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성경이야기 - 삶을 축복으로 이끄는 성경 레시피
유재덕 지음 / 강같은평화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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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서평

맛있는 성경이야기- 유재덕 지음




준비된 만찬과 초대

새벽 한시가 막 지나간다. 이 시간에는 꼭 허기가 느껴진다. 저녁을 먹은 이후로 물만 먹고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정답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생활 습관과 환경에서 나오는 일종의 반복적 룰이자 패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늘 야식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를 수발하면서, 어쩌면 철저하게 야식에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인식의 사이클에 수정을 가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지나친 폭식과 과식이 아니라면 먹는 게 무슨 죄란 말인가. 잘 먹고 잘 자는 게 건강비결이란 말도 있던데...




 ‘맛있는 성경 이야기’ (유재덕 지음)는 말 그대로 기독교의 힘이자 핵심인 성경을 통해 들여다본 사람들의 먹을거리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이다. 음식을 기본으로 음식과 함께 살아가는 성경 속 인물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종교적인 부분과 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문화적인 측면까지 총망라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성경을 통한 문화인류학 분야의 안내서 비슷한 이미지로 다가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겉표지를 장식하는 먹음직스러운 빵이 먼저 눈을 매혹시킨다. 단순히 맛있는 빵 사진만 보더라도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이고, 조금 전까지 무반응이었던 텅 빈 위에서 위액이 흘러드는 것을 느낄 법도하다.   

 

 크게 모두 세 가지 내용(3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가 ‘재미있는 식탁 이야기’, 두 번째가 ‘달콤 살벌한 먹을거리 이야기’, 마지막이 ‘즐거운 축제 음식이야기’ 등의 부제목을 달고 있다.

1부에서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미 친숙함으로 밀착된 성경책 속에서 많이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야곱과 아비가일, 엘리사와 집을 떠난 탕자의 이야기도 들여다볼 수 있다. 

책 내용이 이어질수록 성경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이와 연계하여 같이 소개되었던 먹을거리, 이를테면 성경 속 인물들이 즐겨 먹었던 빵과 양이나 염소, 소를 재료로 해서 만든 고기류, 또는 물고기 등의 어류와 잡곡(옥수수, 콩류) 그 외에도 이스라엘 지방에서만 나는 특산물과 같은 다양한 음식재료가 소개된다. 더불어 이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사진으로 볼 수도 있는데, 만드는 방법도 소개하는 친절한 수고로움을 느낄 수가 있었기에 두 눈이 즐거워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개된 것 중 일부는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재료와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 낯설다는 인식이 발동을 거는 바람에 그저 눈으로만 즐기는 맛있는 음식으로 남아야했다.




 특히나 저자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성경시대’에 만들어 먹었다는 치즈와 요구르트, 버터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건조하고 더운 이스라엘의 기후와 유제품의 궁합은 언뜻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우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성경시대(나는 이 표현이 좀 낯설다. 오래전 예수와 관련한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에서 성경시대가 아닌 ‘예수시대’ 라는 표현을 써서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에 살았던 이스라엘 주민들은 가죽주머니에 우유를 넣고 계속 젓는 과정을 통해 버터를 만들고 치즈와 요구르트까지 별 어려움 없이 만들어냈다. 오래전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도 치즈와 버터를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놀라움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색색이 현란해 빛깔의 렌즈콩에 대한 이야기, 로마시대 토지 운영에 있어 ‘순환재배방식’의 소개와 안식년 제도를 땅에 적용한 ‘휴경제도’의 소개를 살펴보면 저자가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 머물러 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대의 경작방법과, 과일종류에 따른 유입시기에 대한 정보 제공 따위는 마치 세계사 교과서 한 페이지나 세계 백과사전 한 페이지를 보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저자 유재덕은 여기에서 주춤하지 않는다. ‘탕자를 위한 식사’ 이야기를 살펴보면 또 다른 보물을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헨리 나우웬이라는 작가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한다.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 이라는 미술작품으로 영감을 받은 나우웬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유재덕은 종교에 관한 음식 이야기에서, 세계사 이야기, 더 나아가 미술 이야기까지 그 범위를 한정짓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부의 ‘달콤 살벌한 먹을거리’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채식을 위주로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식을 하게 된 동기, 유대인들의 식사와 관계된 법규인 ‘카슈릇’ 이야기, 코셔(먹을 수 있는 음식) 트라이프(먹을 수 없는 음식)등에 대한 소개 역시 흥미롭다. 특히 2부에서 소개하는 쇼헷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애잔한 감동을 주는 대목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생명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이게 바로 쇼헷이 수행하는 세히타의 핵심이다.”




