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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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서평

진정한 유토피아와 우리들 이야기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김용규 지음




‘우선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가능하다면 차라도 한잔 마셔가며 오랜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듯한 기분으로 첫 장을 넘겨주길 바란다.’-책머리에서..-




 커피는 마실 줄 모른다. 아니 마셔 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커피도 잘 타지 못한다. 누군가는 커피를 정말 맛나게 끓여내곤 해서 그 집에 가면 나름대로 맛있고 향이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도 했지만, 내 집에 아주 가끔씩 들리는 사람들은 물론 인스턴트커피 그것도 물의 양을 잘 맞추지 못해 어중간한 농도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맛의 국적도, 맛도, 향기도 없는 말 그대로 이상한 커피를 접할 뿐이다.

 카페라테라든지 에스프레소라는 단어조차도 그다지 친근하지 못하다. 커피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쯤은 짐작으로 알 것 같기는 한데, 맛이 어떤지 색이 어떤지 느낌이 어떤지는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커피에 대해 무능하다고 해서 저자가 마련해놓은 카페 앞에서 주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커피가 아니라면 냉수라도 한잔 마시러 들어가고 싶은 사심이 있었던 까닭이다.




 철학카페에서 접하는 문학이란 어떤 느낌일까. 철학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문학을 데코레이션의 특징으로 올려놓은 아담한 케익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긴 했지만 그건 가벼운 기우 같은 거였다.

 책은 공평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몫은 저자가 아닌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얼마나 알고 얼마나 느끼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닐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문제였던것 같기도 하다.




 이번 책은 철학과 문학을 큰 테두리로 삼고 그 안에 기타 사회학과 인문학 등 많은 학문을 곁들여 놓은 인문관련 교양서적 쯤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모든 문학과 예술 작품에는 그 안에 철학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다. 어찌보면 인간의 삶 전체가 바로 철학과 밀접한 연계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인간 삶의 모습을 철학자들이 다양한 학설을 이용해서 먼저 풀어놓았던 까닭에 우리는 살면서 그 이론들을 하나씩 꺼내 필요한 만큼 담아서 인용하고 공부하고 서로 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철학을 좋아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이는 이 책을 철학에 대한 간단한 응용 레시피 정도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즐기고 공부하는 이는 문학과 철학의 절묘한 조화를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문학을 파고들다보면 하나하나 걸리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에, 늘 똑같은 질문을 던져내지 않던가 말이다.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편의 소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소설의 주제(저자의 집필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어떤 철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라도 상당수의 내용이 철학적 요소 쪽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번 책이, 문학과 연계되면서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듯한 분위기다.

 이제 저자가 말해주는 철학이 바탕이 되고 있는 문학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괴테의 파우스트(자기 체념과 자기실현), 헤세의 데미안(성장),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만남), 섹스피어의 오셀로(질투), 카프카의 변신(가정의 의미), 사르트르의 구토(일상),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권태), 최인훈의 광장(유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디스토피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인간공학), 조지오웰의 1984(사회공학),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회상)등등 모두 열 세 가지의 문학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나는 나약한 자아를 끌어안는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한권으로 자기체념과 자기실현이라는 두 가지 테마로 풀어나간다. 전자는 책의 주인공이자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주인공 파우스트의 연인 그레트헨의 죄와 구원받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선택의 기로에 든 연약한 인간 본성과 심리가 어떤 단계를 거쳐 기독교식의 죄사함을 받아가는 가를 보여주면서 실존적 나약함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떤 사건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 는 죄의식이 최고의 자기부정이자 동시에 강한 자기 체념이라는 내용이다.

2부에 자기실현에 나오는 것은 자신의 존재부여를 확고히 다져가는데 더 중점을 둔 주인공 파우스트를 소개한다. 그는 부정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한 가지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신의 선택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것을 찾아 실현하는 일. 이를 바탕으로 실존적 인간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저자가 역설했듯이, 그레트헨의 선택받음이나 파우스트의 선택받음은 그 타당성에서 점수를 후하게 얻지를 못한다.




외로움을 치료하는 명약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이다.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동화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여우, 꽃, 사막, 뱀 그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정의까지.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한 대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는 우주 멀리 어느 한 별에서 찾아왔다는, 장미꽃을 키우던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소년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주는 상대 앞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상대가 없는 곳에서는 자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를 만들어 가는지 한번 천천히 생각해볼 화두다.

