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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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주 오래 전에 임철우 작가의 <등대>를 읽었다. 절친이 선물해 준 책이었는데 이젠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신작 소설집 <연대기, 괴물>를 읽으면서 그 친구와 아우라지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보니 <연대기, 괴물>에도 뗏사공의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우리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아우라지에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작인 <이별하는 골짜기>는 사서 읽지도 않은 채 책장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황천기담>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새벽에 이 책을 다 읽었는데, 예전에 기억하는 임철우 작가 특유의 글맛은 여전했다. 이러니 그의 글을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있나 그래. <등대>부터 다시 구해서 읽어야겠다.

 

소설집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흔적>에서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젊어서는 미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겪고, 인생의 중반전을 지나다 보면 중세인들처럼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죽은 아내의 망령이 찾아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제 당신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싸인으로 받아 들여야할까? 이미 죽음의 문턱에 두 번씩이나 다녀왔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사후 자신을 거두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추한 잔재를 남기느니 한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지키겠다는 화자의 결심이 이해가 간다.

 

표제작 <연대기, 괴물>는 아예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식민지배와 해방, 연이은 좌우대립에 민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용병으로 참전한 베트남전쟁까지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를 오롯하게 담아낸다. 현실에서는 예의 주인공 송달규 씨가 노숙인으로 살다가 평생 자신을 쫓아온 괴물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까지. 어쩌면 그는 태어나선 안될 그런 존재였던가. 자신의 아버지가 어쩌면 생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어머니의 남편을 죽인 몽둥이패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을 송달규 씨는 받아 들일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인 그는 용병으로 참전한 불의로 점철된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에 나서기도 했고, 그 후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처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이야기에 저자는 세월호 사건까지 겹쳐서 이야기의 전개를 그야말로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마치 자신의 창조주를 파멸시키려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은 정말 섬뜩했다.

 

남도 출신 옹기장이 허만석 씨의 이야기도 구슬프기 짝이 없다. 아무런 연고 없이 쪽방생활을 하는 이들의 사연은 왜 그리도 깊은지,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아우라지 뗏사공 출신 송필구 할아버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실타래는 중후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전자가 전지적 시점에서 전개가 된다면, 후자는 방송 PD로 보이는 C라는 인물을 작가의 페르소나로 내세워 자신이 정선과 영월 일대를 돌며 수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보니 <이야기 집>(단추눈아짐)의 이야기도 맥을 잇는다. 탐 드루리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같은 미국 출신 작가들이 풀어내는 미국 특유의 시골 마을 이야기들처럼, 뗏사공이나 새점을 치는 이가 등장하고 남도를 돌며 옹기를 파는 옹기장이의 한이 서린 이야기들이 과연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세계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고샅이나 단골(무당) 혹은 들병이 같은 우리도 사전을 찾아야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토속어들의 향연을 그네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한국적인 세계적이라는 말은 적어도 우리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같이 도심에 사는 이들이 과연 저자가 우리 산하를 떠돌며 채취한 시골 정경의 그 맛과 정취를 과연 제대로 짚어낼 수 있을지 나는 의심이 든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풍광을 소화해낼 소비자의 문제인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혹은 화자들이 세상과 맺은 관계라는,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간이역>에서는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자신의 불운에만 한탄할 뿐 자신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인 남편의 초상을 다룬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을 저격한다. <물 위의 생>에서는 새와 대화하던 죽은 한수희의 뗏사공 인연을 찾아 나선 C의 ‘황량하고 헐벗은 시간과 기억’에 파문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가. 깊이 없이 형성된 피상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고, 관계의 주체들은 그 속에서 부유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보다 인간다워 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최근 다양한 성취를 선보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과는 달리 원숙미가 돋보인다는 점도 소설집 <연대기, 괴물>이 가진 경쟁력이라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자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직접 체험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매 소설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죽음과 기억을 매개로 한 핍진성 넘치는 구성이야말로 임철우 작가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우리네 삶의 시작은 자유의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종언은 의지의 문제라는 걸까. 어쩌다 마주친 생의 끄트머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타인이 살아온 삶의 진실은 낯설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하나쯤은 삶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밀에 대한 접근이야말로 우리가 그의 소설집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어쩌면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 임철우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줄 알기”를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망각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나 꺼려하는 소재이지만, 또 피할 수 없는 소재에 정면 도전장을 낸 작가의 기백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연어가 회귀하듯, 임철우 작가의 전작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등대>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별하는 골짜기’로 여행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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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거장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전하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는 철학 동화 그 네 번째,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3분)


