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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리커버) 대산세계문학총서 1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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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이하 ‘보들레르’)!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미술비평가 중 하나이자 ‘현대시의 시조’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악마의 옹호를 자처한 반항적인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 바로 이 책,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다. 그의 이미지만으로는 악마주의적이거나 다소 외설적인 시(詩)들이 가득 찰 것 같지만, 실제 <악의 꽃>을 펼치면, 반항적인, 젊은 락스타의 노래 같은 느낌을 주는 시(詩)가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알바트로스(L’ALBATROS)>라는 시(詩)가 있다.

알바트로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엽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 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p. 47]


우리가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르는, 날개를 펼치면 가장 큰 새인 알바트로스를 제목으로 하는 이 시(詩)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과 공존(共存)하려는 동양이라면 이렇게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그저 보고 즐겼을 텐데자연을 정복(征服)의 대상으로 여기는 서양이기에 선원들은 그 새를 잡아 갑판에 내려놓는다. 시(詩)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날개를 꺾거나 해서 알바트로스가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보들레르는 이 무기력해진 알바트로스에게 자신을 투영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라고 한탄한 것이 아닐까? 혹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번뜩이는 재능을 가진 자신이 대중의, 문단의 평가에 의해 날개가 꺾일 미래를 어렴풋이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 사창가를 드나들다가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전 성병에 걸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방종한 품행 때문에 그의 작품에도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악의 꽃>에서 삭제된 시(詩)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출간으로 공중도덕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벌금과 함께 시(詩) 여섯 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삭제된 시(詩) 중 하나인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A CELLE QUI EST TROP GAIE)”를 보면, 굳이 삭제해야 할 만큼 음란하고 저속한 시(詩)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


그대 머리, 그대 몸짓, 그리고 그대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처럼 아름답다;

청명한 하늘에 신선한 바람처럼

그대 얼굴엔 웃음이 노닌다.


그대 곁을 스쳐가는 침울한 행인도

그대의 팔과 어깨로부터

빛처럼 솟아나는

그 건강에 황홀해진다.


그대 옷차림에 뿌려놓은

요란스런 색깔은

시인의 마음에

꽃들의 발레 같은 환영을 던진다.


그 야단스런 옷들은

얼룩덜룩한 그대 마음의 표상인가;

나를 황홀하게 하는 쾌활한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미워한다, 그대 사랑하는 만큼!


때로 아름다운 정원에서

무기력을 떨치지 못할 때면,

나는 태양이, 빈정거리듯,

내 가슴을 찢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봄과 신록이

내 마음에 그토록 창피를 주었기에,

나는 한 송이 꽃에

[자연]의 교만함을 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날 밤

쾌락의 시간이 울릴 때,

보석 같은 그대 몸 곁으로

겁보처럼 살그머니 기어가,


쾌활한 그대 살을 벌주고파

내맡긴 그대 젖퉁이를 멍들게 하고파,

그대의 놀란 옆구리에

움푹한 커다란 상처를 내어주고파,


그리고 아 현기증 나는 쾌감이여!

더욱 눈부시고 더욱 아름다운

그 새 입술을 통해, 누이여,

그대에게 내 독을 부어 넣고 싶어라! [pp. 351~352]


아무리 읽어봐도 왜 삭제되는, 일종의 기록말살의 판결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여성의 동성애를 노래하는 “레스포스(LESBOS)”나 “천벌받은 여인들(FEMMES DAMNEES)”은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풍기문란죄의 적용을 납득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詩)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그가 <악마의 연도(煉禱)(LES LITANIES DE SATAN)>에서 언급한 악마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악마와 달리 하나님에 의해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 소위 ‘루시퍼(Lucifer)’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B.C. 183)처럼 핍박 받는 영웅의 이미지도 살짝 곁들인.
어쩌면 악마를 그렇게 묘사했기에 악마를 옹호했다는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분석하기에는 난해하지만, 가볍게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보들레르에 대한 선입견은 버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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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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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은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 <으제니 그랑제(Eugenie Grandet), <고리오 영감(Le Pere Goriot)> 등으로 유명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는 이 책,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1831)은 사실주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소유자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만, 그 때마다 소유자의 목숨도 조금씩 사라진다는 나귀 가죽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원제목을 고려하면, ‘나귀 가죽’이 아닌 다른 이름, 예컨대 ‘괴로움의 가죽’이 더 적절한 번역일지도 모른다. 불어사전을 펼쳐보면, ‘peau’은 ‘가죽, 피부’라는 뜻을, ‘chagrin’은 ‘괴로움, 슬픔, 신경질, 우울’이라는 뜻을 각각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제목이 프랑스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래서 번역자의 해설을 펼쳐보니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chagrin’은 가죽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로써

