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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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번째 서평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최윤필 지음




안과 밖, 그 경계를 허물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꽃향기가 진동하고 아스라이 먼 언덕까지 야생화와 귀한 풀들이 빼곡하게 깔려져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바깥은 지금 한겨울인 까닭에 귀한 산삼을 찾을 수가 없는데, 저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비밀의 문을 열고 가면 어린 소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매서운 칼바람에 몸서리가 쳐지는 곳. 소녀가 서 있던 곳에서 문을 열고 보았던 곳은 또 다른 안인가 아니면 바깥인가.




안과 또 다른 공간 즉 바깥이라 명명되는 그곳은 같으면서도 다른 공간이다. 그 의미는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안이라고 본다면 저문 넘어 보이는 곳은 바깥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저기 멀리 보이는 곳이 안이라고 할 때, 내가 서 있는 곳이 바깥이 될 수밖에 없다. 바깥이라고 했다. 바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바깥을 논하는 그의 근거는 어디쯤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만의 기준은 합당한 것이었던가. 사소한 것에 잘 예민해지는  어린아이처럼, 불현듯 새치름해진 나는 비교적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딴지걸기를 시작한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 모두가 아웃사이더들의 아련함 동경내지는 아쉬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 최윤필이 만들어낸 작고 귀여운 덫 같은 이미지였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됐다.

저자는 신문사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는 그동안 그가 신문에 써왔던 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간한 듯했다. 그는 의도적이었든 아니든지 간에 어쨌든 삐딱선의 배를 옮겨 탄 모양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사람들의 시선 바깥에서 머물고 있는,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쩌면 조용하게 뒤로 물러나있는 듯한 이들에게 필이 꽂혔는지 모른다. 그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최윤필은 흑과 백, 안과 밖 등의 이분법 논리로 정형화 되어있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시원스레 돌멩이 하나를 던진 셈이다. 그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문을 따라 스물여섯 명의 바깥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따뜻한 안이 아닌 냉정한 바깥이라 해서 연상되는 처연한 이미지로 가득 찬 것이 아니다. 바깥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과 함께,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는 안과 밖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나름대로 깊이 있는 사색을 요하는 부분도 없지 않기에 단순한 가십거리로 치부하기에, 어느날.. 바깥으로 걸어 들어간 이의 이야기는 자못 무게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내심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연극과 같고 또는 농도 짙은 철학적인 그 어떤 것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연극배우를 하다가 보다 현실적인 자아를 찾기 위해 택배기사의 직업을 따라야했던 전직배우의 이야기는 다소 씁쓸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의 쓸쓸함과 현실에서의 고단함을 함께 해야 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그 너머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비록 현실에서 고개를 숙인 연극배우의 꿈은, 방향을 우회하기는 했을지언정 아직도 현재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이성적이며 인간적인 선택은 없어 보인다. 바깥이라 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해서, 바깥이라 말하는 공간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이 모두 낙담의 밧줄로 스스로를 묶어두지 않는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어차피 안과 밖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구분해놓은 허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안과 밖을 두루두루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웃자고 하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 안에서만 살아도 삶의 무의미함에 떠밀려 언젠가는 바깥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미처 머릿속에 들어않는다.




신선한 소재와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들의 진솔한 얼굴과 그들만의 깊이 있는 마음의 울림을 들려주었던 이번 책이, 일상에서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누군가에게 신선한 바람으로 다가서기를 바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든다.




“경계의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

                                                    -책 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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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예진 2020-04-3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년 전에 썼던 글이다. 십년 전에도 나는 여전히 끄적이던 중이었던가보다. 시간이 가면서 나이만 느는것이 아니라 사족도 느는 것인지. 예전에 기록물들이 더 좋아보이는 까닭은 무언지 모르겠다.
 