저자 김용규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막’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언급하며 단순한 사막이 아닌 인간관계의 소홀이 만들어낸, 외로움이 넘치는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이야기한다.

 외로워지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들어앉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와 크든 작든 안면을 익히고 관계를 만들어야 하며, 이것이 그 유명한 ‘서로를 길들이는 방법’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록 눈의 괴물은 죽지 않는다

초록 눈의 괴물은 질투의 또 다른 은유적 표현이다. 오셀로는 질투라는 주제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진화심리학적 질투와 존재론적 질투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려는 제 3의 경쟁자가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며, 후자는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상대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질투라는 이론이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발동하는 질투의 개념은 다 다를 법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위의 개념적으로 양분하기도 어려운 것이 질투는 두 이론이 거의 동시적으로 작용해서 생겨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개인적인 생각) 분명한 것은 질투 역시 인간 본연의 심리이며, 다분히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닌 외로움이란 감옥에 뒷덜미를 잡혀버린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외에도 카프카의 변신이나, 사르트르의 구토는 많은 철학적 이론을 소개하면서 실존주의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유토피아 개념이 담겨진 ‘광장’이나 ‘당신들의 천국’ ‘멋진 신세계’ 등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읽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끈질기다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이번 책에서 선정한 문학작품과 그 순서의 배열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개인에서 시작해서 자아찾기와 타인과의 관계를 그리는 가운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며 부조리에 대해 당당하게 ‘아니다’(페스트의 ‘리유’처럼) 라고 말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가는 일.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반항’이다. 또한 너, 나 또는 우리가 모두 잘 어울려서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적 의미)의 대조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다.

 

 바로 어제 인터넷 짧은 뉴스에서 볼 수 있었던 낯익은 문구가 내 시선을 꼭 잡았다. ‘1984년 조지오웰’의 소설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모 대학 교수가 쓴 글에는 전자책과 각종 매체 컴퓨터 관련한 새로운 문화체계에서 조용히 뒷걸음치며 물러나는 ‘종이책’에 대한 아쉬움 내지는 안타까움을 남기는 듯한 글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철저하게 감시하며, 재교육 시키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는 서로 감시하고 감시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오래도록 등골을 시리게 한다. 하나의 만들어진 틀에 모든 것을 껴맞추려는 것.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에 맞게 다리를 잡아당겨 늘린다거나,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른다는 이야기는 각자의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가져온 한 예이다. 저자 김용규는 이 대목에서 여러 이야기 즉, 팬옵티콘과 시놉티콘(감시사회, 처벌사회)또는 전체주의 같은 이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정의이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살수 있는 사회’가 바로 올바른 유토피아의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참 많은 길을 에돌아온 기분이다. 열 가지가 넘는 소설 속에 깃든 철학과 문학 요소를 분석해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대별로 요약 해설되고 있는 많은 철학적 내용을 이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슬몃 내려놓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과 달리 메모를 하고 정리를 하며 서평을 준비해야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까닭은 그만큼 의미가 있었던 독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짧은 지식만으로 철학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노라, 착각의 늪에 빠지지 말라고 충언했던 어느 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하나를 알아서 열을 알았다고 믿지는 말자. 하지만 그 하나를 내 것으로 품어 나만의 양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것은 과히 나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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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1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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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서평

과거와 현재, 통하였느냐!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이현군 저)

 오래전 유명세를 탔던 한편의 영화가 생각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남녀상열지사라는 유교적 편견이 숨어있는 선례를 밉지 않은 해학과 통속으로 그려냈던 영화다.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영화를 기록했던 포스터의 한 카피 문구 때문이었다.

 통하였느냐! 대관절 갑자기 뭐가 통하였다는 뜻인가.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막힌 하수구가 뻥하고 뚫려 콸콸콸 시원스레 빠져나가는 물줄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통하다, 라는 뜻은 막힌 데가 없이 원활한 소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 정을 통하다, 는 식의 관용구로도 쓰이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다분히 후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러나 다른 수식어가 없이 통하였느냐! 라는 문장 하나는 어찌 보면 두 가지의 뜻을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고서도 관객은 나름대로 상상의 가방을 재미나게 꾸려나갈 수가 있다. 이런 뜻으로 가방을 꾸리든지, 저런 뜻으로 가방을 꾸리든지.. 그것은 관객의 몫이며 이는 흥미유발이라는 차원에서 성공적인 카피임에 분명하다.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의 서평을 준비하면서 부제목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했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시대적 배경에서 같은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일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조선의 모습과 현대의 모습을 오버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대의 지리, 풍수 그리고 이와 연개해서 설명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그 바탕이 조선의 한양을 모태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현대의 것을 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과거와 현대 두 시대가 남아있는 역사적 사료의 증거물로 소통하지 않고서는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일도, 이해하는 일도 어려워 보이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인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준비단계로 저자는 지도 읽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보다 앞서 저자는 왜 하필이면 옛날 지도를 들고 서울 답사를 떠나야 하는가, 라는 독자의 질문에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진지하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피려한다.