~ 중략 ~

(소설 속에서 가죽은 대개 la peau de chagrin이라고 불리지만 그냥 le chagrin혹은 le peau라고도 불린다), 엄밀히 말하면 동어 반복인 la peau de chagrin이라는 표현은 작가 발자크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가죽을 가리키는 chagrin이라는 단어에 그것과 철자가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슬픔, 번민’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단어를 겹치려 한 데 있다. [pp. 444~445]


라고 되어 있다. 마치 다이허우잉[戴厚英, 1938~1996]의 <사람아 아, 사람아! [人啊, 人!]>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쨌든, 번역자가 원제목을 직역하지는 않았지만,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은 이 책에 정말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가난과 절망으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젊은 ‘라파엘’이 자살하려다 우연히 들어간 골동품 상점에서 늙은 주인으로부터 ‘나귀 가죽’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 혹은 행운 총량의 법칙

어디선가 사람은 각자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이를 초과해서 누릴 경우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주어온 옷을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하루 건너 끼니를 때우면서 60살까지 살 운을 타고난 아이가 만석지기 양반 가문의 장손(長孫)으로 태어나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바람에 그 운을 다 써서 돌잔치에서 급사(急死)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나귀 가죽’은 이런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을 나귀 가죽을 매개로 유형화했다고 느껴진다.

조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강철의 연금술사>(2003)의 유명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떠올려도 된다.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알폰스 엘릭(Alphonse Elric)은


사람은 그 무언가의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연금술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라고 말한다. ‘나귀 가죽’처럼 욕망의 실현을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것 또한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만약 당신에게 누군가 이 소설에 나오는 ‘나귀 가죽’을 소유할 기회를 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이 ‘나귀 가죽’에 새겨진 


만일 그대가 나를 소유하면 그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신이

그렇게 원하셨느니라.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의 목숨이 여기 들어 있다. 매번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가 살날도 줄어들 것이다.

나를 가지길 원하는가?

가져라. 신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아멘! [p.70]


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읽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는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귀 가죽’의 소유자가 될 기회를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당장의 욕망에 눈이 뒤집혀서 그런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1/456의 확률로 456억 원을 받게 되는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보다 더 명확하게 원하는 것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지는, ‘나귀 가죽’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욕망과 수명의 밸런스를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나귀 가죽’을 획득하는 것은 손쉽게 성공적인 삶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문제다. 거의 성인(聖人)급으로 절제해야만 욕망과 수명의 균형을 이루면서 ‘삶’이라는 담장 위를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한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면 자신의 ‘나귀 가죽’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있을지 보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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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50
카를로 콜로디 지음, 아틸리오 무시노 그림,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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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권리와 책임의 다른 이름

우리에게 ‘피노키오’로 기억되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이하 ‘피노키오의 모험’>는 흔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우화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읽은 <피노키오의 모험>은 어린 시절과 다르게 다가왔다.

꼭두각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끈’과 ‘조종자’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어쩌면 이것이 꼭두각시로 만들어진 존재의 숙명일 것이다. 그런데 피노키오는 다른 꼭두각시 인형과 달리 기적적으로 스스로 말할 줄 알고, 움직일 줄 알고,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로 태어났다. 아니,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지기 전, 늙은 목수 안토니오 혹은 버찌 할아버지에게 나무토막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래서 피노키오는 마치 인간처럼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태초에 자유의지가 부여된 아담과 이브가 신이 정한 길을 벗어나 뱀의 유혹에 빠진 것처럼 피노키오도 다양한 유혹에 넘어간다. 물론 자유의지로 진흙탕에 뛰어들었으니 그 대가도 아담과 이브처럼 당연히 치러야 했다.

