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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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두 번째 서평

선방일기-지허스님




동안거, 깊고도 긴 내면을 들여다보다




연 삼일 째 혹한이다. 외부와 정면으로 마주서고 있는 통 큰 베란다의 알루미늄 손잡이에 얇은 잠자리 날개 같은 살얼음이 새로 얇게 드러누웠다.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의 느낌은 진공상태에서 순식간에 열린 구멍으로 생겨나는 흡입력 같은 거였을까. 다섯 개의 손가락들이 일순간 베란다 창틀에 차르르 소리가 나게 들러붙는다. 차가웠던가. 아니면 뜨거웠던가. 계절은 거룩하게도 완연한 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재채기를 해대며 넘겨보던 책은 일기 같은 에세이라고 해야할까보다.




115페이지 분량의 얇은 책이었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었던 것 같다. 책 안에서 하나 둘씩 오롯하게 솟아오르는 심오하면서도 무한의 깨달음을 주는 생각들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었던가. 그것을 철학적 논지로 단정 짓기에 범위가 광범위한 것이기에 수월하지 않았으며, 비단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에도 생각할 거리의 깊이감은 상당히 깊고 아련했던 까닭이다.

 선방일기는 긴 겨울동안 일정기간 칩거라는 사회적 공간적 제약을 스님들의 자의적 선택을 통해 결정하며 스스로 고독해지는 방법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의 모음집이라고 볼 수 있다. 산문출입을 금한 채 수도에 전력하는 동안거는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이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동안거를 위해 선방을 결정하면서 불제자의 겨울 고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들, 춥고 어두운 산사의 겨울. 그들만의 결제(동안거의 시작)를 기점으로 스님들의 겨울 불심에서 자아 찾기 여정의 분초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근원적인 철학적 자문과 스스로가 판단해서 내리는 답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며 구조적 시선에서 보여지는 선방의 생태와 수행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포살 이야기 또는 선방의 풍속과 같은 일상의 모습이 담겨진 동안거 기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스스로의 해탈을 위한 몸부림은 이어지고 쉬어가다가는 다시 또 이어졌다.




왜였을까. 무슨 이유로 처음 출간되었던 삼십여 년 전의 옛 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끊이지 않은 호감과 정감을 받아왔던 것일까를 생각한다. 이름 있는 이들의 책상에는 한권씩 꽂혀 있더라는 말에 나는 살짝 비위가 상했다. 장식품도 아닌 것을. 겉멋이 들었던 것일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끙끙거리며 혹은 양미간에 힘을 주면서 정독했던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얇고 연약해보이기는 한권의 책이 발산하는 거대한 에너지에 대한 것이었다.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은 불교에 대한 것이었지만 글과 글을 헤집고 들어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들은 불교의 틀에서 훌쩍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이었겠지. 선방일기가 갖고 있는 힘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알아가며 깨달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문득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를 잠시 잊어두고 화두에 몰입해 부처의 가르침에 매진하는 일도 결국 좁은 범주에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세상의 온갖 잡다한 유혹을 멀리하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은 자세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심상의 기운마저 멀리하는 일이 밥을 먹는 일이나 잠을 자는 일처럼 결코 유연하거나 쉬운 일은 아닌 일이었을 법하다. 그러니 이런 말까지 생각나는 것이 아닐까. 머리 깎고 절에 가서 중이나 되라고 하던 그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 되어 버렸다. 누가 그 말을 함부로 했던가 말이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실상을 알고는 그다지도 쉽게 입술 주변에 담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뭇사람들이 모르고 살아가는 게 진정 다행스러운 일인가도 싶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영원성을 부인함은 인간의 한계상황 때문이요, 영원성을 시인함은 인간의 가능상황 때문이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불타(佛陀)의 열반(涅槃)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엇비슷하겠지만 하나의 결론은 다 같다고 믿고 있다. 결국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어떤 존재나 신을 의지하는 과정에서 자성과 같은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는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을까.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꼬집어 들춰내는 동시에 그것을 열반이라는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어느 최초의 또는 최후의 지점으로 끌어올리는 이야기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대목이었다. 더불어 육체와 정신에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이어지는 숙명과 운명에 대하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동안 개인적인 화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논리적이면서도 철학적이며 깊이 있는 사색의 묘미를 불교적 색채 안에서 흠씬 느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말이다.




한해의 것은 한해의 것으로 돌려주라고 책이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달력장을 미련 없이 뜯어버리고 새 달력장을 거는 용기를 가지라고도 했다.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있는 망두석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느 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도 했다.




