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눈물 샘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지음, 양대원 그림, 유타루 글 / 알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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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번째 서평

남한산성의 눈물

전쟁. 현자와 충신을 찾는다




책을 논하기에 앞서 이번 서평을 위한 책의 주 독자층이 일반 성인이 아닌 어린이와 학생이라는 사실을 제시해야 할듯하다. 물론 어른이 봐서는 안 될 ‘어른금서’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한 편집내용을 보더라도 시처럼 예쁜 제목을 가진 이번 책은 아이들 책꽂이에 꽂아두고만 싶어진다.

병자호란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까닭에, 전쟁과 관련된 사실적인 이야기와 당시 조선의 시대상황과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까지 엿보고 싶었던 첫 욕심은 잠시 보류해야 할듯하다. 이번 사적인 욕심은 ‘남한산성의 눈물’을 총괄해서 설명하고 정리한 한명기 교수의 다른 저서를 통해 풀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기회로 넘겨야하지 않을까. 선물로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는 조카에게 주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한산성의 눈물. 제목을 접했을 때 무척이나 시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책을 받고나서 근래의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삼고 출판되는 서적의 수준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 연령대를 떠나서 이 한권의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기에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에 대한 소개가 남다르다. 정작 이 책을 쓴 이는 유타루(아마도 필명인 듯 보인다)와 그림을 그린 양태원이지만, 병자호란을 몸으로 겪으며 전쟁의 참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병자록의 저자는 정작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눈물’은 바로 병자록의 기록을 새롭게 한글번역 정도의 단계를 거쳐 재구성된 책이다.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실존 인물인 나만갑이라는 병자호란 당시의 문신이 일기처럼 남긴 전쟁일지라고 보면 적당한 설명일 듯싶다. 이쯤에서 발동이 걸리는 딴지 하나는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이라는 인물 소개가 너무 소소하게 또는 흐릿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원작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좀더 신경을 써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딴지는 일절만 걸고 넘어가자. 남한산성의 이야기는 크게 5부로 구성되어 병자호란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이야기 그리고 전쟁이 끝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부 전쟁의 시작 편에서는 병자호란이 시작되기까지 주변국의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쇠퇴하는 ‘명’과 새로 번성해가는 여진족의 ‘청’, 이 두 나라의 상황이 조선이라는 나라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부에서부터 5부까지는 산성에 고립된 채 싸워야 했던 인간적인 고충이 (신분상의 층위를 따라 제각각 드러나는 감정적 동요가) 잘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피신하여 칩거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오기까지 날짜순으로 기록된 나만갑의 일지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앞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병자호란 당시에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참 모습 임에 분명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신상에 문제나,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문제나 비슷한 상황이 되면 항상 양극화 현상으로 분리되는 여론을 접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선의 말기 일제통치를 앞둔 상황과도 비슷했고, 현재 푹 빠져 읽고 있는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해방 직후의 시기적 상황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는 당대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가 판단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각설하고 주화파(청과 화친에 주도적 역할을 하던 부류)또는 척화파(청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부류)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지 않았던가. 무엇이 더 실리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잠깐 답을 찾는데 시간이 걸릴 것도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양쪽 파벌을 떠나서 한 개인의 시선에 동조하려던 참이다. 그는 유난히 이번 책에서 빛을 발하는 인물로 소개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다. 그 인물은 바로 척화파의 이조판서 ‘정온’이다. 주화파의 수장격인 ‘최명길’과 대립을 이루며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의 일부가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주화파나 척화파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짐 없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상소문은 우직함과 함께 힘이 받쳐주고 있는 명분이란 이런 것이다, 는 느낌을 받게 한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바른 길을 지키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는데 최명길은 둘이 있기를 바라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이 있기를 바랍니다...........엎드려 원합니다.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단호하게 물리치시고, 나라를 판 그의 죄를 밝히십시오...........”




역사 이래로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이든 다양한 인간성이 공존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일진데, 그 가운데는 유난히 이타적 인물과 함께 배타적 인물들의 군상이,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일의 반복적인 양상을 갖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달, 한때 거대한 유명세를 등에 업고 종용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가 생각난다.

‘전쟁도 사람의 일인지라~~~~’ 라고 했던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 권력층과 또 다른 권력층의 대립, 이합집단과의 불일치 또는 그 성격을 조금 달리한 민초들의 봉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과 조선조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반 민중들의 난 역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침략하는 자와 침략을 당하는 자 모두 사람이고,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역시 사람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피해는 같지 않을까.




시대가 어려우면 영웅이 탄생한다고도 했다. 난국일수록 신하됨의 충직함과 덕망을 갖춘 인물은 찾기 어려울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충신이 한 두 명이라도 꼭 불안한 군주 곁에 서 있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다. 주화파와 척화파 그들이 서로 주장했던 실리와 명분을 다시 생각하면서 과연 어느 쪽이 현자이며 충신이었던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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