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 Young Author Series 1
남 레 지음, 조동섭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여덟 번 째 서평

보트-남레 지음
보트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입맛 당기는 단편소설을 접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소설읽기를 등한시 했던 것을 인정한다면 그다지 할 말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소설의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찾는 일에 몰두 할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A4 용지 반을 접어 소설의 줄거리와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가면서 이내 내 머리는 찌근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두통이 심장박동과 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머리를 짓누르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이불 호청이라도 뜯어서 둘러메야 하는 건 아닐까. 두통에는 최고 명약이라던 흰 머리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뜻밖에 소득이라면 소득인데 베트남 출신 작가의 작품이기에 낯선 것에서 풍기는 신선함이 그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작가는 한권의 소설집에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고 생각하기에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보였고, 게임을 하듯 독자에게 툭툭 한두개 씩의 단상을 던지고 간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작정 던지고 가버리는 작가. 남겨진 것은 작가가 던지고 간 그 어떤 것, 그리고 책을 읽고 있었던 나 자신이었다.




 보트. 한가로이 따뜻한 해변을 노니는 편안한 이미지 따위는 잊어버리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생존에 허덕이는 인간 본연의 모습. 상처 받은 개인의 내면에 꼭꼭 닫아두고 결코 드러내지 않는, 숨은 그림자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제 남레의 이야기를 조금씩 뜯어서 펼쳐보면 어떨까.

 

 소설집은 일곱 개의 이야기가 묶여져 있는 형식을 취했다. 각각의 소설은 그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성격, 주요 사건 등이 다양하고 동떨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자세히 생각해보면 각각의 작품들은 얼레를 같이 쓰는 실타래처럼 서로 연관성을 갖는다.

공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전쟁 또는 전쟁과 같은 불안함과 긴박감 내지는 고통을 수반하며, 나약한 인간이 참고 극복해내야 하는(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인내해 내기를 바라는 신의 뜻처럼 보인다)수많은 질곡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존심과 이해와 희생’ 첫 번째 소설은 제목도 길다. 그러나 참 재미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제목에는 소설의 이미지가 다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 어떤 대상을 향해 사랑하고 동정하면서도 자존심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어 힘들어하는 주인공이 결국은 이해라는 중간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주인공은 마치 이 책의 저자인 듯 소설을 쓰는 작가로 나온다. 그에게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있다. 전쟁은 순수하고 때로는 나약한 인간이 온전한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쓰기 위해 실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처럼 마주 앉았다. 가슴속에 겹겹이 쟁여두었던 전쟁 이야기를 아들에게 꺼내놓는 아버지. 어쩌면 말하지 말았어야 할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 몇 십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아파해왔던 상처를 덧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이 밤새 써놓은 소설초고를 들고 나가, 걸인이 불을 쬐던 불쏘시개의 뜨거운 재속으로 떨쳐버린다. 아버지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의 포로로 잡혀있었다. 영원히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있어야 할 것들이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는지. 타인에게는 이미 끝나버린 전쟁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던가 보다. 소설은 아들이 아버지의 상처를 알고 공감하면서 그들이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것들이 해결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얼마나 쉽게 다시 상처받을 지에 대해 걱정한다. 
 

“ 내 이름으로 스스로를 망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
… … … 강 표면이 얼려면, 완벽하게 크리스털 같은 세계 안에 갇히려면, 몇 시간, 아니 며칠이 걸릴까. 그리고 그 세상이 작은 돌이 내는 단음절로도 얼마나 깨어지기 쉬울까...”

 이 작품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이 소설집에 소개되는 다른 작품과도 같으며, 전체적인 주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작고, 늙고, 나약하고, 상처투성이의 아버지. 그러나 그런 현실에서의 부정적인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주인공)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카르타헤나, 의 이야기는 마치 미국의 오래전 이야기를 담은 Once Upon a time In America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간적 배경은 스페인이며, 주인공은 십대 청소년이지만 순간적인 살인을 통해 살인청부업자가(솔다도, 암살자) 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형제를 맺은 친구 헤르난도를 따르게 되지만, 결국 위에서 명령한 헤르난도의 살인청부를 거절하면서 주인공 론 역시 조직에서 배척당하게 되는 이야기다. 남레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문장에 있어 서사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짧은 단문이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디어 중심의 독서 읽기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소설의 긴박감 내지는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있어 보다 자극적이며 읽는 속도감이 붙는 문장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는데 특히나 카르타헤나라는 작품에서는 유난히 분위기나 상황에서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수류탄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안전핀을 뽑기까지 아직은 어린 론의 심리는 보통의 나약한 인간의 내면과 비슷하다.

  카르타헤나의 주인공 론에게 아버지는 부재중이다. 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헤르난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론은 헤르난도를 통해 처음 곤경에 빠지게 되지만 곧 그와 동일시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헤르난도)를 통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 받는 론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친딸을 만나고 싶은 절망구가 든 어느 비정한 아버지를 만나볼 차례다.

