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세상의 왕국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0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평점 :

최근에 나온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잃어버린 발자취>를 읽다 아무래도 그전에 사둔 <이 세상의 왕국>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에 산 책이고, 또 분량도 적어서 바로 읽을 수 있거라는 나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리고 보니 한 두어번 시도했다가 결국 못 읽고 있었다. 다 읽는데 20여일도 넘게 걸렸다. 뭐랄까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언제나 그렇듯, 다 읽고 나니 왠지 모를 성취감이 들더라.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이 된 주술적 리얼리즘 그리고 ‘경이로운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린 쿠바 출신 작가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느낌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왕국>이 출간되었을 때 바로 사지 않았나 싶다. 사는 것과 읽는 것은 물론 다른 이야기다.
내가 이 책을 세 번 만에 다 읽는 건 전적으로 <이 세상의 왕국> 서사의 중심이 되는 아이티라는 나라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노라고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그저 뒤발리에의 독재나 지진으로 항상 피해를 보는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아이티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아, 미국의 대도시에서 유난히 아이티 출신 택시기사들이 많은 것 정도도.
하지만 내 상식 밖의 아이티는 훨씬 더 풍부한 역사를 품고 있는 그런 나라였다. 우선 이백년 전인 1804년 식민 종주국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을 통해 세계에서 흑인들이 처음으로 세운 나라가 되었고,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한 나라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의 종주국 중의 하나라는 미국에서 악명 높고 끔찍한 노예제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아이티처럼 대규모 흑인 노예반란이 미국에서 발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다.
이탈리아 사람 컬럼버스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을 꼬드겨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겠다며 후원을 얻어 서인도제도의 쿠바와 이스파니올라 섬에 상륙한 이래 라틴아메리카는 그야말로 고난의 땅이 되었다. 이스파니올라 섬의 서부를 장악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당시 비싼 값을 받고 팔 수 있었던 설탕의 원재료가 되는 사탕수수 재배가 아이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노동집약적 산업인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우선 아시엔다라 불리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구축하고, 그곳에서 일할 노동력을 아프리카 대륙에서 구했다. 흑인 노예라는 이름으로. 백인 식민주의자들과 흑인 노예들의 갈등과 분쟁의 양상은 이러한 사업이 구상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런 역사적 배경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작가는 역사적 인물과 가상의 인물들을 교차로 투입하면서 주술적 리얼리즘의 서사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위키피디아에서 마캉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직업(occupation)이 무려 탈주 노예(maroon)라고 되어 있다. 아니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옥시덴트한 사고의 발로가 아닌가 말이다. 아이티 혁명사에서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가 된 프랑수아 마캉달은 르노르망 드 메지 소유의 노예였다가 왼팔을 사탕수수 기계에 잃고 산으로 도주해서, 부두교 사제로 변신했다던가. 소설의 이야기와 전승들을 서로 다른 교착점을 가르킨다. 난 여기서 개인적으로 그가 부두교 사제라는 통설을 따르고 싶다.
만딩고족 출신의 마캉달은 아프리카 전승을 바탕으로 파리나 새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존재로 진화한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다. 백인 농장주들에게 끝없이 착취당하는 다수 흑인 노예들의 입장에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구세주였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을 이 세상의 왕국에서 해방시켜 줄 그런. 그는 어느 주술사에게 임상독성술을 배워, 아이티에 사는 백인 종족들을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물론 기득권층에게 이런 도전은 1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장장 18년의 항쟁을 하던 마캉달이는 동료 흑인의 밀고로 잡혀 1758년 1월 20일경 카프의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아니 화형 도중에 파리로 변신해서 형장을 탈출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런 주술적 서사야말로 카르펜티에르 같은 작가에게 좋은 소재가 되지 않나 싶다. 이런 허술하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서사의 원형이야말로 문학의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작가가 투입한 티 노엘(마캉달의 동료 노예)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아이티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의 증언자로 등장한다. 아이티 레볼루션의 다음 주자는 부크만이었다. 그들의 무장봉기는 예상보다 쉽사리 진압되고, 부크만은 참수되었다. 앙시앵 레짐을 끝장낸 프랑스대혁명 기간에도 그랬지만, 아이티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도정에서 벌어지는 유혈극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폴린 보나파르트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르클레르 장군의 황열병 급사 사건에 대한 언급도 양념처럼 명멸한다. 훌륭한 가톨릭 교육을 받은 서구인들이 아이티에 건너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아무리 봐도 엉터리 같은 부두의 주술 의식에 빠진다는 설정은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서구인들의 본질인 결국은 아이티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카르펜티에르식 블랙유머가 아니었나 싶다.
지난한 투쟁 끝에 아이티는 결국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렇게 얻은 성공의 열매를 엉뚱한 인물이 독점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앙리 크리스토프. 우리의 티 노엘이 아는 바로 그 요리사 출신 노예의 아들이 바로 신생국가 아이티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예전 식민지 시절 아이티 민중들을 지배하던 권력 계급이 백인들이었다면, 이번에는 권력층의 피부색이 바뀌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백인들은 자신의 자산인 노예들을 소중하게 다룰 줄 알았지만(순전히 경제적 이유 때문에), 몰락한 백인 부르주아 계급을 대신한 잔혹한 독재자 앙리 크리스토프를 필두로 한 흑인 권력층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이티 민중들은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시민이 아닌 어디까지나 통치와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재침공에 대비해서 만든 시타델 라 페리에르 건설 과정에 동료 흑인들을 가차 없이 동원하는 장면은 비극의 재현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유인이 되어 자신이 살던 옛 아시엔다로 돌아온 늙은 티 노엘 역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병사들에게 항의하는 티 노엘에게 돌아온 것 곤봉 세례였다. 지배 계급의 피부색이 바뀌었을 뿐, 목숨을 바쳐 독립투쟁에 나섰지만 아이티 민중들의 삶은 식민지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야말로 경이로운 현실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광대에 가까워 보이는 왕 노릇을 하던 앙리 크리스토프의 말로가 좋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요소들로 모호한 엔딩으로 <이 세상의 왕국>을 끝낸다.

<이 세상의 왕국>은 결국 나로 하여금 아이티 혁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얇은 소설만으로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란 요원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침 다행히 로런트 듀보이스가 아이티 레볼루션 200주년을 기념해서 발표한 <아이티혁명사>를 수배해 두었던 기억이 났다. 마구잡이로 쌓아둔 책더미에서 <아이티혁명사>를 찾았다. 그리고 우선 마캉달 처형 사건을 급하게 찾아봤다. 마캉달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라기 보다 전설에 가까워서 그런지 한 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되어 있더라.
이제 다시 <잃어버린 발자취>를 읽는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책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

튤립이 만개했다. 꽃이 너무 무거워서 옆의 왕수선화 녀석에게 기대고 있더라.

[보너스컷] 인스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호랑이
그림을 보고 그려 보았는데, 결론은 살찐 고양이로 판정.
누구는 또 고랑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