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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스페인사 - 현대 스페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윌리엄 D. 필립스 주니어 외 지음, 박혜경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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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하나의 국가인가
 
얼마 전에 읽었던 <중앙아시아, 막이 오른다>라는 책을 펼치면,

소비에트 이전까지 중앙아시아 대부분 나라는 단일한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씨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연방이 해체된 뒤 각각의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자, 이제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을 결합시킬 구심점이 필요하게 되었다.1)


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단일민족 국가에 태어나고 살아와서 그런 것일까? 국가가 나서서 이렇게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모습은 ‘근대적’ 국경(國境) 개념이 희박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절대왕정(絶對王政)을 처음 꽃피웠다고 여기지는, 서유럽의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이하 ‘프랑코’) 총통은 ‘스페인은 하나’임을 내세워, 우리에게 스페인어로 알려진 카스티아어를 제외한 각 지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탄압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각 지방이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 이에 대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바스크 분리주의자’나 ‘카탈루냐 분리주의자’처럼 ‘분리 불가능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급증했다고 한다. 심지어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는 ‘카탈루냐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카탈루냐 지역이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0~741)에 의해 프랑크 왕국의 속국이 된, 아키텐 공국(602~1453)의 지배에 반항하기 위해 지역 유력자들이 바르셀로나와 손잡고 형성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이런 중앙집권에 대한 반항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기원(起源)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포르투갈과 공유하는 근대국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곳의 지리적 용어는 모두 복잡한 역사를 지닌다. 그리스인은 이 반도를 이베리아(Iberia)라고, 로마인은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8세기까지 사용된 스페인(Spain)이라는 용어는 정치적 현실보다 편의에 따른 용어였다. 이곳의 영토와 민족들을 묘사한 다른 용어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슬림이 스페인을 장악했던 시기에 그들은 반도에서 손에 넣은 지역을 알안달루스(al-Andalus)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이르는 지리적 범위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팽창하다가 종국에는 축소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은 이곳을 세파라드(Sefarad)라고 불렀다. 중세 기독교 스페인에는 수많은 왕국과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중세 말에 이르러 반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 카스티야의 통치자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은 스페인이라는 근대적 국가 개념의 기원이 되었다. [p. 13]


즉, 스페인은 처음부터 지방자치적 성격이 강한, 연방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왔다. 예를 들면, 한때 스페인의 황제를 칭했던,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824~1841)의 산초 3세(Antso Ⅲ, 재위 1004~1035)는 그의 자식들에게 나바라, 레온(Leon)-카스티야(Castilie), 아라곤(Aragon)을 나눠주었고, 이들은 상당기간 서로 견제하면서 존속했다. 산초 3세의 차남이자 카스티야의 백작 겸 레온의 국왕인 페르난도 1세는 자신이 확장한 영토를 그의 자식들에게 나눠주었다. 페르난도 1세의 차남 알폰수 6세는 그의 아버지가 나눈 카스티야, 레온, 갈라시아(Galicia)와 포르투갈 백작령을 재통합했다. 이런 식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왔다.

오늘날 이베리아인과 전 세계 스페인어 화자들은 중세 카스티야에서 쓰이던 언어에서 유래된 카스티야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스페인인 외에는 대부분 이 언어를 스페인어라고 부른다.

~ 중략 ~

반도의 로망어들 가운데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의 공용어이고, 가까운 사촌 격인 갈리시아어는 지역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출판계에서 사용되며 스페인 서북부에서 부활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수많은 카탈루냐 주민의 모국어로 교육과 대중매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프랑스 남부의 중세어인 오크어, 즉 프로방스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 중략 ~

가장 특이한 언어는 바스크어(에우스케라(Euskerra)어)다. 이 언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이며,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무렵 언어가 쇠퇴하자 바스크 지식인들은 바스크어를 다시 사용하고 이전에 미흡했던 문어체를 발전시켰다. 그 후 에우스케라어의 사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한 다양한 모색으로 연결되고 있다. [pp. 15~16]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은 스페인어로 알려진 카스티야어 외에 옛 왕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을 가지고 있는 17개의 광역자치주(Comunidad Autónoma)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은 연방의 성격이 강한 미국 못지 않은, ‘연방국가’의 성격을 띄고 있음이 드러난다.



