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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이 혼인하고 달 포가 다 되 갈 때,
“ 저 친정 집에 신행 다녀오고 싶십니다. 말미를 주이세 ‘
망설이듯 남편에게 말했다.
반듯한 이마와 흑백이 또렷한 연신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만석씨는 빙그레 웃으며
“ 아, 참 그래야제 , 내가 진작에 생각했어야 하는건데. 미안하구만. “
만석씨는 연신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이며
“ 마을에 얘기해서 큰 돼지 한 마리 잡고 음식도 넉넉히 해서 친척들 부르고 이웃 사람들도
모두 불러 크게 잔치 한 번 하자구. “
하고 기분좋게 웃는다.
과연 만석씨는 연신의 신행길에 만반의 준비를 다 해 주었다. 연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새 옷 한 벌 씩을 선물로 준비하고 쌀 서 말을 풀어 떡을 하고 엿을 고고, 그리고 마른 건어물들을
바리바리 싸서 한차에 실었다.운전수를 딸려 친정 집으로 보내며
“낸 바빠서 함께 못 가지만 , 당신은 , 이틀 밤 묵으시요, 내 사흘 째 날 오후 쯤 데리러 가리다. 그 때 장모님께 인사도 드리고요. ““
연신은 남편의 빈틈없고 따뜻한 배려에 너무 너무 고맙고 흐믓하고
주변 사람들의 치사도 한이 없었다.
동생 정연이 동연이도 좋아서 입이 벙긋벙긋했지만 엄마는 왜인지 아직까지도 새초롬해서 연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는다. 많이 수척하고 누르스름한 얼굴이 끼니도 제대로 안 먹고
방 안에서만 웅크려 지낸 것 같아 연신은 마음이 아프다.
우선 엄마 앞에 예를 갖추어 두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나브즉이 앉으며 큰 절을 올린다.
“ 엄마, 어떠싯십니까 ? 잘 지내싯십니까 ?”
이젠 머리를 짧게 잘라 신식 파마로 달라진 딸의 얼굴을 이윽이 눈부신듯 바라 본다.
“ 잘 있었나 보구나, 잘 했다 “
엄마는 눈을 비키며 낮으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연신은 엄마의 짧고 건조한 말 한 마디에도
너무 기분이 좋아지며 예전 어린 시절처럼 마구 수다가 쏟아져 나올 판이다.
그러나 엄마는 긴 치마를 추스려 일어나며
“ 손님들이 많이들 오실끼니 대접할 준비를 해야제.”
마루에는 동네 아낙들이 모여 상 위에 음식들을 올려내고 마당가에 큰 가마솥에는 이글이글한
장작불로 통돼지를 삶고 있다. 구수한 냄새에 동네 아이들도 몰려 와 제기를 차고 잣치기를 하며 돼지고기가 어서 익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이윽고
떡이며 술이며 고기며 모두 넉넉하게 먹고 즐긴 친척과 이웃들은 마음이 더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워 연신의 기지와 용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 잘 한 짓이여, 딸이 살림밑천이라고 맏 딸이 한 집안 일으킨거 아니여 ?”
“ 그치만 애처롭제, 저 어린 것이 나 많은 서방과 전실 아들 딸 까정 키워야 하니, 맘 고생이 오죽
할라구 “ 조금 숨 죽여 말하는 여인네 목소리.
“ 아유 ! 걱정 털어 버리드라구, 소문 들으니까 늙은 서방이 연신을 공주 선녀 떠받을듯이 위한다능만. “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
연신과 연신 어매는 들으마 마나 그들의 우수개 잡담은 못 들은 척하고 일일이 찾아가 반갑게 절하며 인사를 올린다.
동네 잔치가 끝나고 대충 뒷정리를 한 후, 연신은 엄마와 마주 앉았다.
이제 어려운 고비 넘기고 한 숨 놓으며 엄마와 마음을 터놓고 싶은 것이다.