안도에게 보낸다 - 퇴계가 손자에게 보낸 편지
이황 지음, 정석태 옮김 / 들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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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 번째 서평

안도에게 보낸다-이황. 정석태 옮김




퇴계, 평범한 가장의 이름으로 만나다




“너는 어지러운 와중에 부디 침묵하기 바란다”




여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한 나이든 사내가 있다. 그는 아들도 아닌 손자에게 무려 16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람과 삶 또는 정치와 시대를 논하고 있었다. 솔직하며 자상하고 때로는 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인간적이었다. 나는 사람냄새 나는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이야기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그렇긴 한데 역시나 부작용이 꿈틀한다. 채워도 채워도 깨진 밑둥으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배곯아 죽은 아이의 욕구가 어디엔가 들러붙은 듯, 어떤 충족감이나 만족감 따위를 느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퇴계, 학문을 떠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볼만한 기회는 이번 책이 어느정도 적당한 역할을 해주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2010년 4월 26일, 서울과 인접한 이곳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 앉아 있고, 가랑비 수준에서 벌써 전부터 그 양태가 빗나가버린 빗줄기의 기세는 곧 어둠을 몰고 왔다가 빠르게 도망이라도 칠 기세다. 비와 섞인 바람 냄새를 따라가다보면 약 500년 전 같은 땅에서 숨 쉬고 생각하며 고뇌했던 한 학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바라보던 하늘에서도 비가 내렸을 법도하다. 시공간을 겅중겅중 뛰어넘어 퇴계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어쩐지 애틋함이 묻어나는 일이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안도에게 보낸다, 는 제목에 이 책은 편지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처럼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시처럼 짧은 은율 속에서 진득하게 배어나오는 강한 떨림이 있는 것도 아니며 편안함을 건네주는 에세이의 느낌과도 조금은 다르다. 그저 편지글일 뿐이었다. 100여 통이 넘는 많은 분량의 편지글 속에서 독자는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먼저 손을 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말 그대로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져 있다고 봐야 맞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퇴계의 손자 안도는 퇴계의 아들 준의 큰 아들이었다. 안도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퇴계의 관심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인덕을 쌓으며 성장해나간다. 퇴계는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여러 가지 번민을 지니고 항상 노심초사하는 심성여린 학자였지만 안도에게는 언제나 큰 나무의 기둥처럼 듬직한 면모를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들 퇴계와 안도의 관계,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이다지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퇴계가 남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책은 이 두 사람이 서루 주고받은 서신(안도가 보낸 서신은 빠져있음)을 소개하는 가운데 한 개인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대소사 일등을 비롯하여, 당대의 생활풍습과 정치적인 문제, 옛사람들의 생각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방식 등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서신 한편 한편 안도에 대한 사랑과, 교육적인 훈계도 빠지지 않는다. 더불어 퇴계의 시선이 뻗어나가는 곳곳에 그의 진심어린 관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 며느리의 병환과 손자며느리의 병환까지 두루 챙기고 걱정하며,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 병에 걸려 많이 아픈 것을 염려하는 퇴계는 기득권을 가지고 당대 정치계를 휘둘렀을 강한 이미지에서, 보다 사려 깊고 인간적인 일반 여염집 사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특히나 증손자였던 창양의 죽음과 연계하여 유모를 보낼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자식을 살리자고 친자식을 버리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안도에게 보낸다, 이번 책은 퇴계관련 책 중에 ‘함양과 체찰’ 이라는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을 듯싶었다. 물론 책의 가치나 의미는 사뭇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한쪽은 사적인 성격이 강하며 다른 한쪽은 사적인 것을 포함하며 정치적인 요소와 학문적인 요소의 색이 더 많이 들어간 퇴계관련 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두 책을 같이 놓고 읽다보면 소통이란 것의  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책의 가치는 어떤 책이든 각각의 책 스스로가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있을법하다. 역사적 자료와 고증이 따르는 사료의 정리가 필요조건으로 따라오는 고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책에는 퇴계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소개되어 있다. 일일이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생몰연대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방대하면서도 지치는 작업이었을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고 양질의 책을 세상 밖으로 끌어올린 이(정석태-이 책을 준비하고 출간해낸 옮긴이)의 노고에 감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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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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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번째 서평

무서운 그림-나카노 쿄코




그림, 진실을 알다

무섭다, 라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포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풍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조그만 소리와 동선조차 느껴지지 않는 배우들의 움직임에도 어떤 이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에워싸는 공포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가하면, 또 다른 어떤 이는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커다란 스크린 화면을 응시하지 않던가 말이다.