<강렬한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치들을

은유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동화를 썼다>

─ 2016 헤밍웨이 문학상 수상 당시 심사평



세풀베다가 추구해 온 문학 세계의 결정체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우정에 바치는 찬가. - 『리베르타』


세풀베다를 모르는 이들 역시 이 믿을 만하고 순수하며 강렬한

내레이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 『엘 파이스』


세풀베다 문학이 천착해 온 새로운 삶의 전망과 형식이

아프마우라는 개를 통해 오롯이 드러나는 수작이다. - <옮긴이의 말>에서


* 서평단 신청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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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위 네 가지 모두 지켜야 합니다.


* 모집 인원: 3명

* 모집 기간: 3월 15일~3월 20일(5일 간)

* 당첨자 발표 및 도서 발송: 3월 21일 화요일 예정


* 서평단 활동 방법

도서를 받으신 후, 3월 31일까지

알라딘 서재와 개인 블로그(또는 타 SNS: 인스타/페이스북 등)에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남겨 주신 리뷰는 당첨자 발표 페이지 아래에 댓글로 주소를 남겨 주세요.

★ 도서 수령 후 리뷰를 올리지 않으신 분들은 이후 이벤트에서 당첨 제외됩니다.




작가 세풀베다가 어릴 적 자라며 들었던 이야기이자,

실제 라틴 아메리카에서 2500년 넘게 살아온 원주민 부족인 <마푸체족>에게

잊지 않기 위해 이어온 이 이야기는 분명 지금 우리들에게도 유의미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많은 신청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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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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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학자 프랑크 디쾨터가 저술한 중국혁명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해방의 비극>을 읽었다. 오랜 세월 공산당 정부기록보관소에 잠자고 있던 자료들과 다수의 인터뷰 그리고 수많은 사료들을 기초로 해서 프랑크 디쾨터는 중국혁명의 진실을 파헤친다. 어쩌면 제목에서부터 그의 결론을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중국 공산주의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공내전에 대한 관심이 있어 2차 세계대전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다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초반에 대략적으로 다루어진 정도가 전부다. 공산당이 대륙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원인에 대한 분석보다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중국 공산당이 선전선동과 통일전선 전술로 종전 후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만주를 발판으로 해서 국민당 정예군을 섬멸한 창춘공방전, 상징적인 베이징함락, 전반적인 전세를 가름한 쉬저우 전투 마지막으로 양쯔강 도하작전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섬세하게 프랑크 디쾨터는 기술했다. 특히 1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창춘전투는 대륙에서 국민당 패퇴를 가르키는 역사적 지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중국 인민들에게 고취시킨 인민해방군이 실질적으로 그들의 보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만주를 정복한 린뱌오의 표현대로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는 말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방에 앞선 불길한 전주곡이라고 해야 할까.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축출한 베이지의 공산당 정권은 1세기 동안 외세의 개입과 소모적인 항일전 그리고 국민당 정권 하에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를 체험한 중국 대다수 가난한 인민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 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문제는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전후에 시급한 경제 재건보다 계급투쟁 아니 계급 전쟁을 가장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인민들의 복리후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탄생한 신생정권의 보위와 요새 섬 타이완에 웅크린 장제스 정권과 가상의 제국주의 강적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산당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과 뒤이은 공포정치는 모두가 예상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순조로운 정권 이양을 위해, 국민당 정권 아래 복무했던 과거를 가진 공무원들과 상공업자 그리고 산업가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마오 정부는 우선 그들을 안심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물론 그들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공산당 간부들이 수년에 걸친 훈련을 거쳐 그들의 임무를 대신하게 되자 가차 없는 숙청이 되었노라고 프랑크 디쾨터는 사료를 통해 증언한다.


