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스물 세 번째 서평

가난한 이의 살림집-노익상 지음




 집, 그리고 삶의 허기를 달래다.




 가난한 이들의 집이 산꼭대기에 있는 까닭은 신께로 더 가까이 가고자 했던 열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이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아주 높지 않으면 끝도 없이 낮아지는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꼭대기 높은데서 사는 이나,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낮은 데서 사는 이나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옛 집에 대한 회상을 시작으로 글을 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살던 옛 집이었고, 아버지의 집이었으며, 돌아가신 할머니의 집이었던 그 집에 대한 기억을 살려내는 일은 책을 읽는 동안 꾸준한 숨고르기처럼 이어지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가족은 흩어졌다. 7월 중순께 상을 치르고 나서 그해 겨울 가족들은 그 집을 팔았다. 할머니가 망자가 되신 후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집은 더 이상 우리의 집이 아니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찾아갔던 우리들의 옛 집은 내가 살던 때와 비슷하게 마당 한쪽으로 길게 화단이 꾸며져 있었으며, 한 여름 담장 밖으로 능글맞게 늘어지던 장미 나무의 가지들도 여전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말고 그 외 많은 것들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무심코 철 대문 안쪽으로 발 한쪽을 집어넣는 내게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제제가 따라와 어린 내 마음을 아리게 하지 않았던가.




집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집이란 추억인가보다. 아니다. 집이란 삶인가보다. 그대의 삶이 남루했을지라도, 혹은 치열했을지라도, 혹은 처음 움트는 봄날의 여린 꽃망울처럼 여린 그 무엇이었을지라도, 내가 살아온 이만큼의 시간으로 꼭 그만큼씩의 거리로 저만치 물러나 있는 옛 집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3주 가까이 잡고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었다. 가볍게 읽고 싶지 않았지만, 또 그다지 쉽게 넘어가지도 않았던 책이었다. 쉽게 눈으로 읽어버리기에는 놓치는 게 너무 많아 보였으며, 실제로 제법 생각할 것들이 많아 쉬어가는 순간들이 필요했던 것을 기억한다. 소중했던 옛집에 대한 기억, 남편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살았다던 경북 영주의 동촌 산골에서의 낡고 오래된 집 이야기, 지금은 시댁이라는 이름으로 명함이 깔린 양옥집에 대한 생각(그 일대는 비슷한 형태의 구조를 가진 집들이 많이 있다. 후에 안 알이지만 아파트처럼 비슷한 집을 지어서 사고 팔았다는 설이다.), 또는 대학교 때 찾아갔던 해남의 폐교된 분교까지 노익상의 발걸음을 따라 그가 찾아내고 설명해주는 것들에 맞춰 내 기억속의 공간을 채웠던 풍경들이 쉴 사이 없이 일어섰던 것이다.




그랬다. ‘가난한 이의 살림집’ 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집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이야기는 집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과 더불어 사람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들의 삶의 모습까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때로는 저자가 작업했다던 다큐멘터리의 이야기처럼 그의 목소리는 이성적이며, 객관적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진을 찍으며 글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 노익상의 글은 글과 사진의 매듭이 자연스럽다. 글 따로, 사진 따로 엇박자로 뒤틀리는 감 없이 안정감을 준다. 그가 직접 찍은 사연 많은 사진들은 각각마다 저자가 보고 듣고 느꼈던 삶의 지난한 이야기를 더 친근하게 소개하는데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저자는 양지바른 언덕보다는 이끼가 앞다퉈 피어나는 그늘진 음지로의 여정을 선택했다. 가난이란 말은 생각해보면 상당히 주관적이면서도, 감상적인 표현이다. 그렇긴 한데 책 속에 담겨져 있는 가난이란 말은 그저 아련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뜩한 것도 아닌 것이, 마구 쓰라린 것도 아닌 것이, 큰 상처가 나서 언제나 아물까 당장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닌 것이, 이를테면 엊그제 손가락을 베었는데 아주 조금씩 아물어가는 기미가 막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쓰여졌기에 엿보일 수밖에 없는 미세한 흠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또한 저자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노력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너그러이 넘어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고단한 하루일과를 정리하며 저물어 가는 석양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기약 없는 내일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를 걱정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저자는 끊임없이 그들을 찾아간다. 그의 걸음은 산간벽지와 한 길가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외로운 집에도 머문다. 또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아이들이 다니는 분교이야기도 그렇고, 사람이 들고 나는 공간에서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힘을 기울인다.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에세이의 느낌처럼 부드럽지만은 않은 부분들이 간혹 독자의 의식을 날카롭게 자극하기도 한다. 그것은 저자가 풀어놓았던 집과 당대의 정치와의 관계, 분교와 간이역, 차부집의 또 다른 정치적 의미(우리가 몰랐던 시대적 상처를 안고 가는 주변의 모습)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측은지심으로, 감상적인 것으로 책을 대한다면 독자는 개인적으로 내가 범한 실수를 경험하게 될 것도 같다. 그런 까닭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책을 읽는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책을 잡고 있는 동안 나는 무언지 모를 허기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고약했던 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조선시대부터 첫 걸음을 옮겨 놓아, 200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시기까지 하루의 노곤한 일상과 지친 심신을 내려놓기 위한 휴식 같은 공간의 이번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기억에 남는 그 언저리마다 한순간 내가 머물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다지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자랑할 만한 나이가 아닌 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궁이에 연탄불을 지피며 고단했던 내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상기하고, 200장이니 300장이니 한 장에 얼마씩 하던 연탄을 새로 들이는 날이면 일꾼들의 검은 색 지게를 떠올리며, 볕 좋은 봄 어느 때 마당에 새로 일 기왓장을 구경하던 유년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궁이에 물이 차올라 퍼올리기 바쁘고, 비가 오면 슬레이트의 벌어진 틈으로 비가 새고, 우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두다다다닥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소리에 두려워했던 기억과 또 다른 기억과 또 다른 그 뒤편의 기억들까지.




그러나 잊지는 말자. 평온한 시선이 무심하게 외면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곳 어딘가에도 삶의 진솔함이 피어나고 있음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자 노익상의 발걸음과 그의 의식이 닿아있을 그 어딘가에 나와 닮은 이웃과 내 아이와 닮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진다.




이제야 조금 배가 부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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