“ 엄마, 나 없어서 많이 아쉽지 않았나 ? 낸 엄마 보고잡고 동연이 정연이 야들도 생각나 밤마다 눈물이 나더라 “
‘ 어째 안 그렇것노 ? 네 고생할거 뻔해 내도 잠이 안 오더라카이’ 연신은 엄마의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엄마는 빤히 연신의 얼굴을 본다.
“ 어매, 어째 내 얼굴을 그리 세세히 보노 , 뭐 이상한거 있나 ?”
연신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엄마를 건너다 본다.
엄마는 뭔가 다른 생각에 잠긴듯 침착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먼 곳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분하고 노여운 마음은 많이 스러졌으나 여전히 쌀쌀하고 , 그리고 처연한 표정,
연신은 문득 엄마의 얼굴이 아직 젊고 곱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가난한 살림에 무능한 남편과 자라나는 삼남매의 호구를 위해 엄청난 삶의 질곡을 겪어 왔으나 이제, 얼마간 안정된 방파제 골 안에서 거센 파도를 벗어난 홀가분한 얼굴이 저럴까 ?
엄마가 아버지 장례 후로 부터는 거의 밖에 나가 거친 일하지 않고 집 안에만 칩거해 있어선지 피부가 해말게 보인다.
연신이 새삼스레 묻는다.
“ 어매 몇 살이고 ? 아적도 새댁 같고만. “
분위기가 무거워 웃자고 농담으로 한 말에 엄마는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며 뚝뚝하게 말한다.
“ 니 에미 낫살도 모리나 ? 네 서방과 내가 비슷한기라. “
‘ 앗차’ 연신은 자신의 심한 실수에 해쓱해 진다.
따져 보자면 어매는 사위보다 겨우 서너 살 위이다.
“ 내라고 나 많은 서방이 좋아서 갔겠나 ? “ 곧 뒤이어 나올 집안을 위해서 어쩌구 하는 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다. 이제 그런 말은 철 없이 유세떠는 위선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연신은 서러움이 북받치며 울컥 울음이 터져,
펼쳐 놓은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어깨를 떨며 울고 만다.
이불을 들썩이며 흐느끼는 딸의 모습을 보며 길례는
‘ 내가 왜 이리도 맴이 강팍하고 어리석을까, 이러지 말아얄낀데 ‘
마냥 부끄럽고 한스럽다.
길례도 어린 나이에 중신아비 따라 한씨 집으로 시집이라고 왔지만 빈한한 집안에 남편이란 작자는
먹고 살아가는 일은 뒷전이고 성격이 사나워 제멋대로였다.
그나마 시부모가 계실 때는 그럭저럭 끼니나 때우고 큰 소리없이 살았으나 두 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후 남편은 더 한층 고약해지고 매일 술을 마시며 주사가 심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식구들을 괴롭혔다.
그래도 맏딸인 연신이가 일찍부터 철이 들었는지 , 때로는 어미보다 더 강단있고 지혜로운 데다
힘도 센 편이라 딸이 아니라 조력자, 동무같다는 생각으로 고된 세월을 함께 살아 온 것이다.
연신이 곁에 없었다면 어찌 살았을꼬.
길례에게는 좋던 싫던 부모가 짝지어준 남편, 한서방 하나 뿐이였다.
남편이 아무리 고약스레 굴어도 ‘ 세상 남자들 속성이 다 그런가 부다,, 또는 내 팔자가 사나워서 전생의 죄 값으로 이리 당하는게 아닐까 ‘ 하며 불평하지 않았고 남들은 어쩌구 하며 비교할 줄도 몰랐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노새처럼 굿굿이 견디며 정해진 인생길을 이제껒 성심껒 열심히 살아 온 길례였다.
그런 길례에게 놀랍고 새로운 시야가 열려진 것이다.
이만석씨는 본래 길례 남편 한씨와 한 동네 국민학교를 다니며 형 동생 하던 사이였다.이후에도
인품이나 신망이 좋은 만석씨는 명절이나 생일 때 직접 들러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바빠진 근래에는 사람을 시켜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작년 한 때 한씨가 지병으로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찾아 온 적이 있다.
