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리뷰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E. 벤저민 스키너 지음, 유강은 옮김 / 난장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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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뉴스에서 미 국무성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인신매매 보고서에 북한이 지난 6년간 인신매매 최악의 나라 3등급에 지정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3년 보고서를 처음으로 작성한 이래 북한은 실제로 벌어지는 있는 인신매매에 대한 인정은 물론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 나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이 3등급의 나라에는 벤저민 스키너의 책에서도 다뤄지고 있는 수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올라 있다.

<뉴스위크>와 <포린어페어스> 같이 저명한 잡지들에 글을 실어온 벤저민 스키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서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수의 노예들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작가는 노예제 해방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영국과 심지어 헌법에 보장된 모든 이들의 평등을 위해 전쟁까지 치른 미국(물론 남북전쟁에 대한 다른 시각도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의 경우에서 모든 인류의 소중한 가치인 자유에 접근을 시도한다.

우선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노예제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강요나 사기를 통해,’ ‘생존을 넘어선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벤저민 스키너는 중남이 소국 아이티의 만연한 ‘더부살이’로 대변되는 아동 노예들의 실상을 파헤친다. 작가는 나중에도 계속해서 언급을 하게 되지만, 절대 빈곤선에 있는 대부분의 가정들에 현대판 노예상들의 유혹이 뻗친다고 말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먹을 것마저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약속하는 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노예 중개업자들이 나타나서, 교육을 약속하며 아이들을 아이티 중산층 가정에 공급한다. 물론 그런 거짓 약속 뒤에는 혹독한 매질과 가혹한 노동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쉽게도 벤저민 스키너의 현대판 노예제에 대한 고찰은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인지 전 세계적인 노예제 폐지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미국의 노력에 집중되고 있다. 미 국무성 산하 인신매매담당과의 무임소 대사로 활약을 한 민주당원 출신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꾼 존 밀러가 있다. 한편, 기독교 복음주의 출신의 마이클 호로위츠는 존 밀러가 주장하는 대로 노예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보다 성매매가 개입된 인신매매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아이티를 시작으로 해서, 수십 년간의 내전의 참화를 겪은 수단의 가재 노예들의 처참한 상황과 루마니아와 몰도바에서 서유럽 매춘시장을 위해 유입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담담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참고한 참고자료들의 수는 방대하다. 실제로 작가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타임>의 “인간노예” 기사를 찾아보면서 얼마나 많은 수의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동유럽 젊은 여인들이 가난과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조건들 때문에 비인간적인 성적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지 실감할 수가 있었다.

특히 수단의 경우에는 친정부 아랍계 민병대들에게 노예사냥으로 잡힌 수단 남부의 딩카족을 비롯한 아프리카계 소수민족들의 자유 ‘되사주기’가 수단 반군들에게 자금줄로 역이용되고 있다는 폭로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의 자유를 위해 미국 어린이들이 모금한 소중한 자금이 수단 반군에게 병참과 무기 구입을 위한 돈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제정치역학의 모순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계의 인신매매 근절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존 밀러의 이야기는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예제와 교차 편집된다. 미국 정부에 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혹은 인도 같은 나라들에 3등급 지정을 하고, 제재를 가하려는 존 밀러의 시도는 그의 상급자들의 정치적인 이유로 해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게 된다.

마지막으로 벤저민 스키너는 전 세계 노예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인도로 눈을 돌린다.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 중의 하나라는 우타르프라데시의 채무 노예 고누 랄 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도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인 카스트 제도 밖에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출신의 고누는 거의 3대째 채무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악질 지주들은 고누와 같은 채무 노예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최소한의 물질을 공급해 주면서 대대로 그렇게 가혹한 착취를 일삼고 있었다.

