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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 - 시와 해설로 읽는 신화 인문학 고전 아틀리에 2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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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가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 이유는 그 시대의 지식인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세계관, 배경지식 등]과 현대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책을 읽기 전에”에서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원전 번역본 <일리아스>는 방대한 분량, 낯섦, 신화, 수많은 에피소드 등으로 읽기 쉽지 않다. 10년 전쟁 중 4일의 전쟁 이야기로는 <일리아스>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전쟁의 원인도 나오지 않고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관한 서술도 없다. 누구나 아는 트로이아 목마를 서사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왜 신들이 편을 나누어 인간을 돕고 응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서양 문화권이 아닌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리아스>가 서양 인문학의 출발이라고 하는데 막상 실제로 읽으려면 기본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를 위해 <일리아스>의 이전과 이후, 그리고 신화와 비극 등 관련 내용을 담은 도움서가 필요하다. [p. 21]

 

라고 말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은

 

제1장 [일리아스]를 읽기 위한 준비’에서는 서사시 <일리아스>의 가치와 이를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고전은 원전 또는 원전 번역본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고, 스마트폰 등 다른 매체의 이용으로 독서율(책을 읽는 사람의 비율)도, 독서량도 줄어드는 상황1)에서 얼마나 유효한 주장인지 의문이 간다. 게다가 블링키스트(Blinkist) 같은 책 요약 서비스가 흑자 전환2)할 만큼 요약본 혹은 발췌본 읽기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 고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것 같지않다. 오히려 서양 고전의 경우에는 기본 배경지식 문제로 더 진입장벽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전 내지 원전 완역본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평역(評譯)이나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 해설서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글은 원저자가 아닌 해당 글을 쓴 이의 시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제2장 [일리아스] 이전 이야기’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고대 헬라스 서사시는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으로 나누어진다. 트로이아 서사시권은 트로이아 함락 이야기이고, 테바이 서시시권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중략 ~

트로이아 서시시권 서사시는 총 8편이다. <퀴프리아>는 파리스 심판에서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의 트로이아 도착 이야기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이야기이며, <아이티오피스>는 아킬레우스가 아마조네스 여왕 펜테실레이아, 아이티오페스 왕 멤논을 죽이고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이야기이다. <소(小) 일리아스>는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의 무구 재판 이야기, <일로오스의 함락>은 오뒷세우스의 목마로 트로이아를 함락한 이야기,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아카이오이족 장수들의 귀국 이야기,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이아의 귀국 이야기, <텔레고노스>는 오뒷세우스가 아들 텔레고노스에게 살해되는 이야기이다. 이 중에 온전하게 전해오는 서사시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pp. 34~35]

 

굳이 따지자면 제2장은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과 초기 부분을 다루는 <퀴프리아>의 내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이 된 황금사과와 파리스의 재판, 아프로디테의 뜻에 따라 트로이아로 가는 헬레네,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이 트로이아를 공격하기까지 과정 등을 언급한다.

 

제3장 [일리아스] 날짜별 서사의 전개’에서는 24권으로 구성된 <일리아스>의 서사를 날짜별로 소개한다.

 

제4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트로이아 함락’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다루는 <아이티오피스>,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 다툼과 아킬레우스의 사촌 아이아스의 자살을 다루는 <소(小) 일리아스>, 유명한 트로이아의 멸망을 다루는 <일로오스의 함락>에 해당한다.

 

제5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영웅들의 귀향’은 승자인 아카이오이족 영웅들의 귀향을 다룬다.

 

승자인 아카이오이족에서 행복한 자는 없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등 영웅은 죽는다. 귀향 후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신들의 노여움으로 영웅들의 여인들은 바람이 나고 영웅들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오뒷세우스는 10년의 어려운 귀향 후 자신의 자식에게 죽는다.

전쟁은 신에 대한 거역이다. 그 결과 전쟁에 참여한 자들 중 행복한 이를 찾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전쟁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하면서 처참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역설한다. [pp. 246~247]

 

 

저자의 해설을 보면, <일리아스>가 전쟁에 참여한 영웅들의 몰락을 통해 반전(反戰)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본인이 아닌 조상 때문에 파멸하는 경우를 보면, 헬라스 문화권도 ‘조상의 음덕(蔭德)’을 의식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6장 [일리아스] 깊이 읽기’에는 헬라스에 문명이 생겼을 때부터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까지의 간략한 역사, 트로이아 전쟁에서 각 진영으로 나뉜 헬라스의 신(神)들의 소개, <일리아스>의 구조에 대한 해설, 트로이아 왕가의 계보 등이 실려있다.

