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김희정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도서관에 가면 참 다양한 책들을 만난다. 내가 항상 만나는 책들과는 다른 세계가 열린다고나 할까.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난 8월에는 연간 가장 많은 책들을 만났다. 암튼 도서관에 가서 몇 편의 그래픽 노블과 짧은 책들과 만나면서 나름 독서 슬럼프 탈출을 시도했다. 장자크 상페 샘의 책이 도움이 됐다.
그리고 파올로 조르다노라는 글쟁이의 책을 하나 빌려 왔다. 제목부터 벌써 전염의 시대, 코로나 시절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로마에 산다는 이 양반은 무려 물리학 박사님이다. 그런데 본업을 제치고 아예 전업 글쟁이로 나선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소설도 한 편 소개된 모양이다. 9년 전에 나온 <소수의 고독>은 현재 절판됐다.
조로다노 박사님은 작년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당시 가장 끔찍한 시절을 경험한 이탈리아에 살았고, 여전히 그곳에 삶을 영위하고 있다. 초창기에 이탈리아 정부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무시했다가 그야말로 의료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붕괴하기도 했다. 중환자들 가운데 생존할 가능성이 그나마 큰 젊은이들을 위주로 집중치료를 했다. 이게 비극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비극이란 말인가.
코로나 시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 건 가짜뉴스였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난무하고, 시민들의 불안에 편승해서 증폭되어 유포되었다. 무시무시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미증유의 확산을 목도하면서 의료진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확인증이 있어야 봉쇄령이 내려진 가운데, 식료품 구매를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던 모양이다.
시민들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믿지 않았고, 기관은 매번 방역 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개발되지 않았던 백신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드디어 전국을 바꿀 게임 체인저인 백신이 등장했다. 하지만 온갖 유언비어에도 백신을 맞겠다는 이들이 줄을 섰지만, 백신의 절대 물량 부족으로 일상으로의 복귀는 요원하기만 하다. 저자는 ‘코로나 전쟁’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서구인들의 우려라는 생각과 동시에 비상 상황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의 발로가 아닐까. 오늘까지 2020년 2월 15일 이래 이탈리아에서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129,638명이라고 한다.
모든 사적인 모임들은 취소되었다. 관계에 우선하는 것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 아니었던가. 동시에 조르다노 박사님은 모든 괴로운 것들을 서둘러서 잊고자 하는 인간의 망각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전후에 사람들은 모두가 과거를 잊는데 최선을 다했다. 살아남은 이들도 죽은 자들만큼이나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아트 슈피겔만의 <마우스>를 읽으면서 혹독한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저자의 어머니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어려서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또 홀로코스트에 대한 저술들을 만나게 되면서 슈피겔만의 어머니가 한 선택에 대해 수긍이 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작금에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 사태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는 육류부터 시작해서 플라스틱의 무분별한사용 등등이 결국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갈 지구별을 아프게 만들고 온갖 환경 문제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공동정범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깨달았다면 나부터라도 한 가지의 실천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깨달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저자가 구사하는 알제로(R0)라는 전염이 되는 과정에 대한 논리도 신선했다. 또한 자연의 본질이 예측 가능한 선형이 아니라 비선형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유능한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미 감염된 자, 감염대상자 그리고 회복자라는 세 가지 단순한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수학적 분류도 냉정하지만 적확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소중한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해 왔다. 가족들과의 나들이, 친구들과의 만남, 친지들과의 모임, 내가 좋아하던 독서모임 같이 소소한 일상들이 이제는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몇 개월이면 끝날 거라는 초기의 예상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코로나도 종식될 것이다. 부디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이 시간들을 잊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