책 한권을 다 접고 나니 소소한 생각들이 물밀듯 그저 흘러내리기만 한다. 사람들의 책장위에 앉아 쉬고 있다는 이 한권의 책은 작고 얇지만 그 품은 의미는 무한한 것이었나 보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중순께의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사소한 화두 내지는 깨달음을 선정하기는 어설픈 개념만 남아 무리수라는 생각이 많기에 다만, 두고두고 읽어보면 때마나 날마다 매 시간마다 뭔가 다른 깊이감을 새로이 얻게 되는 책이라는 생각만 하고 싶어진다.  이제 내가 지닌 어제의 낡은 짐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는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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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행복하다 - 10년의 시골 라이프
조중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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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한 번째 서평

사는 게 참 행복하다-조중의 지음




    삶의 예의(행복예찬)




사람들은 이중적이면서도 때로는 이기적인 생각을 동시에 갖고 사는 듯하다. 이중적이며 또는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특별나게 악의가 숨어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심신의 안정이라는 두 가지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흔히들 시골에 내려가 안착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막상 시골에 내려가면 한 시대 내지는 한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낙오되어, 한 곁으로 빗겨나 다소 소박해진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한 조용한 걱정이 앞서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늘 그렇게 듣는 잔소리이겠지만 이를테면 인식의 전환으로 귀결될 문제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버리고 와야 한다는 식의 똑 부러지는 이분법적 사고는 때때로 사람들을 허전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동전의 양면이 있듯 무엇이든지 간에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니까 너무 의기소침해질 일은 아니다. 스멀거리는 더운 대기의 열기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상큼하기까지 할 법한 우리네 고향 어디쯤 그곳에서부터 불어오는 수줍고 포실포실한 자연의 숨결을 친구삼아 귀거래사를 선택하는 일도 역시 내가 결정할 자유 의지에 의한 가치 있는 풍요로움이 아닌가 말이다




 ‘사는 게 참 행복하다’는 저자 ‘조중의’ 씨의 전원생활에 대한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장을 뜯어보면 시처럼 그 느낌이 살아있으며, 한편 한편의 수필로 볼 때도 역시 문학성과 감수성을 한껏 드러내는 말 그대로 예쁜 글들의 모음집이다. 전원생활의 시작인 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이웃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자연이 주는 풍부한 감성에 기대어 매일 조금씩 기록으로 남긴 그만의 기록인 것이다. 비단 시골 생활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심의 북적거리는 일상에 비해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해주는 곳에서 바라보는 하늘빛은 그만큼 많은 느낌과 색감을 주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책은 우리네 삶에 대한 애착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다. 삶에 대한 저자의 넉넉한 시선은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긍정적 마인드의 핵심일 것이다. 또한 관조적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그만의 삶의 예찬도 함께 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기록으로 남긴 글처럼 어여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같이 편집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더 깊이 공감하고 매려 될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좋아 보이는 요소였다. 아무리 말로 좋다고 설명하더라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좋은 효과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던가.




 사실은 밤새도록 환한 불빛에 지쳐 잠못드는 생활이 안쓰럽기 그지없기에 소박할지언정  내 자신에게 조금은 더 충만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떠남이 바로 시골 생활이겠지만,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바로 ‘동화’라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저자 ‘조중의’는 그 동화(同和)를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동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우리가 로빈슨 크로스처럼 외딴 무인도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항상 주변과 교류해야 한다는 점이기에 이 책이 더욱 그 가치를 발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름의 의미를 두는 것이다.

 수채화처럼 색 고운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도 사회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을 슬쩍 올려놓고 돌아가는 저자의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가 아닌 몇 가지 생각의 여운을 맛보게 하는 작은 숙제를 던진 셈이다. 




각박하다고 했다. 사는 게 영 재미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뭔가를 바꾸고 실행하기에는 너무 내 자신이 나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까닭에 갑자기 보따리를 싸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책은 나태함과 주저함으로 뒤에 물러 앉아있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과감하게 시골로 돌아가는 이들을 매개체로 삼아 용기 내지는 대리만족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도와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신도 지금 바로 가방 하나 챙겨 떠나라고 하기에는 역시나 조금 무리인가. 그렇다면 ‘조중의’가 나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면 어떨까.

