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econd Hometown 마이 세컨드 홈타운
오지윤 지음 / 카멜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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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econd Hometown]의 목차를 펼치면,

살아 보기
|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관찰하기
| 시즈오카, 오사카, 교토, 도쿄
춤추기
| 다딩베시, 카트만두, 히말라야, 포카라, 치트완
기억하기
| 빈, 파리, 두브로브니크, 니스, 로마, 상트페테르부르크, 포틀랜드

라고 되어 있다. 이것만 보면, 이 책이 열거된 19개의 장소에 대한 소개 혹은 경험을 살아보기, 관찰하기, 춤추기, 기억하기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언급된 장소가 많다는 느낌은 있지만, 여행지에서 일정기간 머물며 살아보고, 여행지를 관찰하고, 여행지를 기억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춤추기’라니. 뭔가 생뚱맞은 카테고리가 하나 끼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다딩 베시(Dhading Besi), 카트만두(Kathmandu, 네팔의 수도), 히말라야, 포카라(Pokhara), 치트완(Chitwan) 국립공원에서 전통 춤을 배웠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래서 ‘춤추기’ 파트를 제일 먼저 펼쳐봤다.

의외였다. 춤추기 파트에 언급된, 네팔의 지명들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 그리고 에피소드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저자가 한국어 교사로 머문 디딩 베시 인근의 고아원에서의 경험과 히말라야 등반의 경험 등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한국에 일하러 온 네팔 젊은이들의 허망한 죽음과 자신의 한국어 제자가 한국에 오지 않아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가 덧붙여진다.

우리가 지낼 고아원은 다딩베시라는 도시의 중심지로부터 40분 정도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달 동안 먹고 자며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기로 했고, 동네에 사는 청년들이 고아원으로 와서 한국어 강의를 듣기로 했다. 모두 한국에서 일하는 데 관심 있는 청년들이었다. [p. 148]

나는 어쩌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 젊은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똥통에 빠져 죽을 수도,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대한민국에서의 노동은 힘들 거란 것을. 레건이 자문자답한 것처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고 이 나라에 왔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오늘도 의욕 넘치는 눈빛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겠지.
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결국 단 한 명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p. 159]

그래서일까? 해당 부분을 다 읽을 때까지 왜 ‘춤추기’라는 파트 제목을 정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마을이자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의 결혼식장에서 춤을 춘 경험이 그나마 ‘춤추기’와 연관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나중에 한번 더 읽더라도 ‘춤추기’라는 파트 제목 설정에 대한 의문을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의문은 마음 한 구석에 몰아놓고, 책장을 다시 펼쳐 처음 파트인 ‘살아보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 파트는 퇴사 후 친구 집에서 한 달을 얹혀살며 경험한 베를린(Berlin)에서의 에피소드가 중심이었다. 음? 또 한 달? 혹시 이 책의 파트들이 특정 지역에서 한달 살기였나?
베를린에서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는 듯 했다.

- 베를린 살면서 좋은 게 뭐야. 자랑 좀 해 봐.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그에게 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말했다.
- 지금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서울에서는 사치였어. 
창 밖으로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일까. 서울에서는 벽이나 다른 아파트가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 돈이 별로 없어도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며 살 수 있어서 좋아. 그것만으로도 여기가 좋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어. 삼십 대 중반이 되니까 친구들을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가 부동산이며 주식이며 하는 것들로 정해졌던 것 같아.
 - 그건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일 것 같아.
나는 왠지 방어적으로 답했다.
- 맞아. 여기는 
평생 세입자로 살아도 주거 안정성이 보장돼. 죽을 때까지 집을 소유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비교하고 걱정하는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지. 삶의 스펙트럼도 넓고 친구들의 스펙트럼도 넓어. 플리마켓에서 그림을 그리며 사는 친구도 있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도 있어. 어떤 나이에 어느 만큼 경제력을 갖춰야 한다는 기준이 없어. 다들 격 없이 대화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달까.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pp. 23~26]

하지만, 그건 상대적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만난 나우엘과의 에피소드였다. 세계 어디서든 엄마의 삶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주었다.

- 그래도 독일은 엄마들이 살지 좋이 않아? 육아휴직도 엄청 길 것 같은데.
- 육아휴직이야 몇 개월 주긴 하지. 그럼 뭐 해? 복직한 후가 문제야. 독일은 어린이집이 3시면 문을 닫아. 그럼 우리는 어쩌지? 3시에 퇴근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지. 결국에는 
아이를 가지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는 여자들이 생기는 거야. 사회가 여자들의 경력 단절을 조장하고 있어. [p. 76]

피천득의 <인연>을 떠오르게 하는,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해 갈까’라는 에피소드도 흥미로웠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의 교환학생 시절 만난 라트비아인 친구 ‘우나’와 10년째 인연을 이어 가며 세 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10년 사이에 우나는 흡연도, 맥도날드도, 클럽도, 술도. 탄산음료도, 카페인도 끊고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피천득과 아사꼬의 만남과는 달리 저자와 우나의 만남은 더 이어질 것 같아 흥미로웠다. 다음 만남에서 우나는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세 번째로 펼친 ‘관찰하기’ 파트는 부모님의 효도여행,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인스타그램 친구이자 브런치북 대상 동기인 이예은 작가와의 만남 얘기를 두 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펼친 ‘기억하기’ 파트는 조금 의외였다. 각각 다른 신문에 실린, 오늘 날짜의 4컷 만화들을 모은 듯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잘츠부르크 유학시절 친구인 리사를 만나기 위해 탄, 빈(Wien)에 가는 열차의 옆자리에 앉은 ‘파독(派獨) 간호사’가 언급한  ‘두 번째 고향’이야기나