이 책, <피노키오의 모험>은 36개의 에피소드로 그 과정을 담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피노키오라는 주인공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고 인간이 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1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당대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풍자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우리가 단순히 동화로 인식하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원래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15번째 에피소드로 끝날 예정
이었다고 한다.
15번째 에피소드 마지막은


피노키오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두 다리를 쭉 뻗었어요. 그리고는 한 번 크게 버둥거리더니 굳어 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답니다. [pp. 99~100]


로 끝나는데, 누가 봐도 이것은 피노키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결말이 나오게 된 것은 <피노키오의 모험>이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 1826~1890)가 살던,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피노키오부터 ‘이탈리아인’하면 떠올리는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피노키오는 아직 ‘이탈리아인’이라는 소속감이 갖춰지지 않은, 갓 생겨난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 1861~1946)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새롭게 열강이 되었다는 ‘뽕’에 취해 자제할 줄 모르는 이탈리아 사회와 피노키오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판사 앞에서 자신이 당한 몹쓸 사기 사건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어요. 도둑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법의 심판을 요청했어요.

판사는 아주 친절하게 피노키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어요. 피노키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고, 피노키오를 가엽게 생각하고 동정을 표했지요. 피노키오가 설명을 다 끝내자 판사는 손을 뻗어 벨을 눌렀어요.

벨 소리에 곧 병정 옷을 입은 불독 두 마리가 나타났어요.

저 불쌍한 악마는 금화 네 닢을 도둑맞았다. 그러니 저자를 잡아서 즉시 감옥에 가두어라.” [pp. 130~131]


에서는 판사가 사기와 강도 행위를 눈감아 주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둔다. 이 에피소드가 사법의 집행자인 판사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일단 처벌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풍자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사법의 부정을 상징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저자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가 어린이들이 평온, 무사하게 자라나기 힘든, 험난한 사회라고 환경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바보 잡기 도시를 다스리는 젊은 황제가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자 큰 잔치를 베풀었던 거예요. 조명을 환히 밝히고, 폭죽을 터트리고, 경마와 커다란 앞바퀴가 달린 자전거 경주 대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황제는 승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감옥 문을 열고 도둑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명령했어요.

~ 중략 ~

피노키오가 말했어요.

죄송하지만 저도 도둑이에요.”

“그렇다면 충분히 자격이 되지.”

교도관은 정중하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피노키오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그리고는 감옥 문을 열어 피노키오를 내보내 주었답니다. [pp. 132~133]


에서 보이는 모습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된 이후의 남부 이탈리아 사회를 풍자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프랑스에 뿌리를 둔, 북부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가 주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통일운동의 지지자인 지주층을 의식, 농민들이 원한 토지개혁 등 사회 구조 개혁은 외면하면서도 통일 자금 확보를 위해 곡물세 등을 부과했다고 한다. 이에 반발하여 남부에서는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브리간타조(Brigantaggio)’라는 게릴라 반란군을 통한 저항이 발생했다. 즉, 이 에피소드는 이탈리아 통일과 이에 따른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게릴라 반란군의 발생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이를 풍자한 것이 아닐까?

이처럼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어린이들이 평안 무사하게 자라기 힘든 환경으로 보았기에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도 피노키오가 죽는 새드 엔딩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를로 콜로디는 끝내 피노키오를 부활시켜야 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사건>(1894)에서 셜록 홈즈를 죽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처럼 독자들의 요청으로 주인공을 부활시킨 셈이다. 그런데 카를로 콜로디의 경우, 피노키오를 부활시키면서 유령이 푸른 머리의 요정으로 변화
하는 등 동화적 요소가 향신료처럼 뿌려지는 변화가 발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은 <피노키오의 모험>을 단순히 동화로 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1940)의 역할이 크다. 그에 의해 <피노키오의 모험>이 가지고 있던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이 거세되었으니까.