 무서운 그림이라고 해서 정말 심령그림쯤 생각하면 어쩐지 손발이 잘 맞지 않는 느낌이다. 저자 나카노 쿄코가 말하는 무서움이란 그림에서 풍기는 공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림의 분위기는 많은 것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무슨 말인가.

저자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이야기, 그림이 그려지는 시대적 이야기, 그림의 배경이 되고 모티브가 되었던 현실에서의 사실과 또는 허구라는 측면에서의 신화를 두루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나의 미술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고전이니 르네상스니 따위의 미술계의 흐름을 떠나서라도, 그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들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선택적인 문제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그림을 들여다보는 이의 머릿속에 어떤 씨앗들이 담겨있는가에 따라 싹이 오르는 식물의 풍경은 그만큼 다양하고 이채롭다는 의미일 것이다.

책 속에는 모두 스무 편의 그림과 함께 저자가 풀어놓는 지적호기심이 독자의 눈과 마음을 자극한다. 아작아작 소리가 날만한 그런 자극은 아니다. 다만 조용하게 밀려오지만 와락 안겨버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여기 한편의 그림이 있다. 저자는 그림이 스스로 말하는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인다. 이를테면 구도나 색감, 인물들의 표정과 배경스케치 따위까지 꼼꼼하게 짚고 넘어간다. 또한 한편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드러나지 않았던 뒷이야기까지 찾아내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으로 눈앞에 있는 작품의 가치보다, 그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여러 배경을 이루던 면면들의 가치가 더 커 보이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무희의 모습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드가의[에드알]이라는 그림 속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숨은 속내를 저자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아름다고 우아한 무희의 모습 뒤에 들어찬 어두운 이면의 세계. 저자는 그림 자체가 주는 공포보다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을 들춰냄으로써 이를테면 익숙한 것들 중에 불쑥 낯선 것을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 생경함에서 오는 이질감, 또한 그 이질감이 끌어들이는 낯선 공포를 꺼내어놓는다.

브뢰겔의[교수대 위이 까치]나, 홀바인의[헨리 8세의 초상], 조르조네의[노파의 초상]등등... 이 책에 소개된 그림들은 다들 엇비슷한 이질감과 공포를 가지고 있다. 아늑함과 발랄함 평온함과 여느 때와 다르지 않는 일상의 안온함 속에 숨겨진 다른 인간의 이중성과 같은 희비가 갈리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은 사뭇 재미나는 일이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만나기 전 미리 그림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그림이 담고 있는 비밀스런 것이 무엇인가 찾곤 했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눈빛, 배경의 색감 따위를 보면서 저자 나카노 쿄코의 이야기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견주어보고 비교하는 일 또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재미가 아닐까싶다.

굳이 무서운 공포감에 온 몸과 정신이 포로가 되어 그림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의 숨은 이야기 앞에서 낯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방어기재가 막 작용하기 시작한 뻣뻣한 내면의 떨림이 더 큰 여운으로 남는 듯한 책이다.

교양의 그릇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한번쯤 그림의 매력에 푹 빠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경계선상에서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짐이 커지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내실 있는 선택을 위해서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예술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던가. 글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나, 음악과 영화 속에서나 어디서든지 그 모습은 인간의 삶 모든 것을 담아낸다.