우리로 치자면 도축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쇼헷이라 했다. 짐승을 잡는 일을 터부시해왔던 우리의 과거와는 달리 유대인의 세계에서 도축은 경건함과 엄숙함, 고귀한 일의 행함으로 그 가치가 월등해 보인다. 나이 많은 쇼헷을 대신할 젊은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보더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의 존귀함은, 어쩌면 인간에게로 향하는 하느님 내면과 마음의 소리와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굳이 딴지를 하나 걸자면 3부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유대교의 전통과 음식, 그들의 문화에 대한 소개일 것이다. 이는 긍정적인 요소와, 다소 부정적인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기독교의 ‘부활절’과, 유대교의 ‘하누카’ 의식의 통합론을 저자 유재덕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3부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교인들의 실생활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보수이론에 근거해서 본다면 기독교와 유대교는 엄연히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기에, 이 책이 유대교와 유대인을 소재로 해서 쓴 책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를 부각했다는 시각도 없진 않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있기 이전에 유대교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성경의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둔다면 그리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포괄적인 면에서,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다양한 문화를 찾아 둘러보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를 이미 앞에서 알고 시작한 글 읽기가 아니었던가.

    

음식과 함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한 ‘맛있는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보다 쉽게 보다 긍정적으로 ‘성경과 기독교’라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전파는 이미 대중화 되었기에 이제는 성경에 반영된 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해야 할 시기라는 ‘소망교회 곽선희 원로목사’님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기독교의 보편화를 뛰어넘어, 개개인에게 향해 열려진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독교의 대중화는 이미 시작된 듯 보인다. 이제 준비된 만찬과 초대에 응할 일이 하나 남겨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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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기행 - 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
심경호 지음 / 이가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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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번 째 서평

내면기행(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 심경호 지음

삶의 진실성을 엿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크리스마스 케롤’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욕심쟁이에다 고집불통으로 앞뒤 코가 꽉 막힌 스크루지 영감의 이미지는  어른이 되고 난후 이따금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서로 교차되는 원인으로 발동하곤 한다. 이를테면 스크루지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 나의 이미지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이미지와 조금씩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불쌍한 이웃을 위해 기부해달라는 이에게 스크루지는 냉소와 멸시를 건넨다. 혼자만의 아집에 몸을 숨긴 채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의도된 고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 스크루지. 이 인물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저 늙은이 정말 못됐지 뭐야! 성스런 성탄절 전야에 저렇게 욕심만 부리고. 라는 식의 불만이 가득한 평가와 함께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외로운 존재이기에 불쌍할 뿐이다, 라는 연민이 깔린 평가로 구분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주인공 스크루지는 하룻밤 사이에 세 유령에게 심하게 시달림을 받고 개과천선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 안에 잠재되어있던 본성을 되찾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는 유령들과의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엿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쇠고랑을 온몸에 칭칭 감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며 스크루지를 찾아와, 앞으로 전개될 유령과의 여정을 암시했던 스크루지의 옛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살아서 행한 일로 인해 죽어서까지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표현한다. 살아서 지독하게도 고약한 배타적 성격의 안일함 따위가 죽어서는 쇠고랑으로 늘 따라다니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의식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문득 의아한 호기심 같은 게 생겨난다. 인간군상이란 말이 있다. 인구가 어떻고, 올해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 수가 어떻다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인간 군상이란 말만 듣고만 있으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왔던 전쟁 장면이 겹쳐진다.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많고 많은 이들의 군집.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각자 개인이 갖고 있는 사고의 범위는 또 얼마나 거대한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을지. 거대한 구름처럼 운집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드넓은 우주 한 귀퉁이에 내가 살고 있음을 상기하며 존재감의 위축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태어날 것을 명받고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벽인 동시에 가장 작고 확실한 종지부. 바로 죽음이다. 죽음 그리고 죽음 뒤에 존재하는 영혼. 하지만 어렵게 읽어가야 했던 이번 책은 죽음에 대한 잡다한 논지를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겸허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내면기행’ 은 6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툼한 분량의 서적이다. 저자 ‘심경호’ 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을까. 방대한 분량의 책은 단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겉도는 생각만 내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옛사람들의 모습이 심야의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영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이 살아서 무슨 일을 했는지, 그들의 행적을 시대 순에 맞게 따라가며 살펴보는 일을 시작으로 내면의 기행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행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다른 타인이 아닌 내가 주인공이 되고, 작가가 되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시작됐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저자가 애정을 갖고 선별했던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를 앞서 살았던 이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과, 그들이 남기고 간 행적을 통해 죽음에의 예의와 더불어 ‘삶의 무상함과 진실성’, 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공통적인 것은 삶의 무상함 일진데, 그 무상함을 알기까지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며 시간과 공을 들여서야 깨닫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일 것이다.

