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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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만나기 전에 원작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개봉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너튜브 콘텐츠로 사전에 공부도 많이 했다. 중세 기사도를 필두로 해서, 아직 현대적 사법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절에 진위를 가리기 힘든 재판을 소위 신명재판이라는 이름 아래 한판 맞짱을 떠서 해결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야만스러운 방식의 재판이 흥미를 자극한다. UCLA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에릭 재거의 <라스트 듀얼>은 여러 면에서 독자 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쟁이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영화화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13681229일 토요일, 파리 부근의 생마르탱 수도원에는 수천명의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왕국의 국왕 샤를 6세를 필두로 한 수많은 귀족들과 인류 역사상 법원이 마지막으로 인정한 사법 결투를 직접 목격하려는 사람들이 다시없을 빅 이벤트 구경에 나선 것이다. 국왕과 파리 고등법원이 정식으로 허가한 사법 결투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원고 장 드 카루주와 피고 자크 르그리. 이 둘은 노르망디 출신의 귀족들로 오랜 친구 사이였으나, 노르망디의 대영주 피에르 알랑송 백작의 영지에서 봉토를 둔 갈등과 어느 사건 때문에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건 마지막 도박, 아니 결투에 나섰다.

 

<라스트 듀얼>의 저자 에릭 재거 교수는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중세 마지막 사법 결투로 기록된 카루주와 르그리의 사투를 추적했다. 저자는 두 사나이 간의 갈등의 원인부터 시작해서, 결투에 나서게 된 결정적 사건의 전개 과정과 법정 다툼 그리고 결국 결투장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이 역사적 사건은 중세라는 시대에 대한 모든 흥미로운 요소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도에 대한 엄격한 규칙과 의전들,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모욕당했다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기사들의 격투,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법정드라마까지 그야말로 좋은 서사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라스트 듀얼>의 시대적 배경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계속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왕의 봉신이자 지역 영주였던 장 드 크루주는 종기사(스콰이어) 신분의 백전노장이었다. 하지만, 발루아 왕조의 귀족 피에르 알랑송 백작이 카루주의 새로운 주군이 되면서 유서 깊은 귀족 카루주의 신세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정치적 식견이라고는 갖추지 못한 완고한 성격의 카루주는 하급 성직자 교육까지 받은 자크 르그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알랑송 백작의 총애를 받은 르그리가 잘나갈수록 카루주의 처지는 비참해졌다. 원하던 영지는 라이벌 르그리에게 돌아가고, 자신의 상관 격인 알랑송 백작과의 봉토 다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카루주는 자신의 주군인 알랑송 백작의 눈에 날 만한 행동들을 골라했다. 나라도 이런 부하하면 탐탁해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후사마저 끊길 위험에 처했던 카루주는 새로운 규수 마르그리트를 맞아 새출발에 나선다. 나이 차가 많이 다는 새색시 마르그리트는 아름답고 총명한 처자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집안이 프랑스 왕을 두 번이나 배신한 대역죄인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두둑한 지참금에 미래의 풍족한 소작료를 보장할 영지 상속까지 받을 그런 집안의 마르그리트를 몰락해 가는 카루주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런 핸디캡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궁핍한 재정 때문에 카루주는 부하 기사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나선다. 스코틀랜드 연합군과 함께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몫 잡아보려는 그런 꿍꿍이였다. 약탈에 눈이 먼 무자비한 프랑스군은 방화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중세 전쟁의 본질이 명예나 무공 따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루주는 처음의 기대와 달리 별 소득 없이 고국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리고 왕에게 지급받지 못한 봉급을 수령하기 위해 파리로 간 사이,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육욕에 눈이 먼 전우이자 오랜 친구였던 르그리가 카루주와 그의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마르그리트가 머무는 곳을 찾아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이 사건을 자신의 남편인 카루주에게 알리고, 카루주는 일단 자신의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알랑송 백작에게 르그리의 파렴치한 범죄행각을 고지했다. 하지만, 알랑송 백작은 철저하게 르그리의 편을 들어 이 사건을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영주였던 알랑송 백작의 행동은 어떻게 보더라도 공평한 그런 판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카루주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파리 고등법원에 상고하기로 결심했다. 중세 말기로 접어들면서 거의 명맥을 잃어 가고 있던 사법 재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성폭행당한 아내의 명예와 복수를 위해, 완고한 귀족 카루주는 자신과 아내의 목숨까지 판돈으로 건 것이다.

 

14세기에도 변호사들이 법정을 무대로 활동했던 모양이다. 르그리의 변호사로 선임된 르코크는 하급 성직자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할 지도 모를 결투 재판을 피하고자 했지만 자신을 고용한 르그리는 유능한 변호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카루주와 맞짱을 받아들였다. 파리 고등법원은 카라주의 상고를 받아 들여 세기의 이벤트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듀얼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결투장으로 선정된 생마르탱 수도원에서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귀족 간의 결투 의식은 그전에 이루어진 법정에서의 심리만큼이나 복잡했다. 마상 결투를 위한 군마의 준비부터 시작해서, 전투용 도끼와 장검과 단검 모든 과정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지고 구름 같이 모여든 군중들에게 이것은 절대 오락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는 경고와 함께 결투를 방해하는 이들은 재산과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선포도 이루어졌다. ,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두 명의 기사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저자의 논픽션은 픽셔너리한 드라마를 능가하는 그런 재미를 가지고 있다. 마르그리트 성폭행사건의 진위는 변호사 르코크의 기록처럼 알 수 없는 영역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중세 여성들은 배우자의 재산처럼 간주되었다. 만약 카루주가 사법 결투에서 패한다면, 마르그리트 역시 위증죄로 산 채로 화형당할 그런 운명이었다. 프랑스와 해외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대중들에게 사법 결투만큼이나 쇼킹한 후속 이벤트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카루주 부처는 사방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모험에 나선 것이다.

