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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ㅣ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평점 :
서구 학자 프랑크 디쾨터가 저술한 중국혁명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해방의 비극>을 읽었다. 오랜 세월 공산당 정부기록보관소에 잠자고 있던 자료들과 다수의 인터뷰 그리고 수많은 사료들을 기초로 해서 프랑크 디쾨터는 중국혁명의 진실을 파헤친다. 어쩌면 제목에서부터 그의 결론을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중국 공산주의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공내전에 대한 관심이 있어 2차 세계대전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다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초반에 대략적으로 다루어진 정도가 전부다. 공산당이 대륙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원인에 대한 분석보다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중국 공산당이 선전선동과 통일전선 전술로 종전 후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만주를 발판으로 해서 국민당 정예군을 섬멸한 창춘공방전, 상징적인 베이징함락, 전반적인 전세를 가름한 쉬저우 전투 마지막으로 양쯔강 도하작전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섬세하게 프랑크 디쾨터는 기술했다. 특히 1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창춘전투는 대륙에서 국민당 패퇴를 가르키는 역사적 지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중국 인민들에게 고취시킨 인민해방군이 실질적으로 그들의 보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만주를 정복한 린뱌오의 표현대로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는 말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방에 앞선 불길한 전주곡이라고 해야 할까.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축출한 베이지의 공산당 정권은 1세기 동안 외세의 개입과 소모적인 항일전 그리고 국민당 정권 하에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를 체험한 중국 대다수 가난한 인민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 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문제는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전후에 시급한 경제 재건보다 계급투쟁 아니 계급 전쟁을 가장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인민들의 복리후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탄생한 신생정권의 보위와 요새 섬 타이완에 웅크린 장제스 정권과 가상의 제국주의 강적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산당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과 뒤이은 공포정치는 모두가 예상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순조로운 정권 이양을 위해, 국민당 정권 아래 복무했던 과거를 가진 공무원들과 상공업자 그리고 산업가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마오 정부는 우선 그들을 안심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물론 그들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공산당 간부들이 수년에 걸친 훈련을 거쳐 그들의 임무를 대신하게 되자 가차 없는 숙청이 되었노라고 프랑크 디쾨터는 사료를 통해 증언한다.
공산당 정부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토지개혁과 지주계급 척결을 우선적으로 시행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제 시스템을 파괴하면, 희망대로 농민 계급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라는 전망은 훗날 오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중국 전통을 무시한 소련의 방식을 모델로 삼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집산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생산력의 감소를 초래했다. 혁명의 기운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무모한 도박으로 시작한 한국전쟁 개입은 1950년 초반 대기근을 불러왔다. 농민들에게 불하된 토지에 대한 막대한 세금과 연인원 300만명이 투입된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병참으로 우선적으로 식량이 무리하게 공출되면서 인재에 인한 기아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 가운데 특출난 인물로 쓰촨, 윈난 그리고 구이저우를 비롯한 서남 지역을 책임졌던 덩샤오핑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골수 공산주의자로 대장정에도 참가했던 이 작은 거인은 이미 1950년대에도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지방지도자로 악명을 날렸다. 해방 초기의 사례들을 검토해 볼 때, 톈안먼 사건 당시 덩샤오핑의 무자비한 진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모든 이들이 말렸던 한국전쟁에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흔히 인해전술로 일컬어지는 막대한 인력투입으로 미국과 유엔 연합군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40만명에 달하는 중국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국공내전에서 포로로 잡힌 국민당군 출신 병사들이었다고 전한다. 아마 순망치한이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겨냥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쩔쩔맸던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전쟁을 치렀다는 점을 지식인 계급에서는 자랑스러워 했던 모양이다. 다만 민간에서는 강제징집을 기피하려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 역시 눈길을 끌었다.
한편 마오쩌둥이 기획한 공산당 독재의 기원은 대장정 후 적도 옌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파이와 간첩을 축출하겠다는 명분으로 공안과 정보기관 수장이었던 캉성을 앞세워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됐다. 해방 후에는 사상 개조라는 이름으로 전국 단위로 아예 제거할 대상을 선정하고, 제거되야할 인원들이 할당되기도 했다. 처형, 고문 그리고 노동개조의 방식으로 수백만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종교인사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계급에 대한 숙청도 아울러 이루어졌다. 물론 1966년부터 시작되는 문화대혁명에 비한다면 해방 초기의 숙청은 그야말로 몸풀기 정도였다고 해야 할까. 해방전쟁 당시 선전되었던 자유와 평등 같은 정치적 구호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지식인들이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풍조는 단기간에 중국 전통 사회질서의 붕괴를 불러왔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서구사회에서 보장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한 펑유란 같은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발표한 학문적 성과를 부정하고, 치욕적인 자아비판을 해야했다. 저명한 예술 이론가 후펑이나 베이징대의 저명한 철학교수 량수밍도 마오 정부에서는 모두 환영받지 못한 인사들이었다.
토지 개혁에 이은 곡물 전매 제도 역시 대중의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경제를 담당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 같은 온건론자들의 시간이 걸리는 점진적 개혁 대신 마오 주석은 무조건 속도전을 강조했다. 그것은 마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오자서가 남긴 “일모도원(日暮途遠)” 같다고나 해야 할까. 공산당 경제팀의 엇박자와 괴리된 현실로 잉태된 인재의 비극은 대량 기아사태의 전조였다. 물론 그것도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대기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만. 프랑크 디쾨터 작가는 진짜 비극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후속작으로 이어질 <마오의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을 조용한 목소리로 예고한다.
공산주의 특유의 선전술에 입각한 허상에 대해서도 작가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혁명 초기의 구호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빛이 바래지고 있었다. 대신 존재하지도 않는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위해 서구사회에 보여주기식 전시행정 스타일의 대규모 건설공사가 시행되었고, 전국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붐이 일었다. 쥐, 벼룩, 빈대 등에 대한 전국단위의 박멸작전이 마치 군사작전을 실시하듯 처리되었고, 공공을 위한 위생사업도 꾸준하게 실시된 점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신장개발에 대해 작가는 상대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계획들이 부작용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입안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리고 순전히 마오쩌둥 마음대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해방의 비극>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편중된 입장에서 저술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혁명으로 인민의 삶이 나아진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공산정권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에 따르면 단언컨대 하나도 없다. 다만 지도자와 권력이 장제스 국민당 독재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 독재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중에 약속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 어떤 것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민중의 삶 역시 개선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계급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전통 사회질서가 파괴되었고, 고발과 비난이 난무하는데 가운데 자본가 지주계급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지 않고 강제노동수용소나 한국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민들은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연이어 실패한 경제정책과 무리한 토지 개혁으로 농업을 필두로 한 각종 생산성은 저하되었고, 그 결과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가 초래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야만 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지식인들도 각종 규제를 불러온 공산독재 시스템에 넌더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연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1930년대 국민당 최고의 절정기 시절에 볼썽사납게 패퇴한 홍군의 장정을 기록하면서 산베이 소비에트 옌안에 자리 잡은 홍군이야말로 중국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기록했었다. 불과 12년 전의 홍군/공산당과 대륙을 패권을 잡은 1950년 중국 공산당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벌어졌단 말인가. 거대한 성취가 가져온 오만과 오판의 결과물인지에 대해 작가의 나머지 연작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