 ‘시간의 흐름, 역사로 장소를 볼 것이 아니라 장소를 통해 시간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그가 스스로 발 딛는 순간순간, 그  자리마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역사를 찾고자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딴은 그렇게 본다면 범위가 서울로 소개된 이 책을 벗어나서, 내가 딛고 서 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땅 한 귀퉁이도 혹시 숨겨진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늦은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오고가던 길도 어쩌면 깊은 역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책은 총 네 장의 큰 이야기로 나뉘는데, 사대문 안에 왕이 거처한 궁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싸는 산과 지리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다. 복개공사로 오랜 시간동안 지하에서 음습하게 숨죽어 있던 청계천을 중심으로 물길 이야기를 꺼내고, 서울이란 지역이 성곽으로 이어진 곳이라는 내용의 도성답사 여정을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문 밖의 일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서 나오는 달변은 그 범위가 다양 할뿐 아니라 세세하며 다정하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궁 이야기에서 경복궁을 둘러싼 북한산과 북악산, 도봉산과 남산의 지리적 입지조건과 당대의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은, 무심코 지나가며 스쳐보기만 했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대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해주는데 한 몫을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 경복궁이 뒤로 북악과 북한산을 등지고 자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더불어 현대시대에 맞게 지리적 요인과 건물의 입지 조건 등을 비교 정리하는 내용은 바로 과거와 현대가 서로 ‘통하였기에 ’ 통하고 있기에 들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청계천이 복개 된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서 저자의 답사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나 접했을 청계천의 모습을 많은 다리의 설명과 더불어, 계천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다양한 면모를 작은 보폭으로 걸어가면서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저자의 노력은 고맙기까지 하다. 또한 3장의 도성답사 중에서 중국의 관우사당을 소개로 한 동묘의 동관이나, 임진왜란 후 명나라 군사를 위해 세웠다는 민충단 이야기는 적어도 내게 있어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책은 뒷부분으로 읽어갈 수록 재미가 있는 글 읽기였다. 저자는 당대 권력층의 대표적인 건물이던 궁에서 벗어나 이를테면 소외되어 있는 부분들, 성 외곽의 일반 민초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생활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 부분에 싣고 있다. 

 결국 조선의 왕이 거처했던 궁이나, 궁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로와 육로나, 성 외곽의 모습들을 담고 있는 역사적 지리적인 이야기 등은 모두 인간이라는 큰 맥락을 벗어나서 거론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기실 지도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바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결론을 혼자 조심스레 내려본다.

 

 끝으로 저자인 이현군은 ‘문화지리학’과 ‘역사지리학’이라는 말을 언급한다. 물론 이 두 관점은 이 책에 기본 바탕이 되는 개념일 것이다.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두 가지 학문이긴 하지만 단순히 지리학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지리와 역사라는 거대한 주제를 조합해 하나로 완성해서 풀어나가는 저자의 건실한 노력이 돋보였던 책이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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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김성연 지음, 홍상현 사진 / 터치아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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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네비게이션의 목소리를 듣는다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다섯 번째 서평)-




 나는 그다지 길눈이 밝지 못하다. 그래서 길에서 해매거나 잘못 들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지각을 한다거나 늦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길눈이 밝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방향감각이 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말이 그 말처럼 들리는 것이 어째 똑같은 말로 들리긴 한다. 하지만 무작정 어딘가를 목표로 해서 의도적인 방황을 하기도 했다. 모 대 학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던 친척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던 적이 있는데 내가 확인했던 것은 오로지 지하철 노선표였다. 지하철 계단의 높고 험준한 고개를 올라서서 오로지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되어, 물에 젖은 옷자락처럼 허우적거리는 것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무겁게 불어오는 낯선 바람,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이상하게 묘한 느낌의 냄새와 무섭기까지 했던 사람들의 시선 따위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  걸어다녔던 때가 내게도 있었나보다.

