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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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사놓았다. 물론 당장 읽지는 않고 좀 묵혀 두었다. 그러다 이번 달에 발자크 발동이 걸려서 내리 5권을 읽었다. 물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는 중이다. 문제는 막상 <미지의 걸작>을 읽어 보려고 하니, 찾을 수가 없더라는 거였다.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미지의 걸작>에는 두 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데 단가가 무려 17,000원이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냐? 그리고 뒤에는 <미지의 걸작>1994년에 자크 리베트가 영화로 만든 <누드 모델>의 씬들이 몇 컷 실려 있더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격을 이 정도 받으려면 단편 하나 정도는 더 넣어 주어야 하지 않았나.

 

타이틀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실린 <영생의 묘약>부터 잠깐 짚고 넘어 가자. 이 짤막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돈 후안 벨비데로다. 공간은 이탈리아의 페라라. 아버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또 유흥과 환락에 아낌 없이 돈을 써대는 탕자 같은 아들이 바로 돈 후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바르톨로메오는 인생의 대부분을 상인으로 살아온 구십대의 노인이다. 이제 곧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로, 병상에서 죽어가는 중이다. 죽음의 시간이 이르자,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불러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기묘해 보이는 병에 든 약물을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자신의 시신 곳곳에 발라 달라는 거였다. 아무리 탕자였지만,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돈 후안.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 대로, 하얗게 변한 아버지의 눈에 묘약을 넣자 아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영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 돈 후안은 자신의 아들 펠리페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한다. 고딕 스타일의 언데드를 연상시키는 결말이 사뭇 충격적이다. 19세기 프랑스/파리 사회를 그린 발자크가 이런 스타일의 소설도 썼구나 하며 넘어간다.

 

지금까지는 워밍업이었다. 이제 본론인 <미지의 걸작>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나는 <미지의 걸작>을 읽으면서 지난주에 우연히 만나게 된 너튜브 르네상스 동영상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그건 마치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라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도래를 알린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필두로 해서, 그의 제자로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였던 티치아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바로 <미지의 걸작>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포르뷔스-니콜라 푸생 그리고 프렌호퍼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앙리 4(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시조), 마리 드 메디시스와 칼 5세 등이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래서 역사 공부가 중요하다는 걸까. 마침 공부처럼 열심히 메모까지 해가면서 시청한 르네상스 동영상이 소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포르뷔스와 니콜라 푸생은 실존 인물이고 프렌호퍼는 발자크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이제 막 화가로 출발한 니콜라에게 거의 모든 화가들과 그들의 작법에 대해 비평을 삼가지 않는 프렌호퍼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가난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부자기도 했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고래로 자연을 모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중세 회화는 신학을 보조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문주의로 사유의 거대한 흐름이 전환하게 된 점을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역시 천재였던 미켈란젤로가 형태의 마법사였다면, 티치아노는 색채의 조련사였다. 그는 특히 붉은색을 그 누구보다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는데, 주걱턱 유전자를 가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칼 5세의 전속 초상화 화가가 되면서 그야말로 인생역전에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된 부분들이다.

 

훗날 빛에 집착하게 된 인상파들에 앞서, 빛이야말로 천재적 창조자라는 표현으로 발자크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정말 강력한 미술 비평가로서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글로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면, 화가들은 화폭에 데생과 색채 그리고 선으로 자신이 관찰한 것을 실천해냈다고 한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선들이 그림 세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포르뷔스와 니콜라는 프렌호퍼가 자신의 아틀리에에 지난 10년 동안의 작업을 꽁꽁 감춰 두고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구상해온 작품에 미지의 걸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나는 순간, 그 걸작이 과연 존재는 하는가라고 직감적으로 묻게 된다. 그리고 니콜라는 자신의 애인이자 순결한 질레트를 프렌호퍼의 애타게 그리고자 하는 걸작의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 다음에는 광기에 물든 작가의 기이한 행동들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좀 더 시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자크 리베트의 영화 <누드 모델 La Belle Noiseuse (1991)>이다. 너무나 친절한 너튜브 리뷰의 도움으로 237분 짜리 원작 영화를 7분만에 퉁칠 수 있었다. 니콜라의 여친 마리앤 역할을 맡은 이십대의 엠마뉘엘 베아르의 고혹적인 연기는 이게 정말 연기인가 화가 앞에 선 모델인가 싶을 정도였다. 넘실대는 애증의 관계 속에서 베아르가 보여주는 자기파멸적 감정에 대한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걸 카메라에 담은 누벨바그/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린 걸작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며, 벽에 넣고 회칠하는 노화가 에두아르의 모습에서는 <미지의 걸작> 엔딩의 프렌호퍼가 연상됐다. 소설에도 나오듯이 아름다움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발화할 수 있게 긴밀하게 얽어매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면, 종이에 서사를 그리는 글쟁이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발자크다. 말이 필요 없다.



[뱀다리] 영화 <누드 모델>에서 노화가 에두아르 프렌호퍼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리즈 역은 제인 버킨이 맡았다. 그렇다, 버킨백으로 유명한 그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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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2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리베트의 저 영화 극장에서 봤습니다. 베아르 정말 아름답고 열연 대단한데 한편 그 긴 시간 내내 너무 고생스럽게 보여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촬영시간은 훨씬 더 길었겠죠 - 절래절래 했던 기억이 납니다.

레삭매냐 2022-11-22 14:09   좋아요 1 | URL
저도 영화 한 번 보고 싶었으나
어마무시한 러닝타임으로 인하야 -
짧은 리뷰로 대신했답니다.

자크 리베트는 처음 들어 보는데
누벨바그 출신 감독이라고 하네요.

네 시간 짜리 영화를 보셨다니 대
단하십니다 !!!

독서괭 2022-11-22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내리 5권이라니!! 한 작가 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신가봐요. 저도 예전엔 그렇게 읽었던 때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요즘은 끈기가 부족해서인지;;
우연히 봤던 뭔가가 탁 독서에 도움이 되는 순간 짜릿하죠~^^

레삭매냐 2022-11-22 19:20   좋아요 1 | URL
발자쿠가 구사하는 너무나 다양
한 당대 이바구가 넘나 재밌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중독 증상이 심해
지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훅~ 다 읽어 버릴까봐 조
바심이 날 정도입니다 ㅠㅠ

바람돌이 2022-11-22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을수가 없어 도서관 대여라니.... 이런 웃픈 일이 종종 우리에게 일어나죠. ㅎㅎ

미지의 걸작 내용을 보니 앗 이건 사야돼가 바로 떠오르네요. ^^

레삭매냐 2022-11-25 10:58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다 뒤집어 쌌는데
도대체 찾지를 못해서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더라
는...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짧은 단편인데 참 매력적이
었습니다. 소장각 공감합니다.

서니데이 2022-11-25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91년이면 엠마누엘 베아르가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겠네요.
제인버킨이 나온다고 하니 오래전 영화 같기도 해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1-27 17:30   좋아요 1 | URL
그렇죠 :>

제인 버킨은 노화가 에두아르
의 부인으로 나온답니다. 아마
이 때도 나이가 있었던 것 같
습니다.

베아르는 그야말로 팜므 파탈
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런 느낌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2-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