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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2권 탐욕과 정복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ㅣ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2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평점 :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 호세 리잘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은 중국계 메스티조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유학 갔던 스페인에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angere, ‘Touch Me Not’의 라틴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소설 때문에 그는 퇴학당하고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귀국한 후 그는 필리핀 동맹(La Liga Filipina)를 조직,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과 스페인 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자치 운동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896년 스페인 식민지 군에 의해, ‘KKK’ 혹은 ‘카티푸난(Katipunan)’이라는 무장혁명을 위한 비밀조직의 배후로 몰려 공개 총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나의 마지막 인사’로 알려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스페인 시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인사
안녕, 나의 사랑하는 조국, 태양이 쓰다듬는 땅,
(Adios, Patria adorada, region del sol querida,)
동방의 바다의 진주,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이여!
(Perla del mar de oriente, nuestro perdido Eden!)
기꺼이 너에게 나의 슬프고 억눌린 삶을 바치노라, …
( A darte voy alegre la triste mustia vida, …) [p. 57]
최강의 군사강국, 식민지가 되다[미얀마]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은 버마였다. 라이벌인 시암(태국)은 버마를 상대로 패권 싸움을 벌였지만 열 번의 전쟁이 일어나면 아홉 번은 버마의 승리였다. [p. 64]
9세기 중반 운남(雲南)의 남조(南詔)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지역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당시 버마 남부에는 몬(Mon)족이, 중북부에는 퓨[Pyu, 驃]족이 살고 있었는데, 버마족이 퓨족을 대체하여 중북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 버마족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왕조가 바간(Pagan) 왕조다. 오늘날 미얀마의 원형인 바간 왕조는 11세기 아노라타(Anawratha Minsaw, 1014~1077)가 세웠다고 한다. 아노라타는 전통신앙인 ‘낫(Nat)’ 신앙을 정리하고 소승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4세기 초 몽골에 의해 바간 왕조가 멸망한 후, 북부의 버마족 중심의 아바[Ava, 상부 버마]와 남부의 몬족의 바고[Pegu, 한타와디(Hanthawaddy) 왕조, 하부 버마]가 각축을 벌였다. 한때 바고가 아바를 격퇴하고 융성했으나 따옹우(Toungoo)의 버마족이 타빈쉐티(Tabinshweti, 1516~1550)를 중심으로 반격을 가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두 번째 통일왕조인 따옹우 왕조이다. 타빈쉐티의 처남 바이나웅(Baynnaung, 1516~1581)에 의해 따옹우 왕조는 인도의 마니푸르, 버마 서남부의 아라칸(Arakan) 왕국, 라오스의 란쌍 왕국,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Lan Na) 왕국 등을 연이어 정복하여 당대 동남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버마의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정복군주였던 바이나웅의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한때 속국이었던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활약 등으로 타격을 입어 쇠약해졌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몬족이 독립하여 1740년 후(後)바고[= 부흥 한타와디] 왕조를 세웠다.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은 후(後)바고 왕조에 의해 몬족의 통일 왕조가 생길 뻔 했지만, 목소보(Moksobo)의 아웅제야(Aung Zeya, 1714~1760)가 이끄는 버마족에 의해 후(後)바고 왕조가 멸망했다. 이후 몬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웅제야는 후(後)바고 왕조에 무기를 제공했던 프랑스와 영국을 몰아내고 버마 최후의 왕조인 곤바웅(Konbaung) 왕조를 세운 후, ‘미륵불’이라는 뜻을 가진 알라웅파야(Alaungpaya, 1714~1760)으로 개명했다. 그의 아들인 신뷰신(Hsinbyushin, 1736~1776)은 중국 청(淸)나라의 건륭제(乾隆帝)의 침략을 4차례 물리치고,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왕국과 라오스의 비엔티안(Vietiane)왕국을 점령[1764]했으며,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1767]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버마-시암 전쟁(1785~1786) 이후 인도와 인접한 아라칸 지방(1785), 마니푸르(1814), 아삼 지역(1817)까지 정복하여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도의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여긴 영국과 전쟁[1차 영국-버마 전쟁(1826), 2차 영국-버마 전쟁(1852)]이 벌어졌다. 여기서 잇달아 영국에게 패배한 후 점차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국권을 침탈당해 마침내 버마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물론 버마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버마 최후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돈(Mindon, 1808~1868)와 그의 이복동생 카나웅(Kanaung Mintha, 1820~1866)에 의해 개혁이 진행되었다. 카나웅은 민돈 왕의 후계자 자격으로 행정과 군사를 맡아 버마를 민돈 왕과 사실상 공동통치하면서 근대적 상비군의 창설, 전신선 설치 등의 혁신을 이루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에 눈이 어두운 민돈의 두 아들, 밍군(Myingun)과 밍곤다잉(Myingundaing)에 의해 국무회의 도중에 카나웅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당하면서 마지막 불꽃은 허무하게 꺼졌다.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가, 라오스
5~8세기경 타이족의 일파인 라오족이 라오스 중북부로 이주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353년 파응움(Fa Ngum)에 의해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을 가진 란상(Lanxang) 왕국이 세워졌다.