꼭두각시가 아닌 인간, 피노키오의 입장에서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분명히 어떤 버전을 선택해도 새롭게 만들어진 결말은 똑같다. 요정이 꼭두각시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활기찬 모습의 소년으로 바꾸어 준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해피 엔딩일까?
이야기 속의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인간이 된 피노키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피노키오는 다섯 달 넘게 매일 아침 해 뜨기 전에 일어났어요.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고, 아빠의 건강에 아주 좋은 우유 한 잔을 벌어 오기 위해서였지요. 이것만이 아니었어요. 남은 시간에 갈대로 광주리와 빵 바구니 엮는 법을 배웠고, 바구니를 만들어 번 돈을 아끼고 아껴서 생활비로 썼어요. [p. 296]


꼭두각시 시절에 했던 노동을 반복하는, 피곤한 노동자의 삶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물론 요정이 은화 40개를 금화 40개로 바꿔주었지만, 5개월 정도 노동하고 은화 40개를 저축할 수 있었다면, 금화 40개도 신세를 바꿔줄 만큼 큰 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피노키오의 입장에서 꼭두각시 인형에서 인간으로의 신분상승(?)이 보상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왠지 카카오99% 초콜릿을 한 입 머금은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1) 원래 결말은 피노키오가 여러 잘못을 저지르다 결국 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것이었으나, 반응이 너무 좋았기에 편집자의 요구로 피노키오가 파란 요정의 도움을 받아 되살아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15번째 에피소드에서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피노키오에게 “나도 죽었어”, “ 날 실어 갈 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6번째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알아 둘 필요가 있겠네요.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천 년 전부터 그 숲에 살고 있는 아주 마음씨 고운 요정이었어요.)라는 추가 해설이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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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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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눈부신 안부>의 화자(話者)인 이해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 이해리를 잃었기에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시선을 더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도 크지만,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더 클 것이다. 그렇기에 모범생이던 큰 딸 이해리를 가스 폭발 사고로 잃은 해미의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별거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로를 볼 때마다 그 아픔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만 힘겹고 언니를 잃은 해미는 괜찮을까? 해미는 언니에게 “땡땡이 치지 못하는 범생”이라고 놀렸기 때문에 언니가 조퇴하고 거리를 거닐다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여동생 해나까지 의식하면서, 그녀는 멀쩡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괴로움을 삭혀야 했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 30]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옮겨간 곳은 독일 중부의 G시였다. 수많은 장소 가운데 G시를 선택한 것은 엄마의 언니인 ‘행자 이모’[오행자]가 정착한 곳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도시에서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가족을 의식해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바둑에서 훈수 두는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고독과 불안이 잘 보이는 것일까? 간호조무사로 건너가 의사로 정착한, 행자 이모는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진짜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 바로 그녀보다 한 살 위인, 마리아 이모[최말숙]의 딸 ‘레나’였다. 이렇게 만난 레나와 친해진 후 해미에게 가상이 아닌 현실의 친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 40]


선의의 거짓말이라지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얘기가 모순되지 않도록 해미는 자신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디서나 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짓말을 할 때마다 기록을 하는 해미를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레나는 해나에게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임선자]의 아들 ‘한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녀의 첫사랑을 만나기를 원하는 한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갔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첫사랑이 누구인지를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이었다.


석사학위까지만 받기로 아빠에게 약속하고 독일로 건너왔던 엄마는 학위를 따게 되면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해나는 한국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 109]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의 가족은 갑자기 한국, 정확히는 아빠가 사는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느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境界人)이 된 해미는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게 된다. 심지어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미묘한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친구와 연인 사이의 선(線)을 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우재는 해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해미는 상자에 담아 묻어두었던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떠올리고, 늦었지만 그녀의 첫사랑 K.H.를 다시 한번 찾아본다.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p. 299]


선자 이모에게 들은 힌트로 그 사람의 이름이 K.H.로 시작되는 수학시간에 쓰는 용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해미는 K.H.를 ‘기호(記號)’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해미는 K.H.가 ‘근호(根號, 제곱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내 K.H.를 찾아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로소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은 셈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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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킷 - 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작 텍스트T 7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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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의 상실, 비스킷이 되어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성제성(이하 ‘제성’)은 남들보다 예민한 청각으로 인해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 ‘소리 강박증’이라는 청각 관련 질환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 예민한 청각 덕분에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이라고? 수련을 통해 닌자[忍者]가 된 사람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된 것일까? 아쉽게도 그들은 닌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수련을 한 것도, 특별한 약을 먹거나 광선을 쐰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존재감이 옅어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나는 그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다. [p. 7]


이들 비스킷을 제성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나는 비스킷을 소리로 인지한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안다. 일단 그 소리를 인식하면 곧이어 모습이 보인다.