여기가 두 번째 고향이네. 
작은 지구에 살면서 고향을 하나 더 만드는 건 너무 좋은 일 같아요. 그리워할 수 있고 언제나 돌아갈 곳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건 행운이에요. [p. 227]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로마(Roma)에서 관광 가이드를 거쳐 개발자로 일하는 대학 동기 보연과의 만남을 얘기하기도 하며 포틀랜드(Portland)의 카페 코아바의 비효율적인 아니 돈에 구애 받지 않는 널찍한 공간 구성과 어느 호프집의 넉넉한 커피 인심도 부러운 듯이 말한다.

크게 독일 여행, 일본 여행, 네팔 여행에서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살아보기, 관찰하기, 춤추기 파트와는 달리 서로 다른 장소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저 엮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학창시절 동아리 방에 놓여 있는 ‘날적이’처럼 통일성이 약한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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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감각 - 아트 디렉터가 큐레이팅한 도시의 공간과 문화, 라이프 스타일
박주희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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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브랜드가 되다


건축가 서현은


“건축이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되는 것처럼 공간은 단지 바라 보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과 생활 그리고 그 사회의 부대낌, 사회가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리하여 건축은 건축가가 공간으로 표현하는 시대정신이 되는 것1)


이라고 했다. 이를 도시 단위로 확장해보면,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장소와 건축의 분리를 통해 이루어진, ‘상품으로서의 건축’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그 도시만의 고유한 감각을 얘기하기 어렵겠지만.


사람이 모여 ‘도시’라는 장소를 만들면, 그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노래하게 된다. 사람으로 치면, ‘개성’을 갖게 된 셈이다. 이렇게 개성을 가진 도시는 ‘뉴요커’처럼 그 도시의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 즉, 도시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


이 책은 수 많은 도시 가운데 ‘뉴욕’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여행객이 아닌, 뉴욕에서 10년간을 보낸 ‘뉴요커’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뉴욕의 감각>이라는 책은 공간, 예술, 문화, 맛을 테마로 뉴욕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장 공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에서는 ‘뉴욕’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장소들과 브랜드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소개된 하이라인 파크[2009]는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하이라인 파크는 오래된 기찻길 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풀과 꽃을 인공적으로 덮지 않고 남겨둬 길과 어우러지게 설계했다. 그래서 보도가 반듯하지 않고 좁거나 길거나 넓은 자유로운 형태로 이어지며 풀이 무성한 곳도 있다. 그래서 하이라인 파크는 직선으로 걸을 수 없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풀과 꽃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보도와 높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시야를 방해하지 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녹이 슨 갈색의 철길에 뿌리를 내린 꽃과 풀, 양쪽에 늘어선 개성 있는 건축물, 달리는 차를 바라보며 내 속도로 걸어갈 뿐이다. [p. 23]


‘뉴욕’하면 떠올리는 화려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2주에 한 번씩 바뀌는 쇼윈도를 통해 뉴욕 거리의 표정을 바꾼다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1901]을 방문하면 된다.


이곳은 마치 잘 차려진 편집숍 같다. 품목별로 나눠진 공간에서는 브랜드에 상관 없이 맘에 드는 제품을 집어 비교해 볼 수 있다. 다른 백화점에서 이브닝 드레스를 사기 위해 온갖 브랜드 매장을 다 들어가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이브닝 드레스가 큐레이팅된 공간에서 오직 이브닝 드레스만 여러 브랜드별로 비교해서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쇼핑은 즐거운 일이지만, 물건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취향에 맞지 않는 곳까지 일일이 둘러보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버그도프 굿맨은 고객에게 합리적인 동선으로 편리함을 주고, 섬세한 큐레이팅으로 취향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 중략 ~

편집숍이라는 방식은 고객이 좀 더 주체적으로 제품을 찾고 구매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것과도 직결된다. 소비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건드린 버그도프 굿맨의 전략은 결국 뉴요커를 매료시키는 데 완벽하게 맞아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 계속 찾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정체되기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을 이곳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pp. 29~32]


미국의 전설적인 금융 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 모은 수집품을 전시한 모건 라이브러리 앤 뮤지엄[1906]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욕을 보여준다


어쩌면 모건의 부와 명예는 미국이라서 지켜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과오는 티끌이 되고, 그의 돈으로 수집한 물건이 업적으로 기억되는 건 미국이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 나라여서 가능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 43]


뮤지컬의 성지(聖地) 브로드웨이도 유명하지만,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지명(2015)으로 다문화국가인 미국을 상징하는 듯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1939]의 존재감도 뚜렷하다.