스페인,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다

아마도 스페인이 국민 스스로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되려면, 소수 언어와 문화 등에 대해 프랑코 총통 이상의 강력한 탄압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예컨대 베트남의 경우 불교를 믿는 비엣[越]족이 지속적인 남진(南進)을 통해 중부와 남부를 병합했다. 그런 후,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 문화, 민족들을 포용하는 대신 배제를 선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과 힌두교를 믿던 말레이계 참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다. 그 결과, 한때 참파 왕국(192~1832)을 형성하고 베트남 중남부를 장악했던 참족은 베트남 내에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프랑코 정권이 지속되었다면, 스페인에 있어서 베트남의 얘기는 남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은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 경제적 계층, 직업, 가문의 내력 등을 근거로 또는 이 모든 요소를 조합해 본인이 무엇에 진정으로 충성하는지를 규정했다. 하지만 많은 시민은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을 장악한 진영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한 진영에 서서 싸우려고 다른 진영의 통제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었다. 다른 곳의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내전은 가족과 공동체를 산산이 부숴놓았다. 강한 신념, 공포, 개인적 반감, 야심, 비겁함, 혹은 온갖 수많은 다른 동기로, 이웃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내전은 억압된 분노와 과거의 증오 곁에 참상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p 341]

 
이런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이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을까? 프랑코 총통의 후계자로 등장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지방자치를 존중하는, 입헌군주정을 추구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스페인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문제점은 남아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정서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는 등 프랑코 정권의 유산(遺産)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불행했던, 그리고 잊고 싶었던 과거를 바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Cuéntame como pasó)>라는 제목의 주말 드라마는 가공의 알칸타라 가족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 말기인 1968년부터 그들을 따라가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이후 매주 목요일,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인 밤 10시, 자신들의 삶과 조국의 최근 역사를 다룬 이야기가 펼쳐지면 수백만 명의 스페인 사람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꼼짝 않고 앉는다. 노련한 작가, 프로듀서, 배우로 이루어진 팀이 얽히고설킨 역사를 인간애와 더불어 균형 있게 묘사하는 이 시리즈는 압도적인 성공작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p. 393]



 
1) 김주연, <중앙아시아, 막이 오른다>, (파롤앤, 2025),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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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그린 일본 지도 조선의 사대부 26
이근우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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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장의 지도에 담긴 정보량이나 지리적인 인식, 관심사, 제작 방식 등을 통해서 그 사회의 수준과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회의 지도와 서로 비교함으로써 각 사회의 지향점도 파악할 수 있다. 지도 한 장이 갖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런데 지도는 사실대로가 아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그려진다. [p. 5]


조선 시대 일본 지도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이하 ‘혼일도’)>다. 이 지도는 당시 알려진 구대륙 전체를 아우르지만, 원도(原圖)는 전해지지 않고 1470년에 수정된 지도의 사본이 남아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지도를 만들 때, 박돈지(朴敦之, 1342~1422)가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갔다가 비주수(備州守) 미나모토노 쇼스케[源詳助]로부터 입수한 상세한 일본 전도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 <혼일도>에 포함된 일본 지도에는 지명과 해안선 외에 다른 정보가 거의 없으며, 나찰국(羅刹國)나 영주(瀛州)와 같은 가상의 공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 전기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주도로 편찬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다. 여기에는 그가 세종 때 다녀온 쓰시마섬[對馬島], 이키섬[壹岐島], 류쿠[琉球] 왕국 등의 사회, 풍속, 문화, 지리, 생활상, 정치·외교관계 등이 총체적으로 분류, 정리되어 있다. 나아가 이 책에 수록된 방대한 지명은 일본의 지명 연구나 중세 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본국지도(日本本國之圖)’, ‘일본국서해도규슈지도(日本國西海道九州之圖)’, ‘일본국이키섬지도(日本國壹岐島之圖)’, ‘일본국쓰시마섬지도(日本國對馬島之圖)’, ‘유구국지도(琉球國之圖)’ 등 모두 6개 일본 지도가 실려 있다.