인도의 법률은 카스트제도와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현대 인도에서 그 두 가지 악폐들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구인들의 일시적인 동정에 의한 도움이 아닌, 자신들의 처해 있는 반인류적인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예속적인 노예생활에 대한 자각을 위한 계몽활동과 더불어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어야할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대명천지에 여전히 현대판 노예제도가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오늘도 이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나이 어린 아이들이, 젊은 여성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채무 같은 다양한 이유로 해서 착취와 학대에 신음하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벤저민 스키너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각성과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 같다. 벤저민 스키너와 존 밀러 같이 이 심각한 문제를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개선시키려는 이들의 부단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지구상에서 노예제가 없어지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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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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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들어 작가들의 첫 번째 소설들을 많이 대하고 있다. 지금 막 읽은 조나단 트리겔의 <보이 A> 역시 작가의 데뷔 소설이라고 한다. 영국 출신은 조나단 트리겔은 2002년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창조적 글쓰기로 석사 학위를 받고, 2004년 <보이 A>를 발표한다.

이 소설은 1993년 2월 영국의 리버풀의 쇼핑센터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아동 살해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명의 10살 난 소년들인 존 베나블스와 로버트 톰슨이 두 살 난 제임스 패트릭 불거를 살해했다. 경찰에 의해 검거된 이 소년들은 법원에서 최소 10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소설에서처럼 <선>지가 30만 명의 청원을 받아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하워드에게 양형을 늘리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8년을 복역하고, 조건부로 2001년 풀려났다. 이런 실제 사건의 줄거리를 주지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보이 A>의 구성은 모두 24개의 영어 알파벳으로 시작된다. 실제 사건과 유사한 사건으로 소년원과 교도소에서 14년간 복역을 하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교도관이었던 테리의 도움으로 맨체스터에서 새 출발을 시작하는 소년 A, 아니 이제는 잭 버리지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여느 결손가정에서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천둥벌거숭이처럼 참혹한 아이들의 세상에서 항상 지는 역을 맡았던 잭은 어느 날 소년 B의 도움으로 비로소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동안 누려 보지 못했던 친구와의 즐거움들이 드디어 소년 A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아, 조나단 트리겔의 구성은 시간에 따른 연대기적 구성이 아닌 플래시백과 현재의 일들이 뒤죽박죽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책에 몰입할수록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구성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친부마저 자신을 떠난 잭에게 테리는 아버지 그 자체였다. 성난 군중들과 그들의 심리에 편승한 매스컴은 두 소년을 괴물로 몰아가고, 이미 재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은 결정지어진다. 한 때 잭의 절친한 친구였던 소년 B는 교도소에서 레테의 강을 건너는 선택을 하고, 그보다 훨씬 약해 보였던 잭은 싸워 보지도 않고 질 수 없다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숱한 고난과 외로움의 장벽을 테리의 도움으로 뛰어 넘어 가석방에 성공한다.

14년이란 시간 동안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잭은 새 출발을 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언제라도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 속에서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미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동료 크리스와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잭에게는 모래성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모든 것이 거짓말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보이 A>에는 많은 담론들이 배어 있다. 우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 교정기간을 통해 다시 사회에 복귀가 가능하냐는 회의론적 주장이 존재한다. 반면에 그들이 몇 달만 더 어렸더라도, 무죄가 될 수 있었다는 반론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 조나단 트리겔은 주인공 잭에게 좀 더 동정적인 시선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잭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상대적으로 극중 희생자인 안젤라 밀튼에 대해서는 조금은 편파적인 매스컴의 주장들을 배치시킨다. 가해자와 희생자의 구분이 어느 순간 모호해진다. 소년 A와 B는 가해자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희생자가 된다. 사실 잭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커밍아웃에 앞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들의 관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들이 생략된 진실”(223쪽)의 치명적 약점이다.