아메리칸 걸[1986]이라는 인형 가게는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의 만화  <피너츠(Peanuts)>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을 만화에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편견을 깼던 것처럼, 다양한 인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걸에는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인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형이 있다. 휠체어를 탄 인형, 목발을 든 인형, 안내견과 함께 있는 인형도 있다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나와 다른 것에 어떠한 편견도 가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아메리칸’ 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이렇게 인형 가게에서도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하지만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평등의 문화가 다양성의 나라 미국을 만든 게 아닐까. [p. 92]



‘2장 예술,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움’에서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단순히 졸부(猝富)처럼 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뉴욕을 대표하는 근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 현대미술관’, 200만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소장품을 가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중세 건축물 잔해를 조합해 만든 ‘클로이스터스 박물관’, 분리파(Secession)2)의 미술에 집중한 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 오직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만 취급하는 ‘휘트니 미술관’, 타이타닉의 비극이 낳은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의 3대 갤러리라는 가고시안, 페이스, 데이비드 즈위너 등 곳곳에 예술 공간이 가득한 이 도시는 뉴요커들이 그림을 쉽게 접하고 감각과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며, 파리만 예술의 도시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3장 ‘문화, 다채로운 이야기 가득한 뉴요커의 일상’에서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뉴요커의, 아니 뉴요커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미국’하면 떠올리는 록펠러(Rockefeller) 가문은 뉴욕시의 수도세를 부담하는 등 사회 환원 사업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석유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의 며느리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1874~1948)와 그녀의 두 친구에 의해 뉴욕 현대미술관이, 그의 손자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1908~1979)가 기증한 3,000여 점의 작품을 토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각각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 D. 록펠러 본인도 시카고 대학(1890)과 록펠러 대학(1901)을 세우고,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단체인 록펠러 재단(1913)을 설립했다.


부자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허파’라는 센트럴 파크는 공공 공원이지만 개인의 기부와 기업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개인의 기부를 장려하기 위해 1만 달러를 기부하면 기부자가 원하는 문구를 동판에 새겨 벤치에 붙여주는 ‘어답트 벤치(Adopt A Bench)’라는 제도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기에 센트럴 파크는 산소를 공급하는 물리적인 ‘뉴욕의 허파’일 뿐 아니라, 다름이 차별로 변질되지 않고 ‘우리는 모두 뉴요커’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뉴욕의 허파’가 된 것이 아닐까?


록펠러가 싹 틔운 기부 문화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부를 쌓으면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고소득자의 의무이자 명예라고 생각한다.

~ 중략 ~

일반 시민에게도 소액이나마 동네 체육관이나 학교에 기부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생활화된 미국의 기부 문화는 그 자체가 나라의 가치를 높이는 브랜딩 전략이란 생각이 든다. 뉴욕에 사는 동안 도시 곳곳에 보이는 기부의 흔적들, 이를테면 시민들이 세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을 보면서 높은 시민 의식이 어떻게 도시의 문화를 꽃피우는지 볼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현대미술관도 다 미국 시민들의 기부로 인해 만들어진 문화 공간이다. 어쩌면 기부와 나눔 문화는 세계적 찬사를 받는 글로벌 메가시티의 필수 요건이 아닐까. [p. 211]


뉴욕의 또 다른 특징은 보행자를 배려하는, 걷기 좋은 도시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심지어 범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같은 경우, 은행 강도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 출구 또는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 은행을 털고 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경찰 헬기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사라진다고 한다. 반면, 뉴욕의 은행 강도들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코튼 요원은 교통 체계가 다르고, 보행자 친화적인 뉴욕의 도로에서는 다른 종류의 은행털이가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뉴욕의 범죄자는 뛰거나 지하철을 타고 도망간다는 것이다.3)


뉴요커의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특정 요일에만 형성되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인 유니언스퀘어 파크의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다.


뉴욕시는 뉴욕으로부터 32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만 거래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았다. 반하는 과정에서 농작물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올 수 있는 최대 거리가 321킬로미터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농산물들은 주로 뉴저지나 롱아일랜드, 메인 등 뉴욕 근교의 주에서 오며 무척 신선하다. 농부들은 중간 마진을 떼지 않은 채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어서 좋고, 구매자들은 원산지가 정확하고 건강한 채소나 과일을 눈으로 보고 사 갈 수 있으니 모두가 윈윈이다. 게다가 이동 거리를 제한함으로써 자연스레 탄소 배출도 줄일 수 있으니 이곳을 주로 찾는, 오가닉한 삶을 추구하며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에게도 뜻이 맞는 곳인 셈이다. [pp. 247~249]



‘4장 맛, 마음까지 열고 닫는 음식의 힘’에서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거주지 ‘뉴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뉴욕의 다양한 맛을 보여준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밥보(Babbo)’,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굴[Oyster]의 도시였던 뉴욕의 흔적이 담긴 그랜드 센트럴 역의 ‘오이스터 바(Grand Central Oyster Bar)’, 샤오롱바오[小籠包]로 유명한 홍콩요리 전문점 ‘조스 상하이(Joe’s shanghai)’, 클래식한 스테이크의 정수를 보여주는 ‘피터 루거(Peter Luger Steak House)’, ‘뉴욕의 디저트’하면 떠오르는 치즈케이크를 파는 대표적인 가게인 ‘주니어스(Junior’s Restaurant & Bakery)’, 이탈리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의 이탈리아 식재료와 음식을 함께 파는 오픈 마켓인 ‘이틀리(Eataly NYC Flatiron)’ 등을 소개하고 있다.