공산당 정부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토지개혁과 지주계급 척결을 우선적으로 시행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제 시스템을 파괴하면, 희망대로 농민 계급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라는 전망은 훗날 오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중국 전통을 무시한 소련의 방식을 모델로 삼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집산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생산력의 감소를 초래했다. 혁명의 기운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무모한 도박으로 시작한 한국전쟁 개입은 1950년 초반 대기근을 불러왔다. 농민들에게 불하된 토지에 대한 막대한 세금과 연인원 300만명이 투입된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병참으로 우선적으로 식량이 무리하게 공출되면서 인재에 인한 기아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 가운데 특출난 인물로 쓰촨, 윈난 그리고 구이저우를 비롯한 서남 지역을 책임졌던 덩샤오핑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골수 공산주의자로 대장정에도 참가했던 이 작은 거인은 이미 1950년대에도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지방지도자로 악명을 날렸다. 해방 초기의 사례들을 검토해 볼 때, 톈안먼 사건 당시 덩샤오핑의 무자비한 진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모든 이들이 말렸던 한국전쟁에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흔히 인해전술로 일컬어지는 막대한 인력투입으로 미국과 유엔 연합군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40만명에 달하는 중국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국공내전에서 포로로 잡힌 국민당군 출신 병사들이었다고 전한다. 아마 순망치한이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겨냥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쩔쩔맸던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전쟁을 치렀다는 점을 지식인 계급에서는 자랑스러워 했던 모양이다. 다만 민간에서는 강제징집을 기피하려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 역시 눈길을 끌었다.


한편 마오쩌둥이 기획한 공산당 독재의 기원은 대장정 후 적도 옌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파이와 간첩을 축출하겠다는 명분으로 공안과 정보기관 수장이었던 캉성을 앞세워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됐다. 해방 후에는 사상 개조라는 이름으로 전국 단위로 아예 제거할 대상을 선정하고, 제거되야할 인원들이 할당되기도 했다. 처형, 고문 그리고 노동개조의 방식으로 수백만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종교인사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계급에 대한 숙청도 아울러 이루어졌다. 물론 1966년부터 시작되는 문화대혁명에 비한다면 해방 초기의 숙청은 그야말로 몸풀기 정도였다고 해야 할까. 해방전쟁 당시 선전되었던 자유와 평등 같은 정치적 구호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지식인들이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풍조는 단기간에 중국 전통 사회질서의 붕괴를 불러왔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서구사회에서 보장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한 펑유란 같은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발표한 학문적 성과를 부정하고, 치욕적인 자아비판을 해야했다. 저명한 예술 이론가 후펑이나 베이징대의 저명한 철학교수 량수밍도 마오 정부에서는 모두 환영받지 못한 인사들이었다.


토지 개혁에 이은 곡물 전매 제도 역시 대중의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경제를 담당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 같은 온건론자들의 시간이 걸리는 점진적 개혁 대신 마오 주석은 무조건 속도전을 강조했다. 그것은 마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오자서가 남긴 “일모도원(日暮途遠)” 같다고나 해야 할까. 공산당 경제팀의 엇박자와 괴리된 현실로 잉태된 인재의 비극은 대량 기아사태의 전조였다. 물론 그것도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대기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만. 프랑크 디쾨터 작가는 진짜 비극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후속작으로 이어질 <마오의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을 조용한 목소리로 예고한다.