 

제7장 [일리아스]의 영향과 평가’는 헬라스가 세계에 끼친 영향과 [일리아스]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 등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제8장 [일리아스]외 다른 서사시들’에서는 <길가메시 서사시>, <라마야나>, <아이네이스>, <에다>, <니벨룽의 노래>, <동명왕편> 등 세계의 서사시를 소개하고 있다.

 

제9장 [일리아스]의 종합적 이해’는 [일리아스]가 고대 헬라스인들의 인간에 대한 보고서라고 주장하며, [일리아스]의 주제, [일리아스] 속 신화에 대한 해석 등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남자처럼 살았다.

베니스 상인의 포셔처럼

십이야의 바이올라처럼

남장 여성이다.

벗기면 그대로인 것을

고대 올림픽 경기는 먼저 알아

경기 선수는 나체이다.

경기는 공평해야 하므로

똑같이 지닌 몸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겨루어야 정당하다. [p. 97]

 

이 책에 종종 삽입된 저자의 시(詩)는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사족(蛇足)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각 단락을 시(詩)로 시작하는 것은 신선하지만, 동시에 고대 소설에서 내용을 함축하는 짧은 글로 장절(章節)을 시작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예컨대 유명한 <홍루몽>의 경우 제1회를

 

진사은은 꿈길에서 통령보옥 처음보고[甄士隱夢幻識通寶 ]

가우촌은 불우할 때 한 여인을 알았다네[賈雨村風塵懷閨秀]3)

 

라고 시작한다.

 

굳이 이런 부분을 넣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는 제목 그래도 <일리아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양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한 이에게는 <일리아스> 독해를 위한 좋은 가이드북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옥의 티

 

p. 21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문맥상 사람 이름인 호메로스가 아닌 ‘호메로스의 저서 전체’ 혹은 <일리아스>를 의미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든 명확하게 표기하는 것이 읽고 이해하기 좋을 듯하다.

 

p. 418

<일리아스>는 고대 희랍인들의 오랫동안 누적된 인간에 대한 보고서이다. ~ 헬라스인들은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그려진 삶을 꿈꾸지만 그 방패를 내세우면서 죽는 존재이다. ⇒ 희랍인 혹은 헬라스인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이은정, “지난해 국민 독서량 ‘뚝’… 2년 전보다 성인 3권, 학생 6.6권 ↓”, <연합뉴스> 2022.01.14. 참고로 성인의 독서율은 2011년 73.7%에서 2021년 46.9%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 김상희, “짧게 즐기는 시대… 책도 줄여본다”, <머니투데이> 2023.01.29

3) 조설근(曹雪芹)/고악(高顎), <홍루몽> 1, 최용철/고민희 옮김, (나남, 2009),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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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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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이해의 난해함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철학’은 난해한 학문이다. 교과서에 쓰여진 것처럼 성리학(性理學)하면 ‘이기론(理氣論)’, 양명학(陽明學)하면 ‘지행합일(知行合一)’ 같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유사한 풍토에서 나와 오랜 시간 한국인의 사고에 맞게 현지화한 유교철학과 불교철학만 해도 그런데 아예 전혀 다른 풍토에서 태어난 서양 철학의 경우에는 더욱 난해할 것이다.

이런 서양철학을 저자들은 선(禪)불교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붙들고 있는 물음, 즉 ‘화두(話頭)’의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마치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던 초기에 불교 교리를 노장(老莊)사상 등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던 것[격의(格義)]처럼.

 

