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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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근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서울)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연애사건, 살인사건 그리고 기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이번에 자살이라고 하는 어쩌면 금기에 해당하는 주제를 다룬 전봉관 작가의 <경성 자살 클럽>이 출간됐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서 보니, 죽음은 현실에 대한 자각이라는 표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책에서는 모두 해서 10개의 자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수도 경성에 악머구리 끓는 듯한 문제들이 이 주제를 통해 폭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7:3의 비율로 여주인공들의 에피소드들이 압도적이었다. 남자들이 민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한 대의 혹은 입시문제 등으로 자살을 택했다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가 연애와 관계된 정사(情死)였다.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다른 책에서 다룬 연애사건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다산북스에서 나온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과 윤심덕-강명화 그리고 홍옥임 스캔들이 그것이다.

특히 조혼(早婚)과 전래의 인습으로 인해, 자각된 신여성들과 유부남 남성들 간의 연애 그리고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갈등은 새로운 천년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이다. 새로운 학문과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가치관들과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는 그야말로 엄청난 격변의 과정 가운데 내던져진 우리의 꽃다운 청춘들에게 세상살이는 필연적으로 버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억압적인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를 양산해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들이 바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내몬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물론 21세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실연당했다고 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와 요즘의 사랑에 대한 관념이 그만큼 변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우선, 조혼 풍습으로 인해 괜찮은 미혼 남자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실연이라고 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났다. 물론 당시 경성에도 자유연애주의 풍조가 만연해 있긴 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연애는 자신의 일생을 걸만큼 중요한 일이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0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바로 8번째 <입시지옥>이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의식전환으로 인해 모든 조선의 부모들의 교육열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취학연령의 아동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학교의 수 때문에, 예닐곱 살 먹은 미취학 아동들이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런 상황들이 거의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참 답답하기만 하다. 물론 그 당시와는 다른 이유의 과열된 입시경쟁이지만 그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의열단 출신의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비록 그가 목표한 것을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식민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쾌거였다. 그리고 모든 의사 표현 수단을 빼앗긴 약자들의 마지막 저항방법이라 볼 수 있는 테러리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근대 조선의 경성을 거닐며,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멋진 시간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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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더 뉴스 -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오귀환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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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란 직업은 아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는 것”이라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다오우드 쿠탑의 선언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화두처럼 다가온다. 이제는 다분히 권력화된 언론은 사회의 테제를 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우리네 삶에서 불가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다오우드가 말한 언론의 본질에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동안 우리들은 서구의 대형언론사들로부터 기사를 공급받아 왔다. 그래서 어쩔 땐, 우리네 현실에 대한 기사들도 그들의 시각으로부터 녹취한 것들도 다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에서 같이 숨 쉬는 이들의 시선과 이방인의 시선이 일치하지는 않는 법. 이런 세태에 개탄을 하면서, 아시아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10명이 뭉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 <더뉴스>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였던 폴 포트였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세계에 학살자라는 악마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폴 포트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이제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진실을 알 수가 없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린 시절 <킬링 필드>를 야기한 장본인으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사실일까? 이 책에서 지난 30년간 캄보디아 정세에 정통한 일본인 기자 나오키 마부치의 밀착취재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지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도차이나 분쟁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나 앙코르 와트로 우리에게 유명한 캄보디아 근대사가 끌렸다.

자유 수호라는 미명 하에, 캄보디아 독재정권을 수립했던 론 놀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는 동남아에서 베트남 연방을 이룩하려는 베트남이 국경분쟁을 이유로 해서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캄보디아의 큰 악으로 규정했던 크메르 루주를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지원하는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킬링 필드’가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의 숙청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전쟁 중의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을 했던 유수의 언론들에 대해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서 만들어낸 영화 <킬링 필드>가 크메르 루주에 대한 결정타를 날렸다.

베트남군의 철수 이후, 인민농민혁명을 지향하는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의 꼭두각시 정부에서 결국 친위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훈센 총리의 무장투쟁과 정쟁의 과정은 부족한 대로 현대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갈증을 덜어 주기는 했다. 물론 바란 만큼 상세하지 않다는 점이 좀 아쉽긴 했지만.