 

에릭 재거는 중세의 꽃이라고 불리는 기사들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라스트 듀얼>이라는 역작을 발표하는데 성공했다. 공간적 무대가 된 노르망디에 대한 현지답사는 물론이고, 갖가지 사료들을 검토하고 심지어 태피스트리에 기록되었다는 전언까지 분석하면서 마지막 사법 결투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카루주의 잉글랜드 종군 묘사 장면도 그렇지만, 카포메스닐 사건 현장을 그야말로 카메라로 중계하는 것 같은 기술 그리고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드론까지 날려 원거리와 근거리를 커버하는 듯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에서도 생마르탱 수도원 결투 씨퀀스 고증을 상당히 잘했다고 들었다.

 

이번 가을에는 왜 이렇게 멋진 책들이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안드레 애시먼의 <아웃 오브 이집트>를 필두로 해서, 에릭 재거의 <라스트 듀얼>, 그전부터 읽고 있던 콜슨 화이트헤드의 <할렘 셔플> 그리고 오늘 막 도착한 N. 스콧 모머데이의 <여명으로 빚은 집>까지. 잇달아 좋은 책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어디 가서 꺅꺅대며 비명이라고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꿀꿀한 코로나 시국의 그나마 작은 위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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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0-2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0일 개봉했는데 벌써 평점이 9.10이네요?!!맷데이먼도 나오고 제가 좋아하는 조디 코머가 아마도 마르그리트 역인가봅니다. 사법결투라니 일단 영화를 먼저 한번 봐야겠어요! 😎

레삭매냐 2021-10-28 19:25   좋아요 2 | URL
영화 개봉하기 전에 배급사에서
한다하는 너튜버들에게 콘텐츠
를 좀 맹글어 달라,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논픽션 역사물은 그야말로 끝내
줍니다. 영화도 기대만빵이구요.
어제 오늘 해서 이틀만에 다 읽
었답니다. 드랍게 재밌어서요.

아, 조디 코머가 마르그리트 드
카루주 맞습니다. <프리 가이>
에서 깜딱 놀랐습니다. 오 멋져
부러~

붕붕툐툐 2021-10-28 19: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라스트 듀얼> 재밌다는 얘기 들었어요~ 원작 책이 있는 건 처음 알았네요!ㅎㅎ 레삭매냐님의 꺅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정말 큰 위안이죠!!😄

레삭매냐 2021-10-28 19:27   좋아요 2 | URL
이달에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작
가들의 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
어서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콜슨 화이트헤드, 안드레 애시먼...

에릭 재거 선생이 무려 10년이나
되는 시간을 투자해서 쓴 책이라
하니 더더욱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완성도가 탄탄합니다.

coolcat329 2021-10-28 19: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비문학인줄 알았는데 글 읽어보니 문학이군요 . 이 책 읽고 영화보면 정말 다 이해되겠어요. 이 영화 별 관심 없었는데 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10-29 07:22   좋아요 2 | URL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에릭 재거
교수가 상상력을 양념으로 재구
성하 작품이랍니다.

영화는 원작을 어떻게 요리했
는지 궁금하네요.

scott 2021-10-28 21: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냐님도 플레그 착 붙 파 셨네요 영화가 넘 잘 만들었는데 원작도!

레삭매냐 2021-10-29 07:23   좋아요 2 | URL
예전에는 책에 밑줄이나
메모 같은 거 하나 없이
봤었는데, 언제부턴가 연필
로 죽죽 그어 가면서 본답
니다. 플래그도 달구요 ㅋ

mini74 2021-10-28 2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신명재판. 그 당시 귀족들은 결투 신청이 두려웠을거 같아요. 안하자니 겁쟁이 하자니 죽을 수도 있고. 기사도에 신명재판 아!!! 넘 재미있겠어요. 영화도 왼성도가 높은가봐요 ㅎㅎ

레삭매냐 2021-10-29 07:24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그놈의 명예가
무언지...

기사가 명예를 잃으면 살
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대세를 이루
던 시절이었다네요.

딱 할리우드가 좋아할
법한 스토리입니다. 아니
어쩌면 작가가 영화화까
지 고려하지 않았나 싶기
도 하구요. 일타쌍피!

새파랑 2021-10-28 2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만나면 너무나 즐거워서 미칠거 같아요 ㅋ 레삭매냐님의 비명을 듣고 싶습니다 ^^ 멋진 책이라고 하셔서 바로 찜입니다~!!

잠자냥 2021-10-28 22:58   좋아요 3 | URL
새파랑 변태설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10-28 23:02   좋아요 3 | URL
앗 😅 저 그런 사람 아닌데 ㅎㅎ 레삭매냐님 느낌에 공감이 가서 제가 오바했나봐요ㅋ

레삭매냐 2021-10-29 07:25   좋아요 3 | URL
읽기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는데
1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네요.

장장 10년을 준비해서 쓴 책이
라고 하니, 정성이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