 

1)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개정판), (효형출판, 2004), p. 248


2)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로도 불린다. 1897년 빈(Wien)의 전시관인 퀸스틀러하우스(Kunstlerhaus)의 보수주의 성향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이 탈퇴하여 결성했다. 분리파의 주요인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등이 있다.


3) 제프 마노, <도둑의 도시 가이드>, 김주양 옮김, (열림원, 2018),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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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 나를 위로하는 일본 소도시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1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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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살기, 생활인의 삶인가 여행객의 관광인가


‘한달 살기’라는 키워드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후 천편일률적인 여행에 지친 이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한달 살기’는 비교적 기간이 짧은 패키지 여행이나 자유 여행과는 달리, 현지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생활’하는 것이기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게다가 물가도 고려해야 하기에 ‘동남아시아’를 해외에서 한달 살기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기왕 해외로 나가는 김에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의 비교적 잘 알려진 뉴욕, 런던, 파리, 밴쿠버 등 대도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출장이나 파견이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이 이런 대도시의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뭔가 고즈넉한 정취 가득할 것 같고, 어느 정도 편의시설도 갖춘 소도시에 눈이 가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귀농을 선택했다가 실망하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처럼, 외국의 소도시에서 한달 사는 것조차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물을 보는 것처럼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도시에서의 한달 간의 삶을 그리는,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삶이란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정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살아 보는 여행은 늘 탐스럽게 반짝이는 인생의 리미티드 에디션과도 같다. 어차피 번외 편이니 평소와는 다른 일에 도전해 보거나, 어떤 역할에도 얽매이지 않은 온전한 나를 여과 없이 드러낼 수도 있다. 아무리 찰나에 불과해도 그런 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본 편 같은 일상도 조금은 버텨 볼 힘이 나지 않을까. [pp. 213~214]



다카마쓰[高松]라는 도시는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도시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1859년 개항한 이후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한 ‘요코하마[橫浜]’, ‘눈의 도시’로 유명한 ‘삿포르[札幌]’, 지금은 사슴으로 유명한 옛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였던 ‘나라[奈良]’, ‘천하의 부엌’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사카[大阪]’, 도시의 상공업자인 조닌[町人]들의 조직인 에고슈[會合衆]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 ‘동양의 베니치아’라고 불리던 ‘사카이[堺]’,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스와[諏訪]’,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京都]’, 외국인 거류지에 건설된 이진칸[異人館]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낭만이 깃든 국제도시 ‘고베[神戶]’, 원폭투하로 기억되는 ‘히로시마[廣島]’, 한반도 및 대륙과 가까워 1세기 무렵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후쿠오카[福岡]’, 서양문화 수입의 창구가 된 ‘나가사키[長崎]’ 등 일본에는 다양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굳이 가가와[香川]현의 현청(縣廳) 소재지인 다카마쓰를 골랐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과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 덕분에 해산물은 물론 과일과 채소도 풍부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어진 탓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동현’이라고 불릴 만큼 수두룩한 우동집과 기업가 후쿠타케 소이치로를 필두로 한 아트 프로젝트도 가가와현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러니까 천혜의 자연과 특색 있는 미식, 예술이 조화롭게 생동하는 작지만 옹골진 지역인 셈이다.

나는 다카마쓰에 작은 원룸을 구하고, 오랫동안 꿈꾸던 소도시의 로망을 실천에 옮겼다. 낮에는 바닷가와 산골 마을을 유유자적 산책하며 그림 같은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예술 작품을 실컷 감상했다. 오후에는 커피 향 진하게 풍기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어디에나 있는 셀프 우동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저녁에는 여유로운 해변 공원에서 하염없이 노을을 보고, 해가 지면 왁자지껄한 선술집 혹은 숙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돌아보니 그곳에서 먹고, 보고, 걸었던 행위 하나하나가 내게는 최고의 치유였다. [p. 8]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다카마쓰의 ‘푸드 테라피’


저자는 이 책,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소도시 여행의 매력과 함께 다카마쓰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가와현의 특별함을 얘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미식(美食),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우동’이다.


우동의 본고장인 가가와현에는 약 500개의 우동 집이 있는데, 이 숫자는 가가와현에 있는 편의점 수보다 많다. 그뿐이 아니다. 면 반죽하는 법을 가르치는 우동 학교와 우동집을 탐방하는 우동 버스는 기본이고, 우동 국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애완견도 먹을 수 있는 우동, 뇌가 우동으로 된 캐릭터 등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기괴한 우동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 ‘우동현’이라는 애칭이 무색하지 않다.

~ 중략 ~

이곳 사람은 국물 있는 우동, 비빔 우동, 고기 우동, 튀김 우동, 미역 우동, 카레 우동 등 그때그때 원하는 방식으로 면을 소비하고 있었다. [pp. 22~23]


물론 옛 ‘사누키국[讚岐國]’인 가가와현에는 우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과자 와산본[和三盆], 찹쌀떡 된장국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뼈가 붙은 닭다리 구이 호네츠키도리[骨付鳥] 등 독특한 먹거리들이 각자의 이야기와 함께 방문객들을 반긴다.