오늘 비록 그대가 도심 속 비좁은 카페에 앉아 있더라도 잠시나마 정신적 휴양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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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공부 벌레들 - 조선 최고 두뇌들의 성균관 생활기
이한 지음 / 수막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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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번째 서평

성균관의 공부 벌레들- 이한 지음




성균관, 유쾌한 분석이 시작되다




드라마의 영향이 미치는 범주는 파급적이다. 한때 성균관이라는 어휘 자체가 유명세를 탔던 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즉 대중매체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한 편의 드라마가 종영이 된 이후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성균관은 다시 차분한 옛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한 인상이다. 들썩이던 성균관의 기와가 모두 제 자리를 찾은 듯하면서도 부지불식간 찰나에서 영원으로, 사람들의 먼 의식 속으로 되돌아간 아쉬움이 남는다.

실질적으로 드라마를 통해서 성균관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회를 맞보았다면, 이번 ‘성균관의 공부 벌레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보다 심도 있는 성균관 관찰일지를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 이한이 새롭게 세상에 내놓은 책 ‘성균관의 공부 벌레들’은 성균관의 공간적 배경의 겉과 안 그리고 시대적 배경에서의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과 안으로 감추어진 것들의 유쾌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작가 이한이 풀어내는 성균관의 모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고 생각해볼 시간이다.

우선 이한이 바라보는 성균관의 공부벌레들의 이미지는 측은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유학이 굳건하게 존립하며 그 위상을 키워갔던 성스러운 공간인 성균관은, 우리들의 평범한 인식과 구태의연한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기대치가 그대로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던 듯 싶다. 필부필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성균관은 그들 나름대로 구성하고 완성시켜 놓은 긍정적 선망의 대상에서 약간의 일탈이 존재했던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일탈이라고 해야할지, 삶의 한 흐름이라 할지, 학문하는 이의 고충이라고 해야할지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잠깐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학생들의 고단한 일상, 학문과 정치의 연계선상에서 유생으로서 미래의 학자라는 신분으로서 지켜져야 했을 학문의 열정과 순수성이 현실적 문제 앞에 잠식되어가야 했던 당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사족의 사설들을 무시하고서라도 이번 이한의 성균관 이야기는 크고 작은 사소한 재미가 꿈틀댄다. 이를테면 역사의 해박한 전문성과 일반인의 흥미를 유도하는 대중성까지 모두 균등하게 확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지방에서 시험을 치르고 그 합격자들이 모인다는 조선의 국립대한 ‘성균관’은 들어가기도 힘들고, 공부를 하는 과정 역시 힘든 시간의 연속임을 소개 하고 있다. 입학과 관련해서 성균관 입학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시험 종류와 제도, 또는 성균관 안에서 시행되었던 다양한 시험제도와 그 점수의 기준 등이 소개 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은 많기도 하고 쉽게 넘어가지 못할 산과 같은 부담감으로 다가왔던가 보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채 가부좌를 틀어 앉은 젊은이와 현재의 학생들이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는 모습이 겹쳐지면서, 시대가 변해도 한결 같은 것이 여기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조금은 냉정하면서도 우울한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학생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처럼 조선의 학생들 역시 밤새워 글을 읽고 시문을 지으며 가문과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성균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할 것은 성균관 내 존재했던 재회, 즉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해서 실세를 이어갔던 학생회 성격의 단체가 아닌가 싶다. 물론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이며, 흑과 백은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기에 이 자치기구 역시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임금에게 ‘이건 아니다!’ 라고 주저함 없이 청춘의 대쪽 같은 열정으로 직언을 상소로 올렸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아주 먼 시간. 몇백년이 지난 현실과 비교해 봐도 사뭇 비슷한 면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띄곤 한다. 결론은 이런 것일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부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며, 학문을 바탕으로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고충은 그만큼 심신의 바닥이 다 드러나 구멍이 보일 정도로 애가 타는 일이었을 법하다.




책은 성균관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시해 그 안에서 유학을 세워가며 조선을 지켜왔던 젊은 학자들의 학업과 일상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흐름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가장 중심적인 것은 역시 성균관 내의 청춘들의 이야기라고 할수 있다. 당대 조선의 역사에서 아린 상처로 남아있는 당파의 갈림이 성균관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경쟁 없는 조직관계는 타성 즉 매너리즘의 덫에 쉽게 노출되기 마련이 아닌가. 적당한 견제가 서로의 인식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면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달라질지, 오랜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 성균관의 모습은 또 어느 색다른 두루마기를 걸치고 우리에게 다가왔을지 혼자만의 질문을 꺼내본다.




성균관 이야기를 함에 있어 그 주변의 사회 문화를 소개하는 ‘반촌’에 대한 저자 이한의 이야기는 성균관 유생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조선의 생활사, 선조들의 사람 사는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이한은 말한다.




