자(懺悔者)가 되어 자신을 비판(批判)하고, 이어 재판관이 되어 타인을 심판(審判)한다. 하지만 그의 심판은 단지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남이 우리 말을 곧이듣는다고 한번 가정해보시죠? 그럼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테죠. 아이구 떨려……. 물이 얼마나 차갑다구요!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겝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 148]

 

<전락>이라는 이름의 그 현란한 자기 고백은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언어유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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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0-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했던 책이라서요… 항상 올려주시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KOEMMA 2023-10-21 08:21   좋아요 0 | URL
1. 주인장님의 격려에 감사합니다.^^

2. 저도 막연해서 고민하다가 이해가 되는 부분만 엮어서 정리했습니다.
 
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 - 일상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 특별한 발견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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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 합니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이 책은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어디에 갈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지난 수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도쿄 근교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총 스무 번의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 밖 풍경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도시와 마을의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세련된 멋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가꿔온 문화와 꾸밈을 덜어낸 삶이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도쿄 근교를 산책하며 발견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p. 5]

 

라는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도쿄 근교에 대해 소개하지만, 도쿄 근교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도쿄 근교의 10개 현(縣)을 배경으로 ‘음식’, 인상 깊게 감상한 일본 문화 ‘콘텐츠’, 그리고 ‘키워드’라는 3개의 테마로 20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글마다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담담히 얘기하고, 산책 tip, 가 볼만한 곳을 덧붙였으니 여행 가이드와 여행 에세이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음식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도쿄에 참치를 공급하던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 반도였다. 저자는 이곳에서 참치의 다채로운 맛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마구로 만개 세트’를 맛보며, 에도 시대(1603~1868)에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뛰어넘어 간다는 뜻에서 ‘네코마타기[猫]’라고 불리며 버려졌던 참치의 영욕(榮辱)을 생각한다.

 

살다 보면, 본질이 바뀌지 않아도 상황이 바뀐 탓에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 종종 본다. 그 옛날, 기름지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참치가 지금은 똑 같은 이유로 선호되듯이 말이다. 먼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참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억지로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준다 메시지는 꽤 희망적이다. [pp. 22~24]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에 가서는 그곳의 명물, 시나스동을 시켰다가 한일 양국의 인간관계가 반영된 비빔밥과 돈부리의 차이를 떠올린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p. 29]

 

도치기[?木]현 닛코[日光]의 특산품인 가열한 콩물의 막인 유바[湯波]와의 만남을 애기한 글에서는 여행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여행은 사실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다름 아닌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자가 정작 관찰하는 대상은 외부 풍경이나 이국의 문화보다는 그런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p. 64]

 

 

콘텐츠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여행에 질린 이들이 자신들만의 테마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여행 방법의 한 가지가 자신들이 흥미롭게 본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는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보다 소설 <도련님>의 발자취 따라 거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는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지만, 이 책에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p.116]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지 못해 저자의 감상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新瀉]현 유자와[湯澤]를 방문한 이야기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도쿄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하고 성미 급한 벚꽃도 고개를 내밀던 겨울의 끝자락, 다카한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한 뒤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창가에 앉으니 멀리 눈이 소복이 쌓인 산에 시선이 닿았다.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설산이 한기를 몰고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내리기 전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쿄와 완전히 다른 계절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맥과 건물의 지붕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없던 시대에 설국을 찾은 시마무라처럼 보통열차를 탔다면, 길이 약 9.7km에 이르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한다. 긴 어둠을 지나 이토록 환한 설경을 마주한다면,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p. 160]

 

언젠가 겨울에 도쿄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번 유자와를 방문해서 설국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글이었다.

 

 

키워드

 

키워드’라는 테마로 여러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을 알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뜻의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가 대표적인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쓰오카 세이고[松岡 正剛, 1944~ ]는 ‘이이토코도리’라는 일본식 문화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도시로 보면, 가나가와현의 항구 도시인 요코하마야말로 이이토코토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859년,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에 의해 닫혀 있던 빗장을 푼다. 비록 무력에 의한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이는 요코하마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발 빠르게 체득한 요코하마인은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았던 서양식 호텔과 베이커리, 이발소를 열었고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을 만들었으며, 경마와 야구 시합을 즐겼다. 자연스레 외국인은 물론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일본인까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중략 ~

지금도 요코하마 곳곳에는 150여 년 전 뿌리를 내린 세계 각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덕분에 여행객도 마치 셀렉트 숍에 온 기분으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이이토코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pp. 207~208]

 

또 다른 키워드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벚꽃을 죽음과 결부해 왔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고, 가장 화려할 때 덧없이 흩어지는 꽃잎이 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바로 일본인만의 미의식이라 불리는 모노노아와레다. [pp. 290~291]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러브 레터> 등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모노노아와레’의 미학(美學)때문에 일본의 정서가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쿄 사람들의 ‘에도[江戶] 시대’에 대한 감정도 ‘모노노아와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쿄에 살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에도 시대(1603~1868)에 대한 집단적 향수를 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100년 넘은 가게를 일컫는 시니세[老?]는 흔하지만, 에도 시대 때부터 내려온 곳은 훨씬 각별하게 친다. 또, 도쿄 국제공항이나 스카이트리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에는 에도를 테마로 한 공간이나 전시물이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 도쿄의 옛 지명이 에도라서는 아니다. 에도 시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를 지금의 수도로 만든 도시의 기원이자, 어쩌면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pp. 234~235]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에는 에도 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사라졌다. 다행히 개발의 열풍이 비껴간 덕분에 에도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바로 ‘고 에도[小 江戶]’라고 불리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 고에도로서의 자부심을 꼿꼿이 지켜나가는 가와고에는 가끔 들춰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첩과도 같다. 물질적 풍요나 첨단 기술은 도쿄에 집약되어 있지만, 막상 도쿄가 잃어버린 에도의 풍경은 가와고에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타고 가와고에를 떠날 때, 나는 일본인의 추억 한 페이지를 거닐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p. 240]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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