와산본은 죽당이라는 품종의 사탕수수를 사용하며, 당분 외에도 사탕수수의 여러 영양소를 함유하여 맛이 풍부하고, 입자는 마치 밀가루처럼 곱고 부드럽다. 이 설탕을 예쁜 틀에 넣어 사탕처럼 굳힌 것도 똑같이 와산본이라고 부르는데, 우동과 함께 가가와현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작고 앙증맞은 모양새를 자랑하는 와산본은 입에서 톡 깨트리면 눈처럼 녹으며 오묘한 풍미를 선사한다. 씁쓰름한 커피나 차와 함께라면 더욱 환상적이다. [p. 36]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출처: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p. 47


모르고 보면 그저 낯설고 기이한 음식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옛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나면 정감이 간다. 힘겨운 노동의 굴레 속에서도 특별한 요리 한 그릇에 살아갈 힘을 얻었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분 제도가 남아 있던 시대에 거창한 인생 역전보다는 그저 새로운 한 해도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귀한 재료로 끓였을 안모치조니는 그 시절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p. 48]


일본에서는 치킨하면 ‘가라아케[唐揚け]’가 가장 일반적이다. 뼈를 발라낸 살코기를 한 입 크기로 잘라 간장으로 양념한 뒤, 반죽을 얇게 입혀 튀겨 낸다.

~ 중략 ~

일본인도 가가와현에 오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를 꼭 먹는다. ‘뼈가 붙어 있는 닭’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두툼한 닭 넓적다리를 오븐에 통째로 구워 손으로 들고 먹는다. [pp. 51~52]



자유로운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만나며 감성을 채우는 ‘아트 테라피’


여행을 가면, 남는 거는 ‘사진’뿐이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평소에 보기 어려운 것들을 찍고 SNS에 올리고 싶은 욕망은 참기 힘들다. 물론 그게 가능했다면 SNS가 다 망했겠지만…….


다카마쓰[高松]시가 소속된 가가와[香川]현에도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장소들이 있다.

먼저 다카마쓰[高松] 시에서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野口 勇, 1904~1988]의 유지(遺志)를 구현화했다는 ‘이사무 노구치 정원 미술관’과 ‘다카마쓰 출신의 문호’이자 ‘문단의 오고쇼[大御所]’1)라고 할 수 있는 기쿠치 간[菊池 寬, 1888~1948]의 희극 <아버지 돌아오다>(1917)의 한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과 ‘기쿠치 간 기념관’을 얘기한다.


살짝 서쪽으로 가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가 특산인, 가가와현 제2의 도시 마루가메[丸龜]시가 있다. 이곳에서는 전후(戰後) 일본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이노쿠마 겐이치로[猪熊 弦一郞, 1902~1993]의 작품이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 1937~ ]가 설계한 ‘마루가메시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노쿠마 겐이치로는 노년에 모든 소장작품을 기부함으로써 동네 놀이터에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역 앞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스승이었던 앙리 마티스나 동시대를 산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세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몰라도, 마루가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이들에게는 한 단계 높은 문화를 선물하며 누구보다 고귀한 유산을 남겼다. 성공은 ‘세상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 랄프 월도 에머슨의 시는 화백을 위한 말이 아닐까. 그가 바란 대로 가가와현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잠재력이 현대 미술을 만나 저마다의 색으로 꽃 피리라 믿는다. [p. 104]


다카마스항에서 고속 패리(Ferry)로 30분 거리에 있는,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에 가면,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세 개의 미술관이 반겨준다. 호텔이자 미술관인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과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중 일부를 감상할 수 있는 ‘지추[地中] 미술관’ 그리고 ‘여백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우환(李禹煥, 1936~)의 작품이 전시된 ‘이우환 미술관’이다.


정말 삶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한 군데도 빠짐없이 골고루 채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관심 있는 부분에 조금은 치우치기 마련이고, 어떤 곳은 끝내 공백으로 남기기도 한다. 나는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보다 조금 더뎌도 여유 있게 걸으며 주변 이들에게 곁을 주는 사람이 좋다.

~ 중략 ~

원형적인 점과 선을 단순하게 배열한 이우환 화백의 그림은 내 쪽에서 말을 걸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캔버스 밖으로 끝없이 생각을 팽창하다 보면 결국 그림보다 내 안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둡고 고요한 미술관을 나왔을 때 긴 명상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p. 123~125]



다카마쓰에서의 힐링, 내면의 행복을 찾는 길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부터 떠밀리듯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 ‘이걸 왜 하고 있지?’, ‘뭘 위해 하는 거지?’, ‘이러려고 입사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소위 ‘현실자각타임’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생활에서뿐 아니라 여행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게임에서 포인트를 적립하거나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하듯이, 여행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빨리 다음 여행지로 가느라 바쁘다.