이 책,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은 행복,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실존적 삶, 일상 속의 철학이라는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벤담, J.S.밀, 스피노자,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8개의 화두(話頭), 17개의 답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주인공인 호랑 애벌레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풀밭에서 먹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치열한 경쟁과 속도의 덩어리인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잠재된 참모습을 끌어내 나비가 되는 삶,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p. 39]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 혹은 판타지와는 다소 다르지만 빨간 약을 먹고 진짜 세계를 알게 되는 영화 <매트릭스>와 지혜의 힘으로 무지의 사슬을 끊고 현실이라는 동굴 밖을 나가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르지만 닮았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지금 있는 곳이 현실 세계인가에 대해 자문해야 하는 영화<인셉션>은 진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긴 데카르트와 연결된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아니면 진짜 세계라고 믿는 환상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타블로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운명론이며 결정론인 스토아 철학을 얘기하는 자들에 있어 인간은 신(神)이라는 감독이 써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맡은 바 배역을 소화해야 할 연극배우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삶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고정시켜놓고 팔을 휘둘러 발버둥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 <도깨비>는 운명을 반대로 얘기한다.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운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운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pp. 93~94]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운명이라는 화두와 함께 소개되고 있지만, 오히려 쾌락에 대해 논의하는 파트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피쿠르스’라고 하면 흔히 ‘쾌락주의자’ 혹은 ‘쾌락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처럼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에피쿠르스는 쾌락주의자이자만 적극적인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평정심에 이르는 소극적인 쾌락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조차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p. 109]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교리와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월포드는 설국열차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5살 이하의 몸집이 작은 아이를 엔진의 부품으로 사용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에 따르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선발되고 희생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아이들에게 다수 혹은 공동체의 행복(=쾌락과 안전)을 위해 너희의 삶을 바치라고 할 수 있을까?

 

 

홉스는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의 ‘자연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할 수 있는 평등하면서도 취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월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아포칼립스는 바로 이런 ‘자연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사회의 규율과 통솔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자연법]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육체가 사라져도 ‘기억’ 등을 통해 가족, 친구, 동료 등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서의 ‘자기 보존’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태아(胎兒) 생산과 세뇌 등을 통해 미래가 결정되는 신세계를 거부하는 존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후예이자 역설적으로 자기 보존을 위한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을 다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캐릭터 중 기쁨과 슬픔이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하는 내용이다. 감정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통해 사회적 차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이러한 공감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라는 흄의 철학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理性)에만 충실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평판에도, 동료나 선후배 간의 인간 관계에도, 금전적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밥 한끼에서 시작된 균열에서 무너진 강직했던 선배 검사 이창준과 달리. 어쩌면 그래서 저자들은 감정 따위를 초월한 선(善)의지, 이성적 준칙에 의한 도덕적 결단만이 인간 본연의 의무를 완성한다고 주장하는 칸트와 이 드라마를 연결시킨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시민사회에 적응하려는 ‘인간’과 복잡하면서도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리’를 대비시켰다면,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화가의 이상을, ‘6펜스’는 절망적인 현실을 대비시킨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실존 혹은 실존적 삶을 논의할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와 사르트르를 거론한 것이 아닐까?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사변적(思辨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도 철학이 가능하다. 여기서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연결되는 두 철학자 피터 싱어와 롤스가 거론된다.

피터 싱어는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표되는 동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동물해방>을 통해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천 윤리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식주의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고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 정의론의 약점을 지적한 롤스는 공정한 조건에서 가상적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의가 도출되었다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한 셈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그의 차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이런 점에서 그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17명의 서양 철학자들의 주요 학설을 소개한다. 다만 그렇다 보니 8개의 화두와 그 화두에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도 있다. 다시 말하면, 화두에 자의적(恣意的)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끼워 맞춰, 서로 따로 노는 듯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의 사상을 대학입시를 대비한 수험서를 읽듯이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각각의 챕터 끝에 해당 철학자들의 생애와 핵심 성과에 대해 요약한 부록이 곁들여져 있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사에 대해 입문하는 이라면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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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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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 2017년 12월호에 발표한 <죽지 않는 것들의 죽음에 관하여>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 이중 장례식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 고쳐 쓴 것이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시간과 죽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처음 제기했던 학문적 물음을 뼈대로 삼고 있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 통권24호에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 정진홍의 죽음론>을 새로 고쳐 쓴 것이다. [p. 12]

 

즉, 저자가 이미 발표한 글들을 첨삭과정을 통해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1부 ‘살아 있는 죽음’에서는 로버르 에르츠(Robert Hertz, 1881~1915)의 이중 장례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살펴본다. 죽음 후에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뼈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1차 장례식[‘살’의 장례식] 동안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한다고 여겨진다. 살이 제거되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가지고 2차 장례식[‘뼈’의 장례식]을 치른다. 이를 통해 비로소 죽음이 완성되고, 죽은 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바뀐다.