공산주의 특유의 선전술에 입각한 허상에 대해서도 작가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혁명 초기의 구호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빛이 바래지고 있었다. 대신 존재하지도 않는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위해 서구사회에 보여주기식 전시행정 스타일의 대규모 건설공사가 시행되었고, 전국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붐이 일었다. 쥐, 벼룩, 빈대 등에 대한 전국단위의 박멸작전이 마치 군사작전을 실시하듯 처리되었고, 공공을 위한 위생사업도 꾸준하게 실시된 점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신장개발에 대해 작가는 상대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계획들이 부작용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입안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리고 순전히 마오쩌둥 마음대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해방의 비극>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편중된 입장에서 저술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혁명으로 인민의 삶이 나아진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공산정권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에 따르면 단언컨대 하나도 없다. 다만 지도자와 권력이 장제스 국민당 독재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 독재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중에 약속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 어떤 것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민중의 삶 역시 개선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계급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전통 사회질서가 파괴되었고, 고발과 비난이 난무하는데 가운데 자본가 지주계급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지 않고 강제노동수용소나 한국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민들은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연이어 실패한 경제정책과 무리한 토지 개혁으로 농업을 필두로 한 각종 생산성은 저하되었고, 그 결과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가 초래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야만 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지식인들도 각종 규제를 불러온 공산독재 시스템에 넌더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연 혁명으로 좋아진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1930년대 국민당 최고의 절정기 시절에 볼썽사납게 패퇴한 홍군의 장정을 기록하면서 산베이 소비에트 옌안에 자리 잡은 홍군이야말로 중국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기록했었다. 불과 12년 전의 홍군/공산당과 대륙을 패권을 잡은 1950년 중국 공산당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벌어졌단 말인가. 거대한 성취가 가져온 오만과 오판의 결과물인지에 대해 작가의 나머지 연작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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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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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시대다. 언제는 소통이 시대의 키워드였었는데 이제는 힐링에 자리를 내주었다. 카카오스토리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힐링 여행의 흔적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 삶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힐링들이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은 <오빠 알레르기>의 작가도 누군가에게 위로, 힐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서두에 남겼다. 나도 힐링이 되었을까?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소처럼 꾸역꾸역 그렇게 글을 읽었을 뿐인데.

 

모두 7개의 이야기를 품은 <오빠 알레르기>를 살펴 보자. 남녀 구분 없이 학형이라 부르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내가 복학생이 되었을 때, 오빠라고 불리던 그런 이물감을 고은규 작가가 창조한 <오빠 알레르기>의 주인공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청청패션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 운동과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쉬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표제작을 통해 되살아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선배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옛 사랑을 만난 감정 그리고 술에 취해 미처 부조를 해지 못해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작년에 읽은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 다음 두 이야기는 좀 임팩트가 약해서 패스. 비틀즈 노래 제목을 차용한 <맥스웰의 은빛 망치>가 주는 교훈 하나는 그러니까 남의 일에는 참견하지 말 것. 선의로 개입했지만 결과는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엔진룸>은 소설집 중에 가히 최고로 꼽을 만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퇴직하고 운영하시던 치킨 집을 빈대들의 습격으로 말아 먹고 수술 중에 돌아가셨다. 이혼한 강철 캥거루 언니는 화자와 우연히 갔던 콘서트 무대의 주인공 아이돌 가수에 미쳐 금벌(golden bee)과 화자 은주의 돈을 튀고 대부도로 그리고 대공원으로 튀었다. 그날은 날이 좋아 언니 잡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살림을 줄여 이사간 집은 도무지 세간살이를 버릴 줄 모르는 엄마 덕에 아수라장이다. 그런 자신의 집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기어 다니며 산다고 수군거리고. 우리에게 어쩌면 가족은 바로 그렇게 “발에 맞지 않는 구두”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받는 우리네 삶에 대한 초상을 작가는 직격한다.