 

  크게 5부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에서 11편, 내지는 13편 정도의 인물과 그들의 묘비명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어림잡아도 꽤 많은 이들이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황’, ‘박세당’, ‘정약용’과 같은 우리가 역사상 잘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행적도 기록되어 있다. 5부로 나누어 각각의 부제를 달았지만 특별하게 부제의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굳이 나눌 필요는 없지만 이는 방대한 양에 대한 저자의 독자를 위한 배려인 듯하다.

 

 '출세를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한다', 는 말이 있지만 책을 보는 내내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살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한다” 고 말이다. 역사책에 실렸던 내용을 어렵사리 끄집어내 고민하지 않더라도, 조선조의 역사는 굽이치는 급물살과 같이 위태롭게만 보인다. 이를테면 역사는 결코 평탄하지 않는 긴 고난의 길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특히나 당파의 갈림이 컸기에,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흑백논리가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고, 이도 저도 아니요, 라고 중립을 주장했던 이들은 또 중립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양쪽에서 지탄을 받아야만했다. 남인, 서인, 북인 등등 한쪽이 득세를 하면 한쪽은 전멸한다. 어느 쪽에 몸을 맡기냐에 따라 한 인간의 기복 많은 삶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들어보자. 어떤 이는 귀향을 가서 자신이 죽은 다음에 묘비에 쓸 묘비명을 쓰면서 한탄한다. 내가 더 이상 나아질 것도 없고, 귀향지에서 그만 병들어 목숨을 다할 것 같다는 암울한 묘비명을 남긴 그였지만, 당파 내지는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귀향지에서 풀려 십여 년이 넘게 고위고관의 자리에서 임금을 섬기다가 자손들이 묘비명을 수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소개되고 있다.


 책의 존귀함을(이 책은 사료적인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아 보인다.)인지하고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지켜왔던 절개와 의지, 크던 작던 간에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던,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들 나름대로 구축하려 애썼던 ‘학문’일 것이다. 이 학문의 범주에는 부모에 대한 효와 임금에 대한 예의, 더불어 가족의 화해를 근본으로 한다. 어쩌면 유교사상이 강한 조선조의 시대적 영향이 매우 지대했던 까닭에서 오는 결과임에 당연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내면으로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명의 개인은 자신의 가장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앞두고 과거와 현재, 죽음 뒤의 미래까지 겸손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는 긍정적 자기체념과 겸손을, 각자 성취하고자 했던 학문이라는 틀 안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미 다른 저자들이 저술해 세상에 내놓은 죽음에 관한 책들을 거론하면서 중복됨이 없게 노력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은 기존에 나온 죽음에 대한 사색적 성향의 형이상학적 냄새를 풍기는 책이라기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측면에 접근해서 출발하고 그 끝을 맺고 있기에 독자는 더 애잔함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 불로초를 찾으러 애썼던 진시황도, 로마제국을 이룩했던 군주도 역사 속으로 흘러가지 않았던가. 인간이라면 결국 죽음 앞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앞에 죽음이 당도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가끔 고민한다.