이제는 퀜틴 타란티노의 전매특허처럼 되어 버린 뒤죽박죽된 시간의 나열 역시 소설의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조나단 트리겔은 치밀한 계산 아래, 스토리텔링의 고저를 파악해서 적시적소에 현재와 과거, 사건의 경중에 따라 이야기들을 배열한다. 그의 내러티브 연주에 독자들은 일희일비한다. 도저히 글쓰기를 전공했다지만, 초짜 작가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작가는 용서와 화해라는 궁극적인 대전제를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맡겨 놓는다. 그가 비록 주인공 잭/소년 A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온전하게 책을 읽는 이들의 몫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소년 A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편견 없이 그의 아픔의 눈물을 닦아 주고,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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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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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여기저기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런데 그전에 내가 읽던 책에 대해 지인들이 보이는 반응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제목 때문이었다. 뭐 비둘기 똥구멍? 아니 비둘기 똥구멍을 본 적은 있나? 하고 웃어댔다. 글쓰는 아트 디렉터 홍동원 씨의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책 제목을 얼마나 잘 지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홍동원 씨는 책의 말미에서 광고를 ‘악의 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쓴 이 책이 팔리기 위해선 광고를 해야 할진대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의 제목 설정은 다시 한 번 탁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독일 유학을 비롯해 아주 출중한 이력을 지닌 저자가 지난 30년간 몸을 담아온 디자인 판의 이모저모를, 디자인 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익힌 글 솜씨로 아주 맛깔나게 잘 담아냈다. 멋지다!

책의 뒷면에도 나와 있는 질문인데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그 디자인을 한 마디로 하면 뭐가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을 홍동원 씨는 간략하게 하는 대신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장황하게, 그리고 어떻게 보면 매우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라틴어 데지그나레(deginare)에서 유래했다는 디자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관념 속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들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의 본격적인 역사는 한 백년 정도로 볼 수가 있겠지만, 인간은 유사 이래로 디자인과 함께 해왔으면 특히나 현대문명은 디자인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영향력 아래서 작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는 인적 요소로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한다. 우선 실체화를 담당하는 디자이너, 그 디자이너에게 일감과 일용한 양식을 공급해주는 클라이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산된 디자인을 소비하는 소비자, 일반대중이 있다. 이 삼위요소들의 역학관계를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시각에서 풀어나간다.

피티(프리젠테이션)하지 않기로 유명한 아트 디렉터이자 디자이너답게 작가는 디자이너로써 클라이언트에게 꿀릴게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방침이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물어 보란다. 세상은 넓고, 클라이언트는 많으니까 말이다. 아티스트의 자존심이 빛난다고 해야할까?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기십 만원씩 하는 한정식상을 쏘는 클라이언트일수록 꼭 가격을 깎으려고 한다는 분석 또한 일품이었다. 아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런 쓸데없는 비용 말고,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게 투자를 하란 말이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디자인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사랑 바이러스 I♥NY의 주인공 밀튼 글레이저,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하철 노선도의 초안을 고안해낸 전기 배선 엔지니어 해리 벡, 근대 파리를 통째로 뜯어 고친 르 코르뷔지에의 요상하기 짝이 없는 의자 이야기, 프랭크 뮬러의 크레이지 아워 워치, 마르쿠스와 다니엘이 만든 그 유명한 프라이탁 가방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화수분처럼 마구 샘솟는다. 특히 이 책을 나고 나서 하도 궁금해져서 화물 덮개 천으로 만든다는 프라이탁 사이트에도 방문해 봤다.