 

 그날 나는 만나러 갔던 이를 만나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여정이었기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날 이후 한참이 지난 후에 내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 어느 길로 온 거니?  어느 길로 오다니.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초행길이었던 내가 갔던 길 말고도 다른 길이 또 있단 말처럼 들려왔다. 시장을 질러서 오면 좀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는 내가 그저 무심하게 지하철에서 내려 도로변을 따라 와서 골목으로 접어들고 언덕길을 걸어서 왔다는 말에 지루했겠다, 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건 그 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누구누구에게나 맞는 말이지 초행길이었던 내게는 지루함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날 내가 그렇게 헤매고 걸어 다녔던 길은 성북동 길이었다. 물론 이 책에도 그 성북동 길이 소개되어 있다.

기억이 새롭다.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이번 책은 서울 문화예술탐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지도책 같기도 하고, 문학의 짤막한 맛보기 안내책자 같기도 하고, 사진첩 같기도 한 이미지다. 서울 곳곳의 사진들이 넉넉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담겨 있으며, 여행안내 책자의 그것처럼 길 안내를 위한 아기자기하게 도식화된 지도가 더불어 소개된다. 두 명의 저자가 직접 걸어가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저술했기에 독자가 책을 읽는 동시에 그 길을 걸어가는 느낌을 받게 한다. ‘산책코스’에서는 거리와 걸리는 시간(도보기준) 그 외 교통정보와 별도로 중요한 정보가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박물관이나 문학관의 관람시간 내지는 문의를 안내해주기도 하는 수고로움도 곁들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친절해서 특별한 네비게이션, 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 애정이 가는 것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와 연계된 문학의 한줄기 옷자락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이란다. 문학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은 없어 보인다. 소설이나 시나 에세이나 다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친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에서 재미를 찾자고 눈을 부비고 안경을 고쳐 쓰며 고민을 한다면 함께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이 길과 연관되어 있는 문학적 작품은 뭐가 있을까?. 아니 혹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모두 열두 곳의 지역과 함께 관련된 문학 작품 그리고 그 배경 이야기가 소개되는 책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명동, 남산, 남대문, 정동길, 광화문, 북촌길, 인사동, 홍지동, 대학로, 성북동, 사직동, 신촌이 등 많은 친숙한 이름들이 우리 곁을 찾아와 이야기를 건넨다.

 건조하고 무거운 문체가 아니어서 더 정감이 간다. 소개되는 문학작품 중에는 1900년대 초기에 쓰여진 작가의 작품도 있고, 가장 최근 출간된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고 다양해서 거대 문학의 일대기를 접할 수도 있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욕심이란 놈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이 책을 들고 소개되는 한 곳 한 곳 장소를 정해서 직접 가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쯤에 와서 왼쪽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걸어가면 작은 파란색 간판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 어쩌면 내가 책에서 찾아내지 못한 또 다른 그 무언가를 찾게 되지는 않을까, 라는 설렘이 생겨난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모습이 늙어가고, 그 마음은 두리뭉실, 세상과의 타협이란 것에 악수를 건넨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변해가는 것 중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도 있다.

‘공간은 변한다. 기억도 변한다. 사람도 변한다. 그때 그곳을 더듬은 활자만이 기록으로 남았다. 우리는 변하는 물질세계 속에서 무엇을 붙들고자 하는가.’




 책에 인용된 소설가 성석제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변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하는 성장통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삶이 숨 쉬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많은 시간의 흐름을 떠안고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려 하는지, 마음을 열고 앉아 기다려 볼 여유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정겨운 이름으로 남아있는 어느 하나의 길과 그 길에 서 있던 자신과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이 있던 또 다른 누군가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참으로 좋아하던 시인, 기형도의 시를 다시 볼 수 있었기에 반갑기도 하거니와 서울 곳곳을 정감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불어 문학적 감수성을 선사해주는 고맙고 착한 책이다. 이 가을에 한번쯤 사심 없이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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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준이 아이의 수준을 만든다 - 장애영 사모의 주교양 양육법
장애영 지음 / 두란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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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시험에 빠지다.  