저자에 따르면

 

이중 장례식은 개별성을 지우고 집합성을 창조하는 의례, 즉 시간을 지우고 영원을 창조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p. 58]

 

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시사회의 이중 장례식은 종교가 다른 사회영역으로부터 분화될수록 변형된다. 이로 인해 삶에 대한 인식이 이질적인 단계가 연속된 계단식에서 단일한 직선으로 변화했다.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든,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서 삭제하려는 시도이다. 장례식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야만, 죽은 자는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성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p. 88]

 

뭔가 모순적이지만, 일단 죽어야만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128]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죽음을 ‘탄탈로스의 바위’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 [p. 125]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에서는 ‘시간’관념을 중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 시간 너머를 꿈꾼다. 인간은 시간 너머의 존재, 또는 죽음 너머의 존재를 꿈꿈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이미 죽은 자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와 연결시킨다. [p. 356]

 

이처럼 모든 ‘죽음’의 문화는 ‘죽음 너머’를 상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후세계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기점으로 상상된다. 완전한 끝만이 완전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저에 자기만의 죽음의 신화를 품고 있다. [p. 414]

 

 

4부 ‘사라지는 죽음’에서는 현대사회의 죽음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제사, 추도식, 무덤과 같은 죽음을 지연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사회적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불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과거와는 반대로 너무 늦게 죽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의술의 발달로 인한 죽음의 지연현상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자연적인 죽음 대신 인공적인 죽음인 안락사(安樂死), 존엄사(尊嚴死)와 같은 ‘좋은 죽음’의 개념이다. 결국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좋은 죽음’ 혹은 ‘웰다잉(Well-Dying)’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시대적 위기의식이 가져온 산물인 셈이다.

 

웰다잉은 자기가 살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남은 자들에게 최대한의 작은 상처를 주고,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말 같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표준화된 ‘엔딩 매뉴얼’에 따라 자신을 죽음을 준비하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죽음의 기술’을 습득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웰빙이나 웰다잉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개별적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p. 500]

 

과거에는 ‘죽음’과 그에 관련된 일은 사회적 책무였다.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p. 378]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가 되면서 지나치게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 사회적 책무였던 것들이 개인적 책무로 변화하는, 즉 ‘개별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이고 ‘웰(well)’일까? 그리고 이런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저 막연히 단어로만 다가왔던 ‘죽음’ 그리고 ‘웰다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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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정채연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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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로이트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겨났을까?

 

어떤 이유로 시작했든 누군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상을 긍정적으로 혹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를 쓴 저자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하 ‘프로이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따뜻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자가 프로이트를 보는 시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중요한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석하고, 프로이트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리분석에 대해서도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p.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본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저자에 따르면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프로이트 생전에 프로이트에게 수용 혹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영어 표준번역본의 편집장이 생전에 프로이트의 인정을 받아 그의 저작을 몇 권 번역했던 사람이고, 그의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95~1982, 이하 ‘안나’)가 그 영역본의 공동편집자라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더는 알지 못하는 힘에 얽매여 불만족스럽거나 끔찍하기까지 한 삶을 살지 않게 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거나 우리 스스로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p. 33]

 

그렇다면 도대체 독일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의 차이가 뭐기에 저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일까?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원본에 스며있는 심리분석의 본질인 인본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p. 18]

 

다시 말해, 영역본은

 

프로이트가 독자 자신과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여 오히려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영역본이 말하는 심리분석은 다른 이에게 적용하는 지적 구성체계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심리분석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심리분석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스스로의 무의식을 비롯해 내부에 있는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에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었다. [p. 20]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프로이트 다시 읽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상징적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한 모든 은유와 같이, 이 용어도 풍부한 관계성과 연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명시적인, 또 암묵적으로 나타나는 은유를 담고 있기에 다양한 수준에서 의미를 가진다.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통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까지 생생하게 나타내고자 했다.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이 그랬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단순히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라 알고 있는 남성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라 알고 있는 여성을 얻기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신화에 담긴 의미를 빼고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오이디푸스나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 방랑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의 친부모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스스로 해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을 그곳에서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번역된 개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친살해 소망과 근친상간 소망을 갖는 것에 대한 아동의 불안과 죄책감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중략 ~

오이디푸스는 부모에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행동을 했다. 이를 뒤집어보면, 어떤 아동도 부모 모두가 거절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이디푸스적 소망과 오이디푸스적 죄책감의 관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는 갈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아버지가 갓난아기인 우리를 실제로 죽이려 했다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약 어머니가 실제로 우리를 버렸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아 영원히 독점적인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부모에 대한 사랑, 부모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소망만이 부모를 향한 부정적이고 성적인 감정을 억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pp. 42~44]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우리가 스스로의 무의식을 자각해야 한다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버지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길을 막고 섰을 때에도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좌절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자각할 수 있다면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에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p. 45]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아동의 오이디푸스적인 소망과 불안이 아동에 대한 부모의 감정과 대응관계에 있다는 심리분석적 발견의 기반이다. [p. 50]