이렇게 <해동제국기>가 편찬된 것은 어쩌면 유학자답지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하고, 실무를 중시하는 신숙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선시대 통틀어 최고의 일본통이었을지도 모를 신숙주가 죽은 후 일본은 전국시대에 돌입했고, 한일간의 연락은 끊어지게 된다. 게다가 신숙주와 맥을 같이 하는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민생과 현실보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다. 이는 조선 백성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달아난 여진족 추장 속고내(束古乃)가 압록강을 넘어 사냥하러 들어오자 이를 기습, 체포하자는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림파가 집권을 한 이후에는 붕당(朋黨)으로 대표되는 신하들의 정국 주도권 다툼과 탕평(蕩平)으로 대표되는 왕권 강화 노력, 그리고 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조선의 사대부는 외부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만약 여력이 있더라도 조선 사대부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또 다른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루쉰[魯迅]<아Q정전(阿Q正傳)>에서 ‘아Q(阿Q)’가 멸시하던 왕(王)털보에게 사소한 시비 끝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일본에 대한 무시라는 형태로 도치, 발현시킴으로써 ‘아Q(阿Q)’처럼 자위한 것이 아닐까? 이는 18세기 조선 사대부가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일본을 야만적인 나라라고 얕보고 제대로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선조 40년(1607)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가 일본을 방문하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해사록(海?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쌍벽을 이루는 기행문학이라는 신유한(申維翰, 1681~1752)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이하 해유록(海遊錄)’>, 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의 신숙주처럼 제대로 된 일본 지도를 만들거나 일본에 대한 지리 정보를 갱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시기 일본에서는 조선과 달리 정부가 지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풀려있어 입수가 용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급일본유구중원(朝鮮地圖及日本琉球中原)> 등에 수록된 일본 지도가 아예 조선 초기인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 1392~1467] 시기의 일본정보에 기초하게 된다. 그러니 지명의 오류, 지리적인 오류, 사실의 오류가 나타날 수밖에.


그나마 조엄과 함께 통신사 서기(書記)로 갔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가 쓴 백과사전식 견문록인 <화국지(和國志)>에 실린 12장의 일본 지도는 결을 달리한다. 적(赤), 청(靑), 흑(黑) 3색으로 그려진 이 지도들은 주(州)별 경계 및 도시명, 육로와 수로 등 교통로, 산과 대천(大川) 등 자연 지리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나아가 원중거와 교분이 있던 북학파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북학파가 현실에 미쳤던 영향력을 감안하면, 조선 사대부의 일본인식을 변경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동람보첩(東覽寶帖)>의 ‘천하도(天下圖)’처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논리와 전설적이거나 공상적인 지명으로 지도의 외곽을 채우는 방식의 지도가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 1603~1868] 시기에 들어서면서 막부의 전국에 대한 통제력이 확립되자 각 지역 봉건 영주로부터 지도를 받아 일본 전체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유럽 등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의 전래되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지리학이 수용되어 일본의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덕분에 다양하고 자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 중 이시카와 류센[石川 流宣]이 그린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1676)을 입수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일본여도(日本輿圖)>를 제작했으나 이것도 원중거의 <화국지>나 이를 간략한 형태로 보이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령국지(蜻蛉國志)>와 비슷한 운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 지도 제작에서 보이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하느냐 아니면 거슬러 역행하느냐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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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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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랍’이지?