 생하고 멸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 밖에 일이다. 사멸을 앞두고 인간의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잘 것 없었노라고’, 겸허하게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삶의 무상함과 동시에 사소하지만 진지한 ‘삶의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스크루지가 실제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는 어쩌면 자기 나름대로 동양의 묘비명 비슷한 짧은 일대기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세 명의 유령을 따라다니면서 ‘나는 삶의 진리를 얻었노라고’. 말이다.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는 ‘사이후이 死而後已’ 야말로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참모습이다”라고 했던 저자 심경호의 글이 오래도록 기억에 자리한다.

죽기 전까지는 끝낼 수 없는 것, 끝을 내서도 안 되는 일이란 무엇일까. 자신을 끊이없이 갈고 닦는 일일 것이다. 쉬지 말고 항상 생각하고, 반성하며, 올곧은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마지막 순간까지 놓아버릴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인간의 큰 과제가 아닐까 싶다. 

 소개되고 있는 각각의 인물들과 묘비에 관련한 내용들, 시대적 배경, 그들 각자의 삶의 모습과 함께 당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학풍을 소개하고, 이를 공부하는 이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접할 수 있었기에 이점 또한 이번 책의 감춰진 매력이라 생각 한다.

방대한 사료의 수집과 정리, 한글 번역에 힘써 노력한 저자의 애씀이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듯하다.

이참에 내 자신을 위한 묘비명 하나 쓰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겨나는 것은 아무래도 책의 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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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웃는 집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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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서평

날마다 웃는 집- 법륜 지음




내 마음. 그 안에서 해답을 얻다.




 요새는 웃을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새벽에 하는 유선 방송으로 지나간 예능오락 방송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지 않으면 그다지 웃을 일이 많지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훈계조로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보거나, 작은 아이가 귀여운 짓을 할 때면 그 모습에 사랑스러워 웃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따지고 보면 육아는 즐거움 보다는 힘듦과 고충의 연속인 듯 보인다.




 무엇보다도 책 제목이 좋았다. 날마다 웃는 집이란다. 이 책을 선정 했을 때 나는 책을 읽으면 매일같이 웃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깐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했었다. 생각해보면 매일같이 웃는 것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언젠가 친한 친구가 집에 왔다가면서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고 갔는데, 제목이 웃음 10계명이었다. 한국웃음연구소에서 나온 작은 전단지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웃어라’ 를 강조한다. 이를테면 크게 웃어라. 억지로라도 웃어라. 함께 웃어라. 마음까지 웃어라 힘들 때 더 웃어라, 고 조언한다. 친구는 내게 말했다. 그냥 의식적으로라도 웃어보라고. 그러나 맹목적인 웃기연습은 사람을 실없이 만든다는 조소 비슷한 감정에 빠져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님의 이야기는 웃음 연구소에서 제시하는 그 웃음하고는 뭐랄까 느낌이 다르다. 웃음을 소재로 한 것은 같지만 웃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과 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법륜 스님의 행적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바로 ‘즉문즉설’ 이었던 것 같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의 양장으로 된 책 안에 담겨진 스님의 ‘즉문즉설’ 형식에 의한 달변은, 마치 거대한 방패와 창처럼 읽는 이의 상처를 보호하고 쓰다듬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님은 직설적이며, 거침없는 화법으로 사실을 분명하게 직시할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역시 스님의 달변이 최고 중에 최고구나. 막힌 체증을 훅 뚫어 주는듯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속이 후련해진다는 말을 하고만 싶어진다.




 아무 조건도 없이 그저 웃으려고 노력하세요. 했던 웃음 10계명 보다는 스님의 딱딱 짚어주는 위안과 조언이 더 내게 다가왔던 것일까. 책은 쉽게 풀이되어 있는 인생의 사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는 이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는 스님만의 배려가 깔려진 내용은, 불교에 몸담고 있는 이가 세상 사람들에 들려주는 이야기건만 불교 경전에 지나치게 치우침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가운데 시작되는 크고 작은 일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갖가지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길을 터주고 있었다.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딴은 비교적 밝고 호탕한 스님의 성격을 엿보는 듯한 분위기의 글을 통해, 책을 읽는 동안 조급함 없이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은 날마다 웃는 집을 위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부의 믿음, 가족의 마음가짐, 엄마의 마음결이라는 주제로 구성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와 내 부모이야기)를 시작으로 부분간의 문제 마지막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와 내 아이의 이야기) 특히나 어머니와 자녀와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인생의 지혜 중에는 나를 유쾌하게 만들었던 문구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구절이었다.

