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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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서평

진정한 유토피아와 우리들 이야기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김용규 지음




‘우선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가능하다면 차라도 한잔 마셔가며 오랜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듯한 기분으로 첫 장을 넘겨주길 바란다.’-책머리에서..-




 커피는 마실 줄 모른다. 아니 마셔 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커피도 잘 타지 못한다. 누군가는 커피를 정말 맛나게 끓여내곤 해서 그 집에 가면 나름대로 맛있고 향이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도 했지만, 내 집에 아주 가끔씩 들리는 사람들은 물론 인스턴트커피 그것도 물의 양을 잘 맞추지 못해 어중간한 농도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맛의 국적도, 맛도, 향기도 없는 말 그대로 이상한 커피를 접할 뿐이다.

 카페라테라든지 에스프레소라는 단어조차도 그다지 친근하지 못하다. 커피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쯤은 짐작으로 알 것 같기는 한데, 맛이 어떤지 색이 어떤지 느낌이 어떤지는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커피에 대해 무능하다고 해서 저자가 마련해놓은 카페 앞에서 주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커피가 아니라면 냉수라도 한잔 마시러 들어가고 싶은 사심이 있었던 까닭이다.




 철학카페에서 접하는 문학이란 어떤 느낌일까. 철학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문학을 데코레이션의 특징으로 올려놓은 아담한 케익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긴 했지만 그건 가벼운 기우 같은 거였다.

 책은 공평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몫은 저자가 아닌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얼마나 알고 얼마나 느끼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닐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문제였던것 같기도 하다.




 이번 책은 철학과 문학을 큰 테두리로 삼고 그 안에 기타 사회학과 인문학 등 많은 학문을 곁들여 놓은 인문관련 교양서적 쯤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모든 문학과 예술 작품에는 그 안에 철학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다. 어찌보면 인간의 삶 전체가 바로 철학과 밀접한 연계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인간 삶의 모습을 철학자들이 다양한 학설을 이용해서 먼저 풀어놓았던 까닭에 우리는 살면서 그 이론들을 하나씩 꺼내 필요한 만큼 담아서 인용하고 공부하고 서로 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철학을 좋아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이는 이 책을 철학에 대한 간단한 응용 레시피 정도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즐기고 공부하는 이는 문학과 철학의 절묘한 조화를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문학을 파고들다보면 하나하나 걸리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에, 늘 똑같은 질문을 던져내지 않던가 말이다.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편의 소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소설의 주제(저자의 집필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어떤 철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라도 상당수의 내용이 철학적 요소 쪽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번 책이, 문학과 연계되면서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듯한 분위기다.

 이제 저자가 말해주는 철학이 바탕이 되고 있는 문학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괴테의 파우스트(자기 체념과 자기실현), 헤세의 데미안(성장),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만남), 섹스피어의 오셀로(질투), 카프카의 변신(가정의 의미), 사르트르의 구토(일상),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권태), 최인훈의 광장(유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디스토피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인간공학), 조지오웰의 1984(사회공학),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회상)등등 모두 열 세 가지의 문학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나는 나약한 자아를 끌어안는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한권으로 자기체념과 자기실현이라는 두 가지 테마로 풀어나간다. 전자는 책의 주인공이자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주인공 파우스트의 연인 그레트헨의 죄와 구원받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선택의 기로에 든 연약한 인간 본성과 심리가 어떤 단계를 거쳐 기독교식의 죄사함을 받아가는 가를 보여주면서 실존적 나약함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떤 사건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 는 죄의식이 최고의 자기부정이자 동시에 강한 자기 체념이라는 내용이다.

2부에 자기실현에 나오는 것은 자신의 존재부여를 확고히 다져가는데 더 중점을 둔 주인공 파우스트를 소개한다. 그는 부정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한 가지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신의 선택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것을 찾아 실현하는 일. 이를 바탕으로 실존적 인간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저자가 역설했듯이, 그레트헨의 선택받음이나 파우스트의 선택받음은 그 타당성에서 점수를 후하게 얻지를 못한다.




외로움을 치료하는 명약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이다.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동화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여우, 꽃, 사막, 뱀 그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정의까지.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한 대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는 우주 멀리 어느 한 별에서 찾아왔다는, 장미꽃을 키우던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소년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주는 상대 앞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상대가 없는 곳에서는 자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를 만들어 가는지 한번 천천히 생각해볼 화두다.

저자 김용규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막’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언급하며 단순한 사막이 아닌 인간관계의 소홀이 만들어낸, 외로움이 넘치는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이야기한다.

 외로워지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들어앉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와 크든 작든 안면을 익히고 관계를 만들어야 하며, 이것이 그 유명한 ‘서로를 길들이는 방법’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록 눈의 괴물은 죽지 않는다

초록 눈의 괴물은 질투의 또 다른 은유적 표현이다. 오셀로는 질투라는 주제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진화심리학적 질투와 존재론적 질투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려는 제 3의 경쟁자가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며, 후자는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상대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질투라는 이론이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발동하는 질투의 개념은 다 다를 법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위의 개념적으로 양분하기도 어려운 것이 질투는 두 이론이 거의 동시적으로 작용해서 생겨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개인적인 생각) 분명한 것은 질투 역시 인간 본연의 심리이며, 다분히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닌 외로움이란 감옥에 뒷덜미를 잡혀버린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외에도 카프카의 변신이나, 사르트르의 구토는 많은 철학적 이론을 소개하면서 실존주의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유토피아 개념이 담겨진 ‘광장’이나 ‘당신들의 천국’ ‘멋진 신세계’ 등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읽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끈질기다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이번 책에서 선정한 문학작품과 그 순서의 배열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개인에서 시작해서 자아찾기와 타인과의 관계를 그리는 가운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며 부조리에 대해 당당하게 ‘아니다’(페스트의 ‘리유’처럼) 라고 말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가는 일.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반항’이다. 또한 너, 나 또는 우리가 모두 잘 어울려서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적 의미)의 대조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다.

 

 바로 어제 인터넷 짧은 뉴스에서 볼 수 있었던 낯익은 문구가 내 시선을 꼭 잡았다. ‘1984년 조지오웰’의 소설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모 대학 교수가 쓴 글에는 전자책과 각종 매체 컴퓨터 관련한 새로운 문화체계에서 조용히 뒷걸음치며 물러나는 ‘종이책’에 대한 아쉬움 내지는 안타까움을 남기는 듯한 글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철저하게 감시하며, 재교육 시키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는 서로 감시하고 감시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오래도록 등골을 시리게 한다. 하나의 만들어진 틀에 모든 것을 껴맞추려는 것.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에 맞게 다리를 잡아당겨 늘린다거나,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른다는 이야기는 각자의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가져온 한 예이다. 저자 김용규는 이 대목에서 여러 이야기 즉, 팬옵티콘과 시놉티콘(감시사회, 처벌사회)또는 전체주의 같은 이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정의이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살수 있는 사회’가 바로 올바른 유토피아의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참 많은 길을 에돌아온 기분이다. 열 가지가 넘는 소설 속에 깃든 철학과 문학 요소를 분석해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대별로 요약 해설되고 있는 많은 철학적 내용을 이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슬몃 내려놓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과 달리 메모를 하고 정리를 하며 서평을 준비해야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까닭은 그만큼 의미가 있었던 독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짧은 지식만으로 철학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노라, 착각의 늪에 빠지지 말라고 충언했던 어느 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하나를 알아서 열을 알았다고 믿지는 말자. 하지만 그 하나를 내 것으로 품어 나만의 양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것은 과히 나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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