무서움, 섬뜩함으로 나가오는 것의 의미는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우리 삶속의 모습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서 오는 당혹스러움. 누군가 내 치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 몇 올이 올라붙는 느낌을 받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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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 길라잡이 - 닥터몰리의 면역으로 치료하는 난치병
송창수 지음 / 부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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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네 번째 서평

아토피 길라잡이-송창수 지음




한방에서 본 면역질환




알레르기 비염이 심한 편이다. 가끔 증세가 심해져 기관지염이 오기도 하고, 또는 임파선으로 염증이 퍼져 통증을 힘들어할 때도 종종 있었다. 우습지 않게 아프고 신경이 쓰이는 병이다. 물론 암환자처럼 힘든 건 아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투정은 부릴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알레르기 비염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골골하고 살아왔으니 삶의 절반을 비염과 동거해왔다는 말이 될 듯도 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꼭 끼리끼리 뭉치고 논다는 속된말 하나가 떠오른다.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남편도 역시 비염 환자였고, 다섯 살 배기 아들 녀석도 비염이 심한 편이다. 건강한 사람은 오직 딸아이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부모가 알레르기가 있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알레르기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던 의사의 말이 참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항상 감기에 걸리면 코부터 말썽인 나를 닮은 아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더라도 아침이면 코가 막히고 늘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파고드는걸 느낀다. 소아과를 전전긍긍 쫒아다니며 한의원에도 가보고, 이비인후과에도 가보고해도 늘 약만 조금씩 달라질 뿐 거기서 거기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을 느낀다. 어디 무슨 한의원에 가서 아토피를 잡았다더라, 어디에 가면 천식 비염은 확실하게 낫는다더라, 자식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이런저런 소리에 귀가 쫑긋거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의심 많은 눈초리로 정말 그럴까? 를 중얼거린다.




책에 대한 특별한 끌림이란 게 있나보다. 송창수 저자, ‘아토피 길라잡이’는 꼭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기대가 컸다. 그런데 코드는 달랐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은 아토피와 더불어 면역체제 이상으로 오는 질환들 몇 가지를 더 소개하고 있다. 제일 잘 알려져 있는 아토피성 피부질환을 선두로 알레르기 비염, 천식 그리고 건선이라는 피부질환을 포함한다. 또한 류마치스 관절염, 루푸스 그리고 소화기 계통에 발명하는 질환인 크론병까지 거론하고 있다. 전체적인 핵심은 알레르기 질환의 원인과 치료방안 그리고 예방법에 대해 제시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서양의학과 동양의학(한의학)의 차이를 견주어 보면서 그 차이점을 비교 평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생각했었다고 한다면 너무 예민한 반응인가.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해도 자꾸 삐딱선을 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저자 송창수는 한의사로서 실제 다양한 알레르기 질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치료제를 개발 활용함으로써 환자의 상태 호전 등과 같이, 많은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한의학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로이 하고,(질병만을 보지 않고, 전반적인 몸의 이상까지 확인하는 광범위한 탐색적 치료법)나름대로 질병의 상태, 진행정도 등에 따라 단계를 구분지어 때에 맞게 치료법을 응용하는 등 높은 성과도를 소개한다. 그가 계발한 ‘조원탕’(천연약재의 배합)은 질병과 그 상태에 맞게 적절하게 활용되는 듯했다. 이를테면 아토피 질환에 쓰이는 조원탕과 천식 또는 류마치스 관절염, 루프스 등에 쓰이는 조원탕은 포괄적으로 이름만 같을 뿐 세부적으로 기호도 다르며 다 다른 약재들이었다.

딴은 서양의학의 시각으로 굳어진 의료계와 환자들 그리고 대중의 시각을 조금씩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의학의 가치를 새로이 인지하고 인정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또한 이 책에 소개된 치료과정의 세세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내용이 아토피 피부질환에 국한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토피에 대한 분량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질환에 대해서는 단순히 소개하고, 치료법을 언급하며 실례를 드는 것에 그쳤다는 생각이다.