하지만 이 책 중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끈 저자의 주장은 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아이디어였다. 그가 독일 유학에서 교수에게 배웠다시피, 우리가 아무리 독일어를 잘하고 영어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네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한국어를 가지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디자인으로 실체화시키는 작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베끼기가 아닌,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생산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년 전 뉴욕의 구겐하임 뮤지엄을 찾았을 때의 그 감동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가는 길을 몰라,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저 멀리서 희여멀건 건물의 둥근 곡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동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 같이 디자인에는 일천한 사람까지도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그 무언의 힘!!!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추구해야할 디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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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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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분당 샘물교회에서 아프간에 갔던 선교단 일행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면서 한동안 사회에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기독교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감을 읽을 수 있는 계기였다. 그해 초에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아프간으로 선교를 간다 해서, 회교 율법에서 기독교 전도 행위를 금하고 있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법을 어겨 가면서 전도를 해야 하냐고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면 안되는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전도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7가지 사항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통해 저자 김선주 씨는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목사, 교회, 설교, 복음, 전도, 영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현재 예수님의 자리에 맘몬과 물신을 받드는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대체된 한국 교회가 놓칠 것이 하나 없어 보인다. 물론 주류 교회에서는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외면하겠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저자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메신저라는 선언을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사제와 신도 간의 구별은 없어졌다. 그것이 바로 중세 부패한 가톨릭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유대교 전승에 의거한 제사장 중심의 예배의식이 어느새 한국교회에 침투하면서 목사 중심의 목회가 대세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닌, 낮은 곳에서 우리들을 섬기러 온 예수님의 뜻을 본받아야 할 목회자들이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할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는 교회를 이념의 성전(聖殿)으로 규정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로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던 교계 지도자들의 통렬한 반성 없이 해방과 한국전을 맞이한 한국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예수님의 이웃사랑의 정신을 전파하기보다는 군사개발독재와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치우친 그릇된 모습만을 보여 왔다. 뿌리가 깊지 못한 근본 신학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자성하지 못한 일부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목사들이 발호하는 모습에 일반 대중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대형교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늘날 교회 내의 젊은 청년들이 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진 채 점점 율법주의와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시장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를 등지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세상이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그들에게 실천적 모습과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세 번째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에서 말뿐인 설교의 공허성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과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넘쳐나는 설교들로 인해 설교의 가치는 날로 하락하고 있다. 현장성이 결여된 미디어 설교를 실천적 삶에 참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일예배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성과 현장에서 서로 교류하는 소통의 담론은 확보할 수가 없다. 저자가 표한하듯이 설교 시간이 “소통과 교감의 제의”(121쪽)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데 적극 찬성한다.

너무나 자본주의화된 교회 내의 모습에서 설교 또한 일련의 중산층 사교클럽의 일종의 소비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진단은 뼈아픈 지적이었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인 이웃사랑과 돌봄의 미학보다 교회 내에의 유니폼 크리스천들끼리의 교제에 보다 많은 시간을 들이고, 교회의 유지와 보수에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건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네 번째 복음 편에서는 현재 대한민국 호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 이명박 장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분석을 볼 수가 있다.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도저히 기독교 출신 장로로 볼 수 없는 행태와 정책이란다. 그가 대통령 인수위 시절 기용한 소망교회 인맥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행태는 기독교를 떠나서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고 양심에서도 한참 멀리 벗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저자는 대선 전에 그렇게 이명박을 지지했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정말로 복음의 차원에서 그를 검증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물론 그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정신과 복음적인 차원이 아닌 오로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를 지지한 교계 지도자와 교권주의자의 모습에서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의 위선과 허위를 꾸짖던 예수님의 모습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전도는 다섯 번째로 등장한다. 우선 저자가 모은 실례를 드는데, 아마 많은 이들이 공격적이면서도 일방적인 형태의 전도를 봐왔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도의 취지에 대해서는 찬성을 하지만, 상황과 때를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사랑한다면 나와 타자와의 분리 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충분히 말씀과 복음으로 준비되지 않은 채, 뜨거운 열정만으로 전도 행위에 나서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2년 전 역시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뼈아픈 자기고백과 회개에 대해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느 집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회개가 단발성 이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여섯 번 째에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여의도 모 교회의 목사의 예를 들고 있는데,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한 회개는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중에 그가 가상으로 작성한 회개문이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그가 그런 회개를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인 면에서 세상과 충돌하고 있는 헌금문제가 있다. 성전과 제사장 이데올로기 무장한 한국 교회들은 헌금과 십일조가 정말 쓰여야 하는 용도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건물을 짓고, 목회자들이 대한 사례비나 임대비가 아닌 세상을 구휼하는데 성도들의 헌금이 온전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랜드 사태가 보여 주는 교훈 또한 명확하다. 기업은 무조건 이윤을 내야한다는 자본주의적 명제와 더불어 사는 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양존할 수 없다는 것이 예의 사태를 통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130억의 십일조 납부보다 1000여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승계가 창출한 이익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않았을까? 이들의 농성에 대해 이랜드의 회장이 장로로 시무했던 강남의 모 대형교회가 굳이 외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선주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매체의 기사와 저서를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102쪽에 나오는 경향신문에 실린 구미정 교수의 ‘강남형 대형 교회 여신도들의 신앙양태에 대한 신학윤리적 성찰’ 기사는 직접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0-80년대 개발독재 패러다임이 설교를 통해 현재 대형교회 성장 메커니즘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구교수는 이 기사를 통해 한국 교회의 미래 지향적 가치는 “성장과 성공이 아니라, 작음과 낮아짐, 나눔과 섬김, 보살핌과 살림”이 되어야 한다고 방점을 찍는다.