 

‘아랍’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대체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중동(中東)’이라는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로 유명한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을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를 포함한 유목민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랍’을 ‘사막의 거주민’이라는 베두인(Bedouin)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는 ‘아랍’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초기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 중에서 언어(아랍어)와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다수가 수니 이슬람을 믿는 공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19]

 

어쨌든, 중동(中東) 지역에 위치하지만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에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지 않고, ‘레바논 내전(1975~1990)’ 이전에는 기독교 국가에 가까웠던 레바논의 존재도 ‘아랍’을 ‘이슬람’이나 ‘중동(中東)’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한다.

 

 

유진 로건의 [아랍]은

 

이 책은 아랍의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와 함께 시작된 아랍의 근대사를,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가는 오스만 제국의 발버둥을, 제9장부터는 제14장까지는 1948년 아랍인의 땅에 유대 국가가 건국된 이후 아랍 국가들의 모습을,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각각 그리고 있다.

 

 

아랍의 근대화

 

이 책 <아랍>은 오스만 제국의 9대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거느린 소총으로 무장한 최신의 화약 보병부대와 맘루크 왕조의 49대 술탄 칸수 알 가우리(재위 1501~1516)가 거느린 개개인의 무력에 치중한 기병이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非)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중략 ~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p. 34]

 

쉽게 맘루크 왕조의 멸망을 아랍 근대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구분(時代區分)은 사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근대(近代, Modern)’라고 하면, 흔히 시민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떠올리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그 상징이 된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의 성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近代, Modern)’를 르네상스부터의 ‘Early Modern’과 프랑스 혁명부터의 ‘Late Modern’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도 이 기준을 적용해서 ‘Moder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총, 칼 같은 냉병기(冷兵器)에서 소총과 같은 화약무기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아랍의 근대가 유럽의 근대와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는 어떤 것일까?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후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면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 중략 ~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계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60]

 

이건 아무리 봐도 봉건제(封建制) 혹은 고려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를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으나, 서로 다른 법률과 관료에 의해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구조’가 수백 년 간 오스만제국의 근간을 이룬 질서의 핵심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오스만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의해 아랍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면서 다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1770~1849)의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여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p. 100]

 

대체로 지방의 강력한 권력자와 중앙은 갈등을 빚기 쉬운데, 풍요롭고 넓으며 중앙과 충분한 거리를 갖고 있는 이집트 총독들은 그런 유혹을 받기 쉬웠다. 무함마드 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사실상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던 이집트 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2)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고 10대였던 압돌 메지드 1세가 등극한 1839년은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선포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군으로부터 급박한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유럽 기준의 치국책(治國策)을 충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흐무드 2세의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치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p. 128]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부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개혁과 개발 사업은 도리어 오스만 제국을 더욱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특히 유럽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오스만 제국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로 지배권을 확장했고,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는 1911년에 리비아를 장악했고, 유럽 열강은 1912년에 모로코(오스만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켰던 유일한 북아프리카 국가였다)를 프랑스-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전체는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p. 155]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아랍인들이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편의에 따라 조성한 팔레스타인 같은 위임통치령은 또 다른 불씨를 잉태했다.

 

벨푸어 선언이 공동체 간의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매우 제한적인 자원을 고려한다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향토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예상한 대로 위임통치는 대립하던 두 민족주의, 즉 고도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과 영국의 제국주의 및 시오니즘적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위협에서 기인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양산한 가장 큰 실패작이었고, 그 결과 중동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과 폭력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pp. 277~278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 국가가 건국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젊은 아랍 민족주의자 군인들은 1949년 시리아에서, 1952년 이집트에서, 195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구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연계가 없었지만, 초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는 적응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전쟁은 군사적으로 놀라운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했다. 벤 구리온은 IDF(이스라엘 방위군)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는 현실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기민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3국 침략에 동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던 아랍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p. 432]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단합되지 못한 아랍 민족주의는 쇠퇴했고, 무력으로 유대 국가를 말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 정부들은 시오니스트 적과 싸워서 팔레스타인 향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랍의 공동 의제에 말로만 경의를 표할 뿐,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석유 자원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아랍의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힘이 중동을 제어하게 되었다. [p. 503]

 

하지만 석유의 힘보다도 이슬람의 힘을 더욱 믿는 젊은 세력이 등장해서,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왕정을 폐지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나아가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길이 아직 멀고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의 봄”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성공한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더욱 참혹한 내전으로 빠져드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 질서로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행을 성사시킨 유일한 아랍국가이다.