(엄마의 기준이 아이의 수준을 만든다. -장애영 사모 저 )


 새벽이라 춥다. 9월 말이니 추울 만도 한데 워낙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양말은 꼭 챙겨 신고, 여태 버티다가 이제야 긴팔 난방을 걸쳤다. 그냥 걸치기만 했던 것을 오늘은 아예 팔까지 다 집어넣고 완전히 입고야 말았다. 추위를 잘 견뎌내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물론 따뜻한 차 한잔의 유혹은 너무나 감미롭다. 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매일 새벽 책상위에는 늘 반쯤 남긴 우유 컵이 놓여있다. 그나마 식어버리면 입에도 되기 싫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요사이 아들이 자꾸 전에 없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데 엄마인 나는 적잖이 당혹스럽기까지 한다. 요 녀석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 나쁜 말이라고 아예 단정지어버리고 나서 되풀이 되는 상황이 올 때마다 나는 매체를 들겠다고 아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뒤미처 알게 되었는데, 아동학자나, 유아교육자들이 풀어놓는 방법이란 아이를 다그치지 말고 말로 풀어서 설명하라는 데 주요지로 보인다.  

 아.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매 순간 양육자(엄마)가 참아내야 할 인내의 분량과 다분히 의도적인 외면에서 받게 되는 무자비한 심적 고통을 어찌 견뎌내리오. 자녀 양육은 무조건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번 책 읽기는 솔직히 말해서 사뭇 어려웠다. 글의 내용이 어려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종교적인 문화의 이질감 따위로 설명하기도 애매하다. 그다지 열심히는 아니지만, 나도 한때 저자와 같은 종교 생활에 심취했던 적이 있기에 전혀 낯선 문화와의 부딪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힘들었다. 중간에 책을 덮고 싶은 때가 몇 번 있었던가. 책을 읽는 일주일 사이에 두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고, 그날은 전혀 책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아직까지 약을 달고 사는 두 녀석들과 하루 종일 씨름하면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욕심에 읽기 시작했던 책읽기는 현실에서 묘하게 이질감만 커졌다고 해야 맞을 듯싶다.

 좋은 내용이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자녀 양육서. 이 책에 정의를 내리자면 이쯤이면 좋을 듯하다. 나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번에 기독교 관련 자녀 양육의 책을 읽었으니, 다음번에는 불교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은 자녀 양육서를 꼭 읽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장애영 사모다. 사모라는 말이 어색한가. 기독교에서 목사님의 사모님을 ‘사모’라 지칭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는 소규모 책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름 석자 뒤에 ‘사모’라는 호칭을 붙인 것을 보면 이 책의 성향이 대충 어떠하리라, 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책의 내용은 서울의 모 개척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어느 부부. 아니 목사의 사모가 아들의 대한 양육을 기독교적인 배경과 함께 서술하고 있는데 종교적인 색깔은 아주 진하다고 봐야 한다. 각장의 부분 부분마다 저자가 선택한 좋은 성경구절들이 인용되어 있다. 읽으면서 감동받고 은혜 되는 부분마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하지만 뭔가 갑갑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일렁거리는 것은 왜였을까.

 저자의 아들은 기독교 집안에 태어난 엘리트로 그려진다. 중학교를 자퇴하고, 일년 만에 검정고시를 통해 수능까지 원스톱으로 통과하고 사법고시에 패스한다. 사법고시를 거치는 동안에는 많은 인간적인 고뇌가 소개된다. 저자는 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종교적인 것으로 풀어나가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자녀를 기르는 데 힘들어하는 모든 부모에게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관과 더불어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준다.

 그러나 내가 문득문득 힘듦에 지쳐 책을 덮고 싶더라, 는 말을 하게 했던 동기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씁쓸한 뒷맛을 가져다주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지나치게 개인사를 다뤘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일 것이며 어찌 보면 이 책의 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모들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을 접할 때 무슨 무슨 대학의 교수나 전문가의 책도 선호하지만, 평범하게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쌓아올린 ‘노하우’가 담긴 이야기. 즉 실전 경험을 들려주는 보통의 여느 엄마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쉽게 기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서 개인사적 이야기가 너무 많이 소개되어 어찌 보면 종교의 차이도 물론이거니와, 공부를 아주 잘 하지 못하는 그저 평범한 이웃의 개구쟁이를 둔 부모의 생각에서는 다소 이질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삐딱선이라는 말이 있다. 이쯤에서 나는 이렇게 삐딱선을 타고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에게 당신, 참 삐딱하기도 하지! 하며 혼자 읊조리게 된다.

