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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열세 번째 서평
황홀한 글감옥 (조정래 지음)
시대의 산소, 작가 조정래를 만나다
난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더군다나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해진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 흔히 하는 말 그대로 나는 정보부족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여학교 시절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낱권으로 한두 권쯤 훔쳐보던 때가 있긴 했다. 아. 그런데 질펀하게 늘어지던 그 남도의 사투리를 일일이 발음해가면서 읽기에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너무 성격이 급했었나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지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책 제목을 전해 들었다. 이른바 신혼 우울증에 제대로 빠져버린 까닭에 심리학 분야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떼를 쓰던 내게 그는 스케일이 큰 책을 읽어볼 것을 충언했다. 당시에 내가 붙들고 있었던 책은 ‘프리다 칼로(멕시코 여성화가. 페미니즘과 연계)’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녀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욕심에 그와 관련된 서적을 몇 권씩 사다 나르던 참이었다.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라는 책은 한두 번 쯤, 내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사실 내가 지금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으니 나를 기다려주었던 책이 아니라, 내 관심 밖 그야말로 주변 언저리에 포진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한 부류였을 뿐이다.
문학 작품을 먼저 접하기에 앞서 그에 대한 에세이를 읽는 다는 게 방법론에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주저하기에 시간이 많이 흘러갔던 것도 갔다. 책을 몇장 씩 생각없이 들춰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빙빙 돌려보기도 하면서 나는 방관했다. 책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싶은 생각조차 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지금 나는 생각한다. 모든 면에서 기다림은 용이하다고 말이다.
어떤 분야,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기다림이 필요하다면 굳이 떨쳐낼 필요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고 있다.
뉴스에서 작가 조정래 선생이 에세이를 냈다는 기사를 접하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첫장을 열고 읽기까지 나름대로의 고충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책 ‘황호한 글감옥’의 내재되어 있는 힘은 역시 강했다.
단순히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형식을 떠나,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은 이어져간다. 물론 상당한 분량의 질문과 답글은 작가 나름대로의 룰과 형식에 의해 구분되고 있으며, 문학론, 작품론, 또는 작품과 시대성, 작가 한 사람의 생에 대한 부분까지 폭 넓게 전개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 이 책은 단순히 삶을 반추하며 써나가는 에세이의 형식을 벗어난다. 문학만을 두고 본다면, 문학을 위한 마음 다잡기를 비롯해서 문장 강화 수업의 교재로 쓰일법할 만큼 이따금 작가는 정확한 문장을 강조하는 것이 올바른 문학의 길이라 강조하고 나서기까지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의 특성상 시대적인 부분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그 부분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풀어나가는 데 작가로서 그가 경험해야 했던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솔직하게 저술되고 있다. 몇 번의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마침내 이적물이라는 붉은 딱지를 떼어내게 되는 그의 작품은, 지나간 어렵고 위험한 협곡의 시간을 인내하며 무사히 견뎌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책 속에는 작가라면 반드시, 또는 작가가 아닌 일반인의 자리에서라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할 작가 조정래의 진심어린 충언이 담긴 문구가 속속들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당연 으뜸으로 꼽고 싶은 구절은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 라 했던 작가의 말이었다. 보통은 분노 앞에 이성적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며, 증오 앞에 논리적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인데, 작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작가 나름의 철칙을 세워 한 번도 꺾지 않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버텨왔던 것이다. 한번쯤이라도 부조리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게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작가 조정래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역시 스스로 말하기를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 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시대에 건강한 정신으로 한 생을 바친 그의 열정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은 너무 감상적인가.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글쓰기와 창작에 관한 작가 조정래의 작가론은 누구나 한때 저질렀던 실수처럼 지금까지도 많은 학생들이 문학을 접할 때, 기술과 테크닉 분야에 심취하는 점에 더 치중하는 폐단을 가차 없이 꼬집어 흔들어댄다. 작가의 글 어디쯤에 있었던 문구는 문학의 정신, 글쓰기의 핵심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듯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질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제 수많은 독자의 자리에 한발을 내딛어 한 구석 비집고 들어가 앉아 있으니 묘한 생각이 늘어지는 것은 느낀다. 서둘러야겠다. 불안했지만 어쨌든 작가에 대한 좋은 영향은 그만큼 작가가 품어 탄생시킨 작품에게까지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 조정래. 그의 작품을 만날 일에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