라오스 지역은 내륙인데다 산악지형이 대부분이라 경제적으로 풍요할 수가 없었다. 외적의 침입으로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앤을 옮겨 다녔다. 그나마 ‘란상’이 라오스 역사에서 가장 빛난 왕국이었다. [p. 79]
오늘날 라오스의 정체성을 형성한 이 국가는 당초에 느슨한 봉건적 연맹체인데다가 해외세력과의 접점이 없는 내륙국가였기에 국가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18세기 초에 이르면 왕위 계승 분쟁으로 북부의 루랑프라방(Luang Phrabang) 왕국, 중부의 비엔티앤(Vientiane) 왕국, 남부의 참파삭(Champasak)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비엔티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차오 아누윙(Chao Anouvong, 세타티랏 5세, 1767~1829)은 태국과 베트남의 이중 속령(屬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란상 왕국의 재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참파삭 왕국 지역을 재통합한 후 태국과 전면전을 펼쳐 한때 방콕에서 108km떨어진 사라부리(Saraburi)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태국의 반격으로 끝내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라오스 국민영웅이 보여준 마지막 저항은 이렇게 끝났다.
개혁군주 촐라롱꼰 [태국]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세워진 왕조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짜그리(Chakri) 왕조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인 몽쿳(Mongkut, 라마 4세, 1804~1868) 시대부터 개혁이 시도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이 그 개혁을 이어받아 근대적 국가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촐라롱꼰은 귀족연합의 대표 정도였던 짜끄리의 왕권을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격상시키고, 노예제도와 평민이 지역의 귀족들에게 동원되어 공짜 노역(corvee)을 제공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대식 지도를 작성해서 영토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등 근대화에 몰두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개혁군주로 꼽히고 있다.
전근대적 만달라의 말단을 희생하여 근대적 영토의 주권국가를 확립한 것, 이것이 출라롱꼰의 업적이다. 이런 기3이 있었기에 운7을 활용하여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p. 180]
남비엣[南越], 남진(南進)하다 [베트남]
오늘날 베트남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북부의 남비엣[南越]이 중부의 참파 왕국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끝내 남진하여 참파의 흔적을 지워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남비엣과 상업에 치중한 인도의 힌두문명권에 속하는 참파, 두 나라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인 리(Ly) 왕조는 베트남에서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한 왕조다. 훗날 8대 혜종(惠宗)의 외척 짠투도[陳守度]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혜종의 숙부 건평왕(建平王) 리롱뚜엉[李龍祥, 1174~?]이 일가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짠투도에 의해 시작된 짠[陳] 왕조는 ‘정송가도(征宋假道)’를 요구한 몽골의 침공을 베트남의 국민 영웅 짠홍다오[陳興道, 1228~1300]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격퇴했다.
광남국(廣南國)이라고 불리던 응웬[阮] 정권의 후예인 응웬폭안[阮福暎, 1762~1820]은 삐뇨 드 베엔(Pignead de Behaine, 1741~1799) 신부의 지원 등을 받아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웬[阮] 왕조를 열었다. 지아롱 황제[嘉隆帝]로 즉위한 그의 장남 응웬푹깐[阮福景, 1780~1801]은 어릴 때부터 삐뇨 신부를 따라 유럽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동생이 민망 황제[明命帝, 1791~1841]로 등극했다. 민망 황제는 철저한 유교 보수주의자였기에 지방 자치를 허용한 총독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쳤으며, 수백 년에 걸친 남진(南進) 정책을 완성하여 오늘날의 베트남 영토를 확정했다. 또한 서양과의 교류를 차단했으며, 가톨릭을 박해하여 대규모 순교자를 양산했다. 그의 영향인지 쇄국주의 강경파 대신들에 의해 5대 황제 뒥둑[育德, 1852~1883]이 사흘 만에, 6대 황제 히엡후아[協和, 1847~1883]는 4개월 만에, 7대 황제 키엔푹[建福, 1869~1884]은 7개월 만에 각각 죽음을 당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함니[咸宜, 1871~1944]로 깐부엉[勤王] 운동의 리더이며 가장 과격한 쇄국주의자인 똔땃뚜옛[尊寶說, 1839~1913]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서 함니는 똔땃뚜옛을 따라 3년간 게릴라전을 치렀지만, 끝내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는 1887년 베트남 지역(남부의 코친차이나, 중부의 안남, 북부의 통킨)에 캄보디아 왕국을 포함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발족시켰다. 이어 주(駐) 라오스 프랑스 부공사였던 오귀스뜨 빠비(Auguste Pavie, 1847~1925)의 활약으로 1893년 태국의 지배를 받던 라오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합류시켰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만 직접 통치하고 안남, 통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보호국으로서 왕실을 유지하여 부분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통치를 반겼을지 모르지만 베트남은 입장이 달랐다.
껄끄러웠길래 베트남만 코친차이나, 안남, 통킨으로 분리했겠지. [p. 266]
다만, 베트남의 분리에는 베트남 스스로가 박끼[北區] 혹은 통킨[北圻, Tonkin], 쭝끼[中圻], 남끼[南圻]으로 구분했던 것도 반영되어 있다.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킨[京]족 혹은 비엣[越]족의 폐쇄적인 농업중심의 북부, 말레이계 참파 왕국의 영향으로 개방적인 상업 중심의 중부, 크메르 제국에 속해 있던 남부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언어, 풍속, 문화 등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옥의 티
p. 234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 ⇒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