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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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 서평




저것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 독일 철학자들 편, 철학자 실러.




죽음 앞에 선 한 철학자의 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바라보는 그는 천국과 지옥을 떠올렸던가 보다.

모든 것은 불명료하다. 철학자들이 철학을 하는 까닭은 불명료의 많은 것을 명료의 반열위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삶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오만가지 잡다한 논변거리든, 또는 삶을 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로 그릴 법한 죽음이든 다 비슷하지 않을까.

놀이공원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제일 높이 만들어진 철제조형물의 꼭대기 끝 지점에 다다랐을 때 다음 순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물론 약간의 예상은 누구나 갖고 있기마련이다. 그런데 일초 또는 일분의 짧은 순간, 정적과 동작의 멈춤에서 오는 불안한 공포와 두려움 뒤에 내가 온 몸으로 맞아들여야 할 하강곡선에서의 충격은 그 짧은 순간 롤러코스터에 엉덩이를 구기고 앉아있는 내게 찰나일지언정 무한대의 가늠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올 것 같다.

철학자들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높은 꼭대기의 낙하지점을 향해 올라간다. 모든 관념과 문제들 앞에서 그네들 스스로 공부하고 내세워왔던 학설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그들만의 자신감과 확신에 가득 부푼 자의식으로 무장한 채 인간이 갖는 ‘두려움’은 한갓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역설한다.




한권의 책 안에 많은 철학자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저자 사이먼 크리칠리는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단순히 역대 철학자들이 생각해왔던 죽음의 대한 개념을 소개하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저기 제시된 텍스트를 한데 묶어서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간다. 저자가 그리스, 중세 로마, 중세,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연보를 들면서 하고자 했던 요지의 핵심은 정말 간단하다.

죽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는 말.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와 더불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뛰어넘어 평정심을 확고히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곧 죽음을 통해 철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적절한 태도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논지를 던지고 돌아서는 저자의 사려 깊은 의도와 부합하는 이야기인 듯싶다.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으며,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는 행복은 물론이고 그 어떤 만족의 개념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 으스스해 보이는 책에서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바로 행복의 의미와 가능성이다.




-----------------------------(중간 생략)




감히 장담하건대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죽음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말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정말이지 수로 헤아리면 너무나도 많은 인류 역사상 현존했던 철하자들은 모두 불러들인 듯한 인상을 주는 이 책속의 인물들은 말 그대로 다양한 죽음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 갖고 있었던 선입관은 책에 대한 가벼움이었다. ‘소똥에 질식하거나 화산에 뛰어들거나,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거나 분신하거나, 매독으로 죽거나 날벌레에 쏘여 죽거나, 위장병으로 죽거나 오줌을 참아서 죽거나, 병 들어 죽거나 미쳐 죽거나’ 와 같은 제목을 가지고 소개된 사이먼 크리칠리의 책에 대한 선입관은 이를테면 소재의 중압감을 인지하고서라도 그저 비교적 가벼운 산보하는 이미지로 다가왔었다. 왜 하필이면 소똥에 질식한 철학자인가 말이다.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솔직하게 나는 그런 내 생각에서 완벽하게 아웃되었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독서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가벼운 산보의 시간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죽음을 기다리며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철학자의 모습에 나는 연민을 보낸다. 또한 기독교 성인들의 죽음 편에서 소개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신 앞에 선 인간과, 신 앞에 섰으나 여전히 흔들리는 불안한 한 존재로서의 지극히 인간적인 그(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났다.

저자가 말했듯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중의 고통 속에서 번민한다. 그는 철학자도, 종교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가 아직도 인간의 굴레에서 얼마나 벗어나지 못했으며 신께 얼마나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랍게도 이런 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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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슬픔에 또 하나의 슬픔이 더해져 슬프다. 나는 두 겹의 슬픔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

 

 철학적 계보에 따라 다양한 학파들이 등장하고, 각기 분열된 그들의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그림을 달리 색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라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어진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하며, 겸허해진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죽음의 골짜기에 내동댕이쳐졌을지라도 마지막 순간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긴 해도 그것이 어디 철학자들의 이야기일 뿐일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번역물이 갖고 있는 문장흐름에 대한 점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쉬어감이 없는 문장 분위기에 초반에 지루함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아. 왜 작가는 이렇게 많은 이들을 이 좁은 종이 위에 꽉꽉 채워서 설명해야 하는 걸까. 하나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저자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반부를 시작하는 듯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욕심을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죽음이 다가올 때 떠는 것은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구는 것이다. 창백한 유령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내 문을 두드릴 수 있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용감한 사람도 겁쟁이가 되는 순간에 철학자만이 용감하다.

                                   

                                             -라메트리‘에피쿠로스의 체계’

                                                                                    ”

이 순간 모든 이들이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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