 이미 삐딱선을 보기 좋게 타버렸지만 그래도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게 욕심인가보다. 파트 3의 ‘주교양 양육법 7가지 지침’은 현실에서 응용해볼 만한 실용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저자가 에필로그에 인용한 성경구절이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나는 시험을 받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일이 다 기록하기 뭐하나 생각 한 바, 느낀 바, 깨달은 바가 있기에  내 자신도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본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어쩌면 신이 허락한 영원한 시험의 한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새벽 세시. 모든 것으로부터 시험받기 딱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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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누군가 끊임없이 내게 속삭여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불안해하거나, 걱정스러운 일로 잠을 설치거나, 가슴 졸이며 눈물을 흘릴 어느 시점에 항상 곁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 누군가가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서른 해를 넘기며 이제껏 사는 동안 나는 몇번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이지 내게 그 말을 해줄 누군가를 절실하게 기다렸던 적이 있었으며, 또 내가 내 안에 있는 자아에게 괜찮다, 괜찮다는 말로 위로하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생각하며 끊이없이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위로받기를 원했고, 누군가의 가슴에 안겨 따뜻한 온기를 전달 받기를 원했으며, 그때 내가 처한 현실과 숨 막히게 힘들었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책을 통해 잊고 있었던 순간을 떠올려야 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랐다고 봐야 맞는 말일 것 같다. 그것은 상처일 수도, 딴은 작은 기쁨과 회환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이만큼 지나고 나서 봐라보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인이 된 장영희 교수의 글은 마치 한때 내가 그렇게 바라던 그 누군가의 위로처럼 괜찮다, 괜찮다 하며 흔들리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껴안아주고 토닥여주는 느낌을 받게 해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고인이 된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고, 아이러니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의 책을 통해 위로 받고 있다는 지금의 현실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 그녀를 신문지상에서 처음 접했다. 한참 스크랩에 흥미를 느끼던 어느 때였던가. 신문 한쪽에 칼럼 비슷하게 그녀의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스크랩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 대학의 교수라고 했던 그녀의 글은 으레 직책에서 보아지는 딱딱하고 건조한 어투가 아닌, 마치 절친한 어느 선배가 이야기해주는 듯한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어투를 글로 그려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칼럼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의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 했었다. 이야기 거리도 참 다양했었다. 학생들의 이야기 중 연애 이야기도 있었고, 학생과 교수가 주고받았던 따뜻하고 애정 어린 이야기도 가끔 실리곤 했었다. 그 시절 나는 부러움 때문이었는지, 저렇게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까닭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장영희 그녀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곧 나는 그녀를 잊었다. 보다 많은 문제들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서서 나를 조롱하듯 항상 고민거리를 던져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무렵 나는 전공을 바꾸고 대학을 다시 들어가는 개인적인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전공이라 해봤자 별볼일없는 것이긴 하지만, 뜻한바 있어 가족의 반대를 뒤로하고 다소 이기적인 내가 되어야 했던 시절에 나는 장영희라는 한 사람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니다. 그냥 잊혀졌다고 봐야 사실일 듯싶다. 그동안 샘터 잡지를 통해 꾸준하게 독자와 만나왔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적잖이 부끄러워짐을 느낀다. 그랬구나. 그랬겠지.

사실 그녀가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스크랩을 하던 시기가 아닌 몇 년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십여 년이 훨씬 더 넘게 흘러가버린 지금에 와서 그 긴 시간동안 그녀가 투병생활을 해왔다는 글을 접했을 때는 텁텁해져 오는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하기사,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사는 동안 병도 나고, 좌절도 하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뭔가를 깨닫게 되는 게 삶의 이치 아니겠는가. 나도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다시 위로 받고 싶은 욕심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다시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어질 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이 한 권의 책이 내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괜찮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라고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살아온 기적 살아갈 시절, 장영희 에세이 중 ‘괜찮아’ 일부-




그녀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나는 어쩌면 그녀가 책속에서 이야기했던 수많은 아줌마의 일원으로서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책은 정말 좋은 선물이에요. 가슴에서 어여쁜 꽃이 만발하게 피어날 것만 같아요. 가슴이 이만큼이나 시원해지는 느낌이네요. 잔잔한 물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요. 감상적인 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브라보! 그게 바로 내가 사는 목적이고, 의미입니다! 라고 했을 법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에필로그의 이야기처럼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과 함께 주변의 함께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속삭여주던 사람. 이번 에세이 역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랑, 연민, 고뇌 아니 어쩌면 그저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들.

책을 덮으면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박박 지우고 새로운 그림 하나를 그리며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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