아토피 질환에 치료과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방법을 뒤쪽까지 연계해서 크론병까지 치료과정에 대한 소개를 보여주었다면 보다 더 성의 있는 편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저자는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의술을 펼치는 의료인이다. 나는 문득 의료인이 써내는 책을 보면서 이따금 혼자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것은 각각의 저자가 의료지식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에서 나오는 신뢰성과는 달리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때때로 주관적인 시각의 글쓰기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볼 때가 아닐까싶다. 이런 문제들은 저자의 문제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염려증이 극에 달한 현대인들에게 충분히 어필하고도 남을 좋은 내용의 이 책이 양질의 내용으로 접근하는 착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함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머리말 쓰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말을 읽느라 사실 조금 힘들었다. 저자는 자신이 배워왔고 지금도 실생활에서 한의사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의료인이다. 그러나 서양의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한의술에 대한 걱정이 너무 앞선 듯 보인다. 때로는 편파적이며, 감정적이고, 전문가다운 객관성 확보에 대한 실패, 차라리 중립적이지 못한 면모를 보이는 머리말에 대해 나는 편집자의 일 중에 교정 뿐 아니라 교열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중언부언 반복되는 이야기, 한 페이지에 똑같이 반복되는 어휘가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내용이 한권의 책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다는 인상을 크게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각설하고,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이면 必有我師)라고 했던가. 내가 취할 것만 취하자. 이기적인 사고다. 그렇지만 그게 현실 아니던가. 비슷한 종류의 책은 너무 많다. 그렇지만 저자의 숨은 노력과 공로로 달라지고 있는 변화라는 것에 집중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알레르기성 면역기전 문제로 생기는) 질병의, 치료방안에 대해 기대치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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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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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물 세 번째 서평

가난한 이의 살림집-노익상 지음




 집, 그리고 삶의 허기를 달래다.




 가난한 이들의 집이 산꼭대기에 있는 까닭은 신께로 더 가까이 가고자 했던 열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이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아주 높지 않으면 끝도 없이 낮아지는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꼭대기 높은데서 사는 이나,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낮은 데서 사는 이나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옛 집에 대한 회상을 시작으로 글을 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살던 옛 집이었고, 아버지의 집이었으며, 돌아가신 할머니의 집이었던 그 집에 대한 기억을 살려내는 일은 책을 읽는 동안 꾸준한 숨고르기처럼 이어지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가족은 흩어졌다. 7월 중순께 상을 치르고 나서 그해 겨울 가족들은 그 집을 팔았다. 할머니가 망자가 되신 후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집은 더 이상 우리의 집이 아니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찾아갔던 우리들의 옛 집은 내가 살던 때와 비슷하게 마당 한쪽으로 길게 화단이 꾸며져 있었으며, 한 여름 담장 밖으로 능글맞게 늘어지던 장미 나무의 가지들도 여전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말고 그 외 많은 것들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무심코 철 대문 안쪽으로 발 한쪽을 집어넣는 내게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제제가 따라와 어린 내 마음을 아리게 하지 않았던가.




집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집이란 추억인가보다. 아니다. 집이란 삶인가보다. 그대의 삶이 남루했을지라도, 혹은 치열했을지라도, 혹은 처음 움트는 봄날의 여린 꽃망울처럼 여린 그 무엇이었을지라도, 내가 살아온 이만큼의 시간으로 꼭 그만큼씩의 거리로 저만치 물러나 있는 옛 집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3주 가까이 잡고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었다. 가볍게 읽고 싶지 않았지만, 또 그다지 쉽게 넘어가지도 않았던 책이었다. 쉽게 눈으로 읽어버리기에는 놓치는 게 너무 많아 보였으며, 실제로 제법 생각할 것들이 많아 쉬어가는 순간들이 필요했던 것을 기억한다. 소중했던 옛집에 대한 기억, 남편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살았다던 경북 영주의 동촌 산골에서의 낡고 오래된 집 이야기, 지금은 시댁이라는 이름으로 명함이 깔린 양옥집에 대한 생각(그 일대는 비슷한 형태의 구조를 가진 집들이 많이 있다. 후에 안 알이지만 아파트처럼 비슷한 집을 지어서 사고 팔았다는 설이다.), 또는 대학교 때 찾아갔던 해남의 폐교된 분교까지 노익상의 발걸음을 따라 그가 찾아내고 설명해주는 것들에 맞춰 내 기억속의 공간을 채웠던 풍경들이 쉴 사이 없이 일어섰던 것이다.