아울러 예전에 을유출판사에서 나온 <가톨릭교회>라는 책을 통해 처음 만난 한스 큉의 저작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특히 그의 명저 <그리스도교>를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문제가 많은 한국 교회에 희망은 없는걸까? 저자는 그래도 여전히 교회 안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만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처럼 현재 한국 교회에 깃든 맘몬과 물신주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그동안의 과오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해 거듭나야할 것이다.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원론적인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담긴 진정한 사랑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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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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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어쩔 수 없이 존 그레이의 그 유명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의 책과는 달리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남녀관계의 대한 책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21세기 오늘날의 서울에 대한 스케치였다.

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누구나 다 서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보는 서울은 과연 어떨까라는 문제 제기에서 이 책은 출발을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녀들의 수다>처럼 천편일률적인 한국 예찬론이 아닌 한국에서 생활을 하는 7인의 이방인들을 두 명의 인터뷰어들이 만났다.

현재 영어 광풍이 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방인들은 바로 영어선생님일 것이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 듯,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로버트 프리먼이란 미국 영어선생님과 시작을 한다. 질문은 대개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느냐로 시작해서 한국에서 좋고 나쁜 인상들 그리고 점차적으로 내면을 때리는 질문들이 수놓아진다.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는 이방인의 모습은 향수일까 아니면 자신의 문화에 집착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온라인 싸이월드의 공간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재현해 낸 에밀 고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티스트다. 이 에뜨랑제들이 편안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과연 어딜까? 이태원? 아니면 클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홍대입구? 비슷하게 패턴화된 질문들 가운데 인터뷰이들의 대답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흘러나온다. 우리의 얼굴 모습이 제각각인 것처럼 개성 넘치고 다양한 대답들의 행진이다.

아예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에서 살림을 차린 세밀화 아티스트 곤도 유카코는 일본 출신이다. 아이까지 낳아, 육아로 바쁘다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얼핏 얼핏 드러난다. 획일화된 아파트 대신 단독주택을 좋아하는 그녀의 말에서 정작 우리 것보다는 문명의 편리라는 이유로 서구화된 것들을 추구하는 우리네 모습이 과연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로써 일본에서도 부르기 쉬운 아이 이름을 정하는 고민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일본보다 훨씬 더 끈끈한 가족애와 소통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를 비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생활인으로서 그녀가 보는 쓰레기 이야기는 참 재밌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누군가 쓰레기 봉지를 하다 내다 버리면 바로 쓰레기 더미가 되어 버린다는.

동아시아 영화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얼 잭슨 주니어 역시 특이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서슴 없이 자신을 안티 아메리칸이라고 소개를 하는 그는 스페인에 머물고 있는 아내와 더불어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고 있다. 여타 이방인들과는 달리 채식주의자로 한국 음식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절로 구수한 된장냄새가 나는 듯 했다. 옛것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현대적 도시의 삶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삶의 현장 서울에 대한 생생한 단면들을 그의 입을 통해 되새겨 볼 수가 있었다.

이 책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만딩고 댄서 바또 브레이즈를 들 수가 있겠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바또 브레이즈는 특이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 영어를 한국에 와서 배우게 됐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영어가 다시 한 번 만국공통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그는 커뮤니케이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태원을 꼽았는데, 그만큼 이방인들에게 친근한 공간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일단 타인의 시선으로 좀 더 진지하게 우리네 모습을 바라보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이 모두 영어강사, 교수, 아티스트 혹은 댄서 등 전문직 종사자들만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설마 그들만이 서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책에서도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서라도, 2~3명 정도는 그들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녀들의 수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인터뷰어들의 진행 때문이었는지 최대한 절제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좀 더 솔직한 이야기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당하고 있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 더 진정성을 가진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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