 서로가 맞지 않는 부부가, 같이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때는 ‘헤어지세요’. 라며 인사를 하면서 돌아서라는 말이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인사는 무슨 인사인가 싶은 생각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것이 어쩌면 미련도 후회도 남은 인정도 없이 깨끗하게 마음을 정하고 돌아서라는 스님의 충언 같아서 웃음 속에서도 마음 한 자리가 뜨끔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책 한권을 읽고 나서 나는 스님이 기특하게 생각할만한 수 하나를 찾아낸 듯하다. 그것은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일들의 원인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식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고민 하지 말고, 자식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민하는 내 자신이 더 문제인 것을 깨닫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 남편의 외도로 고민하는 이에게 남편의 행실은 밉지만 그것을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내 마음부터 다스려야 할 것을 권하는 이야기 또한 기억에 남는다.




 한권의 책이 그렇지만 특히 마지막 장에 ‘다시 웃는 우리 집’ 에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이런 문제들을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 라는 개인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스님의 명쾌한 이야기가 실렸다.




“괴롭고 괴롭지 않고는 다 자기 마음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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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인생을, 주어진 시간을,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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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며 사세요.”




‘내려놓다’, 라는 말을 가끔 생각한다. 나는 그 말을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또는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악을 써도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자신에게 그만 인정하라, 말할 때 ‘내려놓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나서 돌아서는 나는 늘 마음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어쩐지 스님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으니 돌아서는 마음이 무겁다는 느낌 그것마저도 내려놓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날마다 웃는 집’은 깨달음과 연륜으로 깊어진 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또는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렵지 않은 인생 지침서로 한권의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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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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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서평

무소의 뿔처럼 우리 같이 가자!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산문집)




 책을 사다 놓고 꽤나 오랫동안 뜸을 들이며 읽어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선입관으로 무장을 해버린 내 인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섣부른 판단이 책 읽기에 방해를 했던 까닭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에 대한 선입관은 무엇이었을까. 또.. 어설픈 생각으로 일찌감치 불러일으킨 우매하기 짝이 없는 그놈의 섣부른 판단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고, 허접하기 그지없는 생각들에서 비롯한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처음 책 읽는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나는 불평을 했었다. 작가는 너무 독자를 의식하고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고. 그 인의적인 글쓰기의 냄새가 나를 자꾸만 책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투덜대곤 했다. 그러나 글 읽기에도 고비가 있다는 말을 새삼 상기하는 순간이 지나자마자 곧 모든 질문들은 매듭도 묶이지 않고 슬슬 비껴가지 시작했다.




 허점투성이고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못한 채 늘 무언가 갈망하기에 정신이 없으면서, 한두 가지 씩 실수를 하고 되돌아 후회와 미련으로 긴 밤을 지새우는 많은 소중한 시간들. 그 순간순간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능한 모태에 자궁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처럼 잔뜩 구겨진 채 엎드려 있는 나 또는 당신 아니면 우리들의 모습과 그 내면을 작가 공지영은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괜찮을꺼야. 그게 뭐 어때서. 현재가 중요하니까. 엄마는 믿어.




 책은 딸 위녕에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전해지는 사소하나 깊이 있는 편지글을 소개하고 있다. 위녕은 실제로 작가의 사랑하는 딸인 동시에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독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오로지 작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엄마가 딸에게 하듯 책망의 잔소리를 접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사랑과 애정이 배어나는 진실하고 진솔한 삶의 충언을 온 마음으로 전해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 공지영의 삶에 대해 일절 운운하지 않더라도, 책을 접했던 이들이라면 자연스레 그녀 공지영이 그려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순간들, 결코 가볍지 않은 회환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실제로 미끄럽고 시린 얼음판 위를 건너왔기에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이렇게 말이다.

저 쪽은 가지 마세요. 얼음이 다른 곳보다 더 살짝 얼어서 여기 당신이 서 있는 곳보다 훨씬 더 위험해요. 얼음 위를 지날 때는 제자리에 서서 뒤돌아보지 마세요. 그런 일은 다 건너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라는 식으로.