 

다음 작품 <급류 타기> 역시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매일 같이 지나는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지연과 영훈이 사는 집은 새로 지은 빌라지만 부실공사로 금이 가고, 정전이 다반사다. 문제는 지연을 누나를 뉴욕에서 지하철 사고, 아이를 임신한 지연은 오빠를 엘리베이터 사고로 잃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죽은 오빠의 시신을 보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엄습한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 아이를 내놓는 게 두렵다는 지연은 유산을 결심한다. 아내의 우울증을 달랠 길이 없는 가운데, 농약회사에 다니는 영훈은 자살을 결심하고 농약을 들이부은 이들에게 해독제 처방을 그리고 농약사용을 잘못해서 손해를 입게 된 학교 후배의 아버지의 피해보상을 다뤄야 하는 곤란한 업무에 시달린다. 농약복용이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왜 사람들은 불가역한 상황에 그렇게 자신을 내던지는 걸까.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혀 맴도는 햄스터 같다는 느낌이 위로보다는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우리네 삶이 마치 거친 물결에 내던져진 보트 같다고나 할까.

 

시위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오빠에 대한 기억을 안은 화자가 등장하는 <딸기> 그리고 악성종양으로 다리를 절게 된 이복언니를 가족으로 둔 주인공 <명화>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소설집 <오빠 알레르기>는 막을 내린다. 고은규 작가가 쓴 소설집에 등장하는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닭 소 보듯이 하고 있어도 가족은 가족이다. 가족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소 전투단위다. 살기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족쇄나 질곡이 되기도 한다. 내가 가족을 고를 수 없듯이, 가족도 나를 고를 수 없다. <엔진룸>에서 이혼한 언니를 강철 캥거루라고 부르면서 독립을 꿈꾸는 와중에 언니가 꼬불쳐둔 상여금을 들고 튀었다. 이 원수를 어쩌란 말인가. 이런 원수 같은 언니에 대한 분노감은 허세를 부리며 부동산을 통해 구경하러 간 집의 주인이 직장동료라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표제작에서 술에 취해 신참내기들한테 남자 직원들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는 꼰대 상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도 멋지다. 원칙을 내세우다 보면,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규정에 걸리기 마련이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이다. 내가 구축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히스테리로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직장에서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는지 묻게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오빠 알레르기>의 소설들은 재밌는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었다. 모든 작품을 평등하게 좋아할 수는 없겠지 아마도. 난 재밌고 내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만 기억하련다. 다가오는 봄에 소품으로 읽기에 아주 부담 없는 그런 소설집이다. 아, 사족으로 고은규 작가도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블랙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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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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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5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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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년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7월 4일, 메인에 있는 웰즈 비치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가롭고 고즈넉한 웰즈 비치는 그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로 기억하게 됐다. 시원한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여름철 휴가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에서 종이봉투에 담아 파는 고소한 칼라마리 맛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직접 수조에서 살아 움직이는 바닷가재를 골라 먹는 레스토랑,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철모와 환타병 같이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파는 골동품 가게를 품은 곳이 바로 메인이다. 유에스 루트 원을 따라 북쪽의 아케이디어로 가는 바닷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퓰리처상에 빛나는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크로스비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13개의 우리가 모르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낸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올리브 키터리지>는 역시나 재밌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소설의 제목을 장식한 까탈스럽고 온갖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차석으로 졸업했고 수십 년 동안 수학교사로 활동한 덕분인지 ‘선생질’이 인이 박힌 72세 할머니다. 소설답게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누비며 타인의 삶에 개입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삶의 본질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는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그렇게 재밌었다. 그동안 세월의 더께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라도 한 걸까. 타인의 고통의 바라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싫어하면서, 전지적 차원의 선생님으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까탈스러운 올리브 여사가 등장한다. 메인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는 작은 만큼 주민들 사이에 비밀이 없는 곳이다. 족부의학 의사로 어엿하게 성장한 아들 크리스토퍼와 빌리지 약국을 수십 년 동안 운영하다가 거대 약국 체인에게 가게가 팔려 조기은퇴한 사람 좋은 남편 헨리와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사가 그렇게 쉽게 흘러가던가. 유대인이자 의학 박사 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수전 번스타인과 결혼한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곁에서 손자들을 키울 거라는 올리브 여사의 바람을 저버리고 나라의 반대편 캘리포니아로 떠나 버린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상실감에 젖어 며느리 방에 들어가 스웨터에 매직을 죽죽 긋는 커다란 덩치의 올리브 여사를 상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 웬 놈의 사연들이 그리도 많은지. 