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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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폰 작가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던 모든 순간에 행복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만난 윌라 캐더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처럼 엔딩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폰 작가처럼 멋진 문장으로 책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신은 나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해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울 뿐이다.

 

<바람의 그림자> 후반전에는 메인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훌리안 카락스의 숙적 푸메로 경감이 등장해서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의 종결에 나선다. 다니엘 셈페레가 <바람의 그림자>의 비밀과 그 소설의 저자 훌리안 카락스에게 다가갈수록 위험은 폭증된다. 이제는 자신의 목숨과도 기꺼이 바꿀 수 있게 된 베아와의 위태로운 사랑도 지켜내야 한다.

 

도대체 사폰 작가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얼개를 어떻게 시작한 걸까? 미래의 천재작가 훌리안은 결국 사랑하는 페넬로페 알다야와 생이별을 하고 파리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아니 그는 페넬로페와 함께 파리로 도주할 계획이었다. 산 가브리엘 학교에서 만난 친구 미켈 몰리에르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훌리안은 한 때 자신의 후원자였던 리카르도 알다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아마 파리 망명생활이 장장 17년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활동에 착수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다니엘과 페르민이 진실이 밝히기 위해 이전투구 끝에 얻어낸 것들이다. 그 와중에 예전에 악연으로 얽힌 푸메로 경감이 페르민을 그야말로 죽기 전까지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폭력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 자신에게 다니엘은 그만 좌절한다.

 

그 장면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네들이 전쟁이라고 부르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푸메로가 페르민에게 용접용 토치로 가한 고문의 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잠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에 앞서 1936717일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킨 파시스트들이 193941일 반란군의 마드리드 점령까지 3년에 걸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정의가 불의와 부당한 폭력에 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다니엘의 집요한 추적에 진실의 끄트머리만 살짝 보여준 누리아 몽포르트 여사가 그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니엘에게 담긴 원고를 통해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누리에타가 구술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을 통해 사폰 작가는 독자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내 생각에 사폰은 거의 음악으로 치면 교향곡 작곡가에 비견할 만한 그런 수준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작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 훌리안 카락스. 사폰은 더블 페르소나로 자신의 한쪽 분식은 카락스에게 그리고 나머지 분신은 다니엘에게 맡긴 게 아니었을까. 이 둘은 서로 쫓고 달아나는 그런 길항적 존재들이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로는 이해하게 된다. 아니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푸메로 경감이 훌리안 카락스에게 품고 있던 복수의 정념은 무자비하고 집요했다. 오늘 어느 사설에서 보니 사랑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바로 복수라고 하더라. 푸메로는 복수의 순간을 위해 수십 년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극적 긴장감을 엔딩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빌런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라인 쿠베르라는 미치광이가 출몰해서 훌리안 카락스가 남긴 모든 책을 불태우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책들은 오히려 인기가 치솟았다. 이 또한 사폰 작가가 정교하게 만든 하나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죽은 뒤에 비로소 그의 책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처럼, 파리에서의 망명과 결투 그리고 스페인 내전 발발 초창기에 미스터리한 죽음이 그의 책들에 대한 시장 가치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절판본 성애자인 것처럼 말이지. 같은 책쟁이로서 110%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의 티비다보 애비뉴에서 벌어지는 엔딩 시퀀스는 정말 이 화려한 미스터리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복수의 종지부를 필두로 해서, 분노의 혈투 그리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자기희생의 현현까지 문학적 상상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사폰 작가는 그야말로 쥐어짜내는데 성공했다.

 

영화도 아닌 책을 보고 이렇게 감동하기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이래 처음이었다. 그냥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빌런과의 사투 끝에 잠시 스틱스강을 건넜던 다니엘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부활에 성공한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로 흐를 수 있는 <바람의 그림자>에서 개그맨 역할을 맡은 페르민의 활약으로 반전된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이런 걸 탁월한 균형감각이라 부른다지. 페르민은 하신타를 찾는 과정에서 산타 루이사 보호소의 늙은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로시이토와 함께 그곳을 찾는다. 그렇지 세상의 모든 약속들은 지켜져야 하는 법이지,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고 해도. 독자가 감동의 도가니탕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잊은 것들도 작가는 그냥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마지막 장까지 탐욕스럽게 읽은 뒤, 나는 도대체 어떤 사유와 창작의 과정을 거쳐야 이런 작품이 탄생할 수 있게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탁월한 작가가 빚어내는 언어의 지옥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니 그가 남긴 책들을 사냥해서 읽는 수밖에. 바로 <천사의 게임>을 읽기 시작했다.

 

당신이 책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어볼 것을 간곡하게 권한다. 지에브알. 그리고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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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2-10 1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롸잇 나우~~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와 함께 이 책을 담습니다^^

레삭매냐 2022-02-10 11:29   좋아요 3 | URL
제가 왠지 책팔이가 된
그런 느낌이랄까요 ㅋㅋ

버뜨 강추합니다.

미미 2022-02-10 1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교향곡 같은 느낌!!!
레삭매냐님 이렇게나 몇번씩 극찬하시니
저도 꼭 읽어볼래요^^*

레삭매냐 2022-02-10 11:30   좋아요 2 | URL
이 소설을 못하는 게 없
는 넷플릭스에서 맹글어
준다면 정말 ~

왜 이제사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고저 후회막급
입니다.

<천사의 게임>도 진도
쑥쑥입니다. 진정 책쟁이
들을 위한 책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coolcat329 2022-02-1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읽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10 14:56   좋아요 2 | URL
말이 필요 없습니다, 증맬루.

라로 2022-02-10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읽었는데 하나투 기억 안 나니까 다시 읽어야겠어요, 증맬루.

레삭매냐 2022-02-10 17:14   좋아요 1 | URL
읽고 잊기에 대해 제가 죽을 때
까지 써먹는 구절이 있답니다.

김용 선생의 <의천도룡기>에서
무당파의 두목 장삼봉이 절체절
명의 위기에서 명교 교주 장무기
에게 태극권을 전수하는 장면이
랍니다.

영맨 장무기는 태사부가 알려주
는 초식을 보는 족족 까 먹어버
리죠. 그런데 그것이 까먹은 거
이 아니라 내적 흡수라고나 할까
요.

우리 책쟁이들에게 수없이 읽고
까먹고 또 다시 읽기의 무한반복
이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받고, 다시 한 번 고고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