그는 한씨의 병세를 이리저리 챙기고 돌아가는 길에 길례에게 명함과 얼마간에 약값을 내놓았다.
“ 형수님, 형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게 연락해 주시소 “ 할 때에도 그의 친절이 고맙다고 생각했을 뿐, 천만 다른 감정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남편 한씨의 위급사항이 생기자 경황없이 그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천지간 믿을만한 친지나 이웃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연락을 받자 열일 제치고 자신의 자가용차를 타고 곧바로 달려 왔다.
그리고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한씨를 넙죽 업어 차 뒷좌석에 태우고
“ 형수님도 어서 여기 타소 “ 옆 자리를 권하였다.
그의 말 따라 운전석 옆 페신저 자리에 앉은 다음부터
길례는 마법처럼 전혀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다.
차 문을 닫자 좁은 공간에 어떤 낯선 냄새가 느껴졌다.
땀 냄새에 베어든 왕성한 동물의 냄새,그 냄새가 싫지 않다. 냄새의 근원을 따라 눈길이 간 곳에 두툼하고 넓직한 남자의 건장한 어깨,
길례는 곧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심장의 박동이 지나치게 두근대어 무의식 중 가슴을 싸 안았다.
‘ 이게 뭔 짓이라냐 ? 애들 애비는 저래 사경을 헤매는데 이 무슨 해괴한 잡생각이란 말이가 ‘
첫 번 째 낯선 충격은 영 가시지를 않은 채 , 그 다음은 온통 뒤죽박죽 허둥허둥이었다. 가뜩이나 병원도 처음이요, 외지 사람은 별로 대한 일이 없어 무척 낮설기만 해 길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되가는 모습을 손님처럼 쫒아가며 보고만 있을 수 밖에.
그러나 만석씨는 익숙하게 환자를 응급실로 옮겨 놓고 의사를 찾아 경위를 아는대로 요령있게 설명한다.깊숙한 동굴속에 울리는 듯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서늘한 그의 목소리가 또한 유별나게 길례의 귓 속을 파고 든다.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를 걱정스런 눈으로 유심히 들여다 보는 그의 모습은 진심이 담겨 인정스럽고 정말 피붙이처럼 친밀하게 느껴진다.
‘ 어째 저런 사람이 다 있노. 한나도 빠진 게 없는 정말 사내다운 사내 아이가 ‘
그리고 문득 저런 사내와 하룻밤만이라도 살아 봤시문 소원이 없겠다는생각을 한다. 그러나 곧
‘ ‘에그그, 내 미친거 아이가 이 무슨 망칙한 생각이란 말인가 ‘ 머리를 흔들며 남편 한씨의 초췌한 얼굴을 들여다 본다.
그 정도 응급실에서 일회성 만남이었다면 그대로 스러질 감정일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남편의 병세가 위중하여 서울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듣자 만석씨는 지체하지 않고 그 밤으로 서울로 향했다.
서대문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하여 입원 수속을 하고 입원비를 지불하며,절차를 거치는 만석씨는 조금치의 주저함이 없이 친동기 같이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 형수님 여기 보호자난에 지장 찍어 주이소 여긴 우리나라서 젤로 좋은 병원이라 합디더, 잘 고쳐줄구마. 염려 놓으소 “
길례는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손가락에 인주를 묻쳐 손도장을 찍었을 뿐 아무 한 일이 없었다.
남편이 한 보름 동안 입원을 하고 있을 때도 그는 틈틈이 찾아와 만사를 보살펴 주었다.
“ 마, 입원비는 걱정 마이소 내가 부담하고 있으니께니 “
“ 고맙십니다. 냉중 꼭 값겠십니다 “
길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이 말을 겨우 했을 뿐이다.
그러나 만석씨의 이미지는 길례의 가슴 속에 찬탄과 동경의 절대주로 크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결국 남편 한씨는 온갖 치료도 소용없이 숨지고 말았다.