 

한마디로 고장난명(孤掌難鳴), 즉 한 손으로 박수칠 수 없다[Nobody can clap with one hand]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번역자들은 프로이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영혼(die Seele)에 대한 언급을 누락하거나 그가 오직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처럼 번역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다양한 곳에서 ‘영혼의 구조(die Strukturdes sellischen Apparats)’와 ‘영혼의 조직(die seelische Organisation)’에 관해 말했다. 이 용어는 거의 언제나 ‘정신구조’ 혹은 ‘정신조직’으로 번역된다. 이는 특히 잘못된 번역이다. 독일에서 Seele와 seelisch는 오늘날 미국인이 쓰는 영혼(soul)보다 더욱 명확하게 영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이 영혼을 대체하여 사용한 ‘정신(mental)’이라는 단어는 geistig라는 독일어와 같은 말이다. 이는 ‘마음의(mind)’ 혹은 ‘지성의’라는 뜻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영혼이 아닌 geistig를 의미하고자 했다면 굳이 다른 단어를 썼을 이유가 없다. [p. 102]

 

이는 영역본에 심리분석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입증 가능한, 과학 그 중에서도 의학의 한 전문분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다른 글에도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프로이트는 <심리분석 개요>의 초기 원고인 <심리분석 입문강의>에서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에 헌정된 심리학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에게 심리학은 광범위한 분야이면서 영혼과학의 부분이다. 그리고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의 특수 분과이다. 이보다 더 심리분석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진술을 생각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표준판은 이를 “심리분석은 심리과학의 정신과학 중 한 부분이다”라고 번역했다. [pp. 106~107]

 

프로이트의 <심리치료>라는 논문의 경우에도

독일어 원본 해석

영어 번역본 해석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독일어 번역은 ‘영혼’이다. 이런 이유로 심리치료는 ‘영혼의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이는 심리치료가 의미하는 것이 영혼에 발생한 병리적 현상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영혼으로부터의 치료,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p. 104]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정신치료’를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이 용어는 ‘정신적 삶에서의 병적인 현상의 치료’로 정의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오히려 마음 속에서 시작하는 치료를 가리키며, (정신이든 신체장애이든) 치료는 인간 마음에 우선적이고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뜻한다. [p. 105]

 

이런 식으로 아예 엉뚱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의역(意譯)의 과정에서 원래 프로이트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게 해서 잘못된 해석을 유도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심리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몇 개의 오역을 바로잡고, 프로이트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독일어도 모르고 원서도 보지 않았기에 저자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오역 부분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와 저자가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관념이 다른 것일까? 저자에게는 아쉽게도 나는 프로이트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부분은 그렇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리뷰는 북하이브로부터 받은 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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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는 심리학 - 매일 자책하는 당신을 위한 마음 수업
조장원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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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관두고 싶은 사람들

 

Part 1. ‘일에 치여 힘겨운 일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에서는 첫 번째 파트에서는 회사 일과 업무에 치여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 세계(주로 주변 인물), 미래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자기인식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가 의욕을 잃어버려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 미래’만’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면 살아가는 경우, 유독 부지런한 한국인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슈드비 콤플렉스(should be complex)1)’에 시달리는 경우 등 다양한 사례가 언급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보듯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이들을 높이 친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미래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성공을 위해 돌진해서 부,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은 얻었어도 정작 몸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이 되고, 주변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친구나 가족 하나 없는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한 것일까? 자신이 얻은 것을 하나도 누릴 수 없는데……. 그래서 저자는 현재의 행복도 맛보라고 권유한다.

첫 번째로 (미래에 집착하도록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주문을 찾아내도록 한다. 나를 망치는 주문이다. 그 주문을 찾아서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주문을 외면서 자신을 쉬지 않고 몰아세우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님이라면 당신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에게는 모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법이다. 대개는 안쓰러워하면서 따뜻하고 정감 어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관점을 바꾸니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얼마나 힘겨운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바로 그 같은 위로의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세요.”

