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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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주 오래 전에 임철우 작가의 <등대>를 읽었다. 절친이 선물해 준 책이었는데 이젠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신작 소설집 <연대기, 괴물>를 읽으면서 그 친구와 아우라지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보니 <연대기, 괴물>에도 뗏사공의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우리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아우라지에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작인 <이별하는 골짜기>는 사서 읽지도 않은 채 책장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황천기담>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새벽에 이 책을 다 읽었는데, 예전에 기억하는 임철우 작가 특유의 글맛은 여전했다. 이러니 그의 글을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있나 그래. <등대>부터 다시 구해서 읽어야겠다.

 

소설집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흔적>에서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젊어서는 미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겪고, 인생의 중반전을 지나다 보면 중세인들처럼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죽은 아내의 망령이 찾아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제 당신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싸인으로 받아 들여야할까? 이미 죽음의 문턱에 두 번씩이나 다녀왔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사후 자신을 거두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추한 잔재를 남기느니 한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지키겠다는 화자의 결심이 이해가 간다.

 

표제작 <연대기, 괴물>는 아예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식민지배와 해방, 연이은 좌우대립에 민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용병으로 참전한 베트남전쟁까지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를 오롯하게 담아낸다. 현실에서는 예의 주인공 송달규 씨가 노숙인으로 살다가 평생 자신을 쫓아온 괴물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까지. 어쩌면 그는 태어나선 안될 그런 존재였던가. 자신의 아버지가 어쩌면 생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어머니의 남편을 죽인 몽둥이패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을 송달규 씨는 받아 들일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인 그는 용병으로 참전한 불의로 점철된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에 나서기도 했고, 그 후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처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이야기에 저자는 세월호 사건까지 겹쳐서 이야기의 전개를 그야말로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마치 자신의 창조주를 파멸시키려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은 정말 섬뜩했다.

 

남도 출신 옹기장이 허만석 씨의 이야기도 구슬프기 짝이 없다. 아무런 연고 없이 쪽방생활을 하는 이들의 사연은 왜 그리도 깊은지,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아우라지 뗏사공 출신 송필구 할아버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실타래는 중후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전자가 전지적 시점에서 전개가 된다면, 후자는 방송 PD로 보이는 C라는 인물을 작가의 페르소나로 내세워 자신이 정선과 영월 일대를 돌며 수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보니 <이야기 집>(단추눈아짐)의 이야기도 맥을 잇는다. 탐 드루리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같은 미국 출신 작가들이 풀어내는 미국 특유의 시골 마을 이야기들처럼, 뗏사공이나 새점을 치는 이가 등장하고 남도를 돌며 옹기를 파는 옹기장이의 한이 서린 이야기들이 과연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세계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고샅이나 단골(무당) 혹은 들병이 같은 우리도 사전을 찾아야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토속어들의 향연을 그네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한국적인 세계적이라는 말은 적어도 우리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같이 도심에 사는 이들이 과연 저자가 우리 산하를 떠돌며 채취한 시골 정경의 그 맛과 정취를 과연 제대로 짚어낼 수 있을지 나는 의심이 든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풍광을 소화해낼 소비자의 문제인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혹은 화자들이 세상과 맺은 관계라는,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간이역>에서는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자신의 불운에만 한탄할 뿐 자신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인 남편의 초상을 다룬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을 저격한다. <물 위의 생>에서는 새와 대화하던 죽은 한수희의 뗏사공 인연을 찾아 나선 C의 ‘황량하고 헐벗은 시간과 기억’에 파문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가. 깊이 없이 형성된 피상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고, 관계의 주체들은 그 속에서 부유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보다 인간다워 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최근 다양한 성취를 선보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과는 달리 원숙미가 돋보인다는 점도 소설집 <연대기, 괴물>이 가진 경쟁력이라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자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직접 체험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매 소설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죽음과 기억을 매개로 한 핍진성 넘치는 구성이야말로 임철우 작가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우리네 삶의 시작은 자유의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종언은 의지의 문제라는 걸까. 어쩌다 마주친 생의 끄트머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타인이 살아온 삶의 진실은 낯설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하나쯤은 삶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밀에 대한 접근이야말로 우리가 그의 소설집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어쩌면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 임철우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줄 알기”를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망각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나 꺼려하는 소재이지만, 또 피할 수 없는 소재에 정면 도전장을 낸 작가의 기백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연어가 회귀하듯, 임철우 작가의 전작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등대>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별하는 골짜기’로 여행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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