중략 ~

튀니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도적이고 세속적인 두 개의 다른 정당과 연대함으로써 고도의 국민적 단결을 유지했다.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강제보다 합의에 기반한 특성을 띠었다. 2014년 1월 채택된 신헌법에는 혁명운동의 성과인 시민의 권리와 법의 지배가 명시되었다. [pp. 729~730]

 

그리고 <아랍>은 아랍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희망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튀니지의 취약한 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아랍 세계와 전 세계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아랍 세계가 2010년대의 폭력과 대대적인 파괴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랍인들은 반드시 책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pp. 729~730]

 

 

 

 

옥의 티

 

p. 67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丈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匠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1) 김가희, <이슬람 국제체제의 역사적 탐구를 통한 걸프위기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p. 22

2)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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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도쿄 깊숙이 일본 1
진나이 히데노부 지음, 안천 옮김 / 효형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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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물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도시’라고 하면 파리를 떠올리듯이, ‘물의 도시’라고 하면 대부분 베네치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도쿄[東京]를 ‘물의 도시’라고 한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중국의 ‘쑤저우[蘇州]’나 태국의 ‘방콕’처럼 수로(水路)가 발달한 곳이라면 몰라도 오늘날의 도쿄에서 ‘물의 도시’를 떠올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다.

 

이걸 뻔히 알면서도 저자가 자신 있게 도쿄를 ‘물의 도시’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울도 물의 도시라고 얘기한다.

 

서울의 고지도를 보면 뒤로 산과 언덕이 있는 이 도시에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에는 남쪽과 북쪽에서 많은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 독특한 물의 도시를 이룬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을 축으로 한 서울의 도시 공간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도쿄와 서울의 비교 연구가 진전되기를 기대합니다. [p. 7]

 

여기까지 보면, 저자가 사용하는 ‘물의 도시’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수로(水路)나 운하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물의 도시’와는 다른 듯하다. 게다가 1장에서 도쿄의 스미다 강[隅田川]을 파리의 센 강 및 런던의 템스 강과 비교하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파리나 런던을 ‘물의 도시’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에도[江戶]와 메이지 시대의 도쿄[東京]는 ‘물의 도시’였다

 

<간에이 에도 전도(寬永江戶全圖)>의 일부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3

 

에도가 ‘물의 도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철도와 노면 전차가 등장한 근대 도쿄는 땅의 도시로 변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에도를 계승한 메이지 시대의 도쿄는 여전히 여러 강과 운하를 품은 물의 도시였다. 수운(水運)의 중요성 또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 동력선이 생기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수송량도 늘었다.

~ 중략 ~

도쿄가 ‘물의 도시’로서의 성격을 잃은 것은 전후(戰後)로, 수상 교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4년 올림픽 무렵 이후다. [p. 65]

 

이렇게 ‘물의 도시’에 대한 기존 개념에 따라 ‘1장 스미다강’부터 ‘4장 베이 에어리어’까지 각각 에도[江戶] 문화의 정신적 원류(原流)인 스미다 강[隅田 川], 도쿄 중심부를 흐르는 니혼바시 강[日本橋 川], 스미다 강 건너 물의 지역인 고토[江東], 1980년대 ‘워터프런트(water front)1)’ 붐으로 각광받았다가 잊혀진 도쿄만[東京灣, Tokyo Bay] 일대를 각각 얘기한다.

