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제럴딘 매코크런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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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인천에 갔다가 방구석에서 쌓여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낡아가는 책들 정리를 좀 했다. 정리라고 부르고 걸레로 먼지를 닦고, 다시 스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 제럴딘 머코크런이란 작가의 <시라노>였다. 내가 시라노는 좀 알지, 그런데 이 책을 읽은 기억은 도통 나지 않는다. 12년 전, 한창 책 읽을 시절에 어디선가 수배한 책이라는 것 정도. 그날 차에 실어서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어제 13권으로 끝날 11월 독서의 말미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 대한 소설을 읽었다. 단숨에. 초반에는 정말 유쾌하게 시작했다. , 그전에 절망적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라는 저자의 머리말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지.

 

연극의 주인공으로만 알았던 가스코뉴 출신 시인검객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실존 인물이었다. 게다가 국왕 근위대 출신으로 검술에 있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런 용감무쌍한 가스코뉴 전사였다. 자존감도 뛰어나서 누구에게 신세 지고 사는 걸, 차라리 그 자리에 칼을 맞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그런 검사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검사는 요즘 공화국에서 머슴이 아닌 주인 행세를 하는 그 검사가 아니라 칼잡이 검사다. 그리고 보니 둘 다 비슷하긴 하네.

 

시라노는 게다가 글도 잘 쓴다. 아니 본업이 검객이 아니라 시인 혹은 작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의 단점은 바로 무지막지하게 큰 코였다. 큰 코 때문에 도저히 미남자라고 부를 수 없는 행색이었지.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시라노는 선뜻 연애전선에 나서지 못한다. 대신 연애 조작에 나선다.

 

대상은? 팔촌누이 록산 로비노였다. 게다가 그녀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건 완전 <미녀와 야수> 17세기 버전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의 록산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근위대 신참내기 크리스티앙 드 뇌비예트라는 작자였다. 모르긴 몰라도, 추남자 시라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 그는 조각 같은 미모를 가진 상남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라노의 속도 모르고 외간남자와 사랑에 빠진 록산은 팔촌오빠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을 가스코뉴 심술쟁이들의 갈굼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로 이런 게 바로 사랑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일대기를 희곡으로 만든 에드몽 로스탕은 일찍이 이런 사랑의 엇갈리는 쌍곡선이 주는 비탄과 쾌락의 즐거움을 익히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원래 스토리의 고갱이를 유지하면서 변주를 가미한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무식한 남자 크리스티앙을 대신해서 문학천재 시라노가 자신의 뜨거운 연애 감정을 담은 편지로 록산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록산이 사랑한 건 크리스티앙의 껍데기가 아닌 바로 그 심장이자 정수였던 말과 글들이었던 것이다. 심각한 자기혐오와 콤플렉스에 빠진 시라노가 그걸 알 리가 있나 그래.

 

자 이쯤에서 빌런 한 명 쯤 등장하는 것도 극의 전개를 위해 아주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권력과 지위 그리고 재산 무엇 하나 빠지지 않게 완비한 빌런 드 기슈 백작을 배치한다. 다른 두 남자와 마찬가지로 드 기슈 백작 역시 록산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다만 다른 두 남자가 순수한 마음으로 들이댔다면, 드 기슈는 오로지 아름다운 여성 록산을 트로피처럼 생각했다는 점이지.

 

그런데 나는 또 이 지점에서 드 기슈 백작 역시 엇갈리는 사랑의 희생물이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 시라노에게 몰입한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를 위한 신원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드 기슈 백작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드무아젤 로비노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일방통행이었다는 거지만. 따지고 보면 시라노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록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애 조작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았던가. 내가 보았을 적에 시라노와 드 기슈의 사랑은 다를 게 없지 않나 싶다.

 

<시라노>는 과연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다수의 요소들을 품고 있다. 우선 못생긴 야수 같은 시인검객이 사랑하는 록산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사랑을 한다는 로맨스물로부터 시작해서, 시라노-록산-크리스티앙-드 기슈로 이어지는 사각관계 그리고 30년 전쟁의 복판에서 벌어진 아라스 포위전(1640)과 서글픈 결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대략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640년경이라고 가정했을 때, 진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나이는 21세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36세에 죽었다고 한다. 아라스 공방전에서 전사한 남편 크리스티앙을 추모하며 15년의 세월을 보낸 록산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시라노.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희비극의 서사에 그만 눈물샘이 주책없이 터지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저 이런 신파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약발이 주효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작년에 영화로도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구해서 한 번 봐야지 싶다. 그리고 여주의 이름 록산을 볼 때마다, 폴리스 시절 스팅이 텁텁한 목소리로 샤우팅하던 <록산>의 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미쿡 친구 브랜던이가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한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러서 동행한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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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01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윽, 오별! 이 장편소설이 에드몽 로스탕의 원전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 이것이죠? 오.....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 - 푸치니 유작 <투란도트> 종결부를 작곡한 사람 - 의 오페라 <베르쥐라의 시라노>도 무쟈게 좋습니다만, 그것 조차도 제가 읽기엔 로스탕 원작 보다는 못했던 거 같은데 아이고,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오페라에선 사다리 아래에서 크리스탕을 대신해 록산느를 위해 노래한 코 큰 시라노의 세레나데가 죽여줬는데요. 흑흑.. 록산느가 바보예요. 코가 크면 좋다는데, 흑흑흑..... 삼종오빠의 순정도, 큰 코도 몰라주고....흑흑.....

레삭매냐 2022-12-01 19:24   좋아요 2 | URL
제가 원작을 읽지 않아서 리메이크
에 더 정신이 팔린 게 아닐까 싶습
니다. 리메이크를 읽고 나니 다시
원전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로옥새앤~ 바보 맞습니다. 좋아하는
남자들이 셋이나 되는데...

라로 2022-12-01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멋진 책을 소개해 주셨군요!! 전자책 알림 신청했어요!!^^;;
늘 전자책 알림 신청만 하는 라로씨.ㅎㅎㅎㅎ

레삭매냐 2022-12-01 19:25   좋아요 1 | URL
되게 옛날 책인데, 전자책
으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네요.

171쪽이라 금방 쉭쉭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알림 신청 완완쉐!

페넬로페 2022-12-01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라노를 뮤지컬로 봤어요.
내용이 넘 재미있고 뮤지컬 넘버도 좋아서 완전 빠져버렸거든요.
뮤지컬에서는 시라노를 생긴 것 빼고 다른 모든 걸 완벽하게 해 놨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시라노같은 사람으로
끝까지 이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 내리라! ㅋㅋㅋ

레삭매냐 2022-12-02 09:06   좋아요 1 | URL
작품의 무한한 변용이자
원소스멀티유즈의 전범이
<시라노>가 아닐까 싶습
니다.

시라노 뮤지컬도 재미질
것 같네요.

자존감 넘치는 시라노의
좌충우돌! 단 사랑 앞에선
고저... 파이팅~입니다.

mini74 2022-12-01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제라드 드 빠리디유? 의 시라노 봤던 기억나요. 큰 코에 딱 맞지요 ㅎㅎ

레삭매냐 2022-12-02 09:11   좋아요 0 | URL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예전
에는 프랑스 국민배우라
불렸는데, 부유세 때문에
러시아 국적 취득한 다음
에는 바로 그 타이틀이 사
라지고 글로벌 배신자로
등극했더라는.

돈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입니다.

큰 코 시라노로는 제격이
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