한 가장이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폭풍처럼 일을 벌여놓고 뜬금없이 가 버렸다.
‘ 나더러 어떻하라고 ‘ 어쩔 줄 모르고 망연한 길례 앞에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해준 사람도
만석씨였다. 그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 이 은혜를 꼭 갚겠십니다. “
길례는 이 번엔 좀 더 또렷한 말씨로 인사를 한다. 어떤 소망이 가능성이 되어 그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을가.
길례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해괴한 욕심이요, 염치없는 생각이라.
‘ 내 이래 살지 않았당이 ,비록 가난하게 힘들게 살고 있지만 한지아비만을 섬기고 아이들 낳아 잘 길렀고만은, 내 이 무신 망령이고, 연신이 보기 부끄럽당이’그러다가도
‘ 인생 한 번 사는기 아이가, 난 한서방, 그 인간 하나만 남자라 생각하며 죽이라, 밥이라,가리잖고 매 맞으며 한 자리서 살았고만, 세상에 저리 잘난 남자가 있당이, 믿기지 않는당이. 남의 말로 들었심 그짓말이라고 했일기구만, 근디 바로 눈 앞에 손 잡을 만한 곳에 있재아이가. ‘그도 나도 홀씨, 나이도 어슥하구만. 몬할 기 뭐 있겠나.
‘ 내도 제 푼수 모리고 웃기는 년 아닌가배 ? 엊그제 서방 상 당한 년이 이 무신 망칙한 발상이고
내 혼자 발광을 하는구만, 김치국만 푸지게 마시고 앉아서 ‘’
하루는 길례 , 세수를 꼼꼼하게 하고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곱게 빗어 본다. 수척한 얼굴이지만 눈매가 깊고 갸름한 턱선이 아담하다. 턱 맡으로 흐르는 긴 목선도 의외로 도톰하고 희다.
‘ 내 아직 마흔이 안 됐고만 ‘
길례는 한숨을 쉬며 들창 너머 먼 산을 내다 본다.
심장이 통증을 느낄만치 뭉쿨하며 오래 잊고 있었던 그 곳의 젖무덤이 뻐근하다.
길례가 하루는 지옥 또 다른 하루는 천당을 꿈꾸고 있을 때, 딸 연신이 폭탄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만석씨와 혼인하므로 빚도 갚고 앞으로 살 기반도 만들겠다고
이게 선수를치는구나 , 놀람과 동시에 퍼뜩 비교치가 주르륵 나온다.
어리고 어여쁜 연신이, 언젠가 만석씨가 중신을 넣었던 연신이, 영리하고 당차서 결심하면 곧 장 돌진하는 연신이,
‘ 내가 얘를 어떻게 당하는가.’
길례는 얼굴이 새파래져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버린다.
‘ 내 아무리 미치지 않고야 우째 이런 에미 속을 네게 말하리.
다음 날 길례는 연신이 시댁에 갖고 갈 이바지 음식을 정성껒 장만했다.
참쌀을 갈아서 지짐을 부치고 가운데 팥알심을 넣어 얌전하게 접어 개어 부꾸미를 만들고 잘 익은 막걸리를 빚어 엿지름 맑은 물과 밥알을 넣고 식힌 동동주를 됫병에 담았다. 연신이 가져온 북어를 짤게 찢어 고추장 참기름으로 양념한 밑반찬도 연신을 위해 만들어 넣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광주리에 담아 놓은 뒤 길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들로 나갔다.
늦으막한 오후, 약속대로 연신을 찾아 온 만석씨는
처남 동연이와 정연이의 배웅을 받으며 연신을 데리고 처가집을 떠났다.
“ 우째 장모님은 내 인사를 받지 않으시까 “
만석씨는 혼자 말처럼 불만스레 말했지만 연신은 못 들은 척 차창 밖만 보고 있다.
저 쪽 콩밭 머리에서, 흰수건을 푹 눌러 쓴 어매가 일손을 멈추고 몸을 일으키어
먼지 일으키며 달리는 검은 세단차를 묵연히 처다 볼 것 같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