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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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라딘 이웃인 잠자냥님의 포스팅 덕분에 읽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개인적으로 고스톱을 무척 좋아한다. 오래전에는 거의 매일 같이 치던 시절도 있었다. 늦게 배운 도적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7장의 패를 받아 한 장씩 볼 때의 쪼는 맛이란 정말! 얼마 전에 읽은 윌리엄 트레버 선생의 <펠리시아의 여정>이 딱 그랬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것을 눙치고 조근조근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대가의 기술은 대단했다.


 


대략 5년 전 즈음에 <비 온 뒤>란 소설집으로 트레버 선생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가끔 그의 책들을 컬렉션하면서, 하지만 읽지 않으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알라딘 북플 동지인 잠자냥님이 최근에 올린 포스팅을 보고는 원래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생각이었던 이 책을 사서 읽었다. 다른 서점에서 사는 바람에 잠자냥님께 땡스투를 하지 못했다쏘리 볼, 버디.

 

하라는 책 이야기는 안하고 만날 이래 삼천포로 빠지누 그래. 우리의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신 소녀 펠리시아다. 그리고 그녀는 조니 라이서트라는 놈팽이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그만 덜컥 임신해 버렸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조니란 녀석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원수 같은 영국군에 자원입대한 배신자다.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절대 녀석과 결혼하면 안된다고 딸에게 당부한다.

 

사실 소설은 이미 증조 할머니의 돈을 슈킹해서 고향을 떠난 펠리시아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과거의 플래시들이 무시로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해 주시길. 나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볼 테니까. 펠리시아의 어머니는 8살 때 돌아가셨고, 육가공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일자리를 잃은 펠리시아는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한 상태다. 그녀의 다음 선택은? 그렇게 영국 버밍엄 어딘가 잔디깎이 공장에서 일한다던(그것도 거짓말이었나?) 조니를 찾는 미션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펠리시아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악당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트레버 선생이 어련히 준비해 주실까 보냐. 미스터 힐디치는 원래 송장 업무를 담당하다가 구내식당 매니저로 보직이전해서 안성맞춤의 활동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50대 남자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말이다. 소설에서 트레버 선생은 노골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미 다섯 명을 희생시키고, 여섯 번째 희생자를 물색하고 있는 시리얼 킬러다.

 

소설의 한 축에 낯선 땅인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자신에게 모든 걸 거짓으로 꾸민, 조니 라이서트를 찾고 있는 펠리시아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에는 위험한 포식자(carnivore) 힐디치가 있다. 유년 시절의 학대 그리고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모병관에게 거부당한 장애의 소유자 힐디치. 거절과 고독 그리고 자기애 넘치는 외로움으로 똘똘 뭉친 힐디치는 펠리시아 같이 소외된 친구들을 사냥하는 몬스터였다. 트레버 선생은 이런 미스터 몬스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암시만 할 뿐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전개로 긴장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내가 책을 읽는 내내 경탄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수녀원 정원사의 딸인 펠리시아는 자신이 처하게 된 작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이전의 일들을 곱씹으면서 느린 속도로 성장이라는 궤도에 오른다. 미스터 몬스터는 펠리시아를 돕는 척하면서 그녀의 돈을 훔쳐,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절대 서두르지 않고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된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린다. 거미굴에서 함정을 파고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함정거미처럼 말이다.

 

그동안 펠리시아는 거리에서 돌팔이 전도사 캘리거리를 만나 신세를 지기도 하고, 일단의 노숙자들을 만나 임시거처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나기도 한다. 세상에 선행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그런 선행을 베푸는 이들은 없다고 트레버 선생은 꼬집는 것 같다. 펠리시아는 미스터 몬스터가 자신의 돈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이 찾는 조니 라이서트의 소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녀가 미스터 몬스터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가공할 만한 위험이 코앞까지 닥친 상황이었다. , 우리 가련한 펠리시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시다면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트레버 선생은 <펠리시아의 여정>에서 고전 빨간 망토의 원형을 차용한 서사를 현대에 적용한 변용을 보여준다.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이가 알고 보니, 사악한 악당이었다. 선과 악이 뒤엉켜서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분별력을 기르는 건 정말 어려운 미션이다. 그런 건 사실 누구도 정확하게 판단해서 알려주지 않는 법이다. 내 스스로 성장의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우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일수록 차분한 판단을 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등장하는 도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결론이 도출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oldie but goodie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트레버 선생은 영국의 사실상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역사에 대해 살짝 맛보기식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운 샘이 다루기도 했던 로저 케이스먼트(그나저나 왜 그 책은 아예 출간되지도 않는 건지 모르겠다)의 이름이 나와 반갑기도 했다. 펠리시아의 증조할아버지가 독립 투쟁 중에 사망한 것도 트레버 선생의 세심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펠리시아의 여정>으로 트레버 선생을 다시 보게 됐다. 이참에 읽다 만 <루시 골트 이야기>부터 다시 읽어야지 싶다. 그나저나 책은 어디에 있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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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07 12:0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 마음으로 잘 받겠습니다. 쪼는 맛 대단한 작품이죠. ‘빨간 망토‘와 연결지은 부분 흥미롭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6-07 13:17   좋아요 5 | URL
모든 문학 작품은 상호간의
variation 이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표현력과 구성
의 전개가 딸리는 관계로...

그리하였다 합니다.

새파랑 2021-06-07 12:4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곧 읽을거여서 자세히 안보고 살짝 본 ㅋ 레삭매냐님ㅡ잠자냥님ㅡ폴스타프님으로 이어지는 삼축이 너무 좋으면서도 두렵습니다 ㅡㅡ

레삭매냐 2021-06-07 13:17   좋아요 5 | URL
나름 스릴러물인지라 최대한
스포를 안하고 리뷰를 쓰려고
했답니다.

진짜는 엔딩에 쿵야~ 기대하
셔도 좋습니다.

mini74 2021-06-07 13: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ㅎㅎ 뭔가 변사님의 목소리로 읽히는건 왜죠 ㅎ 쪼는 맛.~~

레삭매냐 2021-06-07 13:25   좋아요 5 | URL
미미님의 댓글을 보고 나서
제가 좋아하는 화투패들을
몇 짝 올려 보았습니다.

뭐 그런 거죠.

coolcat329 2021-06-07 13: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쪼는 맛~기대됩니다 ☺

레삭매냐 2021-06-07 14:27   좋아요 4 | URL
서서히 가속하다가 긴장
의 페달을 엔딩까지 유지
시켜 가는 장면 참 인상적
이었습니다.

페넬로페 2021-06-07 13: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쪼는맛의 책 내용보다 쪼는 맛의 레삭매냐님의 리뷰가 무척 좋습니다^^
간만에 화투패도 왠지 반갑네요 ㅎㅎ
싸늘한데요^^

레삭매냐 2021-06-07 14:29   좋아요 5 | URL
좋고 즐거웁게 보아 주셨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 합니다.

참고로 타짜는 아니랍니다.
간만에 기계 돌려 보고 싶어지네요.

페넬로페 2021-08-03 1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을 읽고 다시 와 이 리뷰를 읽어보니 왜 그때 빨간망토로 이 소설을 비유하셨는지 알겠어요~~
그때 제가 좋아요도 누르지 않았네요 ㅎㅎ

바람돌이 2021-06-08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대감이 더 커지네요. ^^

레삭매냐 2021-06-08 07:5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계기로 트레버
선생의 책들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