 삶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없지만 삶을 먼저 지나가는 이들에 대한 충고는 우리를 이따금 혼돈의 길에서 등불이 비추는 안전한 길로 이끌어주는 몫을 해주기도 한다. 처음 받았던 어색했던 분위기에서 봄 눈 녹듯이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등불의 따스한 온기처럼 작가 공지영이 풀어놓는 이야기에서 따뜻함이 스며든 배려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가볍지 않은 이름인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땅위에 모든 여성들과 그들에게서 피와 살을 나누어 받아, 서로 닮은 모습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여성들에게 전하는 진솔한 메시지다.

      

 사랑, 우정,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가끔씩 이는 바람에조차 흔들리는 마음으로 맞게 되는 설레임이라는 감정에 대해.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들이 녹아드는 삶의 모습에 대해 작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다독이는 일을 잊지 않은 채 천천히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다.




 “만일 불쾌한 기분이 되살아나고 얻는 것이라곤 없는 낡은 생각들을 되풀이 하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노력하라. 부드럽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그만! 내 손을 잡아. 여기서 나가자. 더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고통에, 고뇌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내주지는 말자. .............. 오늘은 오늘만을 데리고 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이러니해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이 없는 이는 떨어지는 순간에 인간이 느껴야만 하는 수많은 생각을 점 하나, 쉼표 하나라도 비슷하게 그려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왜 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나를 내동댕이쳐야지만 내게 깨달음이 오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언가 알게 되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건 너무 과혹한 형벌이지 않을까.

 살면서 언제나 한결 같이 태연한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때로는 대범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살고 싶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무척 스트레스가 쌓이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몇 가지 생각으로 책읽기를 중단한 채 음악에 몰두하고 있는 내게 작가 공지영이 말하고 있었다.




  “직면하는 것, 회피하지 않는 것,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충분히 거기에 상응한 고통을 겪어 내는 것, 그래야 젊은 시절의 고난이 진정 값어치가 있게 되는거지.”




 이른 새벽 책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젊음이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한 길이고, 어둠속에서도 눈부신 햇살처럼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으로 그 의미를 온전히 다 하는 순간이기에 아름답지만 그 만큼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하지만 젊음의 시기를 반발자국 더 멀리 건너온 내게도 여전히 삶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이다.




 모든 것에서 얽매이지 말고 가능하면 마음을 비우고 가라는 뜻으로 들어왔던 구절을 기억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작가 공지영의 쓴 소설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평을 마무리 하는 지금에서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그것이 정 힘들고 어렵다면 같이 가자!

내가 언제나 네 곁에서 너를 응원할 것이고, 너와 함께 있을 테니까.




ps. 아직 어린 사랑하는 내 딸 효린아. 네가 자라서 생각이 깊어지면 꼭 보여주고 싶은 책을 찾은 듯해서 엄마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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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Young Author Series 1
남 레 지음, 조동섭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여덟 번 째 서평

보트-남레 지음
보트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입맛 당기는 단편소설을 접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소설읽기를 등한시 했던 것을 인정한다면 그다지 할 말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소설의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찾는 일에 몰두 할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A4 용지 반을 접어 소설의 줄거리와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가면서 이내 내 머리는 찌근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두통이 심장박동과 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머리를 짓누르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이불 호청이라도 뜯어서 둘러메야 하는 건 아닐까. 두통에는 최고 명약이라던 흰 머리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뜻밖에 소득이라면 소득인데 베트남 출신 작가의 작품이기에 낯선 것에서 풍기는 신선함이 그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작가는 한권의 소설집에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고 생각하기에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보였고, 게임을 하듯 독자에게 툭툭 한두개 씩의 단상을 던지고 간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작정 던지고 가버리는 작가. 남겨진 것은 작가가 던지고 간 그 어떤 것, 그리고 책을 읽고 있었던 나 자신이었다.




 보트. 한가로이 따뜻한 해변을 노니는 편안한 이미지 따위는 잊어버리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생존에 허덕이는 인간 본연의 모습. 상처 받은 개인의 내면에 꼭꼭 닫아두고 결코 드러내지 않는, 숨은 그림자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제 남레의 이야기를 조금씩 뜯어서 펼쳐보면 어떨까.

