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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에게 보낸다 - 퇴계가 손자에게 보낸 편지
이황 지음, 정석태 옮김 / 들녘 / 2005년 9월
평점 :
스물 여섯 번째 서평
안도에게 보낸다-이황. 정석태 옮김
퇴계, 평범한 가장의 이름으로 만나다
“너는 어지러운 와중에 부디 침묵하기 바란다”
여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한 나이든 사내가 있다. 그는 아들도 아닌 손자에게 무려 16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람과 삶 또는 정치와 시대를 논하고 있었다. 솔직하며 자상하고 때로는 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인간적이었다. 나는 사람냄새 나는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이야기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그렇긴 한데 역시나 부작용이 꿈틀한다. 채워도 채워도 깨진 밑둥으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배곯아 죽은 아이의 욕구가 어디엔가 들러붙은 듯, 어떤 충족감이나 만족감 따위를 느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퇴계, 학문을 떠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볼만한 기회는 이번 책이 어느정도 적당한 역할을 해주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2010년 4월 26일, 서울과 인접한 이곳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 앉아 있고, 가랑비 수준에서 벌써 전부터 그 양태가 빗나가버린 빗줄기의 기세는 곧 어둠을 몰고 왔다가 빠르게 도망이라도 칠 기세다. 비와 섞인 바람 냄새를 따라가다보면 약 500년 전 같은 땅에서 숨 쉬고 생각하며 고뇌했던 한 학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바라보던 하늘에서도 비가 내렸을 법도하다. 시공간을 겅중겅중 뛰어넘어 퇴계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어쩐지 애틋함이 묻어나는 일이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안도에게 보낸다, 는 제목에 이 책은 편지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처럼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시처럼 짧은 은율 속에서 진득하게 배어나오는 강한 떨림이 있는 것도 아니며 편안함을 건네주는 에세이의 느낌과도 조금은 다르다. 그저 편지글일 뿐이었다. 100여 통이 넘는 많은 분량의 편지글 속에서 독자는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먼저 손을 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말 그대로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져 있다고 봐야 맞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퇴계의 손자 안도는 퇴계의 아들 준의 큰 아들이었다. 안도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퇴계의 관심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인덕을 쌓으며 성장해나간다. 퇴계는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여러 가지 번민을 지니고 항상 노심초사하는 심성여린 학자였지만 안도에게는 언제나 큰 나무의 기둥처럼 듬직한 면모를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들 퇴계와 안도의 관계,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이다지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퇴계가 남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책은 이 두 사람이 서루 주고받은 서신(안도가 보낸 서신은 빠져있음)을 소개하는 가운데 한 개인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대소사 일등을 비롯하여, 당대의 생활풍습과 정치적인 문제, 옛사람들의 생각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방식 등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서신 한편 한편 안도에 대한 사랑과, 교육적인 훈계도 빠지지 않는다. 더불어 퇴계의 시선이 뻗어나가는 곳곳에 그의 진심어린 관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 며느리의 병환과 손자며느리의 병환까지 두루 챙기고 걱정하며,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 병에 걸려 많이 아픈 것을 염려하는 퇴계는 기득권을 가지고 당대 정치계를 휘둘렀을 강한 이미지에서, 보다 사려 깊고 인간적인 일반 여염집 사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특히나 증손자였던 창양의 죽음과 연계하여 유모를 보낼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자식을 살리자고 친자식을 버리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안도에게 보낸다, 이번 책은 퇴계관련 책 중에 ‘함양과 체찰’ 이라는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을 듯싶었다. 물론 책의 가치나 의미는 사뭇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한쪽은 사적인 성격이 강하며 다른 한쪽은 사적인 것을 포함하며 정치적인 요소와 학문적인 요소의 색이 더 많이 들어간 퇴계관련 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두 책을 같이 놓고 읽다보면 소통이란 것의 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책의 가치는 어떤 책이든 각각의 책 스스로가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있을법하다. 역사적 자료와 고증이 따르는 사료의 정리가 필요조건으로 따라오는 고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책에는 퇴계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소개되어 있다. 일일이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생몰연대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방대하면서도 지치는 작업이었을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고 양질의 책을 세상 밖으로 끌어올린 이(정석태-이 책을 준비하고 출간해낸 옮긴이)의 노고에 감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