 

에도.도쿄의 특징에 대해 내린 결론은 에도성=황거(皇居)의 바다 쪽에 자리한 시타마치[下町]는 수로와 하천이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베네치아와 유사한 ‘물의 도시’고, 무사시노 대지 쪽의 야마노테[山手]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녹지를 중심으로 한 ‘전원 도시’라는 것이었다. [p. 167]

 

여기에서 그쳤으면 기존 논의의 반복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

 

에도 수계도(水系圖)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90

 

물의 도시 에도.도쿄는 저지대에 발달한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쑤저우, 방콕과 공동적으로 시타마치에 펼쳐지는 평탄한 운하 중심 도시일 뿐 아니라, 서쪽의 무사시노 대지에서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절묘하게 읽어내어 다양한 수자원을 활용하면서 환경을 개조해 조성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역동적인 ‘3차원적 물의 도시’였음을 깨달았다.

에도성을 에워싼 내호(內濠, 안쪽 해자)와 외호(外濠, 바깥쪽 해자)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활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살리며 축조한 계단형의 거대한 물의 공간 장치다. 또한 야마노테에 산재한 다이묘 저택 상당수가 경사면을 효과적으로 살려 건물을 배치하고, 용수를 끌어 만든 연못을 중심으로 에도 특유의 멋진 회유식(回遊式) 정원을 만든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물의 도시 도쿄론’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pp. 167~168]

 

구체적으로 ‘5장 왕의 거주지와 해자’에서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지형을 살려서, 에도성과 그 주변을 감싸고 도는 내호(內濠)와 외호(外濠)를 계단식 논처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수면(水面)이 줄줄이 이어져 위에서 아래로, 시계 방향과 반(反)시계 방향으로 각각 물이 흐르는 순환 시스템을 가진 인공 수계(水系)를 형성되었다. ‘6장 야마노테’에서는 우에노[上野]의 산과 시노바즈노 연못[不忍池]은 산과 계곡이 번갈아 나타나는, 그래서 울퉁불퉁한 야마노테 지역의 ‘산자락’과 ‘물가’의 조합을 상징한다고 얘기한다. 이런 식으로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수운(水運)’이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옛 선조들의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1985년~1986년에 도쿄 임해부도심을 조성하다가 실패했지만, 세계 각지에서는 스페인의 빌바오처럼 물가 공간의 재생과 재개발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나온, ‘테리토리오[영역]’이라는 개념의 영향이다. 이 ‘테리토리오’는 전원(田園)이 지닌 문화와 그 풍경을 존중하는, 즉 역사와 생태를 잇는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슬로푸드 운동, 지산지소(地産地消)2)에노가스트로노미아[와인+식문화], 농촌의 ‘문화적 경관(paesaggio culturale)3)’ 등을 통해 전원과 농촌에 잠재된 가능성을 살려내는 운동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시의 영향을 받는 도시 인근의 전원이라고 생각되는데, 도시의 범위를 확대해서 해석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책에서 다루는 ‘도쿄’라는 도시의 범위도 확장되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물의 도시’라는 개념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된다.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발상을 전환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물의 도시 도쿄를 연구해 보면 이렇게 지형 변화가 많고 다양한 수자원의 혜택을 받은 도시는 국내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일본다운 물의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내 온 도시 문명을 성찰하는 서구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p. 334]

 

즉, 단순히 수운(水運)의 여부가 아닌, 도시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물을 이용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했는지도 감안한다는 점에서 뭔가 입체적이고 독특하게 ‘물의 도시’를 결정하자는 얘기인 셈이다.

 

1) 워터프론트(water front): 대상지를 하천 또는 해양과 연결시켜 유람선이나 요트 등 수상교통이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의 통로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 및 레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도록 하는 수변(水邊)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는 한국의 신토불이(身土不二)처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3) 문화경관(文化景觀)은 자연에 인간의 영향이 가해져 이루어진 풍경을 말한다. 인간집단이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형성한, 가시적인 물질문화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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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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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1)와 고구려라는 정체성2)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때의 인안(仁安)부터 왕호가 전해지지 않는 11대 대이진(大彛震)때의 함화(咸和)까지는 중국측 사서에도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가 전해진다.


2)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고구려)’를 칭했다고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고려국왕 대흠무[大欽茂, 발해의 3대 국왕 문왕]가 말합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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