 

 소설집은 일곱 개의 이야기가 묶여져 있는 형식을 취했다. 각각의 소설은 그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성격, 주요 사건 등이 다양하고 동떨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자세히 생각해보면 각각의 작품들은 얼레를 같이 쓰는 실타래처럼 서로 연관성을 갖는다.

공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전쟁 또는 전쟁과 같은 불안함과 긴박감 내지는 고통을 수반하며, 나약한 인간이 참고 극복해내야 하는(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인내해 내기를 바라는 신의 뜻처럼 보인다)수많은 질곡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존심과 이해와 희생’ 첫 번째 소설은 제목도 길다. 그러나 참 재미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제목에는 소설의 이미지가 다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 어떤 대상을 향해 사랑하고 동정하면서도 자존심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어 힘들어하는 주인공이 결국은 이해라는 중간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주인공은 마치 이 책의 저자인 듯 소설을 쓰는 작가로 나온다. 그에게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있다. 전쟁은 순수하고 때로는 나약한 인간이 온전한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쓰기 위해 실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처럼 마주 앉았다. 가슴속에 겹겹이 쟁여두었던 전쟁 이야기를 아들에게 꺼내놓는 아버지. 어쩌면 말하지 말았어야 할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 몇 십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아파해왔던 상처를 덧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이 밤새 써놓은 소설초고를 들고 나가, 걸인이 불을 쬐던 불쏘시개의 뜨거운 재속으로 떨쳐버린다. 아버지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의 포로로 잡혀있었다. 영원히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있어야 할 것들이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는지. 타인에게는 이미 끝나버린 전쟁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던가 보다. 소설은 아들이 아버지의 상처를 알고 공감하면서 그들이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것들이 해결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얼마나 쉽게 다시 상처받을 지에 대해 걱정한다. 
 

“ 내 이름으로 스스로를 망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
… … … 강 표면이 얼려면, 완벽하게 크리스털 같은 세계 안에 갇히려면, 몇 시간, 아니 며칠이 걸릴까. 그리고 그 세상이 작은 돌이 내는 단음절로도 얼마나 깨어지기 쉬울까...”

 이 작품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이 소설집에 소개되는 다른 작품과도 같으며, 전체적인 주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작고, 늙고, 나약하고, 상처투성이의 아버지. 그러나 그런 현실에서의 부정적인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주인공)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카르타헤나, 의 이야기는 마치 미국의 오래전 이야기를 담은 Once Upon a time In America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간적 배경은 스페인이며, 주인공은 십대 청소년이지만 순간적인 살인을 통해 살인청부업자가(솔다도, 암살자) 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형제를 맺은 친구 헤르난도를 따르게 되지만, 결국 위에서 명령한 헤르난도의 살인청부를 거절하면서 주인공 론 역시 조직에서 배척당하게 되는 이야기다. 남레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문장에 있어 서사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짧은 단문이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디어 중심의 독서 읽기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소설의 긴박감 내지는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있어 보다 자극적이며 읽는 속도감이 붙는 문장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는데 특히나 카르타헤나라는 작품에서는 유난히 분위기나 상황에서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수류탄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안전핀을 뽑기까지 아직은 어린 론의 심리는 보통의 나약한 인간의 내면과 비슷하다.

  카르타헤나의 주인공 론에게 아버지는 부재중이다. 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헤르난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론은 헤르난도를 통해 처음 곤경에 빠지게 되지만 곧 그와 동일시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헤르난도)를 통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 받는 론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친딸을 만나고 싶은 절망구가 든 어느 비정한 아버지를 만나볼 차례다.

‘일리스 만나기’ 주인공 나는 17년 전 아내와 병든 어린 딸과 헤어져 살아왔지만 암에 걸리게 되고 음악가로 대성한 딸을 만나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열성을 보이며 딸을 기다린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점을 달리해서 내가 아버지로 나와 이야기를 풀어간다. 아버지란 자리가 어떤 것인지. 왜 나(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생활해왔는지. 딸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자식의 입장이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세계는 또 달라보였다.

“ 가족은 가족이다!”

‘일리스 만나기’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던지고 간 작은 꾸러미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바로 가족의 의미라고 믿고 싶어졌다.