그랬다. ‘가난한 이의 살림집’ 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집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이야기는 집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과 더불어 사람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들의 삶의 모습까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때로는 저자가 작업했다던 다큐멘터리의 이야기처럼 그의 목소리는 이성적이며, 객관적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진을 찍으며 글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 노익상의 글은 글과 사진의 매듭이 자연스럽다. 글 따로, 사진 따로 엇박자로 뒤틀리는 감 없이 안정감을 준다. 그가 직접 찍은 사연 많은 사진들은 각각마다 저자가 보고 듣고 느꼈던 삶의 지난한 이야기를 더 친근하게 소개하는데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저자는 양지바른 언덕보다는 이끼가 앞다퉈 피어나는 그늘진 음지로의 여정을 선택했다. 가난이란 말은 생각해보면 상당히 주관적이면서도, 감상적인 표현이다. 그렇긴 한데 책 속에 담겨져 있는 가난이란 말은 그저 아련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뜩한 것도 아닌 것이, 마구 쓰라린 것도 아닌 것이, 큰 상처가 나서 언제나 아물까 당장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닌 것이, 이를테면 엊그제 손가락을 베었는데 아주 조금씩 아물어가는 기미가 막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쓰여졌기에 엿보일 수밖에 없는 미세한 흠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또한 저자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노력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너그러이 넘어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고단한 하루일과를 정리하며 저물어 가는 석양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기약 없는 내일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를 걱정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저자는 끊임없이 그들을 찾아간다. 그의 걸음은 산간벽지와 한 길가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외로운 집에도 머문다. 또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아이들이 다니는 분교이야기도 그렇고, 사람이 들고 나는 공간에서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힘을 기울인다.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에세이의 느낌처럼 부드럽지만은 않은 부분들이 간혹 독자의 의식을 날카롭게 자극하기도 한다. 그것은 저자가 풀어놓았던 집과 당대의 정치와의 관계, 분교와 간이역, 차부집의 또 다른 정치적 의미(우리가 몰랐던 시대적 상처를 안고 가는 주변의 모습)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측은지심으로, 감상적인 것으로 책을 대한다면 독자는 개인적으로 내가 범한 실수를 경험하게 될 것도 같다. 그런 까닭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책을 읽는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책을 잡고 있는 동안 나는 무언지 모를 허기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고약했던 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조선시대부터 첫 걸음을 옮겨 놓아, 200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시기까지 하루의 노곤한 일상과 지친 심신을 내려놓기 위한 휴식 같은 공간의 이번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기억에 남는 그 언저리마다 한순간 내가 머물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다지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자랑할 만한 나이가 아닌 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궁이에 연탄불을 지피며 고단했던 내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상기하고, 200장이니 300장이니 한 장에 얼마씩 하던 연탄을 새로 들이는 날이면 일꾼들의 검은 색 지게를 떠올리며, 볕 좋은 봄 어느 때 마당에 새로 일 기왓장을 구경하던 유년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궁이에 물이 차올라 퍼올리기 바쁘고, 비가 오면 슬레이트의 벌어진 틈으로 비가 새고, 우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두다다다닥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소리에 두려워했던 기억과 또 다른 기억과 또 다른 그 뒤편의 기억들까지.




그러나 잊지는 말자. 평온한 시선이 무심하게 외면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곳 어딘가에도 삶의 진솔함이 피어나고 있음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자 노익상의 발걸음과 그의 의식이 닿아있을 그 어딘가에 나와 닮은 이웃과 내 아이와 닮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진다.




이제야 조금 배가 부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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