  “책을 통해 성균관을 좀 더 가깝게 느끼기를 바랐다.”




드라마의 유명세에 편승해서 세간에 주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한의 ‘성균관의 공부 벌레들’이라는 이번 책은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한 메리트가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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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돌
문영심 지음 / 가즈토이(God'sToy)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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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른 아홉 번째 서평

도스토예프스키의 돌-문영심




문학. 그 아리고 시린 것을 위하여 




영원한 열병. 식지 않는 용광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버린 서글프고 어리석은 사람들. 그들은 바로 소설가와 시인이 되고 싶은 문학 지망생들이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방송국에 적을 두며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던 문영심의 첫 소설작품집의 제목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돌’이라는 활자로 생명을 부여받았다.

책은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만하다. 작가 문영심과 같이 책속의 주인공 수영 역시 문학을 지망하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공부하는 학생신분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 수영을 거울삼아 오래전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옛 시절의 추억과 기억들을 되살려 소설로 풀어내는데 열정을 쏟은 듯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인공 수영이다. 나를 둘러싼 인물관계는 삼총사로 대표되는 주변 인물들 즉 희수와 수옥이 등장하며 그 외 수영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확인했으나 현실의 벽 앞에 주저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 카페주인인 업선배, 수영을 외따로이 짝사랑하던 석균 등 몇몇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인칭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며 작가적 시선은 차분하면서도 문장에 숨은 힘이 있음을 느꼈다. 유려한 미적 표현이 특별하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은 스토리의 힘이 아닌가 말이다. 스토리를 끌고가는 작가의 힘이 읽는 이에게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재미나게 잘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 도스토예프스키의 돌인가. 작가 운명심이 왜 굳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돌을 제목으로 선정했는지 문득 생각할 때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첫 느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제목이 상당히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부터 나는 작가 문영심의 속내를 살짝 들여다보는 듯 흥분감을 맛보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인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다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인에게로부터 돌멩이 하나를 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시기, 그를 가두었던 비좁은 감옥에서부터 한국의 평범한 다큐작가에게 흘러오기까지 이 조그마한 돌멩이의 신비스러운 존재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로 집약된다. 그것은 바로 문학에의 열정! 바로 그것이었다. 돌멩이를 소유하고 있는 이에게 창작에너지가 생겨나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다소 신빙성 떨어지는 이 무한의 기대치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또는 현실세계의 문학을 추구하는 모든 문학도들에게 심심치 않는 자극제로 그 몫을 제대로 해준다는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소설 속에서 이 돌이 갖고 있는 허망함에 대해 진지하게 토로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노력과 열정이 있는 정신적 열정의 발로일 뿐이며, 그 어떤 매개체도 다 무의미 하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문학을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작가의 따끔한 충고일지도 모를 일이다.




신입생환영회 때의 기억할만한 인상을 남기는 이미지의 도입은 처음부터 책 속에 집중하는데 좋은 작용을 했다. 전체적으로 대학 4년여 동안의 에피소드와 결혼후의 삶을 통해서 문학적 또는 인간 내면에서의 성장과 고통을 수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반영한다. 저자 문영심은 자신을 닮은 한 인물 수영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동시에 오랜기간 잊고 있었던, 잊으려 애썼던 자아를 되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름지기 문학이란 반항이고 저항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모든 진부한 것,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가치를, 특히 진부한 모랄과 윤리의식 따위는 다 나의 적이었다”  p32




얼마나 치열한 열정이 느껴지는 멘트인가. 소설 속 수영이만큼은 아니더라도 한때 소설을 쓰고 시를 썼던 시절들을 생각하며 나는 적잖이 재미나고 적잖이 웃으며 혹은 가슴 쓰라리며 이 한권의 책을 읽었는가 싶다.

열정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감히 누가 가슴속 깊숙이 세포 하나하나 박혔던 그 뜨거운 열정과 치열함을 두고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도 싶다. 어설펐던 열정과 그 열정을 키워줄 자구책이었을 노력도 부족하기 짝이 없었던, 다만 투덜거리기에만 바빴던 이십대 청춘의 시절은 어딘가 소설 속 수영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공교롭게도 폐렴과 기관지염으로 입원한 아이를 끌어안고 입원실 빈자리가 없어 새벽 내내 추위에 떨며 대기 의자에 앉아 읽어야 했던 책이었다.

“한때나마 문학을 가슴에 품었던 이들에게 바치는 책!”이라 했던 문구처럼 나는 스스로 한아름의 선물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춥고 힘들고 지루했던 시간들을 책과 함께 보냈다.

