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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지난 천년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7월 4일, 메인에 있는 웰즈 비치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가롭고 고즈넉한 웰즈 비치는 그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로 기억하게 됐다. 시원한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여름철 휴가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에서 종이봉투에 담아 파는 고소한 칼라마리 맛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직접 수조에서 살아 움직이는 바닷가재를 골라 먹는 레스토랑,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철모와 환타병 같이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파는 골동품 가게를 품은 곳이 바로 메인이다. 유에스 루트 원을 따라 북쪽의 아케이디어로 가는 바닷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퓰리처상에 빛나는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크로스비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13개의 우리가 모르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낸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올리브 키터리지>는 역시나 재밌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소설의 제목을 장식한 까탈스럽고 온갖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차석으로 졸업했고 수십 년 동안 수학교사로 활동한 덕분인지 ‘선생질’이 인이 박힌 72세 할머니다. 소설답게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누비며 타인의 삶에 개입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삶의 본질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는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그렇게 재밌었다. 그동안 세월의 더께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라도 한 걸까. 타인의 고통의 바라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싫어하면서, 전지적 차원의 선생님으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까탈스러운 올리브 여사가 등장한다. 메인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는 작은 만큼 주민들 사이에 비밀이 없는 곳이다. 족부의학 의사로 어엿하게 성장한 아들 크리스토퍼와 빌리지 약국을 수십 년 동안 운영하다가 거대 약국 체인에게 가게가 팔려 조기은퇴한 사람 좋은 남편 헨리와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사가 그렇게 쉽게 흘러가던가. 유대인이자 의학 박사 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수전 번스타인과 결혼한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곁에서 손자들을 키울 거라는 올리브 여사의 바람을 저버리고 나라의 반대편 캘리포니아로 떠나 버린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상실감에 젖어 며느리 방에 들어가 스웨터에 매직을 죽죽 긋는 커다란 덩치의 올리브 여사를 상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 웬 놈의 사연들이 그리도 많은지. 어쩌면 그런 평온이야말로 사람들이 지닌 고통을 가리는 커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웃의 라킨네 아들 도일은 여자친구를 자그마치 29번이나 찔러 멀리 코네티컷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마을의 죄인이 된 부모는 살아있는 유령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남편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문안카드를 보낸 인연으로 그 집을 우리의 올리브 여사는 방문한다. 타인의 깊은 고통 속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어쩌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절대 내뱉을 수 없는 그런 표현들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가감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이야말로 이 소설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은 날마다 바에서 실연의 상처를 안고, 가족에 특히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피아노 연주를 하지만 무대공포증에 시달려 거의 알코올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헨리의 빌리지 약국에서 일하는 새댁 데니즈 시보도는 총기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묘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 좋은 헨리는 괄괄하고 최근 무신론자라고 천명한 올리브 여사로부터 과부 위로꾼이라는 빈정거림을 듣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성공한 올리브 여사의 제자 케빈은 덧없는 생에 대해 오랜 만에 찾은 고향 크로스비에서 번민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바다에 빠진 어린 시절 친구 패티를 구하는 와중에 저승의 문턱을 거의 넘을 뻔한 사람에게서 느낀 강렬한 삶의 애착의 본질을 깨닫기도 한다. 놀랍군 놀라워.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 올릴 수 있는지 경탄할 따름이다. 작년에 읽었던 탐 드루리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이야기보다 모든 이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미국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방인으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가 유별나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주목한 점의 하나는 어디에서고 죽음이 불청객처럼 찾아 든다는 점이다. 늙은이들은 심장발작이 와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죽음은 도둑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이다. 전혀 대처할 시간이나 준비할 새도 없이 그렇게 말이다. 이제는 하도 많이 사용해서 식상해져 버린 표현인 ‘메멘토 모리’야 말로 어쩌면 <올리브 키터리지>의 진짜 주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기쁨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플라톤이 말했다고 했던가. 엄격한 방식으로 자식을 양육했지만, 자식의 기억 속에 수학선생님 출신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꼰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엄마 올리브는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런 인물로 각인된 모양이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각각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브루클린으로 삶의 공간을 옮겨 심리치료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엄마와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만 자기 주관대로 사는 올리브에게 아들이 사는 방식은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다. 이렇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정말 섬세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의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비밀을 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끝나 간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최근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헨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헌신적인 올리브도 한 때, 이 남자를 떠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 교사인 짐 오케이시와 사랑에 빠졌을 때였던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줬던 남편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부부간의 그 은밀하고 오묘한 진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어쨌든 헨리는 세상을 뜨고 홀로 남아 과부가 된 올리브는 역시 최근에 상처한 부유한 잭 케니언의 고통으로부터 새로운 위안을 얻는다.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이로부터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타격한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장례식에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지도. 그동안 훈련된 예의와 도덕 때문에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말과 표현들을 우리는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의 좌충우돌 삶을 통해 구현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자 개과천선한 마약쟁이 대통령을 정신지체라고 부르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하바드 스퀘어에서 현직 대통령의 이름 밑에 “thug"이라고 쓴 팻말을 걸고 다니는 노인장을 목격했을 때, 정확하게 느꼈던 바로 그 카타르시스였다. 이런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해 주다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기분 좋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HBO에서 만든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구해서 봤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소설 속 거구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까탈쟁이 올리브 키터리지 역할이 요구하는 감정선을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그 덕분에 영화 <파고>로 아카데미상에 에미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드라마는 소설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re-creation의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도 좋을 그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