아랍세계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오사마 빈 라덴도 미국에 대한 9-11 공격으로 인해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한 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침공군에 대항해서 싸우는 자유 무자헤딘 전사로 칭송받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렇듯,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을 만드는데 있어서, 미디어의 역할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직도 9-11 사건 이후, 미국의 주류방송에서 9-11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들을 계속해서 보여 주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자행하고 있는 갖가지 만행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이 두 가지 다른 사건을 공정하게 다뤘다면 아마도 미국사회에서 그렇게 아랍세계는 악, 이스라엘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디어 조작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더뉴스>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조국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고,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초상이다.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우리네 언론재벌들과 그 기자들이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이 책 <더뉴스>를 통해, 우리가 사실이라고 있는 것들이 얼마만큼의 진실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사실’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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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 보스에서 렘브란트까지 그림 속 중세 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세상 중세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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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흥미롭다, 중세의 가을이라……. 먼저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고 싶어서 위키피디아에게 물었더니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훈족의 침입으로 비롯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5세기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5세기까지 약 천 년간의 시대를 지칭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가을’은 작가 이택환 선생의 말대로 쇠락을 상징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중세하면 기독교 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중세의 그림들에 대부분을 종교화가 차지하고 있다. 현실과 환상 혹은 상상의 세계가 병존하고 있던 중세시대에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보다 오히려 더 세속적 욕망에 충실했었다고 한다. 그런 면면들이 당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작가는 이런 그림들에 대해서, 당대의 시대 문화적 배경들과 도상학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우리들에게 설명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긴 부활이 대명제였던 중세사회에서, 그들이 기대했던 현실세계에서의 부활이 천년이 다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중세인들은 죽음을 그들의 삶 가운데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페스트(흑사병)와 종교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등은 그런 불가피한 상황들을 더욱 촉진시켰다. 책의 전반부에서 중요한 화가로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중세의 몰락이 예언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보스의 그림에서는 정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의거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이교도적인 색채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그가 그린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이미지보다는 종말의 세계에 심판자로서의 역할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피터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같은 작품에서는 쇠락으로 치닫는 중세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엿보인다.

현대의 문화코드로 보면 더 엄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중세에 많은 작가들이 성화 가운데 에로티시즘을 섞어 놓았다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큐피드의 그것으로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비너스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종교적 경건함 가운데 중세인들의 욕망들이 들끓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의 중세 사회의 질서들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행위에는 자본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예전에 화가들의 주 고객들은 바로 영주와 주교들과 같은 지배계급이었다. 상업혁명이 진행되고, 부르주아 계층이 등장하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패트론들은 바로 이들 부르주아 계급으로 대체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때 등장하게 되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보수적인 색채로 기존의 영주들이나 사제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했던 루벤스와 종교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 리버럴리즘을 대표했던 렘브란트의 비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신과 인간이 합일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세시대에서 공동체적 삶이 아닌 개인의 자아를 찾아가게 되면서 중세는 붕괴하게 된다. 중세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신학을 개인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철학이 대체하게 되는 역사적 전진이 이루어진다. 단순하게 중세 예술작품에 대한 소개서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중세 전반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명석한 고찰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작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인 중세를 거닐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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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캠퍼밴 여행 - 허영만, 박영석, 김태훈, 캠퍼밴 타고 대자연의 성찬을 맛보다 탐나는 캠핑 3
허영만.김태훈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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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 항상 그 표지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여행칼럼니스트인 김태훈 작가와 허영만 화백 일행의 한 달 남짓한 뉴질랜드 여행을 다룬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의 표지에는 뉴질랜드의 절경인 빙하 산들을 배경으로 녹색대지에서 일행이 바비큐 파티를 하는 장면이 그리고 두 마리의 귀여운 양이 뛰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남은 마지막 낙원’이라는 부제대로 낙원여행을 했다.

창조주가 빚어낸 최고의 걸작인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이 맞는 일행들과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끊이지 않는 여행을 한다면 아마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숙식해결이 가능한 캠퍼밴으로 오토캠핑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일상에 매여 사는 우리네 이미지와 중첩이 되면서 한없이 부러워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북섬과 남섬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 뉴질랜드 12년째 살고 있다는 김태훈 작가의 발의로 시작된 여행은 뉴질랜드의 숨겨진 곳곳을 찾아 누빈다. 한 달간에 걸친 장대한 여행 스케줄도 스케줄이지만, 아마 현지에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김태훈 작가의 뉴질랜드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상당부분 고달픈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관광객으로써 현지에 사는 이들만큼 잘 알 순 없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 넓은 바다에 뛰어 들어 산 채로 랍스터(공식 표기로는 로브스터가 맞다고 한다)를 잡아 올려 바로 회를 치고, 엄청나게 큰 가오리를 잡고, 깨끗한 물이 아니면 아예 살지 않는다는 도미 낚시의 경험들은 너무나 부러웠다. 게다가 끼니때마다 벌어지는 음식의 향연에 대한 묘사는 당장이라도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행한 허영만 화백이 여행하는 도중, 짬짬이 그렸다는 그림들은 책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고, 사실의 나열에 집중하기 쉬운 함정을 멋지게 빗겨나가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물론 사람이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 사진들 역시 일품이었다.

