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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평점 :
2년 전 분당 샘물교회에서 아프간에 갔던 선교단 일행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면서 한동안 사회에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기독교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감을 읽을 수 있는 계기였다. 그해 초에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아프간으로 선교를 간다 해서, 회교 율법에서 기독교 전도 행위를 금하고 있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법을 어겨 가면서 전도를 해야 하냐고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면 안되는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전도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7가지 사항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통해 저자 김선주 씨는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목사, 교회, 설교, 복음, 전도, 영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현재 예수님의 자리에 맘몬과 물신을 받드는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대체된 한국 교회가 놓칠 것이 하나 없어 보인다. 물론 주류 교회에서는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외면하겠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저자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메신저라는 선언을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사제와 신도 간의 구별은 없어졌다. 그것이 바로 중세 부패한 가톨릭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유대교 전승에 의거한 제사장 중심의 예배의식이 어느새 한국교회에 침투하면서 목사 중심의 목회가 대세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닌, 낮은 곳에서 우리들을 섬기러 온 예수님의 뜻을 본받아야 할 목회자들이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할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는 교회를 이념의 성전(聖殿)으로 규정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로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던 교계 지도자들의 통렬한 반성 없이 해방과 한국전을 맞이한 한국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예수님의 이웃사랑의 정신을 전파하기보다는 군사개발독재와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치우친 그릇된 모습만을 보여 왔다. 뿌리가 깊지 못한 근본 신학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자성하지 못한 일부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목사들이 발호하는 모습에 일반 대중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대형교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늘날 교회 내의 젊은 청년들이 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진 채 점점 율법주의와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시장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를 등지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세상이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그들에게 실천적 모습과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세 번째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에서 말뿐인 설교의 공허성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과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넘쳐나는 설교들로 인해 설교의 가치는 날로 하락하고 있다. 현장성이 결여된 미디어 설교를 실천적 삶에 참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일예배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성과 현장에서 서로 교류하는 소통의 담론은 확보할 수가 없다. 저자가 표한하듯이 설교 시간이 “소통과 교감의 제의”(121쪽)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데 적극 찬성한다.
너무나 자본주의화된 교회 내의 모습에서 설교 또한 일련의 중산층 사교클럽의 일종의 소비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진단은 뼈아픈 지적이었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인 이웃사랑과 돌봄의 미학보다 교회 내에의 유니폼 크리스천들끼리의 교제에 보다 많은 시간을 들이고, 교회의 유지와 보수에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건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네 번째 복음 편에서는 현재 대한민국 호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 이명박 장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분석을 볼 수가 있다.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도저히 기독교 출신 장로로 볼 수 없는 행태와 정책이란다. 그가 대통령 인수위 시절 기용한 소망교회 인맥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행태는 기독교를 떠나서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고 양심에서도 한참 멀리 벗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저자는 대선 전에 그렇게 이명박을 지지했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정말로 복음의 차원에서 그를 검증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물론 그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정신과 복음적인 차원이 아닌 오로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를 지지한 교계 지도자와 교권주의자의 모습에서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의 위선과 허위를 꾸짖던 예수님의 모습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전도는 다섯 번째로 등장한다. 우선 저자가 모은 실례를 드는데, 아마 많은 이들이 공격적이면서도 일방적인 형태의 전도를 봐왔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도의 취지에 대해서는 찬성을 하지만, 상황과 때를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사랑한다면 나와 타자와의 분리 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충분히 말씀과 복음으로 준비되지 않은 채, 뜨거운 열정만으로 전도 행위에 나서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2년 전 역시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뼈아픈 자기고백과 회개에 대해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느 집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회개가 단발성 이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여섯 번 째에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여의도 모 교회의 목사의 예를 들고 있는데,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한 회개는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중에 그가 가상으로 작성한 회개문이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그가 그런 회개를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인 면에서 세상과 충돌하고 있는 헌금문제가 있다. 성전과 제사장 이데올로기 무장한 한국 교회들은 헌금과 십일조가 정말 쓰여야 하는 용도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건물을 짓고, 목회자들이 대한 사례비나 임대비가 아닌 세상을 구휼하는데 성도들의 헌금이 온전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랜드 사태가 보여 주는 교훈 또한 명확하다. 기업은 무조건 이윤을 내야한다는 자본주의적 명제와 더불어 사는 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양존할 수 없다는 것이 예의 사태를 통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130억의 십일조 납부보다 1000여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승계가 창출한 이익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않았을까? 이들의 농성에 대해 이랜드의 회장이 장로로 시무했던 강남의 모 대형교회가 굳이 외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선주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매체의 기사와 저서를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102쪽에 나오는 경향신문에 실린 구미정 교수의 ‘강남형 대형 교회 여신도들의 신앙양태에 대한 신학윤리적 성찰’ 기사는 직접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0-80년대 개발독재 패러다임이 설교를 통해 현재 대형교회 성장 메커니즘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구교수는 이 기사를 통해 한국 교회의 미래 지향적 가치는 “성장과 성공이 아니라, 작음과 낮아짐, 나눔과 섬김, 보살핌과 살림”이 되어야 한다고 방점을 찍는다.
아울러 예전에 을유출판사에서 나온 <가톨릭교회>라는 책을 통해 처음 만난 한스 큉의 저작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특히 그의 명저 <그리스도교>를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문제가 많은 한국 교회에 희망은 없는걸까? 저자는 그래도 여전히 교회 안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만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처럼 현재 한국 교회에 깃든 맘몬과 물신주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그동안의 과오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해 거듭나야할 것이다.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원론적인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담긴 진정한 사랑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