아버지 그리고 가족. 작가 남레의 소설집이 말하는 것은 아버지와 가족이 아닐까.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은 베트남의 아픈 전쟁사이며, 그 속에서  평생 가슴앓이 한 채 살아가는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 정도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버지와 가족의 의미는 다음에 나오는 해프리드와 히로시마 보트까지 계속 이어진다. 해프리드를 들여다보자. 병든 엄마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주인공 나는 우연치 않게 학교 대표 풋볼 선수로 경기에 나갔다가 골을 넣은 후 영웅이 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이 주인공 제이미에게 세상의 부조리를 표방하는 듯한 인물 앨리슨이 접근하고 그와 동시에 주인공은 폭력과 비리 등 두려움의 그물에 걸려들게 되는 자신을 인지하게 된다.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이든, 개인적으로든 주인공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작품 해프리드의 주인공은 앞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존재와 가족에 대한 의미를 더하는 글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춘기 소년이 접하게 되는 세상과의 갈등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부조리에서 이를 극복하고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데미안에서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라는 말과 통하는 듯도 한다.

  우리와도 친근한 지역인 히로시마! 역시나 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히로시마의 특징은 지금까지 가해자의 이미지를 벗고 그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글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해서 두 다리를 잃고 지방의 작은 절에 스님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현실적으로 나약하고 작은 존재. 패배하고 있는 일본의 이미지와 쇠약해져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닮은꼴이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과 그 가족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희망으로 자리한다. 아무리 병들고 늙어 그 존재감이 흐릿할지라도 아버지는 가족의 구심점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주인공은 수없이 날아드는 폭격과 위험이 들끓는 위험한 집으로 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있는 곳인 동시에 가족이 있는 곳이며 주인공이 있어야 할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소설 보트의 주인공 마이는 홀로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에 타게 된다.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보트 속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 따라다닌다. 몇몇의 사람들은 병들어 죽고, 극한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존으로의 투쟁을 이어간다. 마이의 아버지는 공산당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는 힘없는 존재. 더 이상 가족과 마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인물이다. 마이는 보트에서 퀴엔과 그녀의 아들 트렁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어린 트렁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있어주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서 살펴본 다른 작품들과 달리 ‘테헤란의 전화’는 분위기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이 글은  이란의 여성인권 운동이라는 소재를 택했다. 사라와 그녀의 친구 파빈의 이야기를 통해 억압과 고통을 받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라는 인물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아버지나 가족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에게 있어 아버지의 이미지는 친구인 파빈일 수도 있으며, 이란에서 안내자를 해주던 마무드일 수도 있고, 한때 사랑이라고 믿었던 한 사람의 존재인 폴일 수도 있다. 주인공 사라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 중에 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소설 보트는 긴 여정을 담아낸다. 삶의 항해에서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작은 배처럼 때로는 아주 위태롭고 불안하며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결국 보트는 정박할 곳을 찾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골지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어둡다고 했던가. 그것은 이 소설이 선택한 이미지일 뿐이다. 소설이 내리고 있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작가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르긴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소설 보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앞으로 드러난 하나의 요소이다. 그 외 인종차별, 종교탄압에서 시작된 인권의 문제, 전쟁 등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우리 각자는 이 병에 이미 지독하게 걸려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적당한 항생제가 없는 까닭에 매번 얼굴을 바꾼 채 갈고리를 치켜드는 바이러스와 같이, 돌아서면 또 다른 모습으로 뒤따라와 어느 한쪽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병에 알맞은 약은 무엇일까. 가장 기분 좋은 플라시보 효과라도 찾고만 싶어진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해결책은 가정이라는, 소박하지만 아늑한 온기가 풍기며 서로를 흔들어 상처내지 않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배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뜻한 미소가 잔잔하게 번지는 공간.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진 거실에 아무렇게나 배를 깔고 엎드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가족의 품 곁에서 쉬고 있는 주인공 내지는 우리들 각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주제를 잡고 읽어나가는 것은 독자의 취향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와 직접 대면해서 토론하지 않는 한.. 상상의 나래를 미리 접어둘 필요는 없어보인다.

 책에 대한 외국의 언론과 작가들의 평이 실리기 전에 먼저 국내의 작가와 비평가들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적어도 한번쯤은 소설의 배경과 인물의 형상화 또는 글의 주제에 대해 논해보고 싶은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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