비스킷은 대체로 형체가 희미하다. 희미한 정도는 비스킷이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비스킷의 상태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딱히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이 “어? 너 여기 있었어? 몰랐네.”라고 말하는 단계이다. 몸 선이 흐리고 전체적으로 선명하지 않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1단계 비스킷을 만나면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2단계는 조각난 상태. 열 명 중 다섯 명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불안정하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약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해서 보았어도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령이나 초자연 현상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2단계에 해당한다. 종종 목소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주변인들이 깜짝 놀랄 때도 있다.

3단계는 부스러기 상태. 존재감이 없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인 상태다. 투명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잘 보이지 않아 나도 소리로 찾아내기 힘들다. 이때까지 비스킷 3단계인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비스킷 3단계는 오랫동안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에 주위에서 덩달아 관심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사라진 비스킷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더욱 숨기는 악순환에 빠진다.

지금까지 관찰할 바로는 비스킷의 단계는 수시로 변한다.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다가 재건되기 때문인 것 같다. [pp.7~9]


이런 비스킷을 찾아내다니 뭔가 대단한 능력처럼 보인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과는 달리 제성에게는 자비에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제성은 어린 시절 길을 헤매다가 개에게 위협당하는 비스킷인 김효진(이하 ‘효진’)을 구해주었다. 문제는 비스킷 3단계에 도달한 효진이는 투명할 만큼 존재감이 흐렸기에, 개 주인을 비롯한 이를 본 사람들이 제성이 그냥 짓기만 하는 개를 뛰어가서 일방적으로 걷어찼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 인해 제성은 ‘비스킷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국 제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비스킷이 된 이를 구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 것으로 채워나간 셈이다. 분명히 비스킷이 된 이들을 구하는 것은 선의(善意)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복수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형식으로 복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수는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주는 쾌감과 허무함에 중독되면 존재감을 증폭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물론 복수는 하지 않더라도 비스킷을 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 18921~1984)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글처럼. 너도, 나도 비스킷이 될 수 있으니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민단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스킷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채식주의를 선언했다가 튄다는 이유로 학폭의 대상이 된 서도주(이하 ‘도주’)나 대입을 앞두고 부모님의 절대적인 관심을 받는 언니와 매 순간 신경 써야 하는 우악스러운 동생과는 달리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구걸하듯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배신감을 느낀 조제 혹은 이지안(이하 ‘지안’)처럼 스스로 존재감을 지우는 경우도 있다. 도주의 경우 학폭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지안처럼 자신에게 덜 신경 쓰는 부모가 원인인 경우에는 도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그렇기에 제성의 방식은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미숙함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제성에게 영화 <엑스맨>속의 자비에 교수처럼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불필요한 악연들은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들만이 비스킷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른들이 더 많이 겪게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해고하는 대신,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취급을 하는 방식으로 퇴사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 혹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짓눌려 결국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을까?


눈으로 보았어도 믿을 수 없는 존재. 보이지 않아도 좌시해선 안 되는 존재. 그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고, 우리의 이웃이라는 걸 잊은 듯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만 모두가 공감하는 한 가지 사실은 누구도 비스킷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스킷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소외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용기마저 잃고 만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자신을 지켜 낼 힘을 잃으면서 단계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지켜 내기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던 쓸쓸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모습이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그 때 필요한 건 어디로 나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득함을 함께 바라보고 손잡아 줄 수 있는 누군가다.

누구나 비스킷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비스킷을 도울 수 있다. 그 전제를 잊지 않으면 모습이 사라져도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건강하게 서서히 회복할 수 있다. 그걸로 반은 성공한 거다. [pp. 217~218]


(주)마크로밀엠브레인이 올해 4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의 59.2%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1)고 한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회가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비스킷’도 이러한 사회 해체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수단의 차이가 있어도 우리 사회 역시 ‘비스킷’을 만드는 사회이기에 서점에 가면,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 충페이충[叢非從]의 <자존감 회복 수업>, 김태형의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처럼 ‘자존감’을 다루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이런 종류의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위에 또 다른 ‘비스킷’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해서 씁쓸했다.



 

1) 정현진, “[청년고립24시]10명 중 6명 ‘외롭다’… 관계단절·박탈감 호소”, <아시아경제> 2024.05.05 (https://v.daum.net/v/2024050506302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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