침상 머리맡에 붙어있는 독서등에 의지한 채 나는 아직도 퇴원하지 못한 아이 옆에서 이 글을 쓴다. 조금씩 차오르는 작은 기쁨. 오랜 시간과의 넉넉한 화해. 어쩌면 이제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비애감에서 오는 자책감 그리고 두려움으로 거의 십여 년을 책을 멀리했다. 책은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내게 이 작은 책이 틈을 벌리고 가버리는 것이다. 비집고 파고들어 오고 갈수 있는 하나의 틈을. 책속에 문장들이 글이 아닌 수학적 물리학적 공식으로 비춰지지 않는 그 순간을 기다렸고 조금씩 나는 내가 만들어놓은 족쇄에서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때 함께 공부했던 십년지기 친구에게 안부문자를 보냈다. 책 보다가 네 생각이 났다고. 보고 싶다고.....

비록 자신이 갖는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질의 부족으로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는 그 보다 더 날카로운 인식의 칼을 든 많은 이들이 있음에 문득문득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과연 어디쯤에 쥐꼬리라도 잡고 낄 만한 공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처럼 뜨끔하면서도 재미난 소설을 만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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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좋은 생각 - 1% 더 행복해지는 가장 간단한 방법, Happy Thinking
와다 히로미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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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번째 서평

오늘하루 좋은 생각-와다 히로미 지 

당신의 하루 일상에게




와다 히로미. ‘오늘하루 좋은 생각’의 저자다. 영업직종에 몸담고 있으며 강연과 세미나 활동을 한다고 했다. 책은 이를테면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빌려왔지만 느낌과 내용은 사뭇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딱딱한 말투나 지식전달의 한계를 드러내며 현실반영에 초점을 맞춘 결과 딴은 개개인의 개성을 잠시 뒤로 보류하고 획일적 사고에 더 귀기울이게 하는 듯한 자기계발서와는 분명 다른 책이었다. 와다의 이야기는 개성과 인간미가 살아있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자신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느낌 역시 부드럽고 따뜻했던 점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다가왔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이야기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만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행복이란 말은 다분히 감성적인 요소를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그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하루 좋은 생각’을 읽다보면 행복에 대해 보편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행복론을 만나게 된다. 거창할 것도 없이 그저 내가 만나는 행복, 만나고 싶은 행복 또는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는 행복이 눈앞에서 조용하게 밑그림으로 그려져 다가오기 시작한다.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 행복의 칸타빌레를 만나기 위해 저자 와다 히로미는 9가지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양전사고에 대한 이야기였다. 행복은 늘 가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이야기로 풀어간다. 또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여러 가지 현실적이 난관을 어떤 방법으로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평범하면서도 진실성이 돋보이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처하든지 생각을 밝게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은 ‘양전사고’라는 어휘로 집약된다. 생각을 바꾸는 일은 더 나아가 심리적 또는 육체적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다지 좋지 않은 쪽으로 향해 있을 때 밝은 쪽으로 갈수 있도록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나는 ’양전사고’라고 부른다               -본문 23P -        ]




무조건적인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좋은 쪽으로만 무조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갖는 부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따위를 먼저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저자 와다는 강조하고 있다. 먼저 인정하고 그 다음이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보자는 이야기다.  

하나의 단락이 끝나면 친절하게도 ‘오늘의 좋은 생각’이란 코너가 우리를 기다린다. 앞서 나온 이야기를 명쾌하게 요약하고 다시금 그 의미를 새겨두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력 질주’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전력 질주라는 말에 무한의 에너지기 느껴지는 동시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 몸으로 희망적 분위기가 가득찬 메세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행복에 대한 저자만의 은은한 빛이 감도는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내렸던 결론은 어쩌면 이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중심의 자리에 서서 행동하지만,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후회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일. 그것이 바로 어떤 의미에서는 전력 질주와 같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그 사람의 앞날에 무한의 힘을 불어넣어주며 언젠가  만나게 될 행복이란 이름에 좋은 밑거름으로 작용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오늘은 저자 와다 히로미의 이야기에 나 역시 긍정의 한 표를 던져야 될 듯하다.




어렵지 않으면서 재미가 있는 책이다. 동시에 책 속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얻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꼭 그렇게 어려운 원서나 전문서적의 무게감에서 벗어나 때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 좋은 생각’과 같은 책을 읽어보고 권해주고도 싶어진다. 인생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이란 것.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편안하게 한번쯤 읽고 느껴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행복이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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