저자의 경우, 바다의 안전을 수호한다는 ‘오모노누시노미코토[大物主命]’을 섬기는 신사(神社)인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의 1,368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높이 가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가 더 중요한 길이 있다. 고토히라궁의 1,368개 계단이 그런 곳이다. 등산로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일일이 돌계단을 놓은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란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만 급급한 도시인의 습성을 버리고, 계단의 개수에 상관없이 누군가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며 걸으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혼자만의 편익이 아닌 다른 이의 치유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의 여유야말로 나와 내가 사는 도시에 꼭 필요한 ‘힐링’이 아닐까. [p. 183]


그런 느낌이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라도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에는 경쟁하듯 점수 올리기에 집착했고, 졸업 후에 남부럽지 않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했다. 도망치듯 떠난 일본에서 후회 없이 대학원 생활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일도 해 보았지만, 다시 그만둔 상태였다. 적어도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이름 있는 기업에서 과장쯤 되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서른 살,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러다 돈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과 호흡하며 사는 미요코 씨의 모습을 보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조급하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학위도 직장도 결국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내면의 행복은 아무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p. 74]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오고쇼[大御所]는 섭정(攝政)이나 관백(關白)의 아버지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에는 어떤 분야에서 노련함, 권위 또는 과거에 큰 공로를 한 사람이나 그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을 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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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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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근대 한국 예술가의 삶을 다룬 책이 나왔을까?


근대(近代).

서양에서 산업혁명 이후인 18세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1945)까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조금 다른 시기를 가리키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흥선대원군의 집권(1864)부터 광복(1945)까지라고 한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에게 붙여진 ‘친일파’ 혹은 ‘빨갱이’ 낙인은 그 혼란기를 버텨온 많은 예술가들의 상당수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죄(原罪)였다.


한국 근대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각자의 시련을 딛고 내면을 벼리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예술가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연대하고 의지하며, 굶어 죽어도 ‘멋’을 유지했던 인간들이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였기 때문에, 세속의 무가치한 경쟁과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속세와 동떨어진 나머지 살아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림이나 조각을 팔지 못해 가난했으며, 심지어 죽고 나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지금도 한국인 대부분이 이름을 알고 있는 근대미술가는 기껏해야 이중섭, 박수근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나. 외국 작가라면 훨씬 더 많은 이름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한국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pp. 5~6]


최근 근대 경성(京城)의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는 기획이 몇 권 나왔다.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비롯해서 황정수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서촌편>(2022)과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북촌편>(2022)는 아마도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네 개의 틀로 분류한 예술가들의 삶


저자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2012년부터 한국 근대작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작가들의 아카이브(편지, 일기, 사진, 노트 등)를 체계적으로 수집 및 구축하는 업무를 최초로 기획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유영국: 절대와 자유] 등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의 개인전과 1930~40년 경성을 무대로 펼쳐진 미술과 문학의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 전시를 계기로 신문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으면서 전시회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책, <샬롱 드 경성>(2023)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된다.

‘1장 화가와 시인의 우정’에서는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이름으로 밀어닥친 신문물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옛 문인(文人)처럼 화가와 시인, 소설가가 장르를 넘나드는 우정과 협업을 통해 서로의 예술 세계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소개한다.

<오감도(烏瞰圖)> 등 초현실주의 시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상(李箱, 1910~1937)과 그의 절친으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야수파 화가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의 우정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 모더니즘의 완성자라는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 삽화가로 명성을 떨친 정현웅(鄭玄雄, 1910~1976), 한국에 모더니즘을 소개한 김기림(金起林, 1908~?)과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통해 복식사(服飾史)를 개척한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 등의 이야기는 낯설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북(在北), 월북(越北), 납북(拉北) 등의 사유로 상당 기간 그들의 작품까지도 금기(禁忌)시 되었기 때문이다.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소설 <나목(裸木)>의 집필 계기가 된,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유작전(遺作展)은 인연이 가져다 준 또 다른 형태의 예술 세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니까.


박수근은 1965년 5월 작고했는데, 같은 해 10월 유작전이 열렸다.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전시회에 갔다가 박수근의 작품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가 있었다. 바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였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서, 박수근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 소설 <나목>을 썼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주부로 살아가던 박완서는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나이 39세가 될 때까지 주부였던 사람이 이런 훌륭한 소설을 썼을 리 없다며, 잡지사에서 집으로 찾아가 진짜 박완서가 쓴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pp. 83~84]



‘2장 화가와 그의 아내’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들과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이며 후원자였던 아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화가는 알아도,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의 배우자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배우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들의 예술세계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그의 아내이자 수필가인 변동림(卞東琳) 아니 김향안(金鄕岸, 19116~2004)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혼 풍습으로 김환기가 일찍 결혼을 하고 딸을 셋 둔 채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변동림에게 선뜻 고백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 그에게 변동림이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셋이 아니라) 열이면 어때? 데려다 잘 교육시키면 되지.” “대신 당신의 아호(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 향안(鄕岸)을 내게 주세요.”

이렇게 해서 변동림은 김환기의 아호를 받아 김향안이 되었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죽음을 맞은 후,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같이 살자’는 희망을 안겨주며,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 중략 ~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그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김환기를 위해, 김향안은 1955년 홀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그녀는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에 김환기를 파리로 불러들였다.