어쩌면 그런 평온이야말로 사람들이 지닌 고통을 가리는 커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웃의 라킨네 아들 도일은 여자친구를 자그마치 29번이나 찔러 멀리 코네티컷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마을의 죄인이 된 부모는 살아있는 유령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남편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문안카드를 보낸 인연으로 그 집을 우리의 올리브 여사는 방문한다. 타인의 깊은 고통 속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어쩌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절대 내뱉을 수 없는 그런 표현들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가감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이야말로 이 소설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은 날마다 바에서 실연의 상처를 안고, 가족에 특히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피아노 연주를 하지만 무대공포증에 시달려 거의 알코올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헨리의 빌리지 약국에서 일하는 새댁 데니즈 시보도는 총기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묘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 좋은 헨리는 괄괄하고 최근 무신론자라고 천명한 올리브 여사로부터 과부 위로꾼이라는 빈정거림을 듣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성공한 올리브 여사의 제자 케빈은 덧없는 생에 대해 오랜 만에 찾은 고향 크로스비에서 번민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바다에 빠진 어린 시절 친구 패티를 구하는 와중에 저승의 문턱을 거의 넘을 뻔한 사람에게서 느낀 강렬한 삶의 애착의 본질을 깨닫기도 한다. 놀랍군 놀라워.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 올릴 수 있는지 경탄할 따름이다. 작년에 읽었던 탐 드루리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이야기보다 모든 이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미국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방인으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가 유별나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주목한 점의 하나는 어디에서고 죽음이 불청객처럼 찾아 든다는 점이다. 늙은이들은 심장발작이 와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죽음은 도둑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이다. 전혀 대처할 시간이나 준비할 새도 없이 그렇게 말이다. 이제는 하도 많이 사용해서 식상해져 버린 표현인 ‘메멘토 모리’야 말로 어쩌면 <올리브 키터리지>의 진짜 주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기쁨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플라톤이 말했다고 했던가. 엄격한 방식으로 자식을 양육했지만, 자식의 기억 속에 수학선생님 출신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꼰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엄마 올리브는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런 인물로 각인된 모양이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각각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브루클린으로 삶의 공간을 옮겨 심리치료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엄마와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만 자기 주관대로 사는 올리브에게 아들이 사는 방식은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다. 이렇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정말 섬세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의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비밀을 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끝나 간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최근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헨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헌신적인 올리브도 한 때, 이 남자를 떠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 교사인 짐 오케이시와 사랑에 빠졌을 때였던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줬던 남편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부부간의 그 은밀하고 오묘한 진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어쨌든 헨리는 세상을 뜨고 홀로 남아 과부가 된 올리브는 역시 최근에 상처한 부유한 잭 케니언의 고통으로부터 새로운 위안을 얻는다.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이로부터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타격한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장례식에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지도. 그동안 훈련된 예의와 도덕 때문에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말과 표현들을 우리는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의 좌충우돌 삶을 통해 구현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자 개과천선한 마약쟁이 대통령을 정신지체라고 부르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하바드 스퀘어에서 현직 대통령의 이름 밑에 “thug"이라고 쓴 팻말을 걸고 다니는 노인장을 목격했을 때, 정확하게 느꼈던 바로 그 카타르시스였다. 이런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해 주다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기분 좋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HBO에서 만든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구해서 봤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소설 속 거구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 역할이 요구하는 감정선을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그 덕분에 영화 <파고>로 아카데미상에 에미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드라마는 소설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re-creation의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도 좋을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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