두 번째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구체적 행동을 하게 한다. 현재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학원을 등록한다거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그런 미래 지향적인, 흔히 이야기하는 생산적이고 뭔가 남기기 위한 행동이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p. 37]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

 

Part 2. 버거운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에서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다양한 사례가 소개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나르시시스트 상사를 만난 경우, 회사에서 쌓인 화를 가족에게 푸는 경우, 나를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려는 상사를 만났을 경우 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나르시시스트 상사의 의도적인 침묵에 당했을 경우

의도적인 침묵에 속수무책 당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리적 증상이 따라온다.

첫째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심한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계속 찾으면서 마치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억울 씨 같은 경우, 고 부장의 맺힌 감정을 풀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살피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행히 노력의 대가로 고 부장의 마음이 풀려 관계가 회복된다면 안도감을 느낀 후 다시는 이런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더 애를 쓰면서 눈치를 보기에 이른다. 의도적인 침묵을 행사한 사람에게 당한 사람이 점점 예속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p. 82]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내가 잘못한 걸 찾아내려고 나의 내부요인에만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외부요인, 즉 상대방에게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둘째, 제삼자에게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좋다.

셋째, 상사를 바꿀 수 없으니 그가 본래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대할 수밖에 없다.

넷째,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을 사준다거나 무턱대고 용서를 구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의 수직관계는 더 강화된다.

다섯째, 내 감정을 살피고 어루만져야 한다. 상사의 감정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감정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처받은 건 그가 아니라 ‘나’다, [pp. 83~85]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변화

 

Part 3. 통제 불능의 감정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에서는 감정의 변화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이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회의만 다가오면 숨이 막히고 떨리는 ‘회의 공포증’, ‘그날’만 되면 유독 예민해지는 ‘월경전불쾌장애(PreMenstrual Dysphonic Disorder)’, 뭘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당위적 사고’ 등 통제하기 힘든 감정의 변화로부터 나를 지키는 간단한 방법들을 알아본다.

 

우리는 흔히 외로움과 고독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지만,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이 두 가지 감정은 다르다고 하다.

외로움(Loneliness)은 타인에게서 고립(isolation)되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있다고 인식하는 정서다.

외로움은 심지어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타인에게서 감정적으로 고립되었다고 생각할 때, 타인과 감정이 공유되지 못한 채 혼자서만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역시 외로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반면 고독(Solitude)은 혼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다. 타인이 아닌 자기에게 집중함으로써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과정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고독을 느끼기보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본인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pp. 172~173]

 

 

가장 소중한 것은 ‘나’

 

Part 4. 스트레스와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일, 사람[인간관계], 감정 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일을 자꾸 미루는 ‘습관성 게으름’,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수면 패턴이 일정치 않고 이유 없이 잠을 못 자는 ‘불면증’, 남들에게 지나치게 잘해줘서 자신은 손해만 보는 ‘구원 환상’ 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다룬다.

 

예들 들면, 불면증의 경우 어떻게 해야 수면 강도를 높여 수면 효율을 올릴 수 있을까?

수면 강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수면 제한을 실천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수면 제한을 위해서는 먼저 내 수면 패턴을 확인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매일 잠자리에 누워 있던 시간과 실제 수면 시간 등을 점검한 다음 실제 수면 시간의 평균값을 구해야 한다.

둘째, 기상 시간을 분명히 정해두는 게 좋다. 내가 꼭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기상 시간으로 정해 반드시 지킨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는 습관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셋째, 기상 시간에서 실제 수면 시간을 뺀 평균값을 구해 이를 취침 시간으로 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일주일 동안 측정한 평균 수면 시간이 5시간일 경우, 최소한 새벽 2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평균 수면 시간을 유지하며 취침할 수 있다. [pp. 223~224]

 

 

나’를 힘들게 하는 것

 

회귀해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실수도, 실패도 경험하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아간다.

 

그런데 한때 유행했던 ‘내 탓이요’를 나 자신에게 무조건 던져버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난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비난을 하지 말고 '내 마음부터 지키라고 한다.

나를 지킨다는 것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비겁하게 변명하는 일도 아니다. 나를 지킨다는 것은 나를, 내 감정을,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품어줄 때, 어떤 상황이 와도 나 자신을 제대로 지키는 법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바탕에 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며,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p. 8]

 

직장인이라면 겪을 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실제 진료실에서 사용하는 치료기법을 응용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직장인이라면 지금 당장 문제가 없다고 외면하지 말고, 한번쯤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1) 슈드비 콤폴렉스(should be complex)는 항상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한시라도 허투루 보내지 못하며 바쁜 일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회복지사나 교사 등 상대적으로 사회적 기대치가 높은 직업군에서도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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