~ 중략 ~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筆寫)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同志)’에 가까웠다. [pp. 158~160]



‘3장 화가와 그의 시대’에서는 야만의 시대를 버텨야 했던 화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혹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남긴 작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도리어 파리에서의 최린(崔麟)과의 불륜 그리고 이에 따른 이혼으로 대표되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은 어떨까?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한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등지고 산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이 지금보다 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서슴없이 가시밭길을 걷는 선구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로 인해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 불행히도 1933년 화실의 화재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타버려서 현재 전하는 그녀의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그녀는 온몸을 불태워 그 시대 여성에게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나아가다가 사그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길은 누군가 걸아 가야 생기는 것이므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었던 이쾌대(李快大, 1913~1965)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난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가 더 나아갈 기회를 앗아갔다. 안 그래도 그의 형 이여성(李如星, 1901~?)이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등에서 활약하다가 월북했는데, 그 자신마저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그가 남쪽에 남을 기회를 사실상 박탈해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지우는데 충분했다.


향토적 서정주의를 추구하여 ‘한국의 고갱’이라는 평가도 있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술 때문에 어이없이 목숨을 날려야 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술 그만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 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pp. 249~250]


일제강점기에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더불어 일본인이 인정하는 3명의 조선인 가운데 하나였던 천재 예술가는 이렇게 주사(酒邪)로 인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4장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은 고통과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오로지 예술을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의 짙고 깊은 ‘운명’을 이야기한다.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삶은 예술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진 이를 보여준다.


“장 선생님은 도와드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버려둔 것뿐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그분이 작품이 안 되고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술만 드실 때입니다. 그때는 소금조차도 한 번 안 찍어 잡수시지요.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 후에는 다시 캔버스에 밤낮없이 몰두하시지요.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는 그의 삶뿐 아니라 작품에 철저하게 녹아 있다. 1958년에 그린〈까치〉라는 작품을 보자. 이중섭에게는 ‘황소’가 화가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었다면, 장욱진에게는 ‘까치’가 그러했다. 장욱진은 마을 주변을 낮게 날며 세상 사람을 관찰하는 이 작고 영리한 새를 좋아했다. 그림 속 까치는 그믐날 깜깜한 밤에 홀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일견 조형적으로 단순하고 귀여운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는 화면 전체를 밤의 어둠으로 새까맣게 뒤덮은 다음, 매우 가느다란 도구로 수천 수만 번의 손놀림을 통해 검은 물감을 ‘긁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증맞은 까치 한 마리를 남기기 위해, 도대체 화가는 얼마나 여러 번 화면을 긁고 또 긁었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작업하길 좋아했던 그는 이 작은 화면을 긁느라 얼마나 많은 새벽을 홀로 지냈을까. 작가의 철저한 고독과 치열한 내면세계가 전해져 내게 이 그림은 도무지 귀엽지가 않고, 도리어 아프고 처절해 보인다. [pp. 288~289]


나혜석처럼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화가 일무(一無) 이성자(李聖子, 1918~2009)의 삶도 기구했다. 자식을 경성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한 분가가 끝내 별거로 이어졌다. 남편이 서울 집에 있는 세 아들을 인천으로 데려가자 그녀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떠나 버렸다. 예상밖에 그녀는 이곳에서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녀의 대표작 <내가 아는 어머니>가 1962년 파리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열린 [에콜 드 파리]에 출품되어 파리 화단의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성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동시에 어머니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세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붓질을 한 번 하면서, 이건 내가 우리 아이들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고,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렸다”고 이성자는 말했다. 그녀는 자식을 키우던 모든 열정을 오롯이 작품을 생산하는 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성자는 진정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향이 그립고 그래서 슬프지 않으냐는 파리 친구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

그런 ‘초월’의 세계관이 그녀의 삶을 지탱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세 아들은 어땠을까? 진짜 밥을 주는 대신, 밥 주듯이 그림을 그린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세 아들은 진심으로 예술가로서의 이성자를 존경했다. 물론 성장기에는 고난이 있었겠지만, 세 아들은 결국 이성자를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라났다. 1965년, 14년 만에 성공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이성자의 귀국전을 열어 준 것도 첫째 아들 신용석(1941~ )이었다. [pp. 322~323]


나혜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보여준 셈이다.


마치 스토리텔링이 있는 전시회 네 개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전시회장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옆에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해당 작품을 그린 이와 작품의 배경 등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도 힘든 시대였기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고, 어떤 명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남긴,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빛나니까.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억(記憶)’이라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한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작품을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열연한 저격수 안옥윤이 남긴 명대사 “모르지.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처럼 그들의 신념(信念)을, 그들의 노력을 전달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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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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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 발달에는 ‘로마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족의 로마에 대한 로망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로망이 생기게 된 것에는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도자기조차 미제를 원해 코넬사의 강화유리 제품을 새롭고 좋은 도자기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라는 객관적인 문명의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게르만족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슬라브족의 심층심리에 새겨져서 그들이 각각 제2의 로마[신성로마제국], 제3의 로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들은 각자 자기방식대로 로마 제국에 정착했다. 그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가 선양(禪讓)받아 위(魏)나라를 세운 것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였던 소(小)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小) 피핀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려 피핀 3세로 즉위했다. 그렇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ippinus Ⅲ, 재위 751~768)와 그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디아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774)을 공략,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는 건축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정리, 발전시키고 있던,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기술을 서유럽 전체로 퍼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어떻게 10세기 프랑크 왕국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프스 북쪽에 살다가 56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를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입니다.

