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광장은 원래 놀이터였다. 중세에는 거기서 부활절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를 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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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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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부커 인터내셔널 작품으로 선정되었다는 다비드 디옵의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의 번역을 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달에 드디어 번역이 돼서 만날 수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투입된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 출신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 소설의 2/3 지점까지는 괜찮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세네갈 간디올 출신의 사자를 토템으로 하는 니아이 가문의 막내 아들 알파다. 시작부터 비극적이게도 같은 마을 출신으로 거의 형제나 다름없었던 마뎀바 디옵이 거의 죽다시피 한 적군에 총검에 내장이 갈려 죽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알파 니아이에 비해 약골이었던 마뎀바는 알파에게 세 번이나 죽여 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알파는 끝내 거부한다. 그리고 결국 마뎀바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렇게 죽었다.

 

절친 마뎀바의 비참하 죽음으로 그렇지 않아도 간디올 마을 시절부터 뛰어난 용사로 소문났던 알파 니아이는 흑화되어 기관총탄과 대포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설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데 투밥(백인 병사들)들은 왜 세네갈 생루이 근처에서 평화롭게 살던 초코렛 병사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불러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초코렛 병사들이 상징하는 야만성으로 푸른눈의 독일 병사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려고 기획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수많은 알파와 마뎀바들은 그저 투밥들에게 적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투밥들의 의도는 적중했다. 알파 니아이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침투해서 종횡무진 활약을 벌인다. 적군의 배를 가르고, 소총과 소총을 들고 있던 그들의 손모가지를 차례로 잘라가지고 본대로 복귀한다. 세 번째까지는 알파 니아이의 용맹에 초코렛 병사들과 투밥들이 전설이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네 번째부터 그들은 자신의 동료를 마법사라 부르며 슬슬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장에서 유행하던 광기가 이성의 통제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알파 니아이의 눈부신 하지만 끔찍한 활약을 견딜 수가 없었던 투밥들은 결국 그를 전선에서 빼내 후방의 병원으로 보내게 된다. 알파 니아이는 자신의 트로피이자 소중한 컬렉션이 된 7개의 손모가지들이 자신을 옥죄는 수단이 되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공 십자 훈장까지 받게 된 이 전쟁 영웅 초코렛 병사는 투밥들에게 계륵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알파 니아이가 후방으로 이송되기 전, 7명의 반란자들에게 혹독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투밥들은 자신의 남은 가족들에게 연금지급이 되도록 사신 앞에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네갈 출신 초코렛 병사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들과 1도 상관없는 전쟁에 뛰어든 걸까.

 

병원 생활을 하게 된 알파 니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마뎀바 디옵과 어떻게 해서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는지, 어려서 헤어지게 된 유목민 출신 어머니 펜도 바와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초중반의 서사는 강렬했지만, 니아이의 회상을 통해 그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부터 서사는 힘을 상실해 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강렬하게 유럽 열강들의 세력 불균형으로 발생한 전쟁에 투입된 세네갈 출신 초코렛 병사들의 가열찬 반전 메시지를 기대했는데, 그런 부분들은 실종되어 버렸다. 어쩌면 이제는 완벽한 프랑스인으로 거듭난 작가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적당한 타협이 소설을 이도저도 아니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상징하는 키워드로는 밤, 블러드() 그리고 블랙(어두움)을 꼽고 싶다. 주인공의 피부색처럼 검은 밤은 용사 알파 니아이가 활약하는 시간이다. 동료들에게 악마 병사라 불리게 된 알파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복수심으로 곳곳에 유혈을 흩뿌린다. 영혼의 포식자는 푸른 눈의 병사들의 손모가지를 트로피처럼 그렇게 모아들인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다고 죽은 마뎀바 디옵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알파 니아이가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방향성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닐까.

 

소설에는 흥미로운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등장한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 알파 니아이가 출정 전날 간디올 마을 최고의 미녀 파리 티암과 보낸 하룻밤 서사는 좀 지루한 클리셰가 아니었나 싶다. 대신, 알파의 아버지 바시루 쿰바 니아이가 파리 티암의 아버지 압투 티암이 간디올 사람들 모두 낙화생(땅콩)을 재배해야 한다는 주장에 분연히 맞서는 장면이 이 소설을 통해 가장 멋진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늙은 현자 바시루 쿰바의 말처럼, 간디올의 모두가 낙화생 재배에 나서게 된다면 당연히 낙화생의 가격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생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압두 티암 같은 매판 자본가들에게 굴종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불행한 식민지배의 서사와 악순환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다비드 디옵은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 하나만큼은 최고의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아주 긴 장편소설이 맥을 추지 못하는 건 아마 세계적 추세가 아닌가 싶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공쿠르 상 역시 짧지만 강렬한 소설을 계속 수상작으로 골라내고 있다. 다양한 상징과 우화들이 넘쳐나는 서사는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다비드 디옵이 좀 더 초코렛 병사들이 왜 전쟁에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 엔딩이 여전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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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7-18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커상 수상작이지만 레삭매냐님이 별 셋 주셨으면 확실히 별 셋이군요~!! 내용이랑 제목은 아주 인상적인거 같아요. 요새 추세가 단편이군요🤔

레삭매냐 2022-07-19 07:44   좋아요 2 | URL
별 세 개에서 네 개 사이를
고민했습니다.
평점의 스케일링이 참 그렇
더라구요.

관심 가던 책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네요.

국내에서 그렇게 인기를 끌만
한 책은 아닌 듯 합니다.

바람돌이 2022-07-18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압둘라자크의 책에서도 저는 이 사람이 아프리카인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그냥 완벽한 영국인이 돼버린거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도 난민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랄까?

레삭매냐 2022-07-19 09:02   좋아요 2 | URL
제가 압둘라자크의 <낙원>을 읽고
나서 바로 <바닷가에서>에서 읽었는데...

특히 <바닷가에서>는 바람돌이님이 지적
해 주신 대로 왠지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라기 보다는 식민 모국 출신의 사람이 되
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이물감이 들었습
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그레이스 2022-07-19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심상치가 않은데요?! 중의적 표현!
그들에게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하지 않는듯요. 그래서 제국주의에 대한 생각도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삭매냐 2022-07-19 20:10   좋아요 1 | URL
프랑스도 그렇고 영국도 보면
피지배국의 엘리트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고, 나중에 귀국시켜서
자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맹
그는 그런 시스템을 돌리지 않나
싶습니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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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었는데, 엔딩이 왠지 용두사미 느낌이 들었다. 세네갈 출신 초콜릿 병사들의 애환을 그렸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결국 엔딩이 문제가 아니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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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07-18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첨 듣는 작가에 작품인데^^; 작년부터 기대하셨다니 역시 레삭매냐님 @_@;;

레삭매냐 2022-07-19 09:00   좋아요 1 | URL
너무 기대를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
우째 그냥 그러네요...
 


이등병에서 하사관에 이르기까지 병사 중에도 이런 노병들이 종종있었는데 대개 배려심도 있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많아 신병들에게인기가 있었다. 이상하게 젊고 건강한 사람 중에는 착한 사람이 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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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어떤 사태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책임 소재를 찾으려 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들이다. 그게 훨씬 간단하니까. 나는 안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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