‘일리스 만나기’ 주인공 나는 17년 전 아내와 병든 어린 딸과 헤어져 살아왔지만 암에 걸리게 되고 음악가로 대성한 딸을 만나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열성을 보이며 딸을 기다린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점을 달리해서 내가 아버지로 나와 이야기를 풀어간다. 아버지란 자리가 어떤 것인지. 왜 나(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생활해왔는지. 딸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자식의 입장이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세계는 또 달라보였다.

“ 가족은 가족이다!”

‘일리스 만나기’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던지고 간 작은 꾸러미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바로 가족의 의미라고 믿고 싶어졌다.

아버지 그리고 가족. 작가 남레의 소설집이 말하는 것은 아버지와 가족이 아닐까.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은 베트남의 아픈 전쟁사이며, 그 속에서  평생 가슴앓이 한 채 살아가는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 정도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버지와 가족의 의미는 다음에 나오는 해프리드와 히로시마 보트까지 계속 이어진다. 해프리드를 들여다보자. 병든 엄마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주인공 나는 우연치 않게 학교 대표 풋볼 선수로 경기에 나갔다가 골을 넣은 후 영웅이 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이 주인공 제이미에게 세상의 부조리를 표방하는 듯한 인물 앨리슨이 접근하고 그와 동시에 주인공은 폭력과 비리 등 두려움의 그물에 걸려들게 되는 자신을 인지하게 된다.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이든, 개인적으로든 주인공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작품 해프리드의 주인공은 앞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존재와 가족에 대한 의미를 더하는 글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춘기 소년이 접하게 되는 세상과의 갈등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부조리에서 이를 극복하고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데미안에서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라는 말과 통하는 듯도 한다.

  우리와도 친근한 지역인 히로시마! 역시나 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히로시마의 특징은 지금까지 가해자의 이미지를 벗고 그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글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해서 두 다리를 잃고 지방의 작은 절에 스님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현실적으로 나약하고 작은 존재. 패배하고 있는 일본의 이미지와 쇠약해져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닮은꼴이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과 그 가족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희망으로 자리한다. 아무리 병들고 늙어 그 존재감이 흐릿할지라도 아버지는 가족의 구심점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주인공은 수없이 날아드는 폭격과 위험이 들끓는 위험한 집으로 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있는 곳인 동시에 가족이 있는 곳이며 주인공이 있어야 할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소설 보트의 주인공 마이는 홀로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에 타게 된다.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보트 속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 따라다닌다. 몇몇의 사람들은 병들어 죽고, 극한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존으로의 투쟁을 이어간다. 마이의 아버지는 공산당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는 힘없는 존재. 더 이상 가족과 마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인물이다. 마이는 보트에서 퀴엔과 그녀의 아들 트렁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어린 트렁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있어주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서 살펴본 다른 작품들과 달리 ‘테헤란의 전화’는 분위기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이 글은  이란의 여성인권 운동이라는 소재를 택했다. 사라와 그녀의 친구 파빈의 이야기를 통해 억압과 고통을 받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라는 인물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아버지나 가족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에게 있어 아버지의 이미지는 친구인 파빈일 수도 있으며, 이란에서 안내자를 해주던 마무드일 수도 있고, 한때 사랑이라고 믿었던 한 사람의 존재인 폴일 수도 있다. 주인공 사라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 중에 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소설 보트는 긴 여정을 담아낸다. 삶의 항해에서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작은 배처럼 때로는 아주 위태롭고 불안하며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결국 보트는 정박할 곳을 찾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골지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어둡다고 했던가. 그것은 이 소설이 선택한 이미지일 뿐이다. 소설이 내리고 있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작가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르긴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소설 보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앞으로 드러난 하나의 요소이다. 그 외 인종차별, 종교탄압에서 시작된 인권의 문제, 전쟁 등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우리 각자는 이 병에 이미 지독하게 걸려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적당한 항생제가 없는 까닭에 매번 얼굴을 바꾼 채 갈고리를 치켜드는 바이러스와 같이, 돌아서면 또 다른 모습으로 뒤따라와 어느 한쪽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병에 알맞은 약은 무엇일까. 가장 기분 좋은 플라시보 효과라도 찾고만 싶어진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해결책은 가정이라는, 소박하지만 아늑한 온기가 풍기며 서로를 흔들어 상처내지 않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배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뜻한 미소가 잔잔하게 번지는 공간.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진 거실에 아무렇게나 배를 깔고 엎드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가족의 품 곁에서 쉬고 있는 주인공 내지는 우리들 각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주제를 잡고 읽어나가는 것은 독자의 취향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와 직접 대면해서 토론하지 않는 한.. 상상의 나래를 미리 접어둘 필요는 없어보인다.

 책에 대한 외국의 언론과 작가들의 평이 실리기 전에 먼저 국내의 작가와 비평가들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적어도 한번쯤은 소설의 배경과 인물의 형상화 또는 글의 주제에 대해 논해보고 싶은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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