~ 중략 ~

6~8세기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발생한 건축을 롬바르디아 건축이라고 부르는데, 왕국은 국가차원에서 건축 장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육성하는 전통이 있어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특히 조적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건축의 조적술은 로마 제국보다는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에 가까웠습니다.

콘크리트로 중심 벽체를 만들고 그 외벽에 높이가 낮은 벽돌을 쌓는 방식의 로마 제국의 조적술은 강도는 좋았지만, 작업이 복잡하고 벽체가 두꺼워져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을 오직 조적으로만 벽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벽돌 하나의 높이가 높고 콘크리트 작업이 없어서 공사가 단순하고 소요 시간이 적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의 조적술을 배우고 정리해 발전시켰습니다. [pp. 42~43]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싹도 카를루스 대제 시기에 발생했다. 그는 아헨 왕궁 성당(Palatine Chapel in Aachen)을 건설했는데, 로마 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장방형 평면의 성당)을 따르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팔각형 평면과 복층 갤러리를 수용,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맹아(萌芽)를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구조와 명칭

 

출처: <로마네스크 성당>, p. 37


 

각 국가별 로마네스크 성당  


로마네스크 성당의 특징으로는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한 점, 건물 내부를 떠받치기 위하여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한 점, 또 아치 때문에 수평으로 발생하는 힘에 견딜 수 있도록 기둥과 벽을 두껍게 구축하는 반면 창문을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런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군이나 성지 순례에 의해 여러 양식이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특히 수도회의 융성과 활약으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다.


야고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낸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의 머나먼 뱃길 끝 예루살렘보다도, 알프스의 높은 산 너머 로마보다도, 지척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네 갈래의 고정적인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 순례길들이 지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곳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순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p.101]



프랑스의 로마네스크는 ‘보편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두 갈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보편주의는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 지방의 로마네스크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나뉜다. 이러한 프랑스 남부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은 11세기 전반부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이런 보편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는 노르망디 지방의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Abbaye Saint-Etienne de Caen)’와 부르고뉴 지방의 ‘제 3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Ⅲ)’로 대표된다.

지역주의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성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홀(hall) 교회 양식의 ‘생사뱅 수도원 성당(Abbaye de Saint-Savin-sur-Gartempe)’과 네이브(nave)1)의 베이(bay)2)마다 천장이 석조 돔으로 올려진 돔(dome) 교회 양식의 ‘앙굴렘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이 있다.



독일 북부의 초기 로마네스크는 보통 ‘오토 건축’이라고 불린다. 웨스트워크 자리에 이스트엔트의 성가대석과 앱스의 구성이 한 번 더 들어가는 ‘더블 엔더’가 특징인 이 양식은 작센 지역의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성당(Michaeliskirche in Hildesheim)’과 라인란트 하류 지역의 ‘트리어 대성당(Trierer Do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성향의 오토 건축은 ‘제1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Ⅰ)’ 의 완공으로 보편주의로 성장했지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은 ‘제2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Ⅱ)’이다.


국가 차원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이탈리아를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는 보편 교회인 로마와 가까운 프랑스 교회와 독일의 지역 교회가 긴장 관계에 놓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이러한 대치는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났는데, 제3 클뤼니 성당과 제2 슈파이어 성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3 클뤼니 성당은 보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종교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제2 슈파이어 성당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종합한 것과 그 결과로 모두 대형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제2 슈파이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독일 로마네스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p. 173~177]


덧붙이자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프랑스 로마네스크가 보여준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와는 달리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보다는 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냈다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수직성과 수평성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와 함께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p. 180]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과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다. 이들 영국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기하학적이고 장식 위주의 ‘영국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특함이 묻어나 있다.

첫째,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되어 슈베(chevet)3)가 동쪽으로 길게 확장되어 있다.

둘째, 네이브도 확장되어 있다.

셋째,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를 통해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대형화란 천장고를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성당의 길이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한 것입니다.

영국 로마네스크는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입니다. 프랑스는 석재의 물질성과 구조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수직성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벽돌을 재료로 수평성을 유지했습니다. [p. 197]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등의 전통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보편주의가 아닌 지역주의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당으로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성 암브로시오 바실리카(Basilica de Sant’Ambrogio)’, 토스카나 지역의 ‘산미니아토 바실리카(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는 알프스 이북의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로마 고전주의와의 연속성이 훨씬 깊습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 로마 고전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월을 구성하는 아치, 오더, 볼트 등의 요소들과 바실리카에서 발전한 라틴 크로스 평면 역시 로마 고전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로마네스크의 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10]


또한,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지중해의 전통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두 번째 특징은 지역주의입니다.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 토스카나의 중부 지역, 그리고 시칠리아가 주도한 남부 지역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두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초기와 전성기라는 시대적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pp. 205~210]


중세 유럽이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와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각 국가별로 지역주의의 싹이 드러난 것이 훗날 국민국가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소개된 성당들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 그리고 로마네스크 성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좀 더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3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에 방문해서 보다 느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더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1) 네이브(nave, 身廊):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성당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2) 베이(bay):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평면의 한 단위를 의미한다.


3) 슈베(chevet): 대성당에서 본당 동쪽 끝의 반원형 부분, 두부(頭部)라고도 번역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祭臺)와 그 근처의 성가대석을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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