물론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에서 뉴질랜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연유산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뉴질랜드의 로토루아와 밀포드 사운드에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 꿈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뉴질랜드는 아니지만, 호주의 애들레이드에서 바로사 밸리에 있는 와이너리 투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외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한잔두잔 공짜로 거푸 내주는 와인에 흠뻑 취했던 기억들이 일행들의 블레넘 일정에서 떠올라 빙그레 미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가봤거나 혹은 뉴질랜드행을 꿈꾸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지난 추억들을 되살리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층 부풀리게 해줄 수 있는 책이라고 선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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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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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는 바로 “무중력”이다. 무중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구가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해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아,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빠졌다. 바로 달이 날이 갈수록 증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태고 이래로, 달은 하나였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살던 우리는 달이 두 개로 늘어나면서 갖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본다면, 아마 판타지 소설 계통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책 표지를 넘기면서 모델 뺨치는 자태의 윤고은 작가 사진에 놀랐고, 이런 놀라운 상상을 바탕으로 주변의 일상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천연덕스럽게 진행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됐다. 또 하나 작게 놀란 점은, 대개의 여류작가들이 자신과 소설의 주인공을 동성으로 배치시키는데 반해 <무중력증후군>의 작가는 대담하게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노시보(그의 친구로 등장하는 구보와 대구를 이루는 이름인가 싶다)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일단 달이 증식된다는 기발한 상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먼저 달이 늘어나면서 불안정을 이유로, 무중력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대담하게 지구의 ‘연약권’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주인공의 어머니는 달구경을 가겠다고 집을 나간다. 달의 증식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으로, 평범하게 지내던 우리들에게 ‘위기’(위험과 기회)를 부여한다. 노시보의 형 대보는 고시원에 살면서, 요리사의 꿈을 꾸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 노시보는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소시민적 모습을 지닌 하이퍼콘드리액(hypochondriac:건강 염려증 환자)이다. 지난 6개월 동안 병원에 들락거린 횟수만도 자그마치 180건이 넘는다. 어느 신문사의 여기자 ‘퓰리처’는 뉴스의 발굴이 아니라 직접 그를 소재로 한 기사를 만들려고 한다. 이만하면, 어떤 이야기든지 풀어 나가기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않을까.

새로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창작을 꿈꾸던 그의 친구 구보는, 자신의 꿈 대신 세태의 흐름에 맞춰 우주적 경험들을 원하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성인기구 “무중력 판타지아”의 판매에 나서게 된다. 그런 구보도 성형미인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순두부’ 같이 맑고 착한 여자를 만나기를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소설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윤고은 작가가 평범남 이하의 인물로 설정한 노시보는 예상대로 우리네 보통의 남성상을 보여준다. 달이 두 개가 뜨건, 세 개가 뜨건 간에 뉴스에 집착하며 보통의 욕망의 바다에서 발기하는 자신의 ‘미니미’가 지속적으로 지구의 중력과 싸워야 하는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기존의 중력자들의 무리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 등장한 신인류하고 할 수 있는 무중력자들 가운데 하나인지 도통 혼란스럽기만 하다.

여느 판타지가 그렇듯,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기존의 달의 증식이 가져온 사태들에 대해 그건 다 뻥이었어! 아니 어쩌면 그런건(달의 증식)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선언 한 방으로 사태를 종결시킨다. 이 선언은 기존의 혼란들을 단박에 매조지하면서 모두를 일상의 삶으로 되돌려놓은 비아그라 같은 약효를 가져온다.

<무중력증후군>은 확실히 재밌다. 분명 많은 시간들을 들여서 작가가 벼렸을 이야기들이며, 소설의 전개 그리고 많이 닦아낸 흔적이 엿보이는 캐릭터들의 배치에서 그런 점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좀 더 나가서, 아예 이 소설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며, 작가의 다음번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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